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랏빛 양산이 날아오를 때 창비아동문고 240
알키 지 지음, 정혜용 옮김, 정지혜 그림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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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고정관념이 하나 있다. 꼭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 책과 연결시켜 보자면 한 가지가 떠오른다. 서구의 가정은 평등하며 여자를 많이 배려해 준다는 생각.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남존여비가 철저하게 뿌리박혀 있고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남성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고-많이 나아졌다지만-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 위와 같은 나의 생각은 그야말로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열 살 소녀 레프티는 공부에 열의도 있고 뭐든지 배울 준비가 되어있는데 아버지는 딸은 공부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진작부터 못박는다. 대신 항상 형편없는 성적표를 가지고 오는 쌍둥이들에게는 굉장한 기대를 건다. 그러기에 레프티의 쌍둥이 동생들이 공부쪽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성적표를 가지고 왔을 때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다고 한탄을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1940년대의 상황이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즈음한 시기다. 레프티네 위층에 사는 프랑스인 마르쎌 아저씨가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다는 소식에 모든 관심사를 끊고 오로지 고국의 소식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정이 많고 현명한 마르쎌은 레프티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만사를 제쳐 놓고 도와준다. 그런 이웃이 또 있을까.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양산을 단지 몰래 빼내오기 위해 그토록 오랜 기간 공을 들인다. 할머니가 이야기가 시작할 때 즉 처음 양산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 양산을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중간에서도 양산은 어떤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산 이야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개구장이 아이들의 아슬아슬한 장난에 온통 신경을 쓰고 읽는다. 그러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양산이 의미있게 다가오고 아이들의 순수함과 순진함 때문에 지금까지의 말썽으로 인해 미웠던 마음들이 싹 가신다. 그리고 마지막 할머니가 나오는 부분에 가서는 잠시 어리둥절한다. 갑자기 왜 할머니가 나올까. 그만큼 처음에 할머니가 나왔던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쌍둥이 동생들의 기가 막힌 말썽들 때문에.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을 한 아빠가 혹시나 바뀌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여기서 이야기의 중심은 그게 아니었다. 또 많은 시간을 그렇게 살아온 아빠가 금방 변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테고. 그러기에 다른 부분을 바꾸도록 한다. 바로 레프티 자신 말이다. 레프티는 이제 권위에 맞서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보이면서 조금씩 성장해 간다. 특히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그 외의 것은 전혀 좋아 보이지 않는 빅토리아를 레프티 친구로 설정하면서 대비를 이루게 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모두 독자가 느끼길 바랄 뿐이다. 잔잔하면서도 여운이 있는 이야기와 미운 짓을 해도 미워할 수 없는 등장인물들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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