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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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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뒤편에 있는 문학평론가 허희 씨의 해설을 읽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끝은 주인공 계나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결심의 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허희 평론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p.200)" 그러니까, 이 해설은 소설의 결론을 뒤집는 것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결국 이 소설이 어떤 부분에서는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거나, 혹은 그려내는 데에 실패했다(혹은 치밀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한 가지는, '난 행복해질 거야'라는 진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나는' 행복해진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국가나, 가족이나, 다른 거대한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제목 <한국이 싫어서>는 일종의 낚시, 혹은 자극적인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계나가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주하는 것은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다. 한국이 싫어서, 가 아니라, 한국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혹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여기에는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한국'이라는 것은 단지 어떤 울타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허희 씨의 말을 빌리자면, 그저 여러 개 축사 중에 어느 한 귀퉁이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그게 '한국'이면 어떻고, '서울'이면 어떠하며, '호주'든 혹은 '우간다'인들 뭐가 달라지는 게 있으리.

 

다시 말해서,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은 '한국'이라는 특정의 공간에 대한 비판을 담고자 한다는 오해를 불러오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한국에 대한 비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우리가 익히 상상하는 그 지점에서 머무르며, 단지 계나가 한국을 탈출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공간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나(그리고 철저하게 계나의 1인칭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계나의 세계관과 소설의 세계관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소설)에게는 사실 그 나머지는 관심 밖, 아이 돈 케어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계나의 스탠스는 사실 그녀가 비판하고자 하는(그러나 사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비판하는 척 하는) 스탠스와 거의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이 소설에서 담고 있는 '한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비판은 그 공간을 지배하는 지배법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지배법칙의 (최소한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지배법칙이 그 모양으로 생겨먹은 것에 대해서는 소설은 사실 관심조차 별로 없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이것이 마냥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에서 자꾸 '한국'이라는 것을 불러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저 계나가, 혹은 소설이 말하는 지점은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가 되었든 말이다. 그 이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 이 소설의 '관심 밖'이다. (그러니 '한국이 싫어서'라는 이 제목은 마케팅의 산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이 별로 싫지는 않은데, 내가 거기서는 힘이 없고 앞으로도 힘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에 가까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난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에서 '진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붙은 이 '진짜'는 사실 그녀가 이 소설의 내내, 그러니까 호주에 와서도 결코 '진짜' 행복해진 적은 없었음을 간명하게 말해준다. 허희 평론가의 말대로 "2000년대 한국 소설에 등장한 이주노동자의 살림과 유사한 모습이다. 부푼 희망을 안고 호주에 온 그녀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고국에서보다 도리어 궁핍하게 산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빌딩 청소 등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p.200)" 그 뿐인가. 계나는 두 번이나 부당한 이유로 재판에 연루되고, 벌금을 내고 호주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녀의 고백대로 사실 그녀가 호주에서 '진짜'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였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호주 시민권을 취득했을 때는 행복해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증서 수여식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과회에서 친지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 슬그머니 행사장을 빠져나왔어. 6년 동안 고생한 게 하나하나 생각나서 뭔가 뭉클한 기분인데, 그렇다고 나 이제 호주 사람이다! 이러고 만세를 부르기도 뻘쭘하고. (p.172)"

 

결국 그 순간에도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이다. 그것은 이런 것과 다를까. 예를 들어 그녀가 한국에서 6년 동안 고생하여 좋은 일자리의 취업을 거의 100% 보장해주는 어떤 자격증을 땄다면, 그녀는 그 순간 행복해할까, 아니면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을 떠올릴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묻고 싶다. 만약 계나가 6년 동안 한국을 떠나지 않고 호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만큼 한국에서 무엇인가를 했다면, 한국에서 살아남을 정도가 될까, 혹은 한국에서 행복해졌을까. 아니 또 오해는 마시라. 나는 당신이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은, 단지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는 엿같은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돈없는 노동자로 사는 것과 호주에서 이주노동자로 사는 것의 차이.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그것이 큰 차이가 있어요, 라는 것이 이 소설의 태도이고, 그것은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무엇인가는 바뀌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허희 평론가의 말이고, 내가 어느정도 수긍하는 말이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의 계나의 진술을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계나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렇게 얻는 행복이 소설을 읽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물론 당연하게도 소설 주인공의 행복과 우리의 실제 행복은 크게 상관이 없다. 나는 그것을 새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소설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과 일치할 수도 있다는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소설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설은 어떻게든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1인칭으로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그러한 강구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계나가 말을 건네는 이들은 누구일까. 호주에 이미 도착한 이들은 아닐테고, 아직 한국에 남아있는 은혜나 미연이나, 혹은 동생 예나와 같은 이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 말은 전해지고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서? "시드니에서 매일 크고 작은 모험을 겪고 있어서 그런가, 옛날 친구들이 좀 얄팍해 보이더라. 내가 걔들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거나, 내 미래가 더 밝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호주에 올 일 있으면 연락해, 나 무지 전망 좋고 겁나 큰 아파트에서 살아."라며 휴대폰 번호와 새로 만든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어.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p.121)" 이 말들은, 그러니까 이 소설은 누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혹시 계나와 미연이와 은혜가 벌이는 작은 파티에서 주문한 배달음식을 30분 안에 배달해주는, 신용카드를 양손으로 받고 90도로 인사하는 배달원에게?)

 

허희 평론가는 (그래도 평론가의 예의를 담아) 계나가 (지금과 같은 태도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진지하게 충고해주었지만 나는 조금 더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녀가 행복하든지, 말든지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 관심 밖, 아이 돈 케어. 그리고 (주인공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환상을 깨는 이 소설은 (적어도 나에게는) 실패한 소설이다.   

 

 

덧.  

어쩌면 이 소설의 의미는 다른 것에 있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한국이 싫어서'라는 마케팅적인 제목이나, 중편 소설 정도에 적당한 분량을 적당히 편집으로 늘려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하드커버를 씌워 13,000원에 팔아먹는 자세 말이다. (빨리 술술 읽힌다,라는 평들이 많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짧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결국 말을 건네고자 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내밀한 '태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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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8-0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드린 날보다도 3일 늦었네요. 너무 더워서 납작 엎드려 있었어요. 파트장님과 신간평가단 담당님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2015-08-06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0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7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0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5-08-22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별 한 개. 많이 과대평가됐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요즘 한국문학이 워낙 별로니까 평가는 후하게 줬던 것 같은데, 사실 냉정하게 어느순간부터 국내소설 신간에 별점을 높게 주기가 힘든 건 사실이에요.

맥거핀 2015-08-24 12:17   좋아요 0 | URL
솔직히 내용상에서도 그다지 공감이 안 가기도 하고, 제 기준에서는 어떤 소설의 기본이 안되어있다..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근데 이 책 꽤 잘 팔리는 것 같은데..요즘에 이런 게 먹히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요새 젊은 작가들이 잘 쓰기는 하는데..글쎄요.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근데 그 `무엇인가`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네요).

그나저나 잘 지내나요? 북플에서는 여전히 왕성하게 책을 보시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2015-08-24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5-08-24 12:24   좋아요 0 | URL
맞죠, 자극적인 제목덕을 많이 본 소설이기도.
응, 또 나이를 먹는구나 으흠, 생각해볼게용 히히
 

 

 

 

암살, 최동훈, 2015 

 

  

(영화의 내용이 일부 들어 있습니다.)  

  

 

 

최동훈의 <암살>은 무리없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내는 영화다. 다만, 나는 (요즘의 한국 영화들에서 특히 보이는) 이런 공식에 들어맞는 듯한 전개, 혹은 뭔가 툭 걸리는 게 없는 무리없는 흐름이 좋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지루함을 주는 부분도 없고, 마냥 뒤떨어진다 싶은 장면도 없다. 약간 울컥하게 만드는 장면도 있고, 다시 돌려보고 싶을 정도로 일종의 쾌감을 주는 장면들도 있다. 만약 이것이 다른 감독들의 영화였다면, 나는 상찬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최동훈의 영화가 아닌가. 이 정도에 만족해야할까.

 

단적으로 말해서 <암살>은 최동훈의 '놈놈놈'이다. 좋은 놈은 안옥윤(전지현)을 비롯한 독립군들, 나쁜 놈은 일본군의 밀정으로 돌아서는 염석진(이정재)이나, 친일파 강인국(이경영)과 같은 인물, 그리고 이상한 놈은 물론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그의 조력자 영감(오달수)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김지운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과는 그 궤가 조금 다르다. <놈놈놈>은 그 제목이 이미 어느 정도 말해주듯이 그 캐릭터를 극단으로 몰아붙여서 장르적 쾌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놈놈놈>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말을 건다. 자, 이제부터 내가 아주 좋은 놈과 아주 나쁜 놈과 아주 이상한 놈을 보여줄께. 너는 다른 거(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배경에서 연상되는 역사 같은 것) 생각하지 말고, 그냥 누가 끝까지 살아남아 이길 것인지 즐기기만 하면 돼,라고 말을 건네는 영화였다.

 

그런데 최동훈의 영화는,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최동훈이 만들어왔던 영화는 조금 다르다. 물론 최동훈의 영화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범죄의 재구성>의 인식이 강해서 그렇지, 최동훈이 이야기를 그다지 잘 만들었던 적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영화 <타짜>도 이야기 자체가 깔끔하게 짜여져 있지는 않다. 이야기는 캐릭터에 치여 분절되며, 꽤나 산만하다. 최동훈은 이를 중화시키기 위해 두 가지의 장치를 거는데, 하나는 정마담(김혜수)의 회상(진술)이라는 이야기의 형식을 거는 것이고, 그것으로 모자라 챕터를 나눠 분절시켰다. (나는 <암살>도 이런 회상의 형식을 적극 활용하려는 줄 알았다. 영화 초반 염석진에 대해 진술하는 씬이 나왔을 때 말이다. 그런데 영화내내 이 장면은 거의 외따로 떨어진 듯 보이다가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의미가 생긴다.) 즉 이야기가 에피소드별로 분절되는 양상으로 영화는 흘러가지만, 그것이 그렇게 관객에게 이상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표면상의 목적은 이 에피소드들을 그러모아, 결국 고니(조승우)라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그려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를 그려내는 것. 최동훈의 이야기는 그것이었다. 가끔 최동훈은 캐릭터를 철저하게 그려내는 것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캐릭터만 잘 만들어내면 이야기는 저절로 따라온달까. <도둑들>은 그게 과했다. 영화 <도둑들>이 활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캐릭터에 대한 소개가 어느 정도 끝나고, 바로 실제의 도둑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캐릭터들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너무 지나쳤던 나머지, 막상 실제의 도둑질은 거의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케이퍼 무비(caper movie)를 표방했는데, 이상하게도 영화에는 그 '케이퍼'가 없었다. 뭐 아무튼 간에.

 

 

최동훈은 이번에는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언뜻 보면 <도둑들>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 캐릭터들을 긁어 모아서, 그 캐릭터들이 어우러지는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을 보여준다, <도둑들>에서 그것이 '도둑질'이라면 <암살>에서는 그것이 '암살'일 따름이다. 그런데 최동훈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여기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넣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역사성이나 정서와 같은 그간 최동훈의 영화에서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았던 낱말들. 영화가 그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영화의 중반부 안옥윤을 둘러싼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부터다. 영화는 비장해지고, 웃음기는 없어진다. 그러니까 장르물(일종의 케이퍼 무비)인 척 하던 이야기는 이 때부터 드라마로 방향을 튼다. 뭐 좋다, 드라마든 장르물이든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이렇게 방향을 급선회하는 도중에 최동훈의 장기가 잘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바로 그 펄떡펄떡 뛰노는 캐릭터들.

 

최동훈의 캐릭터는 사실 초반에 규정되는 법은 없다. 그의 첫번째 장편 <범죄의 재구성>에서부터 이러한 특징은 잘 드러나는데, 이야기가 중후반을 넘어설 때까지 사실 이야기를 정확히 종잡기 힘든 것은 그의 인물들을 선과 악의 경계로 잘 나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타짜>에서도 마찬가진데, <타짜>에서 아귀(김윤석)와 같은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물들의 경계는 흐릿하다. 예를 들어 평경장(백윤식)은 어떤가, 그는 고니를 망가뜨린 인물인가, 아니면 그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는가, 정마담은 어떨까, 그녀는 팜므파탈인가, 아니면 고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순정녀였나. 물론 주인공 고니 역시 마찬가지이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결국 주인공 고니를 입체적으로 그려나가는 영화이기도 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도둑들>이 지루했던 것은 그 도둑질이 비어있는 것에 그 까닭이 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캐릭터들이 들인 시간에 비해 입체적으로 살아나지를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악한 인물은 결국 끝까지 악했던 것 같으며, 선한 인물은 결국 끝까지 선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암살> 역시 이 캐릭터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너무 잘 보여서 탈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거의 최동훈의 '놈놈놈'처럼 보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좋은 놈은 끝까지 좋은 일을 완수하며, 나쁜 놈은 끝까지 악랄하고, 이상한 놈은 마지막까지 조금 이상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조금 이상해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염석진은 왜 밀정이 되었을까. 물론 영화에서 제시하는 해답은 있다. 눈앞에 당장 죽음의 공포가 몰아닥쳤을 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 질문은 질문 자체로는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이전에 꽤 시간을 들여 염석진의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십여분이 넘게 구축한 다음, 단지 그 장면 하나로 이것이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도리어 염석진이 마지막에 내놓은 답이 정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즉 일본이 패망할 줄 몰랐다는 그의 대답.) 하와이 피스톨에게도 같은 것이 적용된다. 그는 왜 갑자기 좋은 놈의 편으로 돌아섰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그가 보았던 결정적인 장면 때문일 수도 있고, 안옥윤에 대한 연모의 감정 때문일 수도 있으며, 그가 가진 어떤 마음의 부채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가 초반에 구축해 놓은 캐릭터, 그러니까 300달러만 주면 아무나 죽여주는 이상한 하와이 피스톨의 캐릭터를 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모호해보였던 속사포(조진웅)는 언제 그렇게 죽음도 불사하던 캐릭터가 되었나. 혹은 강인국(이경영)은 왜 그렇게도 악랄함의 끝에 있는 것과 같은 친일파가 되었을까.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친일파가(그러니까 염석진이나 강인국이) 친일파 되는데에 이유가 있을까. 그저 나쁜 놈인 거지 뭐. 그런데 그것은 결국 그의 캐릭터를 비워 둔 채로 놓아두겠다는 얘기이고, 그것은 그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들에게 영화가 취하고자 했던(그러나 사실 실패한) 어떤 스탠스와 배치된다. 악인이 왜 악인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은 의인이 왜 의인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가 태생이 나쁘기 때문에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인이 태생이 의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어떤 태도와 모순되는데, 이 영화는 이 의인들을 기억해달라고 말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어떤 역사성을 부여하려 마지막까지 애쓰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해달라는 것은 이들을 신화화된 영웅으로서 기억해달라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신화화된 영웅들에게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이 영화도 바라는 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이 보여주는 것은 보다 인간적인 형식으로서의 기억이 아닐까. 춤을 추고 싶었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들. 그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을 기억해달라는 것은 아닐까. 비록 그 기억을 요구하는 방식은 최동훈답지 않게 아주 촌스러웠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명량>의 이상한 인터랙티브가 여기에서도 반복되며, 이것 역시도 어떤 퇴행의 증거처럼 보인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것은 염석진을 둘러싼 에필로그와도 연관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런 방식의 영화적 카타르시스는 조금 위험해보인다. 그런 선택이 그들의 영웅성을 강화할 수는 있지만, 실제의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문제들은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근원에는 결국 우리 손으로 온전히 이루어낸 해방이 아니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고 - 실제로 영화 속의 환호와는 달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임시정부 쪽에서는 이 온전하지 못한 독립을 많이 아쉬워했다, 영화 속에 등장한 김원봉의 씁쓸함도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 이 영화에서 물론 그것을 강조하기에는 어려웠겠지만 이 선택이 아쉬워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실 '역사성을 담아냈는가'라는 물음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결국 이 영화도 최근의 한국영화들이 보여주는 어떤 모습들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각각의 장면들은 인상적이고, 웃음을 터뜨리게도 하며, 카메라워킹도 빈틈없이 구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듬이 없다. 리듬은 모두들 알고 있듯이 5-4-3-2-1의 적절한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4-4-4-4-4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5점 만점 중에 4점 짜리 장면들만 있는 영화들.(요즘에 가장 흔히 보는 영화평이 '차린 건 많은데, 먹을 것은 없다'는 평이다. 다들 먹방 좀 찍어봐서 알잖아요. 고기 반찬만 있다고 많이 먹게 되지는 않잖아요.) 툭툭 걸리는 장면이 없는 영화, 불협화음이 없는 영화. 이것이 최동훈의 영화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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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7-29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를 모르겠는데 이미지가 안올라가네요.

맥거핀 2015-07-29 13:55   좋아요 0 | URL
일시적인 문제였나...수정함.

넙치 2015-07-29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볼까요, 말까요?

맥거핀 2015-07-30 14:44   좋아요 0 | URL
글에도 썼지만, 최동훈 감독에 대한 기대감에 못미쳤다는 거지, 영화 자체는 나름 재미있어요. 감상은 누구나 다르니 넙치님 감상은 또 아주 좋으실수도 있고..

더운 여름 잘 지내시죠? 날씨가 정말 많이 덥네요.

2015-08-01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6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메시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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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는 작은 이야기이다,라고 첫문장을 쓰려다 멈칫 한다. 작은 이야기인가? 어떤 '규모'나 '배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소품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찌는 듯한 더위의 놀이터, 폴리오(척수성 소아마비), 폴리오에 걸리는 아이들, 자신 때문에 아이들이 폴리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놀이터 감독...기껏해야 한여름 미국 지방소도시의 어느 동네에서 일어난, 몇몇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달라지게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사실 모든 소설의 사건은 그 주인공에게는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책임과 회피의 문제, 혹은 죄책감과 희생양의 문제, 혹은 신의 무한함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의 원초적인 한계(또는 비극)와 관련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책 뒤편의 뉴욕 타임스의 평에 '매우 잘 만들어진 오 헨리의 이야기 같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나도 언뜻 오 헨리의 이야기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헨리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작은 이야기인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거의 모든 단편들은 인간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들로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단지 그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대부분 어떤 우화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리고 물론 우화가 우화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그 이야기 자체에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바로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처럼 말이다.

 

<네메시스>의 공간이 있다. 첵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쇠로 만들어져 언제까지나 닳지 않을 듯한 눈에 띄게 또렷한 얼굴,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강인한 청년의 얼굴(p.20)'을 가진 버키 캔터가 감독하고 있던 동네의 놀이터.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듯한 폭염 속에서도 하루 온종일, 이닝에 이닝을 거듭하는 게임을 이어가는 소프트볼을 하는 아이들이 모여놀던 그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는 여남은 명의 여자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줄넘기를 하고, 동네의 '얼간이' 호러스가 나타나, 놀던 아이들이 귀찮음에 못이겨 악수를 해줄 때까지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서 있던 그 놀이터. 그것은 아이들이 모여노는 작은 공간일 뿐이지만, 적어도 버키 캔터에게는 그 자신이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지켜내는가의 문제이다. 필립 로스는 이 '무엇으로부터'의 문제를 초반 흥미롭게 구성한다. 그들이 놀던 놀이터에 어느날 이탈리아 아이들 무리가 찾아온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그들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폴리오를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서 위협적인 자세로 침을 뱉는다. 버키 캔터는 놀이터의 감독관으로서 거의 혼자 힘으로 무리를 제어하고, 그들이 뱉은 침을 신속하게 물과 암모니아로 닦아내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 폴리오는 놀이터의 아이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 즉 이탈리아 아이들이나 그들이 뱉은 침은 닦아내면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폴리오 병균으로부터의 위협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하나는 그가 '왜' 이 공간에 그렇게 큰 책임을 느끼는가의 문제이다. 캔터는 아이들 사이에 폴리오가 퍼지자, 큰 책임감을 느끼며, 죽은 아이들의 집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하기도 하고, 그들의 장례식장에 가며, 이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 맡은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닥터 스타인버그나 다른 이들의 말대로 더운 여름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논다고 해서, 폴리오가 그것으로부터 촉발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탈리아 아이들이 다녀간 것도 물론 마찬가지다. (실제 놀이터가 원인이라면 그것을 임시폐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지만, 당국은 물론 그러지 않는다.) 그것은 막연한 상상이나 두려움에 가깝고, 폴리오가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침투하였는지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대로 광범위한 역학조사가 실시되지 않는 한 정확하게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캔터의 어떤 책임감은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그러니까 놀이터가 폴리오의 온상이라는)와 조금 비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캔터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책임감을 가지고 강해질 것을 요구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난 것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친구들과 함께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싶어했지만, 건강한 신체를 가졌음에도 낮은 시력 때문에 참전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야 했던 그의 이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 필립 로스의 작가로서의 노회한 능력이 드러나는데, 다시 말해서 버키 캔터의 전쟁터는 친구들이 참전한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이 아니라, 여기 미국 뉴어크 위퀘이크의 작은 놀이터였고, 그의 적은 철모를 쓴 독일군이 아니라 폴리오였다. 이것을 필립 로스는 노련하게 교차하며 구성하는데(내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영화감독이라면 당연하게도 교차 편집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그가 소설의 초반에 맞서게 되는 것도 하필이면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이들이며, 그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본의아니게) 물러났다면 이 폴리오와 싸우는 전쟁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물러나며, 전쟁에서 친구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소년(도널드 캐플로)을 잃고, 이 폴리오와 관련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필립 로스의 노회한 세공술에 의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폴리오가 퍼졌던 놀이터 이야기 이상의 것이 된다. 총알이 빗발치는 노르망디 해변과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 혹은 그보다 작은 단계로서의 불볕의 더위가 몰아닥치는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와 상큼한 바람과 시원한 바람이 있는 캠프파이어. 이것은 어떤 단계이자, 혹은 비유(우화)의 공간이며, 소설을 읽는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다만 그 형태가 다른 공간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자신만의 형태가 다른, 감독해야만 하는 놀이터와 그 책임을 벗어나고 도피하여 도착하고 싶은 꿈의 캠프파이어가 있다(노르망디 해변과 미국의 어느 소도시의 놀이터라고 단계를 바꿔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다시 '무엇으로부터'의 책임인가,의 문제로 돌아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폴리오는 독일군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독일군 철모의 갈고리십자는 눈에 보이지만, 폴리오 바이러스의 갈고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적일 때, 그것에 대항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폴리오를 퍼뜨리는 이탈리아 아이들, 그들의 침, 아이들이 즐겨먹던 핫도그, 더운 여름날의 놀이터, 병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더러운 호러스. 혹은 조금 다른 형태도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이라는 존재이거나 혹은 인디언 정신과 같은 것. 하느님이 폴리오를 만들어내고,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불행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캔터의 원망은 어떤 존재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점에서, 설혹 그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앞의 치환들과 묘하게 닮아 있으며, 캠프파이어에서 이루어지는 기묘한 인디언 의식과도 연관된다(이 인디언 의식이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필립 로스의 어떤 비판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인디언을 몰살한 미국인들이 그 애국심을 고취하기위해 인디언 의식을 활용한다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캔터의 방식이 있다. 외부가 아닌 내부로 방향을 트는 것.

 

버키 캔터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듯했던 이야기는 말미에 이르러 묘하게 방향을 튼다. 그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보는 또다른 화자가 등장하면서 말이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는 작가의 어떤 게임에 대한 제안으로 볼 수도 있다. 캔터의 시각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화자의 시각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 나는 필립 로스의 게임에 동참하는 대신, 이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네메시스(Nemesis).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본분을 벗어난 발언과 행동에 대한 신의 노여움과 벌을 의인화한, 흔히 말하는 복수의 여신. 그러나 네메시스는 본래 복수의 여신이 아니었다. 네메시스는 원래 분배의 신이어서 공동체 사회에서 생산물을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하던 선한 신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탐욕을 부려 불평등하게 나누게 되자 네메시스의 직분이 달라져 일한 만큼 분배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5196.html 글에서 재인용). 즉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든 것은 인간들이었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도 인간들이었다. 지금 여기에도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드는 자들은 누구인가.  

 

 

덧.  

소설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 말이다. 필립 로스의 묘사는 거의 스크린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지옥불이 쏟아지는 것 같은 위퀘이크의 묘사와 그에 대비되는 스트라우즈버그 캠프에 대한 초반 묘사는 인상적이며, 보지 않았음에도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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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27 0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리뷰도 영화적 성질이 있어서 좋아요^^ 문학적 글쓰기보다 좀 더 공학성이 엿보인달까요. 그게 또 맥거핀님 문체의 매력이기도~
필립 로스는 어느 소설이나 지옥불을 넣는 것 같아요ㅎ그의 소설 전개 자체가 화염자갈이 깔린 지옥 통과하기 같기도 하고ㅎ;;;

웹에서 강탈되더니 내 좋아요를 잡아 먹었네! 하나는 제 것입니다!! 생색)))

맥거핀 2015-07-27 18:33   좋아요 1 | URL
영화적이라는 의미에서의 공학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영화에서 공학이라는 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중이 크죠(무엇보다도 영화란 결국 카메라로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구요).

아무튼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몇몇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어요. 예를 들어 주인공 버키 캔터에는 채닝 테이텀 같은 친구가 배역을 맡았으면 좋겠군요.

네..확실히 필립 로스 씨는 좀 집요한 느낌입니다. 소품에서도 이 정도시니..

좋아요 하나 제가 꼭 기억해두죠.(저도 생색)

2015-07-29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30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스트 Axt 2015.7.8 - 창간호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새로운 시도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구입했습니다. 외부에 대해서만이 아닌 자기자신에게도 날카로울 수 있는 도끼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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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7-1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이 궁금했는데 맥거핀님의 이야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맥거핀 2015-07-13 12:10   좋아요 0 | URL
보통의 문예지와는 다른 느낌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배수아 작가가 편집위원이라고 해서..보게 되면 또 하게될 이야기가 있겠죠.^^

붉은돼지 2015-07-1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구매했는데, 가격이 착해서...
아직 안왔네요^^

맥거핀 2015-07-13 12:11   좋아요 0 | URL
네..물론 가격이 착한 거도 매력적인 요소입니다. 과연 언제까지 이 가격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싶지만...(사실 보통 문예지들도 그렇게 비싼 가격이라 보기는 어렵죠.) 초기에 얼마나 빠르게 정착하는가가 중요할 듯 싶습니다.

희선 2015-07-13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격이 아주 싸네요 이것을 가장 먼저 말하다니... 차례를 보니 읽을 거리가 많네요 보고 싶기도 합니다 생각만 하지 않아야 하는데... 저는 이런 것도 차례대로 보기도 합니다 보고 싶은 곳을 펼쳐서 봐도 괜찮을 텐데...


희선

맥거핀 2015-07-13 12:16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그런 내용의 글을 쓴 적도 있는데, 잡지도 거의 처음부터 빼놓지 않고 봐요. 처음에 표지만 보고는 이런 내용인 줄 몰랐어요.(사실 표지 언뜻보고 김풍씨인줄..미안합니다. 두 분 다한테.-_-) 사실 이런 잡지는 온라인보다 서점에서 사서 한 권 들고오면 즐거울 것 같습니다.

Shining 2015-07-1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예지군요. 몇 년 전에 판타스틱이나 맥스무비, 이번에 미스테리아 등 창간과 폐간(!)을 바라봤던 설렘반, 불안반이 느껴지네요. 짧게라도 꼭 글 써주세요 히히 :)

맥거핀 2015-07-15 13:20   좋아요 0 | URL
어제 받았는데, 2900원에 받기가 미안할 정도의 구성이군요. 아무튼 기존의 문예지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입니다. 아무튼 이거 아무래도 뭔가 글을 꼭 남겨야할 듯..

아이리시스 2015-07-15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굿이브닝! 퇴근길이에요 아아 빨리집에_ 문득 생각이 나서 /잘지내요?222 안더워죽고?

맥거핀 2015-07-17 12:46   좋아요 0 | URL
아직까지는 살만한데, 점점 더워지는 것 같아요 ㅠㅠ 아이리시스님은 좋겠다..금요일이라서..주말에 좋은 계획 있나요??

아이리시스 2015-07-17 13:34   좋아요 0 | URL
왜요` 맥거핀님은 금욜 안좋아요? _ 그냥 놀라고요 뭐하고놀지는 아직 ㅋㅋ 맥거핀님은 음주 음 안주 아님 가무?ㅎㅎㅎ

아이리시스 2015-07-1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요` 맥거핀님은 금욜 안좋아요? _ 그냥 놀라고요 뭐하고놀지는 아직 ㅋㅋ 맥거핀님은 음주 음 안주 아님 가무?ㅎㅎㅎㅎㅎ

맥거핀 2015-07-17 14:01   좋아요 0 | URL
크크크 아이리시스님 금요일 진짜 좋나보다...똑같은 댓글 두 개나 달았다. 저는 이번 주말에는 일 때문에 좀 바쁠듯..못 놀아요. 놀지는 못해도 술은 먹을듯..ㅋ

아이리시스 2015-07-17 18:00   좋아요 0 | URL
아놔 지웠는데 안지워짐 ㅎㅎ 오랜만에 멍청이인증... 더위가 아니라 사실 요며칠 춥네요 감기조심ㅋ 술찬성! 굿주말 으흐흐 _

아이리시스 2015-07-24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 맥거핀님 나 된통지각이네 어쩌지 ㅠㅠ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있음?ㅋㅋ

맥거핀 2015-07-24 11:44   좋아요 0 | URL
으하..아이리시스님 살아있는거임? 여기는 비도 많이 오는데...그동네는 어떤지..그래도 여기 댓글도 남기고 지각자가 너무 여유로운 것 아님??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장미셸 게나시아의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성장소설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많은 성장소설에서 담는 이야기들이 여기에서도 비슷하게, 때로는 약간 변형되어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전형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소년은 많은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여러가지를 조금씩 통과해 나가면서 어른이 된다. 때로는 다정한, 또 때로는 엄격한 부모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만드는 법을 알아나가며, 조금씩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고, 짝사랑과 동경의 경계에 서며, 예기치 못한 사랑을 만난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미셸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상당히 달랐던 부모가 결국 이혼하게 되는 와중에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가까운 친구(니콜라)를 잃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으며, 잘 하는 것(사진찍기)을 찾아나가고, 못하는 것(수학)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아 나갔다. 짝사랑이었는지, 어떤 우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사람(세실)을 떠나보내는 법을 배웠으며(형의 여자친구를 만난다는 이 설정은 또 얼마나 전형적인가), 갑자기 찾아온 사랑(카미유)을 대하는 법을 알아나간다. 

 

물론 이 소설에서 전형적인 것만 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부당한 평가가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는 우연치 않게 미셸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 있으니까. 게나시아의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미셸의 성장담이며, 다른 하나는 미셸이 관계를 맺어나가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라는 체스클럽 회원들의 이야기이다. 이 클럽의 회원들은 모두 일종의 망명자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망명은 받아들여진 적이 없으므로, 일종의 디아스포라(diaspora)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피해 이곳, 프랑스로 도망쳐 왔다. 그 '무엇인가'는 조금씩 형태가 다르지만, 크게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사회주의의 어떤 폭압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과 동유럽, 그리스 등지에서 온 그들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체제가 가한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말살의 위협에 피해 자유롭다고 믿었던 그곳, 프랑스로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비슷한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 될 것이다. 책 속의 표현대로, 한편에는 고국을 그리워하지만 사회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그런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의도에 의해서, 혹은 의도치 않게 미셸의 삶에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나간다. 

 

그러므로 그들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성장소설에 꼭 필요한 역할모델들, 혹은 (이 표현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겠지만) 일종의 멘토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장소설에서 이런 인물들은 필수불가결하다. 소년이 혼자서 성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소년들(그리고 물론 소녀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성장소설들에서는 상당수 그것은 부모가 아닐 경우가 많은데, 많은 성장소설들에서 부모는 그대신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외부의 누군가를 등장시키는 것이 이야기의 진행에는 더 간편하기 때문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에서도 비슷한 양상인데, 미셸의 가까운 곳에서 그를 붙잡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 예를 들어 부모님들, 형 프랑크, 형의 친구이자 미셸의 친구이기도 한 피에르, 세실과 같은 인물들은 미셸의 성장을 이끈다기보다는 결국에는 그에게 어떤 문제를 안기는 입장에 더 가까우며(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성장하는 이들이 그렇듯 깨지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배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곁에서 떠나가버린다. 물론 대신 그의 곁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을 미셸이 수없이 읽고 보는 책과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셸은 책과 영화를 사랑하는 소년이고, 책과 영화는 물론 멘토의 역할을 대신할 만큼 훌륭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책과 영화가 단지 제목만 빈번하게 등장할 뿐, 그 내용은 그렇게 자세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의 곁에는 책과 영화보다 더 거짓말 같고, 더 극적인 이야기를 가진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회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책이 중반을 향해 가면서부터 점점 이야기를 교차하여 배열하기 시작한다. 미셸의 이야기와 회원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겪은 기구한 삶의 경험일 뿐만아니라, 삶의 여러문제에서 좌충우돌하는 미셸에게 들려주는 조언이기도 하며,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나같이 성장이 멀어보이는 어른들에게도 기꺼이 들려주는 작가의 조언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들이 겪은 삶의 진실들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는 가혹하지만, 그것을 듣는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으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그 교훈들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은 모두 다르고, 각자 다른 의미에서 가혹했으며, 보다 더 사회적이나 정치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뭉뚱그려서 기억의 진실, 혹은 기억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기억의 산물들이다. 모든 사람은 수많은 기억을 지니지만, 그들을 지탱시키는 것은 그 모든 수많은 기억이 아니고, 단지 몇 개에 불과한 작은 기억들이다. 일반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기억의 힘만으로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멀리하고 온, 이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고 믿는 디아스포라들은 더 말할 것이 있을까. 그들은 몇 개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도망쳐 나오기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누룩 없는 빵을 기억하고, 여자가 늘 타고 왔던 프랑스 우체국의 DC-3 쌍발 프로펠러기를 기억하며, 자신에게 찾아왔던 무대에서의 환희를 기억하며, 자신이 배신하고 떠나왔던 사람을 기억하고, 몇 개의 시덥잖은 사회주의 농담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되풀이해 이야기한다. 기억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기억을 잃고 길에 부랑자처럼 버려졌다가 이고르를 만나 기적적으로 기억을 되찾으면서 새로운 기억을 보태고 삶을 되찾은 베르네르의 경우에도, 하다못해 단지 체스를 이기기 위해서도 기억은 필요하다. 수많은 명국의 기보를 외우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샤의 이야기이다. 그의 삶이야기 자체로도 그렇지만, 그가 소련을 떠나오기 전에 임했던 일로부터도 역설적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그가 했던 일은 당을 위해 사진을 조작하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시도이자,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해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조작하려 한다는 것은 기억을 조작하려는 시도이며, 반대로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진은 기억의 보조자료일 뿐이지, 결코 기억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진을 조작할 수는 있어도, 사진에 찍힌 자나 사진을 찍은 자, 혹은 사진을 조작한자의 기억은 조작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기억한다. 자신이 지워버린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지워버린 작가의 시를 통째로 기억한다. 미셸도 세실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그녀를 남기려 하지만, 결국 그녀를 기억하는 것이 그녀를 남기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이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남겨진 것들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프랑크가 어떻게 되었는지 끝내 알지 못하며, 미셸과 카미유가 결국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가 결국 사업을 성공했는지, 어머니와의 관계는 회복되었는지, 체스클럽의 회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세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소설이 취하고자 하는 어떤 태도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아 있는 어떤 기억들이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며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는 기억하는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다음 세대에게 그 기억과 그 기억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개의 장례식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의 장례식은 결국 이들을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는 다짐의 다른 형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덧. 

 

다만 이 성장소설에 대한 (아마도 부당한) 궁얼거림을 여기에 남겨 놓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성장소설은 민감한 문제들을 눙치고 지나가기에 좋은 구조이다. 특히 그런 민감한 문제들이 어떤 사회문제일 때는 더욱 그러한데, 이 소설도 알제리 전쟁이라는 민감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에서 꽤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한다. 다만 그 소재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에 비해 이 소설이 알제리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주저하게 되는데, 그것은 물론 이 소설이 성장소설임을 감안하여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미셸이 알제리 문제가 당시의 프랑스에 가져다주는 어떤 내적인 허위들을 감지해내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동시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결국 모든 성장소설은 성장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성장한 자가 쓰는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른 같은 말투와 짐짓 어른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과연 이 소설이 사회주의의 어떤 폭압을 다루는 만큼 국내의 내적인 문제, 그러니까 알제리 전쟁이 가져다주는 문제들을 직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몇몇 꺼림칙한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에르나 프랑크 같은 청년들의 자원입대나 그들의 치기어린 사상과 그것이 깨어지는 방식에 대한 묘사, 혹은 프랑크의 도피를 이고르가 돕는 것에서 오는 어떤 순진한 시선(물론 이것은 미셸의 시선이므로 그렇기도 하다), 미셸 집안의 부유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예를 들어 이 소설에는 미셸이 알제리에서 온 프랑스인들을 보는 불편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이 있지만, 그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 알제리에 전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프랑스 국내인들도 알제리와 같은 식민지에서 오는 혜택을 같이 누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단지 미셸이 어머니에게 가지는 반감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한 견해일 것이다)이 그렇다. 미셸이 어렸기 때문에 그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들 수 없으며, 그것을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일리가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읽는 독자로서의 어떤 껄끄러움은 남아있다. 

 

아무튼 나는 이것으로봐도 낙천주의자가 되기는 틀렸다. 낙천주의적으로 봐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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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3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낙천주의, 긍정주의...이즘화되면 의도와는 다르게 변질, 편협이 될 수도 있잖겠어요?
맥거핀님의 문제적 시선이 부정성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성주의에 기반한 판단이자 기대에 미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실망이라고...

그런데 말입니다(그것이 알고 싶다 김상중 톤). 인간은 낙천성을 찬양하면서 비극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요. 그 실패, 카타르시스를 긍정성에 쓰는 건 성장(소설)주의일까요~

맥거핀 2015-07-01 12:0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뭐든지 이즘이 되면 문제들이 생기죠. 이 책에서 등장하는 공산주의도 물론 마찬가지일 거구요. 아무튼 이 소설에서는 이 공산주의에서 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들을 수 있지만, 정작 본인 나라의 문제의 집약판인 알제리 문제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비판은 볼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말씀을 듣고보니...어쩌면 제가 비관주의자이기 때문에 낙천적인 내용의 이야기들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희선 2015-07-0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낙천주의보다 비관주의 같습니다 그러면서 좋게 생각해야 해, 하기도... 이건 저 스스로 세뇌하는 걸까요 이상한 말을 했네요

잘 하는 것을 찾고, 못하는 것을 넘어서다니... 저는 평생이 걸려도 그렇게 못할지도... 정말 비관주의군요 어쩌면 그런 일이 한번쯤 있었을지도 모르죠 사람은 늘 자라야 하죠 한때 아주 많이 자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자라는 게 멈추는 건 아닌 듯합니다 어떤 때 자랐다 해도 앞으로 닥칠 일은 많죠 사람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군요

기억하기, 미셸도 여러가지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지도 모르겠네요 가장 많이 기억하는 건 미셸한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준 사람일 수도 있겠네요 그 이야기들은 미셸이 기억하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을지도... 이 책을 보는 사람은 그것을 보려고 하기도 하겠죠


희선

맥거핀 2015-07-01 12:12   좋아요 0 | URL
저도 비관주의에 가까워요. 항상 최악의 순간을 상정하고 뭔가를 하고는 하지요. 문제는 가끔 그 상정한 최악의 순간보다 더 큰 최악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건데...

누구나 잘 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죠. 저도 그렇고, 희선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분명히 잘 하시는 게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도 아직 못찾았을 뿐이겠죠. 그렇게 말하는 저도 사실 제가 잘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는 건 문제이기는 합니다만..못하는 건 확실히 아는데.

가끔 때로는 인간에게 기억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기억이 사라져버린 인간은 분명 예전의 사람과 확실히, 명백하게 다른 사람일 겁니다. 사람이 외모가 같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아니듯이요.

아이리시스 2015-07-01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안녕. 요즘 뭘 배우러 학원다니려고 하는데 너무 귀찮아요.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 안주가 더 쉬워졌을까요.. 티는 나지 않아도 늘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나봅니다. 날이 슬슬 더워요. 잘 지내죠? 맨날 잘 지내냐고만 물어 미안하지만😀

맥거핀 2015-07-03 17:54   좋아요 0 | URL
잘 지냅니다. 다만, 날이 덥다보니 좀 쳐질 뿐..나도 일본어 공부한다고 온라인 강의 끊어놨는데, 지금 제대로 못하고 있어요. 이거 진도 맞춰서 잘 해야하는데..저는 못해도 아이리시스님은 잘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안주..라고 하니까 오로지 술 먹고 싶은 생각밖에는...-_-

하나 2015-07-03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은 기억의 문제구나, 하면서 읽었습니다. ˝ 그래서 이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개의 장례식은 의미심장하다.˝ 두 번의 장례식을 기억의 문제와 연결지어 해석하신 것 보고 감탄하고 갑니다.

맥거핀 2015-07-03 17:56   좋아요 1 | URL
하나님, 들러주시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이들에게 남는 것은 기억뿐이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미셸에게도 그럴지도 모르구요.

신간평가단이 점점 마무리로 가는군요. 그동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려요~.

2015-07-05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7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