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읽고 나서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나보다. 바로 써야 감동이 그대로 묻어나는 건데... 그래도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그 때 느꼈던 감동을 되짚어 가며 써 보련다. 찰스 디킨스는 워낙 시대를 풍자하고 비꼬기를 잘 하는 작가로 알고 있다. 언제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하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삶의 방식이 어쩌면 내 성향과 비슷해서 더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단순히 허구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사랑만을 위해 이야기하는 것을 요즘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것은 이제 소녀 적의 그런 낭만이 사라졌다는 씁쓸한 현실에 기인하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요즘 주로 읽는 책이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거나 그것을 매개로 한 책이었는데 이제는 그 범위를 세계사로 넓힌 셈이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을 무대로 한 소설이니까. 처음에 시작을 그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가는 것으로 시작하는 그야말로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는 게 안개 속을 걸어가는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면 그동안 만났던 인물이나 지나쳤던 주변경관들이 그냥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씨실과 날실이 정확하게 교차하며 하나의 천이 완성되듯이 이 이야기도 여러 이야기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게 되어 있다. 얼마 전에 이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책을 만난 적이 있는데 170여 년 전에도 그런 방식을 구사한 작가가 있었다니... 작가의 다른 책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 당시에는 그저 내용에만 집착하느라 다른 것은 생각도 못했고 그런 걸 알아챌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동양적인 입장에서 영국이나 프랑스를 유럽이라는 동일범주로 생각하지만 그 두 나라는 예로부터 라이벌 관계였기에 미묘한 경쟁심이 있었다. 지금도 그 두 나라의 관계가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두 나라의 수도인 런던과 파리를 무대로 숨가쁘게 전개된다. 언제나 한 제국이 무너지려고 할 때면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인지라 프랑스에서도 민중들은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는 반면 극소수의 지배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억눌렸던 민중들의 감정이 최고조에 도달하면 결국 밖으로 분출되어 무서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이 혁명이라 불리는 일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고. 그러나 이 책은 모든 촛점을 프랑스 혁명에만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혁명은 배경일 뿐이고 주인공들의 삶은 혁명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혁명이 주인공들을 둘러싸고 있어 결국 혁명의 중심부에 본의 아니게 서게 되고, 거기서 간신히 빠져 나온다. 인물들의 애궂은 운명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독자는 가슴 두근거리며 속도를 내게 된다. 그리고 간신히 그들이 빠져나왔을 때에서야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한숨을 돌리며 안도하기에는 뭔가 아릿함이 남는다. 그건 바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한 남자(시드니)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을 위해 숭고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동안의 모든 무미건조한 삶이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되는 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읽기 전에는 표지에 있는 뜨개질이 무슨 의미일까, 내지는 참 예쁜 문양이라 생각했었는데 책을 덮는 순간에 본 그것은 결코 예쁜 문양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살생부였으니까. 어디서나 혁명의 양상은 비슷한가보다. 온건파와 강건파가 있다는 것도 그렇고. 19세기에 씌어진 이야기들이 21세기인 현재에도 유효한 것들이 많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세상은 어차피 돌고 도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