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를 아십니까 책읽는 가족 53
장경선 지음, 류충렬 그림 / 푸른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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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운명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러나 나는 운명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것은 결정론적 관점에서 보는 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론적 관점에서 본 운명이든 처음부터 결정지어진 운명이든 이게 혹시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일이 있었다.(뭐... 운명이라고까지 거창하게 이름붙일 필요는 없는 일이다. 다만 워낙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제암리라는 곳은 그저 지역 이름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난 삼일절날 갔다 왔다는 말을 듣는 정도라고나 할까. 헌데 며칠 전에 집으로 오는 중에 이정표를 보면서 오느라 유심히 살폈더니 제암리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거리도 14킬로라니 멀지도 않았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주변 도로를 모르는지라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제암리가 비로소 가깝게 다가왔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지나서 이 책을 보게 된 것이다. 혹 이런 것이 운명 아닐까...

그리고 책을 읽기 전에 휴일이 끼어서 제암리를 갔다 왔다. 제암리 유적지라는 표지를 보고 따라가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궁금할 만하면 다시 이정표가 나오곤 했다. 마지막에 잠깐 헤매긴 했어도 유턴하는 일 없이 찾아갔다. 제암리로 들어가는 길은 지금까지 달려 왔던 길과는 달리 아주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비록 지금은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큰 도로가 났지만 1919년 당시는 정말 시골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찾아간 제암리에서 영상물과 자료들을 보면서 삼일 운동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이 얼마나 부분적이고 얕은 것이었나를 느꼈다.

제암리는 전체 33가구 중 2집만 빼고 모두 안씨 성을 가진 전형적인 씨족 마을이었다고 한다. 책에서 연화네가 안씨인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비록 못 먹고 힘겹게 살지만 서로를 위할 줄 알고 또 옳은 행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민초들이 일으킨 작은 몸부림이 바로 삼일 운동의 기본인 것이다. 알려진 몇몇 사람만이 일으킨 운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암리 주변에서는 주로 장날에 시위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장날이면 특히 경계를 했던 것이다. 

책에서는 연화와 사사끼의 아들인 나까무라의 눈을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린 눈으로 볼 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막상 상대방을 만나서 그들의 입장을 들어보니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혼란을 나까무라의 입과 마음을 통해 이야기한다. 비록 아버지는 일본의 충견이 될지언정 자신은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용국이의 모습에서 미래의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비록 어른들은 잘못을 할지언정 다음 세대를 책임질 아이들이 제대로 산다면 상처는 더 이상 곪지 않고 흉터로 남겠지.

셀제로 제암리에는 일본인들이 모금해서 교회를 지어주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곳에 기념관을 지은 것이고... 나까무라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사죄하는 뜻으로 그런 것이리라. 전시관을 나오는 곳에 어느 할머니의 사진과 그 위에 써 있던 말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과거에 집착해서 무조건 배격하거나 날선 눈으로만 보면 안 될 것이다. 물론 지금의 일본 태도를 그냥 묵과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록이나 이야기로만 전해 들어서 막연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잊혀진다면 그것은 또 다른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좋았던 일도 나빴던 일도 모두 역사로 받아들이고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은 역사가 여기서 끝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책으로라도 남겨서 아이들이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른들의 몫이라고 본다. 앞으로도 이런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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