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글씨를 천하에 세운 김정희 - 한국편 5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한국편 5
조정육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추사 김정희 또는 완당 김정희... 지난해인가 언제 알기쉽게 간추렸다는 완당평전이 나와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이 생각난다. 김정희 하면 추사가 더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완당이라는 호는 마치 서자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책을 읽고는 싶었으나 아무래도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본다는 것이 무리일 것 같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차에 이번에 드디어 아이세움에서 나온 책으로 읽게 되었다. 비록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책이라지만 어른이 보아도 결코 손색이 없는 책이었다.

요즘 독특하거나 아름다운 글씨체를 많이 발견한다. 처음에는 글씨체가 뭐 그리 대단할까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비록 오래 되었지만 회사에 다닐 때 폰트를 내 구미에 맞게 약간 변형시켜 사용하면서(물론 컴퓨터에서 사용할 것은 아니었다.) 어럼풋이 새로운 폰트를 개발하는 것은 굉장한 창작일 것임을 짐작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누군가가 해놓은 것을 사용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 진짜로 그 누군가가 정말 힘들여서 그리고 창조적으로 변형시켜서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정말 예쁘고 특이하며 한글의 멋을 그대로 살린 많은 폰트들이 나오고 있고 그것도 하나의 사업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글씨체(폰트)에 대한 생각은 그저 현재에 대한 것이었다. 19세기에 그런 창작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니 결과물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이처럼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추사체라는 것을 완성시켰다고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다고 해야할까. 김정희가 추사체를 완성시키는 과정이 결코 쉽게 된 것이 아니며 또한 특별히 어떤 것을 목적으로 했다기 보다 그저 끊임없이 쓰고 변형하고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무엇을 쓰느냐, 어디에 쓰느냐, 누가 보느냐 등에 따라 알맞은 글씨체를 사용했다는 것을 보며 정말 치밀하면서도 모나지 않은 그의 심성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려서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가서 친부모를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한다.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호기심도 많았기에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잘 견딜 수 있었으며 9년씩 유배를 가서도 자신의 안목과 내면을 살찌울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유배를 떠나면서 썼던 오만함이 묻어나는 글씨체와 유배지에서 풀려날 때 겸손해진 글씨체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글씨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조차도 알 수 있었다. 김정희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난날의 오만함을 후회하며 무심으로 돌아가 추사체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글씨체를 창조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교만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글씨체를 이해하고 통달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경외감마저 느끼게 한다. 어디 글씨체 뿐이랴. 현재의 모든 일도 그래야 하거늘 사람들은 그저 외양만을 좇고 기교만을 배우며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열심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순하게 김정희의 삶을 훑어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대기와 당시의 사회를 이야기하고 또한 그의 그림과 글씨까지 이야기하고 있어서 일석삼조의 이득이 있었다. 이 또한 단순히 기교만을 배우려하고 쉽게 얻으려 하는 얄팍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런지... 그래도 그것조차 알지 못하는 것과 이처럼 책을 읽고 거기까지 생각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이래서 내가 책을 자꾸 집어든다.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게 느껴지고 보아야 할 것이 많아지니까. 또한 적어도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아니 많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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