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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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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는 작은 이야기이다,라고 첫문장을 쓰려다 멈칫 한다. 작은 이야기인가? 어떤 '규모'나 '배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소품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찌는 듯한 더위의 놀이터, 폴리오(척수성 소아마비), 폴리오에 걸리는 아이들, 자신 때문에 아이들이 폴리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놀이터 감독...기껏해야 한여름 미국 지방소도시의 어느 동네에서 일어난, 몇몇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달라지게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사실 모든 소설의 사건은 그 주인공에게는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책임과 회피의 문제, 혹은 죄책감과 희생양의 문제, 혹은 신의 무한함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의 원초적인 한계(또는 비극)와 관련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책 뒤편의 뉴욕 타임스의 평에 '매우 잘 만들어진 오 헨리의 이야기 같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나도 언뜻 오 헨리의 이야기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헨리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작은 이야기인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거의 모든 단편들은 인간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들로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단지 그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대부분 어떤 우화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리고 물론 우화가 우화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그 이야기 자체에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바로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처럼 말이다.

 

<네메시스>의 공간이 있다. 첵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쇠로 만들어져 언제까지나 닳지 않을 듯한 눈에 띄게 또렷한 얼굴,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강인한 청년의 얼굴(p.20)'을 가진 버키 캔터가 감독하고 있던 동네의 놀이터.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듯한 폭염 속에서도 하루 온종일, 이닝에 이닝을 거듭하는 게임을 이어가는 소프트볼을 하는 아이들이 모여놀던 그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는 여남은 명의 여자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줄넘기를 하고, 동네의 '얼간이' 호러스가 나타나, 놀던 아이들이 귀찮음에 못이겨 악수를 해줄 때까지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서 있던 그 놀이터. 그것은 아이들이 모여노는 작은 공간일 뿐이지만, 적어도 버키 캔터에게는 그 자신이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지켜내는가의 문제이다. 필립 로스는 이 '무엇으로부터'의 문제를 초반 흥미롭게 구성한다. 그들이 놀던 놀이터에 어느날 이탈리아 아이들 무리가 찾아온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그들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폴리오를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서 위협적인 자세로 침을 뱉는다. 버키 캔터는 놀이터의 감독관으로서 거의 혼자 힘으로 무리를 제어하고, 그들이 뱉은 침을 신속하게 물과 암모니아로 닦아내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 폴리오는 놀이터의 아이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 즉 이탈리아 아이들이나 그들이 뱉은 침은 닦아내면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폴리오 병균으로부터의 위협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하나는 그가 '왜' 이 공간에 그렇게 큰 책임을 느끼는가의 문제이다. 캔터는 아이들 사이에 폴리오가 퍼지자, 큰 책임감을 느끼며, 죽은 아이들의 집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하기도 하고, 그들의 장례식장에 가며, 이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 맡은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닥터 스타인버그나 다른 이들의 말대로 더운 여름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논다고 해서, 폴리오가 그것으로부터 촉발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탈리아 아이들이 다녀간 것도 물론 마찬가지다. (실제 놀이터가 원인이라면 그것을 임시폐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지만, 당국은 물론 그러지 않는다.) 그것은 막연한 상상이나 두려움에 가깝고, 폴리오가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침투하였는지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대로 광범위한 역학조사가 실시되지 않는 한 정확하게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캔터의 어떤 책임감은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그러니까 놀이터가 폴리오의 온상이라는)와 조금 비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캔터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책임감을 가지고 강해질 것을 요구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난 것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친구들과 함께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싶어했지만, 건강한 신체를 가졌음에도 낮은 시력 때문에 참전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야 했던 그의 이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 필립 로스의 작가로서의 노회한 능력이 드러나는데, 다시 말해서 버키 캔터의 전쟁터는 친구들이 참전한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이 아니라, 여기 미국 뉴어크 위퀘이크의 작은 놀이터였고, 그의 적은 철모를 쓴 독일군이 아니라 폴리오였다. 이것을 필립 로스는 노련하게 교차하며 구성하는데(내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영화감독이라면 당연하게도 교차 편집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그가 소설의 초반에 맞서게 되는 것도 하필이면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이들이며, 그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본의아니게) 물러났다면 이 폴리오와 싸우는 전쟁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물러나며, 전쟁에서 친구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소년(도널드 캐플로)을 잃고, 이 폴리오와 관련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필립 로스의 노회한 세공술에 의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폴리오가 퍼졌던 놀이터 이야기 이상의 것이 된다. 총알이 빗발치는 노르망디 해변과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 혹은 그보다 작은 단계로서의 불볕의 더위가 몰아닥치는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와 상큼한 바람과 시원한 바람이 있는 캠프파이어. 이것은 어떤 단계이자, 혹은 비유(우화)의 공간이며, 소설을 읽는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다만 그 형태가 다른 공간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자신만의 형태가 다른, 감독해야만 하는 놀이터와 그 책임을 벗어나고 도피하여 도착하고 싶은 꿈의 캠프파이어가 있다(노르망디 해변과 미국의 어느 소도시의 놀이터라고 단계를 바꿔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다시 '무엇으로부터'의 책임인가,의 문제로 돌아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폴리오는 독일군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독일군 철모의 갈고리십자는 눈에 보이지만, 폴리오 바이러스의 갈고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적일 때, 그것에 대항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폴리오를 퍼뜨리는 이탈리아 아이들, 그들의 침, 아이들이 즐겨먹던 핫도그, 더운 여름날의 놀이터, 병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더러운 호러스. 혹은 조금 다른 형태도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이라는 존재이거나 혹은 인디언 정신과 같은 것. 하느님이 폴리오를 만들어내고,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불행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캔터의 원망은 어떤 존재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점에서, 설혹 그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앞의 치환들과 묘하게 닮아 있으며, 캠프파이어에서 이루어지는 기묘한 인디언 의식과도 연관된다(이 인디언 의식이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필립 로스의 어떤 비판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인디언을 몰살한 미국인들이 그 애국심을 고취하기위해 인디언 의식을 활용한다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캔터의 방식이 있다. 외부가 아닌 내부로 방향을 트는 것.

 

버키 캔터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듯했던 이야기는 말미에 이르러 묘하게 방향을 튼다. 그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보는 또다른 화자가 등장하면서 말이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는 작가의 어떤 게임에 대한 제안으로 볼 수도 있다. 캔터의 시각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화자의 시각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 나는 필립 로스의 게임에 동참하는 대신, 이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네메시스(Nemesis).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본분을 벗어난 발언과 행동에 대한 신의 노여움과 벌을 의인화한, 흔히 말하는 복수의 여신. 그러나 네메시스는 본래 복수의 여신이 아니었다. 네메시스는 원래 분배의 신이어서 공동체 사회에서 생산물을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하던 선한 신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탐욕을 부려 불평등하게 나누게 되자 네메시스의 직분이 달라져 일한 만큼 분배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5196.html 글에서 재인용). 즉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든 것은 인간들이었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도 인간들이었다. 지금 여기에도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드는 자들은 누구인가.  

 

 

덧.  

소설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 말이다. 필립 로스의 묘사는 거의 스크린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지옥불이 쏟아지는 것 같은 위퀘이크의 묘사와 그에 대비되는 스트라우즈버그 캠프에 대한 초반 묘사는 인상적이며, 보지 않았음에도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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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27 0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리뷰도 영화적 성질이 있어서 좋아요^^ 문학적 글쓰기보다 좀 더 공학성이 엿보인달까요. 그게 또 맥거핀님 문체의 매력이기도~
필립 로스는 어느 소설이나 지옥불을 넣는 것 같아요ㅎ그의 소설 전개 자체가 화염자갈이 깔린 지옥 통과하기 같기도 하고ㅎ;;;

웹에서 강탈되더니 내 좋아요를 잡아 먹었네! 하나는 제 것입니다!! 생색)))

맥거핀 2015-07-27 18:33   좋아요 1 | URL
영화적이라는 의미에서의 공학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영화에서 공학이라는 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중이 크죠(무엇보다도 영화란 결국 카메라로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구요).

아무튼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몇몇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어요. 예를 들어 주인공 버키 캔터에는 채닝 테이텀 같은 친구가 배역을 맡았으면 좋겠군요.

네..확실히 필립 로스 씨는 좀 집요한 느낌입니다. 소품에서도 이 정도시니..

좋아요 하나 제가 꼭 기억해두죠.(저도 생색)

2015-07-29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30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스트 Axt 2015.7.8 - 창간호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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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도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구입했습니다. 외부에 대해서만이 아닌 자기자신에게도 날카로울 수 있는 도끼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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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7-1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이 궁금했는데 맥거핀님의 이야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맥거핀 2015-07-13 12:10   좋아요 0 | URL
보통의 문예지와는 다른 느낌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배수아 작가가 편집위원이라고 해서..보게 되면 또 하게될 이야기가 있겠죠.^^

붉은돼지 2015-07-1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구매했는데, 가격이 착해서...
아직 안왔네요^^

맥거핀 2015-07-13 12:11   좋아요 0 | URL
네..물론 가격이 착한 거도 매력적인 요소입니다. 과연 언제까지 이 가격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싶지만...(사실 보통 문예지들도 그렇게 비싼 가격이라 보기는 어렵죠.) 초기에 얼마나 빠르게 정착하는가가 중요할 듯 싶습니다.

희선 2015-07-13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격이 아주 싸네요 이것을 가장 먼저 말하다니... 차례를 보니 읽을 거리가 많네요 보고 싶기도 합니다 생각만 하지 않아야 하는데... 저는 이런 것도 차례대로 보기도 합니다 보고 싶은 곳을 펼쳐서 봐도 괜찮을 텐데...


희선

맥거핀 2015-07-13 12:16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그런 내용의 글을 쓴 적도 있는데, 잡지도 거의 처음부터 빼놓지 않고 봐요. 처음에 표지만 보고는 이런 내용인 줄 몰랐어요.(사실 표지 언뜻보고 김풍씨인줄..미안합니다. 두 분 다한테.-_-) 사실 이런 잡지는 온라인보다 서점에서 사서 한 권 들고오면 즐거울 것 같습니다.

Shining 2015-07-1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예지군요. 몇 년 전에 판타스틱이나 맥스무비, 이번에 미스테리아 등 창간과 폐간(!)을 바라봤던 설렘반, 불안반이 느껴지네요. 짧게라도 꼭 글 써주세요 히히 :)

맥거핀 2015-07-15 13:20   좋아요 0 | URL
어제 받았는데, 2900원에 받기가 미안할 정도의 구성이군요. 아무튼 기존의 문예지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입니다. 아무튼 이거 아무래도 뭔가 글을 꼭 남겨야할 듯..

아이리시스 2015-07-15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굿이브닝! 퇴근길이에요 아아 빨리집에_ 문득 생각이 나서 /잘지내요?222 안더워죽고?

맥거핀 2015-07-17 12:46   좋아요 0 | URL
아직까지는 살만한데, 점점 더워지는 것 같아요 ㅠㅠ 아이리시스님은 좋겠다..금요일이라서..주말에 좋은 계획 있나요??

아이리시스 2015-07-17 13:34   좋아요 0 | URL
왜요` 맥거핀님은 금욜 안좋아요? _ 그냥 놀라고요 뭐하고놀지는 아직 ㅋㅋ 맥거핀님은 음주 음 안주 아님 가무?ㅎㅎㅎ

아이리시스 2015-07-1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요` 맥거핀님은 금욜 안좋아요? _ 그냥 놀라고요 뭐하고놀지는 아직 ㅋㅋ 맥거핀님은 음주 음 안주 아님 가무?ㅎㅎㅎㅎㅎ

맥거핀 2015-07-17 14:01   좋아요 0 | URL
크크크 아이리시스님 금요일 진짜 좋나보다...똑같은 댓글 두 개나 달았다. 저는 이번 주말에는 일 때문에 좀 바쁠듯..못 놀아요. 놀지는 못해도 술은 먹을듯..ㅋ

아이리시스 2015-07-17 18:00   좋아요 0 | URL
아놔 지웠는데 안지워짐 ㅎㅎ 오랜만에 멍청이인증... 더위가 아니라 사실 요며칠 춥네요 감기조심ㅋ 술찬성! 굿주말 으흐흐 _

아이리시스 2015-07-24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 맥거핀님 나 된통지각이네 어쩌지 ㅠㅠ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있음?ㅋㅋ

맥거핀 2015-07-24 11:44   좋아요 0 | URL
으하..아이리시스님 살아있는거임? 여기는 비도 많이 오는데...그동네는 어떤지..그래도 여기 댓글도 남기고 지각자가 너무 여유로운 것 아님??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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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장미셸 게나시아의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성장소설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많은 성장소설에서 담는 이야기들이 여기에서도 비슷하게, 때로는 약간 변형되어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전형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소년은 많은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여러가지를 조금씩 통과해 나가면서 어른이 된다. 때로는 다정한, 또 때로는 엄격한 부모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만드는 법을 알아나가며, 조금씩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고, 짝사랑과 동경의 경계에 서며, 예기치 못한 사랑을 만난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미셸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상당히 달랐던 부모가 결국 이혼하게 되는 와중에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가까운 친구(니콜라)를 잃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으며, 잘 하는 것(사진찍기)을 찾아나가고, 못하는 것(수학)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아 나갔다. 짝사랑이었는지, 어떤 우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사람(세실)을 떠나보내는 법을 배웠으며(형의 여자친구를 만난다는 이 설정은 또 얼마나 전형적인가), 갑자기 찾아온 사랑(카미유)을 대하는 법을 알아나간다. 

 

물론 이 소설에서 전형적인 것만 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부당한 평가가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는 우연치 않게 미셸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 있으니까. 게나시아의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미셸의 성장담이며, 다른 하나는 미셸이 관계를 맺어나가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라는 체스클럽 회원들의 이야기이다. 이 클럽의 회원들은 모두 일종의 망명자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망명은 받아들여진 적이 없으므로, 일종의 디아스포라(diaspora)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피해 이곳, 프랑스로 도망쳐 왔다. 그 '무엇인가'는 조금씩 형태가 다르지만, 크게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사회주의의 어떤 폭압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과 동유럽, 그리스 등지에서 온 그들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체제가 가한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말살의 위협에 피해 자유롭다고 믿었던 그곳, 프랑스로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비슷한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 될 것이다. 책 속의 표현대로, 한편에는 고국을 그리워하지만 사회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그런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의도에 의해서, 혹은 의도치 않게 미셸의 삶에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나간다. 

 

그러므로 그들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성장소설에 꼭 필요한 역할모델들, 혹은 (이 표현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겠지만) 일종의 멘토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장소설에서 이런 인물들은 필수불가결하다. 소년이 혼자서 성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소년들(그리고 물론 소녀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성장소설들에서는 상당수 그것은 부모가 아닐 경우가 많은데, 많은 성장소설들에서 부모는 그대신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외부의 누군가를 등장시키는 것이 이야기의 진행에는 더 간편하기 때문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에서도 비슷한 양상인데, 미셸의 가까운 곳에서 그를 붙잡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 예를 들어 부모님들, 형 프랑크, 형의 친구이자 미셸의 친구이기도 한 피에르, 세실과 같은 인물들은 미셸의 성장을 이끈다기보다는 결국에는 그에게 어떤 문제를 안기는 입장에 더 가까우며(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성장하는 이들이 그렇듯 깨지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배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곁에서 떠나가버린다. 물론 대신 그의 곁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을 미셸이 수없이 읽고 보는 책과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셸은 책과 영화를 사랑하는 소년이고, 책과 영화는 물론 멘토의 역할을 대신할 만큼 훌륭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책과 영화가 단지 제목만 빈번하게 등장할 뿐, 그 내용은 그렇게 자세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의 곁에는 책과 영화보다 더 거짓말 같고, 더 극적인 이야기를 가진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회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책이 중반을 향해 가면서부터 점점 이야기를 교차하여 배열하기 시작한다. 미셸의 이야기와 회원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겪은 기구한 삶의 경험일 뿐만아니라, 삶의 여러문제에서 좌충우돌하는 미셸에게 들려주는 조언이기도 하며,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나같이 성장이 멀어보이는 어른들에게도 기꺼이 들려주는 작가의 조언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들이 겪은 삶의 진실들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는 가혹하지만, 그것을 듣는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으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그 교훈들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은 모두 다르고, 각자 다른 의미에서 가혹했으며, 보다 더 사회적이나 정치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뭉뚱그려서 기억의 진실, 혹은 기억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기억의 산물들이다. 모든 사람은 수많은 기억을 지니지만, 그들을 지탱시키는 것은 그 모든 수많은 기억이 아니고, 단지 몇 개에 불과한 작은 기억들이다. 일반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기억의 힘만으로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멀리하고 온, 이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고 믿는 디아스포라들은 더 말할 것이 있을까. 그들은 몇 개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도망쳐 나오기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누룩 없는 빵을 기억하고, 여자가 늘 타고 왔던 프랑스 우체국의 DC-3 쌍발 프로펠러기를 기억하며, 자신에게 찾아왔던 무대에서의 환희를 기억하며, 자신이 배신하고 떠나왔던 사람을 기억하고, 몇 개의 시덥잖은 사회주의 농담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되풀이해 이야기한다. 기억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기억을 잃고 길에 부랑자처럼 버려졌다가 이고르를 만나 기적적으로 기억을 되찾으면서 새로운 기억을 보태고 삶을 되찾은 베르네르의 경우에도, 하다못해 단지 체스를 이기기 위해서도 기억은 필요하다. 수많은 명국의 기보를 외우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샤의 이야기이다. 그의 삶이야기 자체로도 그렇지만, 그가 소련을 떠나오기 전에 임했던 일로부터도 역설적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그가 했던 일은 당을 위해 사진을 조작하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시도이자,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해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조작하려 한다는 것은 기억을 조작하려는 시도이며, 반대로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진은 기억의 보조자료일 뿐이지, 결코 기억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진을 조작할 수는 있어도, 사진에 찍힌 자나 사진을 찍은 자, 혹은 사진을 조작한자의 기억은 조작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기억한다. 자신이 지워버린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지워버린 작가의 시를 통째로 기억한다. 미셸도 세실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그녀를 남기려 하지만, 결국 그녀를 기억하는 것이 그녀를 남기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이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남겨진 것들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프랑크가 어떻게 되었는지 끝내 알지 못하며, 미셸과 카미유가 결국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가 결국 사업을 성공했는지, 어머니와의 관계는 회복되었는지, 체스클럽의 회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세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소설이 취하고자 하는 어떤 태도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아 있는 어떤 기억들이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며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는 기억하는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다음 세대에게 그 기억과 그 기억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개의 장례식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의 장례식은 결국 이들을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는 다짐의 다른 형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덧. 

 

다만 이 성장소설에 대한 (아마도 부당한) 궁얼거림을 여기에 남겨 놓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성장소설은 민감한 문제들을 눙치고 지나가기에 좋은 구조이다. 특히 그런 민감한 문제들이 어떤 사회문제일 때는 더욱 그러한데, 이 소설도 알제리 전쟁이라는 민감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에서 꽤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한다. 다만 그 소재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에 비해 이 소설이 알제리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주저하게 되는데, 그것은 물론 이 소설이 성장소설임을 감안하여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미셸이 알제리 문제가 당시의 프랑스에 가져다주는 어떤 내적인 허위들을 감지해내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동시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결국 모든 성장소설은 성장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성장한 자가 쓰는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른 같은 말투와 짐짓 어른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과연 이 소설이 사회주의의 어떤 폭압을 다루는 만큼 국내의 내적인 문제, 그러니까 알제리 전쟁이 가져다주는 문제들을 직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몇몇 꺼림칙한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에르나 프랑크 같은 청년들의 자원입대나 그들의 치기어린 사상과 그것이 깨어지는 방식에 대한 묘사, 혹은 프랑크의 도피를 이고르가 돕는 것에서 오는 어떤 순진한 시선(물론 이것은 미셸의 시선이므로 그렇기도 하다), 미셸 집안의 부유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예를 들어 이 소설에는 미셸이 알제리에서 온 프랑스인들을 보는 불편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이 있지만, 그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 알제리에 전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프랑스 국내인들도 알제리와 같은 식민지에서 오는 혜택을 같이 누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단지 미셸이 어머니에게 가지는 반감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한 견해일 것이다)이 그렇다. 미셸이 어렸기 때문에 그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들 수 없으며, 그것을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일리가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읽는 독자로서의 어떤 껄끄러움은 남아있다. 

 

아무튼 나는 이것으로봐도 낙천주의자가 되기는 틀렸다. 낙천주의적으로 봐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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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3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낙천주의, 긍정주의...이즘화되면 의도와는 다르게 변질, 편협이 될 수도 있잖겠어요?
맥거핀님의 문제적 시선이 부정성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성주의에 기반한 판단이자 기대에 미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실망이라고...

그런데 말입니다(그것이 알고 싶다 김상중 톤). 인간은 낙천성을 찬양하면서 비극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요. 그 실패, 카타르시스를 긍정성에 쓰는 건 성장(소설)주의일까요~

맥거핀 2015-07-01 12:0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뭐든지 이즘이 되면 문제들이 생기죠. 이 책에서 등장하는 공산주의도 물론 마찬가지일 거구요. 아무튼 이 소설에서는 이 공산주의에서 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들을 수 있지만, 정작 본인 나라의 문제의 집약판인 알제리 문제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비판은 볼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말씀을 듣고보니...어쩌면 제가 비관주의자이기 때문에 낙천적인 내용의 이야기들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희선 2015-07-0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낙천주의보다 비관주의 같습니다 그러면서 좋게 생각해야 해, 하기도... 이건 저 스스로 세뇌하는 걸까요 이상한 말을 했네요

잘 하는 것을 찾고, 못하는 것을 넘어서다니... 저는 평생이 걸려도 그렇게 못할지도... 정말 비관주의군요 어쩌면 그런 일이 한번쯤 있었을지도 모르죠 사람은 늘 자라야 하죠 한때 아주 많이 자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자라는 게 멈추는 건 아닌 듯합니다 어떤 때 자랐다 해도 앞으로 닥칠 일은 많죠 사람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군요

기억하기, 미셸도 여러가지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지도 모르겠네요 가장 많이 기억하는 건 미셸한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준 사람일 수도 있겠네요 그 이야기들은 미셸이 기억하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을지도... 이 책을 보는 사람은 그것을 보려고 하기도 하겠죠


희선

맥거핀 2015-07-01 12:12   좋아요 0 | URL
저도 비관주의에 가까워요. 항상 최악의 순간을 상정하고 뭔가를 하고는 하지요. 문제는 가끔 그 상정한 최악의 순간보다 더 큰 최악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건데...

누구나 잘 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죠. 저도 그렇고, 희선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분명히 잘 하시는 게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도 아직 못찾았을 뿐이겠죠. 그렇게 말하는 저도 사실 제가 잘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는 건 문제이기는 합니다만..못하는 건 확실히 아는데.

가끔 때로는 인간에게 기억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기억이 사라져버린 인간은 분명 예전의 사람과 확실히, 명백하게 다른 사람일 겁니다. 사람이 외모가 같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아니듯이요.

아이리시스 2015-07-01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안녕. 요즘 뭘 배우러 학원다니려고 하는데 너무 귀찮아요.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 안주가 더 쉬워졌을까요.. 티는 나지 않아도 늘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나봅니다. 날이 슬슬 더워요. 잘 지내죠? 맨날 잘 지내냐고만 물어 미안하지만😀

맥거핀 2015-07-03 17:54   좋아요 0 | URL
잘 지냅니다. 다만, 날이 덥다보니 좀 쳐질 뿐..나도 일본어 공부한다고 온라인 강의 끊어놨는데, 지금 제대로 못하고 있어요. 이거 진도 맞춰서 잘 해야하는데..저는 못해도 아이리시스님은 잘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안주..라고 하니까 오로지 술 먹고 싶은 생각밖에는...-_-

하나 2015-07-03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은 기억의 문제구나, 하면서 읽었습니다. ˝ 그래서 이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개의 장례식은 의미심장하다.˝ 두 번의 장례식을 기억의 문제와 연결지어 해석하신 것 보고 감탄하고 갑니다.

맥거핀 2015-07-03 17:56   좋아요 1 | URL
하나님, 들러주시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이들에게 남는 것은 기억뿐이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미셸에게도 그럴지도 모르구요.

신간평가단이 점점 마무리로 가는군요. 그동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려요~.

2015-07-05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7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용감한 친구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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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용감한 친구들>의 원제는 '아서&조지'이다. 아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셜록 홈스의 창조자인 아서 코난 도일이고, 조지는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본 인물로, 결국에는 이 사건으로 영국 사법 시스템에 상고법원이 생겨나게 만든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두 인물의 소개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듯이) 아서가 조지를 도와, 그가 혐의를 벗고 보통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이 한줄로 마무리 짓기에는 충분치 않은 점들이 있다. 아서가 단지 선의에 의해 조지를 도왔다고 보기에는, 그 자신에게도 조지의 사건에 뛰어들어야할 어떤 이유가 있었으며, 조지가 그렇다고 그로 인해 완전히 혐의를 벗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그 두 사람이 이 사건으로 인해 어떤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기에도 그다지 충분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소설의 원제, 그 자체에 더욱 충실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서와 조지. 이 소설은 그 두 사람이라는 인물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초점을 두는 것은 조지가 누명을 쓰게 된 이 사건 자체나, 아서와 조지가 잘못된 판결을 뒤집어내는 쾌감이 아니다. 그보다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서와 조지라는 이 인물의 모든 것을 천천히 차곡차곡 쌓아내 그려내는 것이다. 단지 분량으로 보았을 때도, 이 중요한 두 인물이 비로소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1권이 끝나고 2권이 시작되는 거의 중반부가 훨씬 넘어간 시점이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삶에서의 큰 사건들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조지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고 풀려났으며, 아서는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아내 투이가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고, 또 훗날 두번째 부인이 된 진을 이미 만나 사랑에 빠진 상태이다. 아마도 그들의 삶에 있어서 이보다 큰 사건들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서와 조지가 만나게 되는 시점에 이미 결말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아서와 조지가 만나기 시작하는 3장의 제목은 '시작이 있는 결말'이다).

 

이로 인해 가지게 되는 효과는 무엇인가. 적어도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의 가정을 제외한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조지가 범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의 가정'이란 작가가 이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조지에 대해 가감없이 기술하고 있다고 독자를 믿게 하면서, 동시에 범인이 될 수 있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비슷한 전략.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이야기는 미스테리를 추적하여,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을 꾀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가정은 제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줄리언 반스의 인도에 따라 그의 인생을 처음부터 봐왔기 때문에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인물이 아님을 안다. 이것은 사건 자체의 증거가 가진 허술함이나 그와 관련된 진술들의 빈약함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단지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조지라는 인물에 그 동안 차곡차곡 쌓아 놓은 묘사들과 일화들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아서가 조지를 만났을 때 그가 조지가 무죄라는 것을 '아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아서 경, 제가...... 간단히 말해서...... 제가 무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서는 분명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조지를 내려다본다. "조지, 전 당신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고, 이제 당신을 만났습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고 생각하거나 믿는 게 아닙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조지로서는 아예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스포츠로 다져진 커다란 운동선수의 손을 내민다.  

- 2권 p.30~31

 

물론 이는 독자가 그가 범인이 아님을 아는 것과 유사하지만,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세심한 기술을 읽은 것이 아니라, 기사를 읽고, 단지 그를 '보았을' 뿐이니까. (책에서도 어떤 힌트가 나오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는 셜록 홈스의 추리법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셜록 홈스의 추리법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홈스는 단지 몇 분의 보는 것, 그러니까 주의깊은 관찰로부터도 어떤 이가 범인이고, 범인이 아님을 밝혀내고는 했다. 다시 말해서 아서에게 있어서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비슷한 것이었다. 보게 되면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엇인가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최초의 기억, 그러니까 할머니의 죽음과 그녀의 죽은 몸을 지켜보았던 기억과도 연결이 된다.

 

그러나 사실 이 '보는 것으로 아는 것'은 분명히 어떤 허점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서가 심령학을 믿고, 그것에 큰 관심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에 기술된 아서라는 인물로 짐작해 볼 때) 아서가 그것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것에서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것에는 허점이 없을까. 대다수의 사람은 설혹 영매가 죽은 사람과 소통하는 광경을 보아도, 바로 이를 믿는다, 혹은 안다,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구축된 어떤 다른 믿음들(이성적인 믿음이거나 혹은 종교적인 믿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서는 강한 자기확신으로 보는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이는 그의 단점이자, 동시에 장점이었다. (그러니까 심령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이전의 이성적인 믿음이나 종교적인 믿음이야 말로 '잘못된 선입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이야기에는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 즉 조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조지와 아서는 거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형적인 잉글랜드인이자 작가로서 명성과 부를 쌓은 인물, 그리고 인도(파르시) 혼혈인으로서 단지 지방의 평범한 사무변호사라는 외적인 면에서 물론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역설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아서는 보는 것을 중시하지만, 그 보는 것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멍은 그가 겪어온 다양한 삶의 경험과 선의에서 우러난 자기확실성이 메워준다. 반면 조지에게는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가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 보이는 것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음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서와 같은 자기확신이 없었고, 보이는 것을 믿으려면 눈에 보이는 그것은 적어도 그 자체로서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법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가 보기에 적어도 법은 일종의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체계이기 때문이다(물론 그가 그 법에 의해 삶이 망가지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기는 하지만).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보는 것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두 사람의 어떤 좋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보되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아서는 보되, 그것에는 선입견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조지는 자신이 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보는 과정에는 주의가 따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못했다. 조지에게 부당한 혐의를 덮어 씌우는 켐벨 경위나 앤슨 지서장과 같은 인물은 조지의 외양과 가정환경을 토대로 선입견을 가졌으며, 이는 그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에서는 이런 마무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조지가, 아서가 죽은 후에 그를 불러내려는 심령추도회에 참석하게 되는 이 마무리 말이다. 즉 아서가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조지의 사건을 받아들였다면, 조지에게도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아서가 믿었던 것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무엇을 보는가?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는 무엇을 볼 것인가?' 이 소설은 이 질문으로 끝난다. 이것은 조지가 '보는 것'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독자를 향해 던지는 줄리언 반스의 질문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보는가? 혹은 무엇을 보았는가? 혹은 무엇을 볼 것인가? (그러니까 사실은 이 소설 자체가 어떤 다른 전략을 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은 과연 반스가 범인을 숨기는 전략을 쓰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어쩌면 조지가 범인은 아니었을까? 소설은 적어도 '명확하게는' 이를 밝혀놓지는 않는다...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법의 측면에서 보자면 적어도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는 한, 그는 무죄라고 추정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반스가 만약 전략을 썼다면 그 전략은 '페어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으며, 그가 그러한 전략은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페어함'을 믿으니까. 아..이거 선입견인가.) 

 

 

덧.  

그리고 이 소설은 현재형의 문장에서 과거형의 문장들로 점점 옮아 온다. 1권에서는 거의 현재형의 문장들인데, 이는 2권에 이르러 점점 과거형의 문장,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읽게되는 익숙한 문장들로 바뀐다. 이는 의도적인 것일까, 아닐까. 만약 의도적이라면 이는 과거형의 문장이 가지는 어떤 무게를 중화시키려는(그러니까 독자가 조지의 결백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는, 다시 말해서 과거형은 어떤 것이 '확정적 사실'이라는 인식을 주니까) 의도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글쎄....내가 보기에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어떤 명확한 구분이 있지는 않고 과거형과 현재형의 문장이 혼재된 부분도 있으니..(다만 비율로 보자면 2권에 와서 과거형의 문장이 주가 되기는 한다.) 개인적으로는 현재형의 문장들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초반에 진도를 빼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혹시 단지 번역상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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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24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을 읽었더라면 신나게 얘기해 볼 거리가 많을텐데 아쉽;_;)

맥거핀 2015-06-25 11:09   좋아요 1 | URL
후에라도 책을 읽게 되신다면, 그 때 말씀해주셔도 좋습니다.^^ 저야말로 Agalma님이 쓰시는 글에 읽은 책이 없어서 말을 못걸고 있어요.

sslmo 2015-06-24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장르소설은 좀 멀리 했었는데,
이 리뷰를 보니 의욕이 생기는 걸요, 불끈~!
아참참,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5-06-25 11:10   좋아요 1 | URL
저도 아마도 서평단 안했더라면 보지 않았을 책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괜찮았어요. 더운 여름날에는 머리 아픈 책보다 장르소설이 제격이죠.

2015-06-26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7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30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5월의 신간소설 추천. 그러니까 이번 기수 신간평가단으로서 책을 골라내는 것은 마지막이라는 얘기다. 지금 내 손에 들린 4권의 책은, 책을 골라내는 일을 조금 더 신중히 했어야만 했다는 충고의 다른 형태이다(잘못된 선택은 늘 실물로서 돌아온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의 축처진 심리상태를 감안해 볼 때) 이번 마감 기한 안에 리뷰를 제대로 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지 책들 스스로가 이야기의 가속도를 붙여 내 속에서 다그닥다그닥 달려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간평가단으로서 책을 읽어나가는 일이 즐겁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거짓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마스크를 쓴 불안한 눈빛의 누군가를 멍하니 보거나, 지난밤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그다지 나오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짜내는 일보다는 손에 들린 소설을 보는 것이 훨씬 낫다. 소설은 불안하고 말초적인 세계가 아닌 더 넓은 세계로 잠시나마 나를 안내해주고, 과거로 안내하거나 또한 그를 통해 때로 미래를 예언하니까. 예를 들어 지난 번에 읽었던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예를 들어 이번의 메르스 사태에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몰래 되뇌이고 있는 사람은 나뿐일까.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 그러니 만인은 만인의 일에 신경 끌 것"이라는 책 뒤편의 문구가 여러모로 섬뜩해 고개를 드니, 마스크를 쓰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이 왠지 더 섬뜩하다. 역시 책이 더 낫다.

 

(약간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읆는다고, 소설평가단 6개월을 하니 이번달에 출간된 소설들만 슬쩍 훑어 보아도, 왠지 어떤 소설이 선정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번에 골라내는 책들은 이와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니 대세를 따르기보다는 정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야겠지.

 

 

 

맘브루, R. H. 모레노 두란, 문학동네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콜롬비아 군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책이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먼나라에 와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군인들의 목소리를 번갈아 담는 형식이다. 그들 개인 각자의 내밀한 역사를 읽는다는 측면에서도, 또 한국전쟁이라는 우리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를 읽는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한국전쟁에 콜롬비아도 참전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어느 포수 이야기, 구마가이 다쓰야, 북스피어

 

일본 산간지방 어느 곰 사냥꾼의 이야기. 전혀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늘 끌린다. 꾸밈이 없는 날 것의 강렬한 이야기일 것 같다.

 

 

길, 저쪽, 정찬, 창비

 

정찬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단편집에서였던가. 정찬 작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역사와 개인, 그 속에서 어떤 윤리의 문제를 꾸준히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역사가 만들어낸 골은 여전히 깊고, 소설가는 그 깊은 골짜기 한구석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끌어올리는 존재임을 작가는 몸소 보여준다.

 

 

러시아의 밤, 블라지미르 오도예프스키, 을유문화사

 

소설 속에 있는 또다른 소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천일야화와 같은 소설. 빠져나올 수 없는 이야기의 미로 속으로 이 소설은 안내해 줄 수 있을까. 이야기의 미로가 아름답다면, 굳이 그 미로 밖으로 빠져나오려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겠지.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나도 가고 싶다. 한국이 싫어서.

 

 

덧.

이 소설 추천은 안되겠지요? 4월 30일에 출간된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 신간평가단의 알고리즘(?)상 이렇게 구멍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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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04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브루>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재라 흥미롭습니다.
<어느 포수 이야기>는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일본판이면 좋겠다 혼자 맘대로 기대해 봅니다; 김연수 작가도 곰 사냥에 대한 인상적인 단편 썼던 게 생각나네요.
<길,저쪽>, <한국이 싫어서>는 신뢰가는 이웃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시니 안 읽으면 북플간첩될 기세; (좋은 의도의 농담입니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은 100% 동감입니다

맥거핀 2015-06-04 13:40   좋아요 1 | URL
다른 책은 몰라도 <맘브루>는 되었으면 좋겠는데..꽤나 흥미로운 책일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서도 가능성이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느 틈에 오셔서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역시 북플계의 배스, 그러니까 책포식자라는 요즘 들려오는 소문(?)이 그다지 틀린 얘기는 아닌가 봅니다.(저도 좋은 의도의 농담입니다.^^)

AgalmA 2015-06-04 15:40   좋아요 0 | URL
북플계의 배스ㅎ; 좋은 책냄새를 맡으면 참을 수가 없잖습니까. 책포식자는 제게 붙을 수식은 아니라고 생각되고요. 북플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니 그리 보이는 거라 생각합니다^^; 좋게 포장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북플 견유자 정도로...

선정이 안 되더라도 위 책들에 대한 맥거핀님의 리뷰는 기대해 봅니다 :)/

맥거핀 2015-06-05 11:54   좋아요 0 | URL
포식자에는 많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다방면이라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평소 서재를 보면 워낙 책, 영화, 음악 등등 다방면에 일정 수준 이상의 식견을 보여주시니 그런 농담을 붙여봤습니다.^^

저 중에 한두 권은 읽게 될 것 같은데 리뷰를 쓰기 위해서 노력해보겠습니다.^^;

2015-06-07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7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0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