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바늘꽃 카르페디엠 15
질 페이턴 월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지금까지 전쟁 또는 내전과 관련된 동화책을 몇 편 읽었다. 대개는 가해자의 입장이거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상대를 미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아니면 적어도 전쟁의 참상을 등장인물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이 뚜렷한 것들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여타의 책들과는 약간 다른 듯하다. 뭐랄까. 전에 읽었던 책들이 의식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고 치면 이것은 순수한 인간 문제를 다룬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정확히 표현을 못하겠으나 그런 비슷한 느낌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 대공습이 있던 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년과 소녀의 생존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야기다. 물론 그들 사이에는 사랑도 있었지만 편안한 세상에서의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그 어떤 것이리라. 그랬다. 어차피 고모네 집에서 아빠와 더부살이를 해야 했던 빌에게 집이란 그저 구속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래서 전쟁 중에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피난시키라는 지시에 따르는 고모를 원망하며 계획된 것은 아니지만 혼자 떠돌게 된다. 그러면서 차라리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혼자 자유롭게 사는 편이 낫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음을 줄리를 만나고 난 후 자신에게 말하기도 한다.

어느 모로 보나 자신과는 처지가 다른 듯한 줄리를 만나지만 전쟁터에서, 그것도 보호자가 없이 떠도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빌이나 줄리가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빌이 줄리를 보호하는 입장이 된다. 전적으로 빌에게 의지하는 줄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빌의 모습은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보호자가 없을 때까지만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줄리의 보호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다. 

공습으로 폐허가 된 줄리 이모의 지하실에서 숨어 지내던 빌과 줄리는 비록 힘들지만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고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빌이 우유를 구하러 떠난 날 그나마 서 있던 건물이 무너지면서 지하실도 사라지고 만다. 그 와중에도 빌은 오로지 줄리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달려가고. 그렇게 간신히 구한 줄리에게서,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고맙게도 살아있는 줄리에게서 들은 충격적인 말 때문에 줄리에게서 떠나고 만다. 아니 어쩌면 줄리 주위에 있어 봤자 신분과 생활의 차이로 인해 그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건물은 무너지고 불탔지만 거기에도 어김없이 잡초들은 싹을 틔운다. 특히 불이 났던 곳에서 자란다는, 평소에는 보기 힘들다는 분홍바늘꽃이 자라는 것을 보며 빌은 자신의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가고 있음을 말한다. 사실 읽는 내내 왜 제목이 분홍바늘꽃일까 궁금했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러다가 마지막에서야 간단하게 설명이 된다. 그러나 그 간단한 설명이 지금까지의 빌의 마음을 너무나 함축적으로 나타내준다. 비록 전쟁의 참혹함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상대편에게 잡혀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생활이 변한 일반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심하며 읽을 수 있었던 점은 적어도 빌은 죽지 않았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빌이 화자로 등장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