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 창비아동문고 233
김소연 지음, 장호 그림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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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딸과 아들을 차별한다는 느낌을 그다지 받지 않고 자랐다. 뭐, 한때는 엄마에게 남동생만 예뻐한다고 투정을 부린 적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나이 차이가 많은 동생이 예쁘긴 했을 것이다. 지금도 식구들이 모이면 간혹 남동생이 설거지도 하고, 엄마도 내가 힘들어 할 때는 동생에게 시키곤 하신다. 만약 엄마가 남자들은 부엌 근처에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면 나 같은 성격에 어땠을까. 아마 언젠가는 입바른 소리를 해서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많은 어린이책 중에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책은 많았다. 또 시대별로, 계층별로 다양한 주인공들을 보아왔지만 이처럼 양반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는 시기에 그 양반의 딸을 주인공으로 해서 그들의 삶을 그냥 객관적으로 바라보듯 써내려간 이런 책은 분명 흔하지는 않다. 대개 한쪽에 촛점을 맞추어서 누가 잘 했고 이런 제도는 나쁘다는 식으로 은연중에 이야기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책은 그러지도 않는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뒤로 갈수록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도발적으로 명혜의 입을 빌려 여성의 문제를 거론한다. 아직은 유교적 관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시기이니 만큼 여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끼워 넣으려고 하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명혜는 거기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그런 명혜에게 오빠는 든든한 후원자다. 억지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장남' 명규 덕분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모습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 모습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문제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 답답하다. 그러면서도 고집 세고 자기 확신이 뚜렷한 명혜는 끝까지 부모님을 설득해서 의사공부까지 한다. 물론 오빠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집안이 예전처럼 권력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공부를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그나마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하에서 사람들의 행태를 그릴 때 친일을 하면 무조건 안 좋은 눈으로 묘사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시종일관 객관성을 잃지 않는다. 특별히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조를 하는 것 뿐이라는 송 참판의 말은 아마도 그 시대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한 것은 아닐런지... 그러면서 의식있는 젊은이들은 어떻게든 일본에게서 벗어날 궁리를 해서 결국은 부자간에도 노선의 차이로 갈등하고 종국에는 그렇게 지키려던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명혜네처럼... 

책을 읽으면서 여자이기에 억울해서 화가 났고 그런 모순이 뻔히 보이는 사회를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답답해서 화가 났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분명 지금도 모순이 뻔히 보이는 일들이 꽤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결국 사회라는 큰 틀은 계속 반복되는 것인가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책에서나마 명혜가 자신의 길을 가게 되었으며(비록 오빠의 희생으로 얻은 것이지만), 송 참판도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해서 빌붙으려고 했던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현실에서도 그런 공식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좋으련만... 

좋은 어린이책 창작 부문 대상 수상작인 이 책의 심사평 중에서 '작품의 줄거리가 복잡하지 않음에도 풍부한 생각거리를 던지는 문제작'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진짜 생각거리를 너무 많이 던져준다. 마음은 조금 불편할지언정 그래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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