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 Moth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걸음 더 나아간 봉준호의 작품세계. 세밀하게 전진하지만, 그 칼끝은 날카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더 - Moth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미리니름이 상당히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옛날 어느 도시에서 한 마술사가 우물에 묘한 약을 넣어 버렸다. 마술사는 말하기를, 만약 그 우물물을 마신다면 누구나 미쳐버릴 것이라 하였다. 그 도시에는 우물이 딱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평민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의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온 도시 사람들이 미쳐갔다. 사람들은 그 우물물을 마시면 미쳐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우물이 그들이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게다가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참을 수 있었겠는가? 얼마 안 가 사람들은 포기했고, 저녁때가 되자 온 도시가 미쳐갔다.
왕은 무척 행복했다. 왕은 궁전 테라스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별개의 우물을 갖고 있지. 신에게 감사한다. 온 도시가 미쳐버렸군 그래." 사람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날뛰고 깔깔거리며 웃고, 울며 난리들이었다. 그것은 지옥이요, 악몽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전에는 결코 해본 적도 없었던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행복에 잠겨 있었다. 사람들이 왕궁으로 몰려와 외치기 시작했다. 병사들 역시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그 우물물을 마시고 미쳐 있었다. 다만 몇몇의 호위병들과 요리사, 하인들, 대신들 그리고 왕 자신과 여왕만이 미치지 않고 온전해 있었다. 왕은 크게 걱정이 되었다. 왕이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봉준호 감독이 그리는 세계는 대체로 상당히 이상한 곳이었다. 그 곳은 열려 있으나 실상은 폐쇄된 공간, 예를 들어 한강을 둘러싼 서울의 일부지역이거나,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 그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이상한 일들은 벌어졌다. 이상한 약품을 먹고 자라난 물고기는 괴물이 되어 고수부지를 덮쳤고, 지방의 한 도시에서는 비오는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들이 강간되어 버려졌다. 그리고 괴물은 한강을 따라 폐쇄된 공간을 활주하며 그 위용을 뽐냈고, 살인마는 작은 도시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경찰의 눈을 피해 은밀히 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그리고 또 여기는 지방의 작은 소읍. 한 여고생이 밤길에 살해되어 옥상에 버려졌고, 한 어리숙한 청년은 살인범으로 지목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진실을 찾고자 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가 미친 세계. 목격자의 불확실한 진술과 작은 골프공 하나를 단서로 범인을 지목한 경찰, 아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돈만 받아 챙기려는 변호사, 아들과 어머니를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보는 이웃들, 도와주기는 하겠으나 돈이 필요하다는 아들의 친구, 그리고 죽은 여고생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은폐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들. 어머니는 묻는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봉준호 감독은 이번에도 그 전작들과 비슷한 것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 <괴물>을 살펴보면, 감독은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범이 과연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 혹은 <괴물>에서 괴물이 과연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찾는 것은, 그저 미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맥거핀'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이러한 것들을 하나의 맥거핀으로 두고, 그보다는 이 모든 것의 이면에 숨은 것들, 이러한 틀을 만든 폭력의 구조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감독이 이러한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은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망가져 가는 개인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계속 사라져가는 여자들과 더불어, 경찰들에게 끌려와 폭행당하고 군화발로 짓밟히는 무고한 시민들, <괴물>에서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호와 도움도 받지 못하고, 괴물보다는 오히려 국가로부터 계속 공격당하는 현서네 가족들이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망가져가는 개인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의 구조가 만들어낸 괴물들(변형된 물고기와 살인마)과 그 괴물을 만들어내고, 만드는 데 일조한 자들(한강에 약품을 뿌린 자들 또는 경찰들, 국가기관)이 은폐되고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무엇이 필요했고, 현서네 가족과 경찰서 지하에서 폭행당한 사람들은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마더>도 그러한 면에서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살인의 추억>이 연상되는 지방의 어느 소읍. 이곳은 상당히 폐쇄된 사회다.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그러한 작은 사회에서, 공동체의 무참한 폭력이 한 소녀에게 가해진다. 이는 폐쇄된 사회, 폐쇄된 공동체에서 가해지는 알려진, 그러나 모두들 쉬쉬하는 그런 폭력. 그러나 이 폭력은 실제로 이러한 폭력을 가한 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사건이든 별로 공들여 수사할 마음이 없는 경찰과, 변호사와 검사와 병원장이 젋은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는 모습이 중첩된 이곳에서 이 구조가 온전히 이들만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봉준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결코 처벌받지 않는다.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른 희생양을 내세우는 것. 도준(원빈)이나 기도원 종팔이와 같은 어리숙한, 사회적인 약자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만들어낸 틈을 가장 약한 곳을 부러뜨려 메우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일어난다. 그러고 보면, 감독은 영화가 현재의 이야기임을 여러번 상기시킨다. 언뜻 배경이나 상황만으로 볼 때는 <살인의 추억>과 같은 80년대를 다루고 있는 듯 하나, CSI를 언급하거나, 2006년 월드컵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임을, 이 폭력의 구조가 여전히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음을 일깨운다. 




.........................................
 

봉준호 감독은 꽤나 친절하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될 장면까지 세세한 설명과 주석을 덧붙인다. 흥행감독으로써 가끔은 비교 대상이 되지만, 그런 면에서 박찬욱 감독과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이 약간 고약한 이미지의 추상화를 그려놓고 "이 추한 것에도 아름다움이 있지 않니..이 이면의 것들을 보렴..."이라고 말하는 식이라면, 봉준호 감독은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에서 보이는 잘 짜여진 풍경화를 그려내놓고, "자 여기에서 네가 보지 못한 것이 있을거야...그게 뭐냐면 말이지.."라고 말하는 식이랄까. 작은 복선들과 작은 디테일들이 중첩되어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봉 감독의 영화는 전달한다. 그러나 굳이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을 예로 든 것은, 이유가 있다. 그 그림들에서 풍기는, 이상한 미스테리와 괴기(怪氣)들. 그것 또한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몇 가지 미스테리한 질문이 가능하다. 도준은 과연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엄마의 생각대로, 혹은 우리 모두의 생각대로, 정말 '바보'인가. 이 엄마(김혜자)는 도준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를 전적으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죄책감(도준을 그렇게 만들었다는)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러고보면 이 엄마야말로 수상쩍은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도준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돈이 별로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에서 숨겨진 돈들이 나오고, 군에서 최고 잘나가는 변호사를 찾아갈 줄도 알며, 이상한 침술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또 형사 제문(윤제문)이나 아들의 친구 진태(진구)와의 관계도 어딘지모르게 약간 이상한 점이 있어...아니야..그건 단지 김혜자에게서 풍겨나오는 어떤 아우라에 내가 너무 깊숙히 빠져든 탓일꺼야...그래도 그 춤은 좀 이상하잖아...그래...그 춤. 맞아, 그 춤. 이 영화는 시작과 끝이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 시작 부분에 엄마의 우스꽝스럽고도 어딘지모르게 슬퍼보이는 그 춤에서, 엄마가 약재를 썰다가 밖을 내다보고 거기에 아들 도준이 서 있는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시작한다면 마지막에서는, 엄마가 산자락에 서 있는(처음의 그 춤 장면은 아마도 시간상으로는 여기에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장면에서, 다시 약재를 썰고 그 밖을 내다보면 형사가 서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여기에 마지막으로 엄마가 버스에 올라타 침을 찌르고 버스 안의 아주머니들과 한바탕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난다. 이 마지막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엄마는 약한 존재였다. 시작 부분에 어두운 방안에서 약재를 썰며 좁은 문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 그 아들이 차에 치여도, 갑자기 나타난 형사에게 잡혀가도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 작은 프레임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나중에 도준과 구치소에서 대면하는 장면과 겹친다. 역시 사각의 틀 안에서 작은 틈으로만 아들과 대화할 수 있는 엄마의 모습. 그러나 이 엄마의 모습은 달리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누구와도 만나고 어디든 나타나면서 말할 수 없이 거대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아들 도준 대신 그곳에 앉아 있는 다른 아이를 보면서 "엄마가 없어?"라고 묻는 그 순간, 엄마는 다시 작은 사각의 틀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더 작은 틀들로 끊임없이 분열된다. (이를 감독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엄마는 고통스런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부위를 침으로 찌르고, 아주머니들과 섞여서 춤을 춘다. 이로써 엄마는 일종의 공범이 된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야만 하는 사회적 약자인 어느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과 아프게 손을 맞잡은 것이다. 다른 수많은 모성(母性)들 틈에 섞여서. 내 아들 대신 다른 아들을 밀어넣고, 작은 엄마로 돌아가며.

어쩌면 모두가 미쳐 있는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최대한 지키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더 미치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이 엄마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의 세상을 지키려했던 어머니를 기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대신이 말했다. "꼭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폐하께서도 그 우물물을 마시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서두르시지요." 그래서 그 왕은 그 우물물을 마셨고, 잠시 후에는 그도 미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군중들이 기뻐하며 소리쳐 외쳤다. "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우리 왕의 마음이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 오쇼 라즈니쉬, <배꼽> 중에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9-06-0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미리니름이 이 정도면 거의 없는 걸요.
그게 있어도 영화감상엔 아무런 지장이 없지요, 제 경우엔^^

맥거핀 2009-06-02 14:59   좋아요 0 | URL
음..제 생각에도 이 영화는 미리니름이 알고봐도
크게 무리가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목적은 범인찾기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또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파산의 기술記述 - The Description of Bankruptc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미리니름 있지만, 알고 보셔도 괜찮습니다.)





인디스페이스의 월례비행에 다녀왔다. 이달의 영화는 이강현 감독의 <파산의 기술(記述)>. 일종의 사회성 짙은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제목은 <파산의 '기술'>이나 '기술'보다는 '이미지' 또는 '파편들'에 가깝다. 화면에는 여러 이미지들이 떠돈다. 지하철에서 투신하는 사람을 흐릿하게 잡은 CCTV 화면, 대한뉴스, 타이거우즈가 빙그레 웃음짓는 카드회사의 광고, 어느 담벼락에 붙어있는 광고전단들, 어느 시위 현장, 386들의 축제, 세계 경제 포럼....많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들. 그리고 그 중간에 비정규직 노동자 몇몇의 인터뷰와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인터뷰와 파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감독의 나레이션과 조세희의 <난쏘공>, <시간여행>의 몇몇 구절이 끼어든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계속 우리의 분노와 공포를 가라앉힌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는 몇몇 강렬한 장면들을 일부러 피했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채권추심자가 파산한 사람의 집의 물건들을 압류하러 찾아가는 장면들, 혹은 카드회사에서 돈을 빨리 갚으라고 반협박조로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아주 흐릿한 화면으로 제시되거나, 아예 암전된다. 그리고 그나마 음성도 조금 나오다가 말아버린다. 인터뷰 장면들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뷰 중 극적인 장면들, 예를 들어, 한 파산한 아주머니가 카드빚을 갚기위해 한 노래방 도우미 경험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조금 이야기하는 듯 하더니 금새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터뷰도 그렇다. 한 사람의 인터뷰를 차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짜깁기한다. 여기에 중간중간 갑자기 끼어드는 여러 이미지들과 자막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갑자기 제시되는 조세희 소설들의 구절들, 그리고 감독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표현했던 상당히 문학적인 수식을 가진 나레이션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영화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든다.

왜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일까. 아마도, 몰입은 공감과 분노, 또는 공포를 낳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이 파산에 대해 어떤 공포심을 갖거나, 혹은 이 사회가 파산한 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구조를 보고 분노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이 파산의 구조, 이 구조 자체를 조금 더 주목해서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파산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두 눈 크게 뜨고 보라고, 그렇게 보아야만 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파산 그 이후(TV의 사회고발물들이 대체로 다루는 부분인)보다는 '파산 그 자체'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꽤나 친절하지 않다. 파산의 '기술'이라고 해서 그 파산의 구조 자체를 줄줄이 설명하기를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이 파산의 구조는 매우 흐릿하고 상당히 희미하게 보여진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파산의 구조라는 것이 그토록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을 것이다. 희미하고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을 조금씩 끌어들이는 거대한 블랙홀, 그것이 파산의 늪이다. 다만 몇 가지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이 파산의 구조라는 것은 드러나 있는 층과 그 이면의 층이 있다는 것이다. 은행의 대출들과 카드회사의 친절한 광고들, 그리고 그 이후에 조금은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불친절한, 아니 폭력적인 전화목소리와 압류딱지를 붙이는 손길과 파산자들의 눈물과 의료보험 해지와 목소리들에 대한 노이로제가 드러나 있는 층이라면, 그 이면에 드러나 있지 않으나 사실은 훨씬 더 폭력적인 층이 있다.

이 드러나 있지 않은 층은 이 영화에서 '집행자들'이라는 자막과 함께 스치고 지나갔던 모습이다. IMF 이후 시작된 외국자본의 침공과 무너진 국내경제, 서민들의 손에 친절히 쥐어진 '카드'라는 함정 속에 숨은 카드회사를 살찌우던 정책들, 불안정한 고용 속에서 언제라도 이런 파산의 늪에 들어설 수 있는 비정규직들과 이 비정규직을 탄생시킨 사람들과 법률과 정책들. 이는 아마도 이 영화에 나온 3가지의 상징적인 장면들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세계 경제 포럼(혹은 그 비슷한 것)이 열리는 장면. 이 장면의 사운드는, 그들이 하는 소리는 '개소리'에 불과하다고 연상될 정도로, 웅얼웅얼 소음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래도 그들 손에 들린 와인잔은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인터뷰. '회사들보다는 가계에서 훨씬 상환이 잘 되니까요. 그쪽으로 자금이 몰리는 거죠.'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커다란 회사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면, 가끔 구제금융이니 뭐니 하는 얘기도 나오지만, 개인이 무너질 때는 아무도 그들을 '구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파산해가는 사람들과 교차되어 편집된 386들의 모습들, 그들이 축제에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손을 흔드는 장면들. IMF 이후 소위 '진보정권' 10년의 시대에 양산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카드회사들과 제2금융권과 파산자들, 그 함수관계.



..............................................
 

영화가 끝나고, 이송희일 감독의 사회로 이강현 감독과 변성찬 영화평론가, 그리고 파산 관련한 시민단체에서 나오신 분(단체명 및 성함이 기억이 안난다...-_-)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영화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은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그것은 아마도, 故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가 필연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월례비행 상영은 몇 달 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지만, 아무튼 지금 이 시기에 이 영화의 얘기를 한다는 것이 감독은 조금 부담스러운 듯 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파산의 구조 그 이면의 것들, 그리고 그 구조를 만든 것에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소위 '진보정권'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은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이 영화는 2006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故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386세대에 대해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감독은 여러번 '잘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감독 그 자신도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지만, 지금 이 시기에 와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박노자 선생이 쓴 글과 같이,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혹은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확실히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그리고 대통령 노무현이 자꾸 섞여들어가고 있음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대담 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변성찬 영화평론가가 질문한 다음의 부분이다. 영화 중간 파산한 분들의 인터뷰에서 한 아주머니가 돈을 어떻게해서든 꼭 다 갚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아주머니는 돈 몇 푼 때문에 의료보험이 없어 고통에 신음해야했던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의료보험비를 못내도 카드빚은 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야만 할까. 이에 시민단체에서 계신 분이 날카로운 대답을 해줬다. 이들에게 파산한 것은 하나의 '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 즉, 돈을 못갚고 파산한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커다란 죄인처럼 이 사회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파산한 사람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과 폭언은 어느정도 정당화되며, 그들이 마치 신앙간증을 하는 것처럼, TV 앞에 나와 눈물로 돈을 다 갚을 것을 호소하는 사회, 그리고 하루에 2-3시간만 자면서 결국 돈을 다 갚은 것이 미담처럼 다루어지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이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빚을 갚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빚을 갚는 것'이 이들에게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프레임'이 다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이같은 다른 '프레임'이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쥐 - Thir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미리니름 있음)



말 많은 영화 <박쥐>를 이제서야 보았다. 여러 논쟁적이며, 동시에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들과 평론가들의 상찬과 혹평에 둘러싸여 있는, 동시에 일반 관객들의 다양한 의견을 촉발시키던 영화, 그리고 네티즌 평점 0점과 10점을 오락가락하는 회오리의 중심에 있는 영화다. 처음에는 다들 왜 이럴까. 이 영화의 어떤 면이 관객들에게, 혹은 평론가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일까하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그들이 이해가 된다. 이 영화는 한편의 원형이자, 아주 흐릿한 형상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문(碑紋)과도 같은 영화다. 그 비문을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달라질 수 있을 듯하다. 한마디로 모호하다. 그들의 '모호필름'이라는 이름처럼.

물론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있다. 그것은 비문이 새겨진 앞면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새겨지지 않은 뒷부분에도, 혹은 그 비문이 새겨진 재질에도 살짝 주의를 기울여봐야 할 것이라는 점. 그러나 뭐 어찌되었던 간에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는 자신의 몫이며, 자신의 즐거움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몇 줄의 글에 대한 자신의 해석만을 강요하는 누구들처럼, 그 오독(誤讀)을 누군가에게 강변하지만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여기 하나의 오독을 살짝 올려놓는다. 



...............................
 

영화가 시작하고, 영화의 제목이 화면 중앙에 나타난다. 박쥐, Thirst. '박쥐'라는 잘 알려진 제목보다, 이 영화의 영문명인 'thirst'에 더 흥미가 가며, 내내 그 제목이 머릿 속을 맴돈다. 목마름이라, 무엇에 대한 목마름인가. 물론 여기서의 목마름은 여러 다양한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에 대한 갈망, 항상 굶주려하는 뱀파이어의 운명과도 같은 목마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태주(김옥빈)의 다른 세상,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의 목마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상현(송강호)의 신부로서의 거세되고, 억압된 삶,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목마름으로 볼 수도 있다. 하여간, 그것을 무엇이라고 보건, 목마름은 결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어떤 것이 부족한 상태, 어떤 것이 충족되지 않은, 일종의 마이너스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목마름을 푸는 행위, 즉 갈증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플러스가 되고자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마이너스 상태에서 벗어나 0이 되기를 갈망하는 행위이다.

이 갈증을 푸는 행위는 영화에서 수차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일단 뱀파이어가 된 상현이 누군가의 피를 빠는 행위도 그러하고, 상현과 태주가 격렬한 키스를 나누는 행위도 그러하고, 혹은 서로의 발가락을 빨거나, 젖가슴을 탐하는 행위도 그러하다. 물론 섹스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러한 행위들 중에서 영화의 중간, 흥미로우면서도 상징적인 장면이 눈길을 끈다. 죽은 태주를 살리기 위해 그녀에게 상현이 자신의 피를 내어주는 장면. 상현은 태주의 피를 계속 받아 마심으로써 태주를 죽음에 가깝게 인도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줌으로써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살리고 있다. 반대로 태주는 자신의 피를 잃어가며, 점점 상현의 피를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그녀를 더욱 뱀파이어화하여 상현의 피를 계속 갈구하게 만든다. 즉 상현과 태주는 완벽히 돌고돈다. 상현이 플러스가 되는 순간 그녀는 마이너스가 되며, 동시에 0을 향한 그녀의 갈구가 시작된다. 왜 그는(혹 그녀는) 끝없이 결핍되며, 끝없이 목말라하는가.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다. 인간은 세속적인 욕망, 혹은 물질적인 욕망 앞에 한없이 나약하며, 한없이 초라해진다. 이는 늙은 노신부(박인환)의 모습에서도 드러나지 않는가. 평생을 사제로 살아온, 모든 것 앞에서 초연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던 이 사내도, 세상을 보기 위해 뱀파이어의 피를 갈망한다. 즉 불완전한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며,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완전해지려고 한다. 예를들어 뱀파이어가 된 태주가 집을 완전하게 하얗게 칠하려던 것처럼 말이다. 하얀색, 완벽하고 순수함에의 욕망. 그러나 태주의 입에서 토해져 하얀 바닥위에 번져 나가던 붉은 색의 피처럼, 완전하게 흰 것이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완전함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해 질 수 있을까. 글쎄. 만약 인간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불러야하지 않을까. 신, 혹은 사탄, 어쩌면 뱀파이어.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서의 뱀파이어라는 것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가 흥미롭다. 이 영화의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느낌은 영화속 태주의 말마따나 꽤나 '귀엽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그간 다른 영화들에서 그려졌던 창백한 얼굴을 한 나약한 모습의(마늘에도 놀라는), 괴상한 검은 망토를 걸치고 다니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게도 박쥐로 변하고 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강하고 힘센, 마치 슈퍼맨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쿨하고 강한 모습의 뱀파이어로 말이다. 왠지 이 영화 속의 뱀파이어의 모습은 영화 <트와일라잇>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 영화에서도 쿨하고 멋진 뱀파이어의 모습에 별 고민 없이 여주인공은 뱀파이어가 되기를 자청하지 않던가. 영화 속 태주가 뱀파이어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태주는 뱀파이어가 되며, 도리어 예전보다 훨씬 생기를 되찾는다. 영화 처음 병든 남편(신하균) 옆에서 남편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로 보이던 다크써클 태주의 모습과 영화 후반부 태주의 모습은 또 얼마나 다른가.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상현과 태주가 쿨해 보이는 이유는 별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고민을 아예 안한다기 보다는 가장 결정적인 고민을 안한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고민 말이다. (생각대로 송에 맞춰) ♬피 먹고 싶으면,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거 받아 마시면 되고, 그도 없으면 자살하고 싶은 사람거 먹으면 되고, 그것 마저도 다 떨어지면~, 인터넷으로 모집하면 되고~. 생각대로 꿀꺽♬ 아..얼마나 쿨한가. 그래서 그런가. 왠지 그런 상현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던 신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사랑과 질투와 복수와 배신이라는 인간의 오만 감정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인간들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쿨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들을 마음대로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고, 벌레로 변신시키고, 나무로 변신시키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을 가르며 날기도 하고, 엄청난 괴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치 상현처럼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 영화는 사랑과 배신과 복수의 감정이 난무하는 그리스 신화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민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힘과 능력을 소유한 이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신화가 연상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들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이는 왠지 신화의 세계를 생각나게 한다. 신화의 효용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중요한 테마는 인간의 불완전함, 신 앞에서의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신과 대결하려 한, 혹은 신을 모방하려 한 인간들은 모두 예외없이 파멸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완벽해지려 하고, 신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내보이려고, 욕망을 향해 목말라한다. 그러고보니 영화 초반부의 설정이 머리를 스친다. 백인과 아시아인, 특히 그 중에서도 독신 남자만 걸리는 병. 반쪽의 존재로서의 인간. 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브'라는 치료제를 투여하는 방법뿐이다. 이브? 태초에 불완전한 존재였던 아담도, 이브의 존재로 인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익히 잘 알듯이, 뱀에게 유혹당한 이브는 선악과를 아담과 나누어 먹었고,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하아..이야말로 <박쥐>의 이야기가 아닌가.  



..................................
 

그래서 이제야 알겠다. 인간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그리스 신화이건, 창세기이건 신화적 이야기에서 그 뿌리를 두고 흘러나와 수만가지의 갈래가 되어 우리 옆에서 머무른다. 따라서 이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여러 다양한 해석들과, 여러 논란들이 생겨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만 나에게는 아직도 몇 가지 의문점들이 여전히 머리 속에서 맴돈다.

하나는, 태주는 거의 백치에 가까운 남편(신하균)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그녀에게 계속 모욕과 수치를 안겨주는(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강아지처럼 다루는') 라여사(김해숙)는 끝까지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일까. 신화라는 것에 너무 꽂혀버려서 그렇겠지만, 왠지 이 영화 속 라여사는 신화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을 연상케한다. 예언자들이 신탁을 받아 그것을 몸짓과 불가해한 언어로써 전달하는 것처럼, 라여사는 마비된 몸 안에서 눈동자를 통해 모든 것을 전달코자 한다. 그리고 이 예언자들은 신화 속에서 대체로 끝까지 살아남아 그가 예언한 세상의 몰락을 그의 두 눈으로 지켜본다. 마치 라여사가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종교적 논쟁들이다. 이 영화는 카톨릭영화인가, 반카톨릭영화인가. 글쎄. 나로서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나약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가 왜 반카톨릭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불완전하고 나약함으로 죄를 저질렀고, 예수님께서 그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돌아가셨다가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에 대한 부분은 확실히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면 뭔가 다른 느낌이 오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세속적인 질문을 하자면, 이 영화는 걸작인가, 아닌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참 모호하다. 모호한 상징과 모호한 알레고리로서 관객을 혼미에 빠뜨리는 이 영화가 과연 '영화적으로' 걸작인가. 관객에게 어떤 영화보기의 쾌감, 혹은 영화보기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가. 글쎄. 이 영화가 원형적인 텍스트로서 철학적인 만족감을 제공해줄지는 몰라도, 영화적으로 훌륭한 것인가. 과연 '영화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물려 이 영화 <박쥐>는 다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간단하고 쉽게 말해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당신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나요? 영화사의 걸작들이 그러는 것처럼, 다시 한 번 그 장면들을 보고 싶나요?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일단 지금은 아닙니다. 한 두어달 후에 생각해보죠.
....................................
 

사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아주 세속적으로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이한 장면들과 괴이한 이야기로 관객을 불편함에 빠뜨리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 못지않게, 박찬욱 감독들의 영화도 그러한데, 왜 누구의 영화는 한국영화 최저관객 신기록을 향해가고, 누구의 영화는 영화관을 가득 메인 관객들을 어리둥절함에 빠뜨리는가. 김기덕과 박찬욱의 차이는 뭘까. 이것은 단순히 배급력과 홍보의 차이인가. 아니면 영화의 문법적으로, 혹은 내러티브, 혹은 만듦새로서, 이 감독들의 영화에는 무엇인가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진 올해의 새로운 주제. 이 영화를 보러 온 수많은 관객들은 왜 이 영화를 보러 왔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9-05-28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불편한 영화라는 점에서 김감독과 박감독의 영화, 비슷하네요.
그런데도 다르구요. 저도 문득 그게 궁금해지네요.
박쥐, 저도 보고 아직 리뷰 못 쓰고 있어요. 테레즈 라캥,을 읽고
태주와 상현이 라여사를 끔찍히 챙기는 이유를 이해했어요.
감독의 말처럼 그 소설에서 상당한 부분 영감을 얻어 만든 영화더군요.

맥거핀 2009-05-30 00:58   좋아요 0 | URL
음..역시 비밀이 어딘가에 숨어 있군요.
<테레즈 라캥>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사실 원작이 있는경우에, 왠지 자꾸 영화를 영화 자체로 보지 않고
원작의 어떤 부산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서, 잘 안보기는 합니다만..;)
박쥐, 나중에 리뷰 꼭 써주세요.^^
 
허수아비들의 땅 - Land of Scarecrow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미리니름 있음)



그 몇 분의 장면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머지 장면들이 필요한 것 같은 영화들이 있다. 절뚝거리며(그리고는..) 걸어나가던 케빈 스페이시의 뒷모습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머지 장면들이 필요했던 <유주얼 서스펙트> 같은 영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를 들어, <쇼생크 탈출> 같은 이야기는 어떠한가. 더러운 시궁창 속을 기어나와 두 팔을 벌리며 쏟아지는 비를 만끽하는 앤디(팀 로빈스)의 감정이 그토록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결국 그 나머지 장면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얘기할 <허수아비들의 땅>에도 그러한 것이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절대 만나서는 안될 것 같은 이들은 이 마지막에 마주친다. 한 때 남자였으나 지금은 여자로 살고 있는 장지영, 그리고 그가 남자로 살 무렵 필리핀에서 입양했던 로이탄, 그리고 현재 로이탄과 사랑하는 사이이자, 한 때 장지영이 장지석이었을 때, 필리핀에서 결혼하려고 데려왔던 여자 레인. 이들은 마주한다. 보통의 영화라면, 이 장면은 극적인 파토스로 점철된, 즉 사랑과 복수와 애정과 원망과 동정과 안타까움이 어지러이 얽힌 복잡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서사를 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이 장면은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이 장면에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감돌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속이 빈 허수아비와 같다. 이 비어있는 모든 것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암흑의 동공들만 남은 이들. 이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
 

허수아비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풍요와 수확의 상징으로서의 허수아비. 허수아비라는 것이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새나 짐승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람의 형상을 가장하여 수확을 앞둔 들녘에 세워놓는 허수아비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허수아비라는 것은 또 실체가 없는 어떤 것, 속이 비어있는 어떤 것, 껍데기, 죽음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수확이 다 끝난 들판에 기울어지고 망가진 채로 내버려진 허수아비들은 또 얼마나 을씨년스러운가. 그래서 그런 것일까. 넓은 들판에서 이상한 표정의 허수아비 옆에서 죽어가던 공포영화의 주인공 친구들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또 허수아비들은 없었지만, 수확이 끝나 짚단을 세워놓은 밤의 들녘은 <살인의 추억>에서 또 얼마나 공포스럽게 비쳐졌던가.

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서사의 흐름과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빈 들녘의 허수아비들은 완전히 후자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이미지들은 상당히 강조되어있다. 왜냐하면 이 허수아비들은 완전히 오염되고, 망가져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채 검은 때로 얼룩진 이 허수아비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오염된 것은 허수아비들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모든 것들은 오염되어 있다. 머리가 둘 달린 개,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인면어), 오염된 검은 흙을 잔뜩 머금은 조개, 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할아버지 등 상징적인 오염으로 인한 변형의 이미지들은 물론이고, 그 나머지 것들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병들고 오염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주인공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인공들이 가장 오염되고 변형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오염이고 변형이란, 주인공들의 외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장지영의 경우에는 외면적인 변형을 먼저 이야기할 수는 있다. 장지영의 몸은 점점 중성화되어가고 있다. 그는 이것이 어렸을 때 쓰레기 매립장 주변에 살았기 때문에 성호르몬이 영향을 받아 그런 것이라고 알고(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장지영의 진짜 문제는 몸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장 문제는 그 자신 스스로가 여성이 되어야 하는지, 남성이 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 즉 정신적인 어떠한 부분이다. 장지영은 본인이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남자라며, 결혼하기 위해 레인을 필리핀에서 데려오는가 하면, 여성이 되고 싶다고, 임신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혼란스러움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정신적 혼란스러움은 비단 장지영의 문제만은 아니다. 차별대우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로이탄이나, 장지영이 여자인 것을 알고 그에게서 나와 거리를 떠도는 레인 역시, 이러한 정신적인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다고,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변형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신적인 혼란스러움과 변형이 오로지 그들 자신만의 탓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오염된 주변의 모든 것들에 있다. 이는 물리적인 오염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병들어 있는 사회, 병들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오염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오염되고 망가지는 환경은 우리의 정신도 오염시키고 망가뜨린다. 아내를 구하러 필리핀에 간 사람들이 필리핀의 여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이를 명확하게 상기시킨다. 여자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결혼을 해본 적이 있는가.""병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들.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보다 물리적인 가치(몸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계량화하는 이 질문들은 망가진 정신, 병든 마음들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오염된 환경, 병든 사회에서 조금씩 물들며 오염되어 가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 것인가.

그래서 이 마지막은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무리로 느껴진다. 레인이 가져온 돌에는 희망의 싹이 움트지만("이 돌에 꽃이 피면 자신이 희망했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이를 희망적인 마무리로 볼 수 있을까. 이 현실의 지옥도에서(지옥문을 지키는 머리 둘 달린 개,케르베로스가 상징하듯) 이들은 살아나갈 수 있을런지. 마지막에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장지영의 옆에 한 소녀가 다가와 뭐라고 속삭인다. 이 소녀는 혹 장지영의 딸일까. 그녀는 임신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룬 것일까. 그 소녀는 뭐라고 속삭였을까. 이 마지막은 신비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왠지 살짝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는 어디인가.
.....................................
 

다만 두 가지는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몸이 중성화되어 가는, 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고 있는 장지영(장지석)이 그렇게 된 이유가 어떤 환경적인 오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질 때,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이러한 성적소수자들을 다룰 때, 이들이 어떤 오염으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지는 것, 신의 섭리를 벗어난 어떤 비정상적인 것, 혹은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인식될 때에 비롯될 수 있는 위험들이 이 영화에서 충분히 고려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들을 한 번 해보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인데, 이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무속(巫俗)의 이미지들이다. 영화 시작 부분에 제시되는 두 여인의 성황당 나무 앞에서의 무속적인 춤사위도 그렇고, 등장인물들이 어떤 고민에 빠졌을 때 무속인들을 찾아가는 것들이 그렇다. 왜냐하면 무속이라는 것은 과학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오염들이 과학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것임을, 그리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오염이 더욱 증폭되고 있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의 반대되는 지점으로서의 무속의 설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병든 사회, 병든 환경을 보듬는 하나의 치유계로서 무속이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