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많이 보다 보면 그림작가 이름을 모르고 책장을 넘겼더라도 그림을 보는 순간 어느 작가인지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어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그런 경우를 종종 본다. 그래서 아이가 '이거 무슨 책하고 그림이 비슷해.'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것을 작가만의 색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렇게 한 가지 방식으로 가는 것도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영통 사회복지회관에서 작가 강연회를 한다기에 오랜만에 가봤다. 전에 그곳에서 책 읽어 주기를 할 때에는 수시로 드나들었던 곳이건만 특별한 일이 없으니 잘 안 가게 된다. 사서 선생님도 어찌나 반갑게 맞아주시던지... 이번 작가 강연 주인공은 바로 이억배 선생님이다. 수수하게 생기신 외모에 맞게 말솜씨로 좌중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진솔한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번엔 강연 내용을 중심으로 작가의 그림 세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 작가 소개 >>
이억배(1960~ )
1960년 용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조소학과를 졸업했다. 주로 목판화로 작품 활동을 해 오다가 최근에는 어린이 그림책을 만드는 데 전력하고 있다.『솔이의 추석 이야기』,『개구쟁이 ㄱㄴㄷ』,『잘잘잘 1 2 3』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반쪽이』, 『도구의 발견』,『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등의 그림을 그렸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그림으로 '97 BIB(브라티슬라바 국제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에 선정되었고,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로 사단법인 어린이문화진흥회 주관 '1998 어린이문화대상' 미술 부문을 수상했다. 아내이자 동료인 일러스트레이터 정유정 씨와의 사이에 딸과 아들을 두고 안성에서 살고 있다.
(예스24에서 발췌)
<< 작품 소개 >>
1. 솔이의 추석 이야기
작가의 첫 작품이자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지금도 추석 때만 되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책. 얼마전에 <모던보이 알렝>이라는 프랑스 그림책을 본 적이 있다. 그 책을 보며 솔직히 그들의 역사나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책에 빠져들 수는 없었지만 그 나라 사람이라면 참 많이 공감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난민생활을 하며 후손들에게 자기 마을의 모든 곳과 사람에 대한 것을 글로 남겨서 전해주고 있다고 한다. 즉 그렇게 일반인들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두 개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도 사라져 가는 많은 것들을 무엇인가 남겨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물론 이책을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서 말이다.
작가도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하는 추석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단다. 이 책이 나올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단행본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아이가 커 가는데 읽힐 만한 책이 없음을 깨닫고 직접 책을 만들기로 했단다. 물론 안양에서 그림책의 지평을 연 사람들과 문화운동을 하기도 했으니 아무런 고민없이 시작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시작한 작업이었으나 처음엔 비전공자라는 원인도 있었고 처음 쓴 책이아서 쉽게 출판사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그 당시 큰 출판사들은 우리 작가를 발굴하기 보다는 외국의 책을 들여와 쉽게 장사하려고만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현상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우리 그림책 시장이 침체기라고 하지 않던가. 어찌 되었든 작가는 짤막한 글로 우리의 명절 추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니 그 안을 조금만 들여다 봐야겠다.
가로수가 면을 분할하고 있고 그 안에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명절을 맞이하기 위해 너도나도 바쁘다. 그러나 글은 딱 한 줄씩 뿐이다. 이런 것이 바로 그림책의 맛이다. 글은 달랑 한 줄이지만 그림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른 새벽 온 식구가 집을 나선다. 스케치 그림은 나무도 건물도 명확한 선이 아니라 흐릿하게 보였다. 작가가 지금 보면 그 정도의 그림으로도 괜찮지 않았을까라는 말을 얼핏 한다. 지금이야 많은 시도들이 있으니까 그런 그림도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 그런 불분명한 방식의 그림을 그렸다면 글쎄, 사람들 반응이 어땠을까 잠시 궁금하기도 했다. 강연회에서는 이렇듯 작가의 작업 과정까지 볼 수 있어서 더 생생한 것이다.
줄 서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 신경써서 그렸다고 한다. 똑같은 사람도 없고 대충 얼버무린 사람도 없다. 모두들 각자가 살아 있고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러기에 시간이 좀 많이 걸렸다고.
이거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낭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 속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행렬이다. 이런데도 모두들 나선다. 과연 계속 이런 모습으로 이어질까. 어느 때부터는 '옛날에는 이랬대.'라는 말로 치환되지는 않을까. 그런 날이 온다면 이 책의 의미는 더욱 클 것이다.
차례 음식을 만들고 성묘를 하고 농악 놀이도 구경하는 모든 장면을 뒤로 하고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마루 벽에 보면 할아버지 사진이 걸려있다. 이게 바로 작가의 할아버지란다. 이런 식으로 사적인 장치를 넣기도 한단다. 그리고 여기서는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에서는 주인공으로 등극한다고.
겉표지에 나와 있는 선물 목록. 이처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농담을 하셨다. 그림책에서는 이처럼 겉표지까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얻을 수 있다.
2. 반쪽이
요즘 세계 여러나라의 옛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나라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파되었다기 보다 비슷한 이야기가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환경에 상관없이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동양화에 깊은 매력을 느껴서 주로 그런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한편으론 느낌이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무조건 서양의 그림 방식을 모방하고 숭상할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림도 얼마든지 훌륭하고 운치있다고 강조하신다.
우물에서 잉어 세 마리를 잡아다 구워 먹는데 반쪽은 그만 고양이에게 빼앗긴다. 이럼으로써 후에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아니나 다를까. 셋째 아들이 그만 반쪽이로 태어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생선을 나누어 먹은 고양이도 반쪽이 고양이를 낳았다. 사실 글에서는 아무 이야기도 없고 후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살짝 그림으로 보여주니 독자는 웃을 수밖에 없다.
3.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
글 작가는 장인어른을 생각하며 썼다고 하는데 그림 작가는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는 가부장적인 면이 지나치게 드러나는 것 같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게 또 우리네 부모들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수긍이 가기도 했다.
한때는 이처럼 굉장한 위용을 과시하는 수탉이었으나 세월 앞에서는 당해낼 게 하나도 없다. 좌절하지만 결국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으로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는 이야기. 작가의 할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셨기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무용담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수탉의 한창 때 모습 중에서 두 페이지에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그림이 있는데 지금 책이 없어서 사진을 못 찍었다. 그림에서는 하나의 천막이지만 시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술병이 쌓이는 모습으로... 그러나 음주 캠페인은 절대 아니라고 농담을 하신다.
4.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한때 모임에서 이 책을 보며 부엌 살림의 모양이 이상하다고 지적하자 누군가가 이건 조선족의 모습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가 이 그림을 그리면서 마땅한 모델을 찾지 못하고 있던 중에 중국으로 여행을 갔다고 어느 시골에서 조선족 할머니 집에서 숙박을 하며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자식들이 떠나고 찾아오지도 않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강연에서는 그 할머니의 사진과 집 둘레의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여기에 옮길 수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게다가 카메라를 안 가져가서 귀한 자료들을 찍지도 못했으니...
할머니가 만두소를 버무리기 위해 커다란 그릇을 짊어지고 가는 이 장면도 처음에는 동물들과 다함께 끌고 가는, 약간은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렸었단다. 손 큰 할머니라서 처음엔 손을 강조해서 크게 그려보기도 했다고.
모닥불 모습도 처음엔 훨씬 크게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큰 것 같아 줄인 것이 이 정도다. 그런데 작가가 직접 시골에서 가마솥에 불을 때 보니 이것도 탈 정도의 세기란다. 모닥불이 훨씬 큰 그림도 채색까지 완전히 마친 하나의 그림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장면을 만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그린다고 한다. 그림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어떻게 비슷한 장면을 여러 장 그릴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 장도 벅찰 텐데.
질문 시간에 누군가가 다른 동물들은 모두 노는데 왜 소는 외양간에서 묶여 있냐고 아이가 물어봤다면서 이유를 묻는다. 사실 작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았나보다. 그저 앞 부분에서 소는 만두를 만드는데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당연히 외양간이 있으니까 소를 그린 것인데 아이는 그것을 예리하게 관찰했던 것이다. 이래서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5. 모기와 황소
황소가 살아 있는 듯한 그림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소를 그리기 위해, 그리고 옛날 모습을 한 외양간을 그리기 위해 이곳저곳 다니다가 충북 영동의 어느 시골에서 간신히 발견했다고 한다. 소의 모습과 모기, 파리를 그리기 위해 단순히 겉모습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관절 모습까지, 거의 해부학적으로 그린 그림을 보고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순히 겉모습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구나하고. 그처럼 관절까지 모두 그려봐야 움직임이라던가 생물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이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다.
구멍 뚫린 나무를 그리기 위해 산을 찾아다니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림 한 장면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사와 노력이 들어가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런 노력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감탄을 하고 마음을 담아가며 책을 볼 수 있는 것이리라.
작가는 특히 동양화에 매력을 느껴 화선지에 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그 작업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척 힘들지만 그래도 그것만 할 마음인가 보다. 18세기에 활동했던 변상벽이라는 화가의 동물 그림을 보여주며 서양의 그림만 좋다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우리 정서에 맞는 훌륭한 그림들이 많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신다. 그 말에 괜히 나도 뜨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