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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 - 서울대 교수진이 내놓는 통합 논술 ㅣ 휴이넘 교과서 한국문학
이청준 지음, 한용욱 그림, 방민호, 조남현 감수 / 휴이넘 / 2007년 5월
평점 :
학교 다닐 때 별 생각없이 읽었던 한국 단편문학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느꼈던 것들 중 하나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었다. 사실 읽을 당시에는 그다지 감동 받지도 않았고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도 없이 읽었던 것들인데 왜 나중에서야 느닷없이 그것들이 생각났을까. 아마도 그것을 읽을 당시에는 내 경험이 적었고 사고의 폭이 협소했으며 남의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이제 어느 정도 경험이라는 것도 해보고 다른 사람의 말도 들을 줄 아는 나이가 되자 그제서야 내 속에 들어있던 그 기억들이 밖으로 나왔던 것은 아닐런지... 그렇기에 책이라는 것은 당시에 아무것을 못 느낀다거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해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에게도 당장 읽은 것에 대한 확인을 하거나 추궁하기보다 그저 마음속으로 느꼈겠거니 하고 한 발 물러서서 보게 되는 것 같다.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을 하나씩 하나씩 펴낸다는 취지로 나온 휴이넘 시리즈 중 이청준의 소설인 이 책은 공간적 배경으로 보나 시간적 배경으로 보나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워낙 바다라는 곳과 멀리 살았고 전쟁이라는 것도 먼 남의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임과 동시에 사상이라는 인간의 정치적 산물에서 벗어나 진정 동일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묘한 심리적 변화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지간의 심리 전개는 미처 내가 예측할 겨를도 없이 전혀 내가 예측하지 않을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며 혹시 내가 이 책을 읽을 준비가 아직 안 된 것은 아닐까 자책하게 만들었다. 사실 처음에는 주인공 홍종선의 기억 속에 있는 학교 정체를 찾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왜 아들 동우는 거기에 그렇게 매달리는 것일까 의아했다. 그저 아버지가 다녔던 학교가 지금 없어졌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이지 그 흔적을 찾아 그리 긴 여정을 떠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나 거기에는 단순히 학교라는 물질적인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추억이 있으며 존재가치와 정체성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방진모 노인은 몇 십 년을 고이 간직한 피아노를 부숨으로써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며 핸재를 잃어버린 시간으로 살지 않을 결심을 하는 것을 보며 내가 왜 그리 속이 시원한지 모르겠다. 어찌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갈등도 없고 누가 추궁하는 것도 아닌데 각 인물들은 자신 안에 갇혀서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길로 가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는 것은 황종선 씨의 아들이자 교사인 동우다. 이처럼 다 읽고나서도 당시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 것을 보며 분명 나중 어느 순간에 문득 떠오를 것 같다. 그러나 중간에 들어 있는 삽화는 내용을 이해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었고 배경을 머릿속에 그리게 해 주지도 않는 등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특히 버꾸놀이 하는 장면이자 표지에 나와 있는 장구를 들고 있는 여자 그림은 왜 그리 어색하게 느껴졌을까. 버꾸놀이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이 아니라 관객을 의식한 듯한 모습은 그림에 빠져드는 것을 자꾸 방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