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사라진 어느 날 마음이 자라는 나무 11
루스 화이트 지음, 김경미 옮김, 이정은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아이들에게 있어 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나도 어렸을 때 낯선 곳에 가면 엄마 옆에 꼭 붙어 있으려 했고 엄마가 없으면 괜히 작아지고 불안했었다. 불안함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왜 그리 작아졌었는지...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다는 그 느낌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가서 아이가 내 옆에만 있으려고 하면 답답하다. 그냥 혼자 있어도 될 텐데,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하고 말이다. 이래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나보다.

세상 전부였고 믿고 의지했던 엄마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떨까. 그 전에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고 그렇다고 외적으로 힘든 상황이 닥친 것도 아닌데 사라졌다면... 아마 대부분의 아이들은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겠지. 그렇다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라면... 그래도 마찬가지고 심한 충격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싶다. 적어도 나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우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기특한 모습까지 보인다. 그렇다고 우드로가 마음의 상처를 전혀 입지 않았느냐면 그건 아니다. 나름대로 많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심지어는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엄마의 행동을 합리화 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의 현실과 마주하는 힘을 스스로 기르고 엄마에게서 자신을 분리시킨다.

집시도 겉으로 보기엔 부족한 것 없고 아름다운 외모와 누구든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멋진 금발을 가졌음에도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 5살 때 겪었던 아빠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두고두고 집시를 괴롭힌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병이 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집시는 엄마와 자신의 아픈 기억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회피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상처란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그 다음에 극복하고자 노력해야만 상처가 아무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처럼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집시 엄마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없었겠지.

우드로의 엄마이자 집시의 이모인 벨이 연기처럼 사라진 사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아픔을 돌아보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서로란 가족일 수도 있고 타인일 수도 있다.-진정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한다. 그 중에서도 우드로와 집시의 자기 자신 찾기로의 여행은 읽는 이를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책을 읽는 내내 '문화적 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절실히 느꼈다. 서로를 자신의 잣대로 바라보지 않고 상대방을 그대로 봐 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아이들이라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할머니 할아버지라도 말이다.) 나도 아이들을 그렇게 대해야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음 아파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아픈 마음을 치유할 수 없음을 알았다는 우드로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누구나 아픔은 갖고 있으며 그것은 그 외부 조건으로 인해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만이 그것을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앞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다. 한창 자라나는 정확히 말해서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아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우드로와 집시에게 자신을 대입하며 읽겠지. 그리고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그들처럼 아이들도 자라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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