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 - Breath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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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음)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똥파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싸가지 없는 캐릭터를 다루는 이 영화가 실은 너무 마음씨 고운 영화라는 것이다. 너무 대책없이 착해서 그 일면성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글쎄.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럴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착하다'라는 말을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생각은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는 착한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잘 짜인 영리한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사실 여러 다른 영화들에서도 비슷하게 변주되곤 하는 것이다. 가정 내의 지난한 폭력이 또다른 폭력적인 사람들을 낳고, 그 폭력은 대를 이어 전해지며, 결국 자신을 망가뜨린다는 이야기. TV에서 하는 <긴급출동 SOS>같은 프로그램에서 1주일에 한 번씩 틀어대곤 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폭력에 물들어가는 가정들과 망가지는 어머니와 자식들이 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런 이야기들. 그런데 이 영화는 가정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 전체에서 말해지는 폭력의 구조는 이중이다. 하나는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구조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들이다. 그러한 폭력의 구조들은 이중의 나선처럼 서로 꼬이고 얽혀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있다. 가정 내에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은 갑자기 들이닥친 상훈(양익준) 일행에게 구타당한다. 상훈 일행은 사채 빚을 받으러 남편을 찾아갔던 것이다. 여기에서 상훈의 대사가 참 인상적이다. "다른 사람 x나게 패는 xx는, 자기는 절대 안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

이러한 폭력의 계층적인 구조와 점점 더 확대재생산 되는 폭력의 구조, 그리고 가정의 폭력과 사회의 폭력이 맞물려 돌아가는 순환의 구조는 영화 <구타유발자들>을 연상시킨다. 다만 <구타유발자들>이 한정된 공간을 제시하고 캐릭터들을 그 곳에 몰아넣음으로써 폭력의 구조를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인상을 준다면, 이 영화 <똥파리>는 그 보다는 훨씬 넓은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폭력의 구조를 드러나게 만든다. 즉 <구타유발자들>이 하나의 실험연구를 연상시킨다면, <똥파리>는 자연스러운 관찰카메라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늘상 연구자들이 말하는대로, 실험연구보다는 관찰연구가 훨씬 힘들다. 이 영화가 이런 이중적인 폭력의 구조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가 잘 짜여졌다는 것을, 한 마디로 영리한 영화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양익준 감독이 한 인터뷰들에서 보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찍었다."는 식의 말들이 많은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감각이 엄청나게 뛰어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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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이 영화가 영리한 부분은 이 영화가 일종의 캐릭터 영화라고 착각할 정도로 캐릭터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비참하고도 이중적인 폭력의 구조, 이 영화가 그런 구조들을 차례차례 나열하는 식대로만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폭력이 난무하지만, 지루하고 짜증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을 쉽게 지치게 했을 거라는 말이다. 이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캐릭터의 힘이다. 이 캐릭터들은 중간중간 곳곳에서 튀어나와 영화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즉 이 영화가 '에너지가 가득한 영화'라고 말해질 때, 이 '에너지'라는 것은 영화의 구조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캐릭터들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들의 비전형성에 있다. 이 영화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상훈부터가 그렇다. 영화의 시작부분,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길거리에서 심하게 구타하고 있다. 이 때 상훈이 나타나 남자를 때린다. 그러나 폭력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처음에는 일시적인 쾌감을 느끼던 관객들도 점점 이 장면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캐릭터의 비전형성이 드러나는 것은 이 이후부터이다. 상훈은 남자를 실컷 때린 후, 뒤돌아서서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왜 맞고다녀, 이 xxx야." 같은 대사를 날리면서 말이다. 이런 캐릭터를 봤나. 뭐지. 이 똘끼는. <나쁜 남자>의 조재현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똘끼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캐릭터가 불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불안함은 영화에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비전형성이 주는 에너지는 비단 상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상훈과 처음 만났을 때 쉽게 물러서지 않는 연희(김꽃비)나, 상훈의 동업자이자, 사장인 사채업자 만식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통의 여고생 이미지나 보통의 사채업자 이미지를 뛰어넘어 비전형성을 창조해낸다.

어떤 이야기들은 전형적인 캐릭터를 필요로 한다. 전형적인 캐릭터가 그들의 캐릭터의 전형성을 어떻게 극대화하여 보여주는가에 그 이야기의 성패가 달려 있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막장드라마들이 그렇다. 그런 영화에서 나오는 악역들은 더욱 표독스러워야 하고, 착한 캐릭터들은 너무나도 선해야만 한다. 시청자들은 그걸 즐기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에서 표독스럽지 않은 악역이나, 결단력 있는 남자 캐릭터는 얼마나 재미가 없는가. 사람들은 "저건 말도 안돼!"하며 분노하다가도, 금방 "왜 말이 안돼? 드라마잖아."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러나 <똥파리>와 같은 이야기에서 전형적인 캐릭터가 나오는 순간, 영화의 에너지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 영화는 그저 사회고발물이 되거나 눈물을 욕설로 대치한 신파극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의 연기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는 전형적인 캐릭터보다 이 영화에서처럼 비전형적인 캐릭터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캐릭터를 전형적으로 연기하는 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왠지 이 영화의 상훈이나 연희, 만식, 그리고 환규나 영재 같은 다른 캐릭터들도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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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영리한 것인지, 그를 뛰어넘어 교묘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 영화에는 지나치다 싶게 많이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매우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고, 또 아예 보여주지 않는 단절의 부분이 있다. 이는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상당히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살을 하기 전, 상훈의 누나와 조카와 함께 아버지가 플스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아버지가 자살을 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즉 중간에 있어야만 마땅한 어떤 사건(상훈이 아버지를 구타하는, 또는 상훈과 아버지 간의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 상훈이 아버지를 구타할 때 조카가 그것을 보게 되는 장면도 있다. 그 장면 이후에 마땅히 뒤따라야 할 조카의 충격, 혹은 상훈과의 어떤 관계들은 잘 보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들은 꽤나 많다. 갑자기 고기집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도 그렇고, 상훈이 연희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부수는 사건들도 보여지지 않거나 매우 짤막하게 처리된다. 또 남다은 평론가가 <씨네 21>에서 지적한 다음의 부분들도 있다. 길지만 잠깐 인용한다.


연희(김꽃비)는 상훈(양익준)이 건달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 건달이 엄마의 포장마차를 때려부순 그런 깡패라는 건 모르고, 상훈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영재가 연희의 동생인 걸 모른다. 상훈의 누나는 상훈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르고, 만식의 고깃집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짓밟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모른다. 무엇보다 연희와 상훈은 연애 비슷한 걸 하기 시작하면서도 각자의 가족사나 상처를 숨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인물들의 이런 무지함이 영화적 비극을 배가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영화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끝내 포기하지 못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영화는 인물들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건 아닐까.


영화가 인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이렇게 인물들을 보호하고 특정의 장면을 생략하는 것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본다.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특정의 장면들과 구조의 일부분을 의도적으로 숨김으로써 관객에게 영화의 구조보다는 캐릭터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자꾸 캐릭터에 동화되도록, 심정적으로 응원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특정의 장면이나 구조를 숨겨 캐릭터에 집중하게 만든다고 해서, 캐릭터를 응원하게 되지는 않는다. 상훈이라는 캐릭터를 응원하게 만드는 것은 그 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클 것이다.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상훈은 <그랜 토리노>의 동림 선생님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살아가면서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딱 1명 꼽자면, 그게 상훈'일 정도로 무서운 캐릭터지만, 자꾸 그를 응원하게 만든다. 여기서의 응원이란 안타까움에 가깝다. 이 영화는 지속적으로 관객이 상훈에게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그를 응원하게 만들다가도, 그것을 그 다음 장면을 통해 지속적으로 막는다. 상훈은 조카에게 플스를 사주고, 잘 놀아주는 좋은 삼촌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또 연희와 욕이 실린(?) 농담을 하며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돌변하여 아버지를 구타하고, 주위 사람을 이유없이 때린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래, 그래, 지금처럼 살아"하고 생각하게 만들다가도, "쟤 갑자기 또 왜 저러니."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즉 관객들을 지속적으로 안타깝게 만든다. 그리고 이 안타까움은 마지막에 최고조에 이른다. 상훈이 사채업에 손을 씻고, 가장 착하게 행동했을 때 사건이 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이 대사는 상당히 안타깝게 들린다. "왜 우물쭈물해?" 여기서 우물쭈물한다는 것은 물론 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런 특정의 장면들과 구조를 숨기는 것이 가미될 때 이 착한 캐릭터에 동화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동화와 응원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그래서 여기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처음에 했던 말에 동의하기가 조금은 의심스러워진다. 이 영화는 너무 대책없이 착한 캐릭터가 나오는 착한 영화인가. 그런가. 그리고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영리하고도 교묘하며, 놀라운 점이다. 착한 영화라고 느끼게 되는 이상한 마법.

하기사, 감독이 이 영화를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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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09-04-28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짤막하게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쓸데없이 길어졌음..;

프레이야 2009-04-29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이 영화 망설이고 있는데 볼까요? ㅎㅎ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09-04-30 01:20   좋아요 0 | URL
보통의 영화들과는 약간 다른 문법으로(눈물을 욕설로, 언어가 아닌 몸으로) 말하는 영화라, 맞으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추천합니다.
지금까지의 영화들과는 다른 방식의 힘이 느껴지는 영화예요. 제가 느낀 바로는 위에서 말한대로 상당히 영리한 영화이기도 하구요.
 
슬럼독 밀리어네어 - Slumdog Million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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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그 자체인 글이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영화를 본 후 마음 편하게 몇 개의 리뷰 글들을 읽었다. 리뷰 글들은 다양하나 크게 두 갈래로 갈리는 듯 하다. 하나는 인도의 현실을 묘사한 잘 만든 영화이고, 충분히 아카데미상을 받을 만하다는 의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잘 만든 영화이기는 하나 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평범한 할리우드산 성공스토리에 불과한 이 영화가 상을 받은 것은 아카데미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이 개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다. 또 한편으로 각색의 아쉬움을 지적한 글도 있었고, 이야기의 얼개가 잘 짜인 잘 만든 영화에 더 무엇을 논하느냐는 의견도 있다.

글쎄. 읽다보니 이것도 맞는 얘기 같고, 저것도 맞는 얘기 같아서 약간은 어리둥절하기도 하지만, 몇 가지는 저것은 좀 이상한데..라고 느껴지는 것도 있다. 먼저 각색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원작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와 같이 책(소설)이 원작이고, 그것을 영화화할 경우, 그 영화들이 받는 부당한 공격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책과 영화는 그 매체적 특성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활자의 나머지 공간들을 채워 나가야 하는 소설과, 그 상상력이 하나의 화면으로서 제시된 영화가 같아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상상력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단지 영화가 책의 일부로서 거대한 삽화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인가? 글쎄. 나로서는 도리어 소설의 빈공간들을 채워넣지 못하고 평이한 재현(재해석이 아니라)으로만 끝나는 영화들에 대해 찬성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또 다른 의견, 과연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을만 한가, 이것은 할리우드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이 가미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 일반적으로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아마도, 동양의 사상이나 문화가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열등한 것이라는 시선, 따라서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서구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선을 의미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그런 시선에서 본다면, 그리고 이 영화가 서구의 영화감독 대니 보일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지적한다면, 그렇게 보이는 몇몇 장면들이 있음 또한 사실이다. 이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힌두교도들이 회교도들을 습격하여 주인공 자말의 어머니가 죽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인도의 역사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얼마나 오랜 대립이 있어왔는지, 이런 습격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어떤 맥락도 설명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들을 습격하는 자들이 힌두교도라는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습격하고, 어머니는 죽고 자말과 그의 형 살림은 내달릴 뿐이다. 이것은 마치 동양에는 이런 비상식적이고, 잔인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그런 인상을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와 반대되는 장면도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인데, 타지마할에 방문한 서양관광객을 자말이 멋지게 속여먹는 장면이다. 또 장엄하게 느껴지는 거대한 빨래터를 묘사한 장면도 있다. 왠지 이 영화는 오리엔탈리즘적인 것과 그의 반대로서 옥시덴탈리즘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감독은 이 두가지를 혼합함으로써 영화의 중심을 잡아보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극과 극의 시선은 버무려지기 힘든 것이다. 물과 기름을 혼합하면, 그 사이의 층만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데에는 작년 작가협회 파업으로 아카데미상이 차분히 지나갔던 것에 대한 반동적인 의미와 아카데미상을 좀 더 세계적인 영화 축제로 만드려는 할리우드의 시선이 혼합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런 것들이 의외의 일본 영화 <굿' 바이>에게, 수상이 유력해 보였던 <바시르와 왈츠를>을 제치고 외국어영화상을 안기고, 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게 작품상을 수여하는 모험을 하게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하고 쓰잘데 없는 음모론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사실 <밀크>, <프로스트 VS 닉슨>은 아직 보지 않았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나 같아도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보다는 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작품상을 주었을 것 같다. <벤자민..>은 기대보다는 훨씬 평이한 스토리에 너무나도 할리우드 산 느낌이 물씬 난다는 점에서, <더 리더>는 얼마전 이스라엘의 침공이 문제가 되었던 시점에서 또다시 제노사이드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슬럼독..>을 선택하는 것이 신선하고도, 안전한 선택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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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영화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퀴즈쇼가 하나의 액자로서 기능하고, 그 안에서 자말의 이야기가 들어왔다 나왔다하며 전개되는 이 영화는 자칫 잘못 만들었으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고, 영화의 줄기를 잡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말의 이야기와 퀴즈쇼를 버무려내는 솜씨가 좋다.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단언할 수는 없으나, 편집상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러나 잘 만들었다고 해서, 이야기가 매끄럽다고 해서 좋은 영화인가라는 물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 도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 자말을 둘러싼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시쳇말로 쌍팔년도 스토리이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된 두 형제가 한 소녀를 만나고, 그 소녀를 동생은 사랑하게 되고, 형은 조직으로 들어가고, 동생은 그 소녀와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하필 소녀가 그 조직 보스의 정부가 되고, 개과천선한 형은 소녀를 꺼내주고 장렬한 죽음을 맞고, 동생은 소녀와 천년만년 잘 산다는 그런 이야기. 뭐 이 스토리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의 말대로 아무리 쌍팔년도 스토리라도 잘 만들어졌다면 아카데미 작품상 그 이상도 얼마든지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뭇 신파조의 스토리를 신파가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노련한 점이다. 바로 그 이야기를 둘러싼 퀴즈쇼. 이것이 하나의 액자가 되고, 거대한 맥거핀이 되어 이야기를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나도 이 때까지는 영화를 즐기며 재미있게 보았다. 그러나 이 맥거핀은 점점 커져 급기야는 퀴즈쇼와 자말의 이야기는 하나로 결합되며, 급기야는 퀴즈쇼가 자말의 이야기를 삼키려 든다. 여기서부터 조금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사회자가 퀴즈에 개입하려 든 순간부터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 자신의 예전의 경험을 토대로 문제를 맞춰나가던 자말에게 경험이란 사라져 버렸다(즉, 경험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말은 사회자와 심리게임을 하며 한 문제를 찍어서 맞추고는 마지막 문제도 찍어서 맞춘다. 그리고 관객이 잊고 있었던 처음 문제의 해답에 대한 자막이 마지막에 제시된다. 자말이 이 모든 문제를 맞추고 우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It is written' 운명이었다. 운명이었다? 운명이었다라니. 결국 그의 운이라는 것인가.

나는 물론 모든 퀴즈 프로그램은 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 더 많이 맞출 확률이 올라간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확률의 영향은 생각 이상으로 미미하다고 본다. 아무리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모든 분야의 모든 문제의 해답을 다 알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이 아는 사람이라도 그가 모르는 문제가 출제되면, 그는 틀릴 수 밖에 없다. 그럼 많이 아는 분야가 출제되면 되지 않느냐고? 그래, 하지만 그것 또한 운이다. 퀴즈는 어떤 의미에서는 로또와 비슷하다. 자신이 선택한 번호가 선택될지 않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끔 로또 번호를 분석한다 어쩐다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이 로또 번호를 분석한다는 것은 그 로또의 우연성과 불규칙성을 믿고 있지 않음을, 거기에 어떤 무언가가 개입되고 있는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믿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반면 로또의 우연성을 100% 믿는다. 그래서 가끔 로또를 산다. 나의 운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리고 가끔 퀴즈 프로그램도 열심히 본다. 나의 운을 가늠해보기 위해.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 내내 자말이 이 해답을 맞추게 되었던 것이 그의 삶 때문이었다고 항변하고는 마지막에 슬그머니 사실은 운이 좋아서..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야기가 조금 딴 길로 샜지만, 내가 이 영화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은 이 영화가 퀴즈의 해답으로서 제시한 이 마지막 메시지에 있다. 자말이 백만장자가 된 것이 그의 운명, 그의 운이라니. 그렇다면 그의 형 살림이 총을 맞아 죽어간 것도 그의 운 때문이고, 백만장자가 된 자말에 환호하면서도 흙길을 맨발로 달리고 있는 가난한 인도의 아이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그들이 단지 운이 없기 때문인가. 이것에는 정말 동의하기 힘들다. 자말은 마지막에 이 문제들을 틀렸어야 했다. 왜? 그는 이 해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뭐 돈 다 잃으면 어떤가. 그의 곁에는 라티카가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 마지막에 기꺼이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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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4-23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의 소설 '퀴즈쇼'가 생각나는 영화였어요.
지혜의 힘을 빌려 우연과 맞서는 인간의 운명을 시뮬레이션한 퀴즈쇼..
우리는 어딜 가나 똑 같고 세월이 흘러도 마찬가지이고 사람은 변하지 않고..
그저 신이 다 짜놓은 각본일까요..
늘 좋은 리뷰 잘 읽고갑니다.

맥거핀 2009-04-26 00:46   좋아요 0 | URL
글쎄요. 모두 신이 다 짜놓은 각본이라고 한다면 사는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운이나, 정해진 운명같은 것은 없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조금은 맘에 안들은 건지도 모르지요.
끌끌...늘 어렵습니다.
 
도쿄 소나타 - Tokyo Son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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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도플갱어>와 <강령>, <주온>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로>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신작 <도쿄 소나타>는 공포물이 아니라고 그랬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공포물들은 귀신과 악령들이 출몰할 것 같은 제목들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그런 귀신이나 악령보다는 다른 어떤 것들이 더욱 큰 공포를 주곤 했다. 그 다른 어떤 것들이 무엇이냐고? 글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들, 보이지 않으나 저 어둠 속에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내 주위에 머물 것들. 여러가지 이름을 가져다가 붙일 수는 있겠지만, 한마디로 자른다면, 그건 희망 없음의 공포였다.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욱 무서운 것, 도저히 여기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가득찬 것이라고 말하면 될까. 그런 구로사와 기요시가 그려내는 가족 드라마라고 그랬다. 공포물이 아니라고 그랬다. 나는 속기를 기대하며 갔다. 그리고 속았다.

이 영화 <도쿄 소나타>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무서웠다. 물론 이 영화에는 귀신이 나오지도, 도플갱어가 나오지도, 검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어떤 형체없는 무엇도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절망들은 우리 현실과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공포감을 준다. 영화의 아버지(카가와 데루유키)나 어머니(코이즈미 교코)는 간절히 소망한다. 다시 시작하면 안될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 앞에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 앞에 있는 것은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이거나, 건널 수 없는 암흑의 망망대해이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reset 버튼을 누를 수 없다. 그들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른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한다. 이 절망은 정말 무섭다.

이 절망적인 마지막 장면 뒤에 마치 하나의 에필로그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더 추가된다. 몇년이 흘렀다는 자막이 스치고 지나간 후, 부모는 막내아들 켄지의 음악중학교 입학시험장에 앉아있다. 켄지는 드뷔시의 <달빛>을 아름답게 연주하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며, 부모는 켄지의 손을 잡고 나온다. 이것을 희망으로 볼 수 있을까. 이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모호하다. 실제 이들의 몇년 후로 볼 수도 있지만, 왠지 이는 아버지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서 보는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꿈속과 같은 희뿌연 화면 속에서 무표정한 사람들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이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곡의 제목부터가 미심쩍다. 드뷔시의 <달빛>이라. 달빛이 의미하는 환상성과 기이함. 어쩌면 이는 소나타 뒤에 이어지는 환상의 즉흥연주인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이 그다지 희망으로 느껴지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바로 전의 장면이, 다시 모인 가족들의 식사장면이기 때문이다. 차에 치여 쓰러졌던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고, 납치범과 같이 바다로 떠났던 어머니는 홀연히 돌아와 막내아들 켄지와 식탁에 둘러앉는다. 이 식탁에는 참을 수 없이 고요한 정적만이 흐른다. 단지 식구들의 밥먹는 소리만 미세하게 들릴 뿐이다. 그들의 지금까지의 식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반복. 이 식탁 위에는 그간 항상 정적만이 흘렀다. 아버지가 젓가락을 드는 것으로 시작하여, 모두들 조용히 밥을 먹고, "잘 먹었습니다."를 말하고 일어나는 동일한 형식. 이 식탁에는 대화가 필요없었다. 아니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두 아들은 모두 이를 잘 알고 있다. 두 아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부모들에게 이야기해보아야 그들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변하는 것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탁에서의 식사로부터의 시작 - 중간의 여러 사건들 - 그리고 다시 식탁에서의 식사로 이어지는 마지막은 왠지 제시부 - 전개부 - (제시부의 비슷한 반복인) 재현부라는 소나타 형식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이러한 식탁에서의 대화의 단절은 세대간의 단절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한편으로는 미래가 변하지 않기를 은연중에 갈망하는 기성세대와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믿는 자식세대와의 단절.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 자식세대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란 또 얼마나 얄팍해지기 쉬운 것인가. 미군이 우리나라를 지켜주기 때문에 미군에 들어가는 것이 가족을 지키는 것이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큰아들의 논리는 그 미군이 어느 중동 전쟁터에 파병되면서 여지없이 깨진다. 이러한 세대간의 단절을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두루두루 큰 무리없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와 특정의 어떤 것만 잘하면 된다고 믿는 자식세대간의 단절이라고 말이다. 영화 속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러간 아버지는 면접관에게 시켜만 주면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면접관은 어떤 특정의 일을 잘 해낼 수 있는가 중요하지,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것은 의미없다고 그를 조롱한다. 그래서 또 한편으로는 이 마지막이 더욱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 절망한 아버지가 음악영재인(즉 '음악'이라는 특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들에게서 희망을 찾는다라. 이것을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또다른 단절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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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기 며칠전 2006년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우연히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속 식탁 장면을 보면서 자주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의 가족의 식탁, 이 실패자들의 집합이 벌이는 식탁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음식 취향만큼이나 다른 그들 각자의 생각들이 벌이는 충돌의 하모니와 유쾌하고도 아이러니한 봉합. <도쿄 소나타>와 <미스 리틀 선샤인>의 식탁 장면은 이들 영화가 달려가는 마지막 결말만큼이나 매우 다르다. 그러고보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가족간의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대화를 가장한 충돌은 식탁 위에서 이루어지는 듯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와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 이 가족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자신과 친밀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또다른 나인 동시에, 나의 숨기고 싶은 모든 치부를 알고 있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상처들은 종종 날카로운 말이 되어 식탁위를 가로질러와 우리의 심장에 박히지만, 때로는 침묵의 공기로 변해 조용히 식탁 위에 내리깔린다. 날카로운 말은 상처를 주고 지나갈 뿐이지만, 침묵의 공기는 중금속처럼 우리의 심장에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내리깔린 공기 속에서 메인 심장 위로 밥을 밀어넣는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기어(gear)가 고장난 차를 타고 달리는 이 가족. 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가족 중에 몇몇이 내려 차를 밀어 일정 속도에 이르게 한 후 차에 올라타야 한다. 매번 약간 위태위태하기는 하지만, 이 가족은 그래도 모든 구성원들을 멋지게 태워 출발한다. 특히 멋진 주제곡 'The Winner Is'가 울려퍼지며, 가족들이 뛰어 달려와 차를 타고가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 속 가장 즐겁고도 사랑스러운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가족이라면, 우리가 가족이라면, 아무리 열없는 실패자들일지라도 모두 남김없이 태우고 출발해야만 하는 거겠지. 그러나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리 떼놓고 가려고 해도, 어딘가에 버리고 가고 싶어도 어느 틈에 달려와 내 옆자리에 앉아있고야 마는 사람들. 그것이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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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The Read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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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생각보다 영화의 이야기는 복잡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의 이야기가 복잡하다기 보다는 그 영화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우리를 복잡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영화는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자신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기술했던 프리모 레비의 유명한 책과 질문이 겹친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무엇이 인간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려운 일이라기 보다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머리 속이 복잡하다 못해 텅 비어 버린 채로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서 겨우 떼내는 일 뿐이다.

영화의 시작. 한 15세 소년과 연상의 여인의 위태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흔한 소년 판타지물, 혹은 역 로리타물로서의 상투적인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여인 한나는 꽤나 많이 해본 솜씨인 것 같기도 하다. 일부러 석탄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빌미로 옷을 벗기는 저 능숙한 솜씨라니. 뭐 아무튼 여기에서부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기는 하다. 도대체 이런 관계를 용납해도 되는 것인가 하고. 성에 대해서는 꽤나 관대하다고 여겨지는 서양에서도 이러한 관계는 꽤나 중대한 범죄로 여겨진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속으로는 더 꼬여 있지만, 겉으로는 꽤나 엄숙한 체 하는 우리의 '위원회'가 어째 이 수상한 영화를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켜 줬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것만 궁금하냐고? 글쎄, 나로써는 이에 대해서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런 경험도 없을 뿐더러(!), 겉으로는 책임 있는 리버테리언을 표방하는지라, 본인들이 뭐 책임만 잘 진다면...쿨럭...하고 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고맙게도 영화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해보기도 전에 2라운드로 넘어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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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법정에서의 대답을 들으면서 우리는 모두 아연해진다. 이것이 아연한 이유는, 이 대답들에는 모두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나의 대답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일자리를 준다기에 자원했다, 방이 모자라기 때문에 뒤에 온 사람들을 위해, 있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이 질문들은 중요한 원칙들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 원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되며, 더 나아가 그들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원칙이라면 그녀의 이 대답들은 절대적으로 틀린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피해자들과 이를 바라보는 우리 관객들은 심정적으로는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녀를 용서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용서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녀를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원칙을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나에게는 이 원칙들이 결여된 것일까. 이것이 그녀의 문맹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는 이 아연하다 못해 순수하기까지 보이는 결여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녀는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해서건, 혹은 난독증이 있어서건 문맹인 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이 문맹은 그녀가 아우슈비츠에서 저지른 이 일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녀는 왜 그렇게 그녀의 문맹을 수치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렇게 문맹을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법정에서의 위증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말하는 그녀의 그 욕망,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이에서 벗어나기를 욕망하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너무 욕망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수없는 시도를 그녀는 지금까지 계속 실패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앞의 질문들은 바보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아무튼 여러가지를 고려해보아도 이는 간단한 문제가 될 수 없다. 문맹이라고 해서 그녀의 그런 범죄 행위들이 용납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역으로 말해 그것이 범죄행위임을 충분히 인식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더 큰 형벌을 내릴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로, 법으로서 이들을 단죄하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이들을 처벌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까지 수송한 기관차의 기관사는 처벌을 받아야 할까.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 철로를 설치한 모든 노동자들도 처벌해야하는 것이 아닐까...법정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영화 속 교수의 세미나에서 혼란을 느끼던 학생들과 동일한 혼란을 우리 모두 겪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도 매우 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과연 실제의 재판은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 아우슈비츠의 범죄자들을 심판하는 재판은 여러 번 열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가 재판받았던 뉘른베르크 재판도 있고, 아이히만 재판도 있지만, 영화 속 경우와 가장 비슷한 사례로는 196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아우슈비츠 재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2명의 피고인은 아우슈비츠에서 보초병, 방역소 직원, 게슈타포, 수용소 책임자, 수용소 의사 등으로 일했고, 이들은 1963년 현재 수출업자, 회사원, 남자 간호사, 농업협동조합 조수, 산부인과 의사, 목수 등의 일을 하다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사람들은 놀랐다. 그들은 가정을 가진 보통 사람들로, 성공하려고 노력하고, 세금도 잘 내고, 점잖고,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는, 괴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들은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리고 판사는 판결을 내렸다. "피고인들이나, 책상에서 인간말살 계획을 수립한 사람들은 다같이 아우슈비츠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사는 피고인들의 정치적, 도덕적 책임은 묻지 않았다. 다만 오늘날과 똑같이 아우슈비츠 시절에도 유효했던 형법의 자구(字句)를 기준으로 선고를 내렸다. (크리스티안 마이어,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에서 부분 발췌)

...어쩌면, 그래서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은 '원칙을 저버린, 혹은 원칙을 배우지 못한 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제 어느때나 유효하다. 예를 들어 광주에서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공수부대원들 중에는 "나는 국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애국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혹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이 믿음은 틀렸다고 믿고 싶다. 국가는 항상 옳은 것을 지시하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다. 국가가 내려준 '명령을 따르라'는 원칙 위에는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대원칙이 있다. 설령 그 원칙을 배우지 못했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어떤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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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한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라고 보았을 때, 그 중심 인물을 서술하는 다른 한 축에는 마이클(랄프 파인즈)이 있다. 생각해보면, 이 마이클도 불행한 인물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마이클. 그는 옥중의 한나에게 여러 책을 읽은 녹음들을 보낸다. 그가 이 녹음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에게는 그가 어떤 반성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은 다시 처음으로 한나를 대면하는 자리에서 묻는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하냐고. 여기서의 기억이란 반성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한나의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아마 여기서 한나는 깨닫고, 마이클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반성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반성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반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는 반성할 수 없으며, 반성해서도 안되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아우슈비츠는 이해될 수도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 그녀는 그 깨달음을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 보였다. 책을 통해 더 가깝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그녀가 책에서 어떤 원칙을 얻었음을 그녀는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증명해 보였다.

그래서 이 마지막은 마음에 든다. 이 마지막에서 마이클은 자신의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 책의 효용이란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후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남기는 것 말이다. 후세들이 그 책을 읽음으로써 과거의 이야기에서 무엇인가 교훈을 얻기를, 그리고 절대적인 원칙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요즘 물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뉴라이트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친일의 경험, 베트남 전에의 참전, 군사 쿠데타, 민주에의 탄압 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자학 사관이라고 자학하는 뉴라이트들에게 말이다. 과거의 비극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자는 미래의 희극을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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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 Gran Torino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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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 나오는데 두통이 밀려왔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 해서 그런걸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들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지만, 자꾸만 울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애이불비(哀以不悲). 마음 속으로는 슬퍼해도 그렇게 슬퍼하고나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자꾸만 무엇인가를 적어내려 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영화 그 이상의 무엇을 적는 것을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마도 영화 속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에 대해서 고귀한 희생이니, 가슴이 벅찬 감동이니 하고 적은 여러 리뷰들을 보았다면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시니컬하게 되뇌었을 것 같다. "다 쓸데없는 소리지." 그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그러나 또 나는 그 쓸데없음 속에도 어느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뭔가를 캐내기 좋아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그저 기억하기 위해 몇 가지를 간단하게 월트 몰래 적어두도록 하자. 
 

1.

월트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다. 어쩌면 월트는 집안에서 소외된 가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자식들은 친밀하지만, 아버지와는 아무도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는 그런 집안말이다. 그러나 이제 아내는 죽었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의 시작이 아내의 장례식임은 의미심장하다. 전작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도 나이든 트레이너 프랭크는 아내가 없었다. 그리고 딸과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체인질링>에서도 크리스틴은 혼자 아들을 키웠다. 그리고 그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랜 토리노>에서는 월트는 영화의 시작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자식들은 그를 싫어한다. 이 상황에서 <밀리언..>의 프랭크와 <그랜 토리노>의 월트는 모두 같은 길을 걷는다. 프랭크가 매기를 딸을 삼았다면, 월트는 몽족소년 타오를 아들을 삼는다. 또다른 가족의 탄생.

왜 스스로도 의아해하면서 월트는 타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일까.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월트가 타오에게서 그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이발사가 폴란드 놈이라고 놀려대는 것처럼, 어쩌면 월트도 가난한 이민자 출신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집안의 이민자 소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가는 것이 그 중 하나. 그리고 그가 전쟁에서 무리한 작전에도 용감하게 나섰던 것은 어쩌면 빨리 어메리칸이 되고 싶은 욕망, 그것의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항상 미국적인 가치를 강조하고, 유색인종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의 성향도 어쩌면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하나는 월트가 타오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것이다. 차를 훔치려던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라고는 하나, 시키는 모든 일들을 별 군말없이 묵묵히 해내는 소년. 이 소년에게서 뭔가 '괜찮은' 부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월트가 수를 청년들에게서 구해주던 장면에서도 그렇다. 월트는 차를 세워놓고 조용히 그들을 관찰한다. 이들을 도와줄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그리고 수가 청년들을 겁내지 않고 맞서려 하자, 그제서야 차를 몰고 그들에게로 간다. 월트가 보았던 '괜찮은' 부분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수의 경우에서처럼 두려움 없이 무엇인가를 대하는 태도였을 것이다. 타오는 갱단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갱단이 되는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갱단이 된다. 총과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세상에 맞설 용기가 없는 것이다. 
 

2.

이스트우드 감독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가 이 세상이 아름답고 평온하기만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해보인다. 그는 <밀리언...>에서는 '네 자신을 보호하라'고 말했고, <체인질링>에서는 '먼저 싸움을 시작하지는 말되, 시작된 싸움은 스스로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아마도 이 세상은 어느 정도의 싸움이 불가피한 곳이며, 아니, 어느 정도의 싸움은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공정한 룰의 필요이다. 싸움은 하되, 공정한 룰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영화 속 월트의 대사처럼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밀리언...>에서는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 진행되었고, <체인질링>의 크리스틴은 그녀 혼자의 힘으로 여러 권력기관들과 맞서야 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총과 커다란 폭력 앞에 노인과 아이들이 맞서야 한다. 이렇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수 있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항상 되묻는다.

이와 관련해 전작에서도 그렇고 '종교'라는 것의 역할이 흥미롭다. 영화에서 월트는 나름 독실한 신자인 듯 하나, 모든 것을 종교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고해하러 찾아간 신부에게도 기대한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하고 나온다. 이 모습은 <밀리언...>에서 교회에서 귀찮은 질문만 해대던 프랭크의 모습과 겹친다. 아마도 이스트우드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즉 어차피 신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그저 자신의 할 일을 다하면 된다는 것. 용서와 참회와 기적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 그저 인간은 그 전에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라는 것 말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에는 살짝 의문이 든다. 이 마지막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희생을 통한 고귀함이고, 자신이 한국전에서 죽인 소년병에 대한 참회의 마음인가. 도리어 나는 그 반대의 인상을 받았다. 참회나 용서는 나의 몫이 아니라는 것. 신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저 내가 해야할 몫을 할 뿐이라는 것 말이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큰 죄악이기 때문이다.  




3.

영화를 본 후 몇 개의 리뷰를 보았는데, 인종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는 시각도 있었고, 또 그에 더 나아가 미국인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관점에서의 불편함, 혹은 유사한 의미의 '팍스 아메리카나'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에서는 인종 문제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는 인상이 짙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종 문제를 넘어선 그 이상(以上)의 시각, 인종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 그 이상의 세계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사실 역설적으로 보았을 때 인종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인종이라는 것은 더 이상 전혀 언급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결국에는 수와 타오를 괴롭히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들과 같은 몽족의 갱단이라는 것이다. 즉 흑인이나 백인의 갱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도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 영화에서 비롯된 결정적인 대립이 인종으로서 비롯된 문제라기보다는 인종을 벗어난 다른 것의 문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는 영화 속 월트와 이발사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인종에 대해 유쾌하게 농담을 나누며 서로에 대한 막말(?)을 서슴치 않는다. 이들에게서 인종간의 긴장이란 찾을 수 없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해서 역설적으로 이들의 관계에서 인종이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서 아무 문제 없는 농담이 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실제로 전혀 중요한 것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스트우드 감독이 인종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이민자들의 국가, 미국. 이 미국 땅에서 순수 어메리칸을 이야기하는 것, 혹은 인종간의 대립과 차별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는 정말 우스운 것이 아닌가 라는 시각. 그것은 이제는 더 이상 고려되지 않아야 된다는 것, 하나의 농담이 됨으로써 말이다.


4.

그랜 토리노. 1972년 포드에서 생산된 옛날 자동차. 옛날 자동차를 가지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항상 관리를 해주어야만 자동차가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능 그 자체로만 따진다면, 옛날 자동차는 절대 최신의 자동차를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옛날 자동차를 가지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당연하다.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명예와 긍지, 그것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 명예와 긍지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지난 몇 십년 동안의 차에 대한 정성과 애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복잡하고 다층적인 스토리로 이루어진 영화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스토리로 이루어진 작은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영화는 커다란 울림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며, 영화 이상의 어떤 순간을 관객들에게 느끼도록 한다. 그 작은 이야기가 그렇게 커다란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해답은 그가 살아온 몇 십년 간의 영화에 대한 정성과 애정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몇십 년 동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쌓아온 가치의 힘에 있다. 그가 살아온 몇십 년 간의 삶에 대한 자세가 이 영화에는 담겨 있다. 그래서 영화는 때로 보이는 것 이상의 많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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