숲 속의 노루 밤비 - 파랑새 클래식 2
펠릭스 잘텐 지음, 김영진 옮김, 윤봉선 그림 / 파랑새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밤비라는 제목을 보며 '당연히' 사슴을 생각했다. 디즈니 애니매이션에 나오는 하얀점이 박힌 사슴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런데 시작부터 노루가 태어났단다. 그럼 내가 알고 있는 그 밤비가 아닌가? 나중에 보니 제목에도 분명 노루라고 되어 있다. 밤비라는 말에 다른 것은 주의깊게 보지도 않고 읽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분명 그 이야기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후기에 나오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 후기를 읽어보니 역시 그 밤비가 맞았다. 미국에는 노루가 없기 때문에 영어로 번역할 때 사슴으로 번역을 했고 그것을 기초로 디즈니가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슴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잠시 옆길이긴 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이처럼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때로는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쨌든 그렇게 디즈니가 영화로 만든 덕분에 밤비는 지금까지 많은 어린이들에게 잊혀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너무 상업적이며 미국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디즈니사지만 이때만 해도 밤비에 나오는 동물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직접 키우며 관찰했다고 한다. 뭐, 지금도 만화 만드는 기술은 최고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숲속에서 엄마와 함께 평화롭게 지내는 밤비를 상상하면 한없이 아늑하다. 그러나 어디에나 영원한 평화란 없다. 그리고 어느 동물이건 산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어차피 먹고 먹히는 것이 자연의 이치니까. 밤비는 풀을 먹기에 누구를 해치지는 않지만 그가 누군가에게 먹힐 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숲 속의 동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바로 사람이다. 가끔 총을 메고 나타나 숲을 온통 긴장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한다. 동물들 사이에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은 전지전능한 무서운 존재로 각인된다. 동물들이 인간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은 이것이 철학동화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지하다.

엄마와 떨어진 밤비가 늙은 노루(그가 결국 밤비의 아버지였다!)의 보살핌 덕분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훨씬 늠름한 노루가 되지만 보통의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노루처럼 현재의 재미와 흥미를 좇는 것이 아니라 혼자 생활하면서 조금은 속세를 떠난 듯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마치 늙은 노루가 그랬던 것처럼. 밤비는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디즈니 만화를 하도 오래전에 봐서 가물가물 하지만 그걸 보며 과연 이런 느낌을 받았던가. 철학적이면서 초월적인 어떤 것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밤비가 살아남았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밤비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며 완성해 나가는 것에 숙연함 마저 느낀다. 읽는 동안은 존 골즈워디가 사냥꾼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말에 공감하고 있었는데 다 읽고 나니 모든 인간에게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빠르게 돌아가며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영상매체보다 이런 책으로 만나는 것이 훨씬 가치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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