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 - Chongq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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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힘들다 했다. 회사는 경제불안과 환율상승과 지도력부재로 이미 어려움에 빠진 상태였고, 더구나 그 녀석은 회사에 다소간의 빚도 들어가 있었다. 회사는 미끄러지는 중이었고, 그 녀석 역시 그 미끄럼틀에 올라탄 채였다. 그걸 알아차린 나는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수능날이라는 데서 97년 수능이야기로 옮아갔고, 덕분에 녀석과 나는 필요 이상의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녀석보다 수능 점수가 8.2점이 좋았다는 것에서부터, 그날 날씨가 상당히 추웠다는 것까지. 그리고,지금은 어딘가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 시끄러운 여학생에서부터,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해버린 동기의 이야기까지, 몰라도 좋을, 그러나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녀석에게 필요 이상의 이야기들을 들은 값으로, 그러나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필요 이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값으로 술값을 치렀다. 그리고 우리는 껄끄러운 친구를 불렀다. 아니,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껄끄러운 친구를 불렀다. 나는 녀석이 껄끄러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즐김의 한계는 딱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까지 였다. 그친구가 진짜로 오겠다고 했을 때, 나는 보리의 쓴 맛을 다시 되새기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내가 그 녀석보다 수능 점수가 8.2점이 앞섰다는 것까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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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이야기는 반복된다. <중경>의 쑤이는 성인용품점에 들어가고, <이리>의 태웅 역시 성인용품점에 들어간다. 몇 십년만에 옛 친구를 만난 할아버지의 옆에서 신기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진서, 그 옆으로 할머니들이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부르며 지나가고, 벤치에서 자신이 따귀를 때렸던 창녀에게 지친 손을 내밀던 쑤이 옆으로는, 마을 주민들이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며 지나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동일한 장면들이, 동일한 느낌으로, 동일한 카메라 워킹으로 반복된다. 단지 이 두 이야기는, 즉 <중경>과 <이리>는 같은 주제를 같은 느낌으로 반복해서 찍은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결국은 같은 이야기의 또다른 변주란 말인가.

물론 다른 부분은 있다. 동일한 듯 하지만, 두 이야기는 하나의 대구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서 <중경>의 쑤이는 점점 자신의 몸을 일부러 더럽히는 쪽을, 자신의 몸을 일부러 다른 이에게 내주는 쪽을 택하지만, 그 몸은 계속 다른 이에게 거부 당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 유학생 김광철은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확인하게 하며, 노숙자는 그녀가 겁탈하려고 할 때,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린다. 그리고, 경관 역시 그녀의 몸을 거부하고, 커다란 Doll을 껴안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 대신, 즉 그의 성기 대신에, 그의 성기를 닯은 물건인 총기를 소유한다.  

반대로 <이리>의 진서는 대신에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하나, 그 몸은 계속 유린 당한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진서, 그녀에게 단 하나 정상으로 남아 있는 몸은, 바로 그 정상으로 남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약탈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장률 감독의 다른 영화의 변주와 마찬가지로, 공간의 이야기를 커다랗게 확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제목 <이리>, 그리고 <중경>이 상징하는 것처럼, <이리>의 속성, 그리고 <중경>의 속성을 그냥 그 도시에 살고 있는 개인들에게 커다랗게 투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익히 잘 알고 있겠지만, '이리'는 1977년 폭발사건 이후로 폭발 이후의 어떤 것, 폭발 이후의 허무함과 슬픔과 잿더미를 상징하는 어떤 것으로, 말할 수 있으며, '중경'은 폭발 직전의 어떤 도시, 그리고 우연하게도 이 영화가 촬영된 직후, 대지진으로 알려진 도시로 상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각각의 두 영화의 여자캐릭터, 즉 진서와 쑤이는 폭발 이후의 남겨진 후유증을 상징하는 삶과, 폭발 이전의 끈적하고 불안한 삶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들은 폭발 이전의 삶과 폭발 이후의 삶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캐니한 삶의 또다른 증명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몇몇 부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리>의 태웅과 진서, 그리고 <중경>의 쑤이는 모두 죽으려고 하나, 죽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하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인터내셔널 가'가 흘러나온다. <이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서는 드디어 한국에 들어온 쑤이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그리고 중국어로 '안녕하세요, 나는 진서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경에서 계속 반복되는 그 시구, 창가들을 들어보라. 결국은 세상은 슬프고,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가겠다, 언캐니하게. 그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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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다시 필요 이상의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 친구 역시 회사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시 결혼하지 못한 또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물론 중요하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펀드들과 수수료와 언페어한 게임 때문에 정부를 증오할 것이고, 녀석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미끄럼틀에 올라타 있을 것이고, 친구는 내일 아침에 공항으로 마중 나오라고 했던 비상식적인 분 때문에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캐니한 삶에 친구가 달려와 준 덕분에 한 때나마 우리는 언캐니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다시 캐니한 삶에 올라탈 동력을 얻게 된 것 뿐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술값을 치렀다. 경제력으로 따지면 그 친구가 치러야만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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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 - Let the Right One i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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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그렇지만, 스포일러 있음)


날은 어둡고,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새는 낮게 하늘을 선회하고, 어디선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북구의 어느 밤. 피가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진 채 죽어 있는 남자는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하수구 옆 도랑에 버려져 있다. 목에는 작은 이빨 자국만 남겨진 채.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이제 너무도 많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뱀파이어라는 존재. 그리고 그의 천형과도 같은 운명. 그 잔인하면서도, 스산한, 그러면서도 묘한 에로티시즘을 발산하는 그런 이야기들. 그러나 이런 이야기라면 어떨까? 그 뱀파이어가 어린 소녀이고, 그 옆 집에는 세상 누구와도 쉽게 소통을 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소년이 살고 있다면. 이런 작은 설정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때로는 예상되는 지점에서, 그리고 더 자주는 아주 뜻밖의 지점에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영화의 제목은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영화에서도 설명되지만, 뱀파이어는 그 곳의 누군가가 초대해 주어야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 제목은 그를 설명하고 있는 셈인데, 이 설정은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이 영화는 다른 여러 뱀파이어를 다룬 문학이나 영화들에게서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즉 다른 영화의 클리셰들이 이 영화에서도 계속 반복된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뱀파이어는 햇빛을 보면 안된다거나, 뱀파이어에게 물린 자는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초대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이 다른 영화나 문학에 있었던가?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초대받지 않고 들어간 뱀파이어는 몸의 곳곳에서 피를 토해내게 된다라...

물론 이와 비슷한 것은 다른 이야기들에도 있을 것이다. 뱀파이어는 결국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일수도, 괴물일수도, 혹은 악마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피를 토해내게 된다는 설정이 자못 의미심장한 것은, 뱀파이어는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는 뱀파이어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어떤 의미에서 뱀파이어의 '피'와 같은 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대입해 보면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피와 달리 인간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마음이 눈에 보일 때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내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누군가의 마음을 갈구한다. 뱀파이어가 피를 갈구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던 소년 '오스칼'은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에게 마음을 건넸고,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는 기꺼이 자신의 피를 건넸다.


영화의 마지막, 소년과 소녀는 멀리 길을 떠난다. 해피 엔딩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스산한 풍경이다. 기차 커튼은 열려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흩날리고, 기차 안에는 그들 외에는 어떤 승객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세상의 끝으로. 누구도 그들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는 다른 사람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멀어지려고 하나, 다른 사람과 멀어져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의 가장 슬픈 점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서 그들은 검게 시작된 엔딩 크레딧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변해갈 때, 마지막 붉은 빛이 화면에서 사라졌을 때 즈음에는 또다른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날은 어둡고,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새는 낮게 하늘을 선회하고, 어디선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북구의 어느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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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아내 - My Friend & His W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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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급하게 뛰어 들어간 극장은 텅 비어 있었다. 상영 10분전, 매표소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표를 끊어준다.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관객이 저 혼잔가요?" 그녀의 어색한 웃음은 조금 짙어진다. "아직까지는 그렇네요." 그리고 그 '아직까지는'은 '결국'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신 경험이 있나요? 나는 누군가에 묻고 싶어진다. 어쩌면, 이것이 마법의 시간, Magic Hour 일는지도 모른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시작되었다. 영화가 1시간이 지나갈무렵, 슬슬 깝깝해지고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주위를 둘러보고, 앞뒤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다. 스크린 안의 인물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처럼, 나에게도 구원이 필요하다. 그냥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하고, 나도 뒤척임을 그만두었으면 싶다. 어떤 영화들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감정은 복합적이다. 한편으로는 이 불편함이 빨리 끝났으면, 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졌으면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복잡함으로 지적, 감정적 쾌락을 느끼며, 이 쾌감이 지속되기를 갈망한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답을 얻지 못하는 불편함이다. 영화는 계속 나에게 질문을 하도록 만들며, 간단하고도 쾌락적인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물론, 한편으로 보면 질문으로 만들어진 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쾌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성문이 닫혀 있는 한 그 쾌락은 불편함을 동반한 쾌락이다.

마법의 시간이 끝난 후, 옛 대학 동기들을 만나러 갔다. 친구들이 오지 않아 지하철 역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심심하다. 열심히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일부러 전단지 2개를 받아 읽는다. "MB정권 퇴진, 촛불의 함성으로" 밑에는 용산 유가족이 보낸 편지의 한 내용이 적혀 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는데, 어느 틈에 나타난 친구가 툭 뺐어 든다. "아우, 배고프다. 뭐 보고 있냐? 으이그, 열심히 보기는. 여전하구나. 빨리 밥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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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영화의 줄거리를 다시 쓰는 것은 바이트(byte)의 낭비가 될 것이다.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상영하는 영화이고, 이에 대해 쓴 여러 좋은 글들도 여기저기에 많다. 다만, 잊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둔다. 답을 찾기는 어렵다. 적어도 내 수준에는.

- 이 영화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다른 여러 리뷰들에도 나와 있지만, 이 영화를 세 사람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실수와 관계의 문제로만 읽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이 세 사람이 발을 디디고 있는, 그리고 그 외부의 관객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자본주의의 땅에서 세 사람이 가진 계급의 상징. 그것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드러내놓고 읽힌다. 전직 학생운동가이자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현직 외환딜러인 예준(장현성)이 실수로 노동자 재문(박희순)의 아들 민혁('민중혁명'의 이름을 딴)을 죽게 만드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 정치적 함의가 너무 노골적이라 쓴 웃음이 날 정도다. 변절한 386(장현성)이 깨어 있는 건전한 노동자(박희순)와 민중(홍소희)이 낳은 '민중혁명'을 고사시켰다...그리고 급기야는 민중에게 거짓 선전을 유포해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한다...?

- 그들은 왜 변절하였는가?

글쎄. 변절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 속 예준은 분노에 차서 말한다. "나 원래 이런 놈이라구!" 그들이 원하는 것이 민중혁명이었을까. 글쎄, 이 질문은 너무 깊고, 포괄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는 필요한 질문이고, 해야만 하는 질문임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MB정권 퇴진을 말한다. 그러나 그 이후는 무엇일까. 그들이 원하는 MB정권 이후는 무엇일까.

- 왜 그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가?

영화 속 지숙(홍소희)의 표정은 전반기와 후반기가 아주 다르다. 전반기에는 웃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등 풍부한 표정 변화를 드러내보이던 지숙은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돌아온 후 감정변화를 거의 드러내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건 이후에 감정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갑자기 늘어난 그녀의 재산과 더불어, 이 감정의 숨김은 기이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후반부의 격렬한 전화씬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감정변화를 크게 드러내보이지 않던 예준과 차안에서 지숙이 나누는 대화는 매우 섬뜩해보인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얼굴은 마치 기계적인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무표정하게 반복적으로 마당을 쓰는 재문과 가위질을 하는 지숙, 그리고 엔딩 크레딧 내내 이어지는 가위질 소리는 매우 섬뜩하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왜 제목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인가?

이 영화의 중심점이 재문에게 있음을 고려해본다면, 이 제목은 다분히 이상하다. 이는 예준의 입장에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예준에게 집중해서 보라는 감독의 주문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예준은 상당히 미스터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앞으로 태어나게 될 친구의 아들과 딸 이름을 민혁('민중혁명'에서 따서)과 예니('마르크스'의 부인 이름)라고 지으라고 말하는 전직 학생운동가이자 군대에서조차 자신의 후임에게 편안히 말을 놓자고 말하는 이 남자. 그는 어떻게 성공한 외환딜러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성공한 외환딜러는 왜 아직까지 결혼은 커녕, 변변한 애인조차 없는 것일까. 조루증이라서? 여자 사귀는 데 서툴러서? 서투르다...는 말은 어쩌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예준으로 대표되는 386 세대의 허위의식인지도 모른다.

- 영화의 마지막에 배달된 편지, 누구에게서 온 것일까?

그들이 미용실을 하고 있는 이 곳은 어디일까. 시골의 외딴 구석에 자리잡은 이 곳까지 편지를 보내 올 사람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서랍에 밀어넣는 지숙의 태도로 보아서는 자주 편지를 보내온 사람, 아마도 예준일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하며 그들을 놓아주는 듯이 보였던 예준은 왜 아직도 살아남아서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일까. 그 내용은 무엇일까. 이 마지막은 꽤나 단호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편지를 열어볼 마음이 없으니까. 어떤 달콤한 사탕발림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무표정하게 마당을 쓸고, 가위질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이 마당쓸기와 가위질은 아무 감정이 없는 행위라는 것이 무섭다. 그녀의 뱃속에는 새로운 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기의 이름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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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들과의 술자리는 재밌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그랬다. 영화보기와 비슷했다. 그들과 내가 나누는 직장 이야기와 학교 이야기는 어떤 동심원을 그리며 뱅뱅 돌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어떤 것들을 터뜨리기는 모두들 불안해했다. 다만 그 주위를 맴돌며, 떨어진 부스러기들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끔 촛불집회나 용산참사나 정부의 정책과 같은 민감한 주제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했다. 우리 모두 그 이후에 이야기하게될 어떤 것, 그것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탓이다.

집에 오는 길에 다시 그 지하철 역에 들어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몇 개의 전단지들이 아직 눈에 띄었다. 무리지어 있는 학생들은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 후였다. 이들 중 몇몇은 한 10여년 쯤 후에 자신이 오늘 나눠주었던 전단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은 10년 후 술자리에서 어떤 세상을 말하고,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10년 후에 할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한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프지만,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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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아가씨 - Camellia 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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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게다가 독립 다큐멘터리. 마치 이는, 이 영화의 감독인 박정숙 감독이 다른 인터뷰에서 말한 촬영 대상으로서의 여성 노동자를 연상시킨다. 노동자라는 것의 약한 위치, 게다가 여성.

이런 조건이라면, 사람이 많이 들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겠지만, 그래도 나름 프라임 시간대라는 토요일 오후 7시의 인디스페이스는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개봉 2주차임을 감안하더라도, 조금 심했던 것이, 관객은 나와 여자친구 단 둘 뿐. 덕분에, 여자친구는 혹시 상영안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는 극장 직원이 사람 수를 확인하러 들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여야만 했다.  


나는 대체로 영상보다는 활자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영상보다는 그것을 기록한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대상자에게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영상은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에 머리 속으로 만드는 가상의 세계. 그 가상의 세계는 같은 글을 읽더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씩 다르게 그려진다. 그러나 그것이 영상화가 되어 나타날 때, 그 영상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하나의 방향으로 제한한다. 그래서 어쩌면 소설을 영화화한 많은 작품들이 그 소설을 감명깊게 읽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그러나 다큐멘터리, 더구나 이런 이야기 만큼은 영상이 활자를 압도한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백마디의 말보다 충격적인 한 장의 사진이 사건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이행심 할머니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오지만, 오그라든 손과 발은 다른 모든 말들을 압도한다. 그래서 아마도 다큐멘터리에서 항상 그런 부분들이 이야기될 것이다. 카메라는 대상을 어떻게, 어떤 느낌으로 바라보는가. 영상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격리. 이행심 할머니의 증언대로, 일제시대부터 한센병 환자에 대해 정부 및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각은 치료가 아닌 격리였다. 쓰레기를 치우듯, 더러운 어떤 것을 가둬놓는 것. 치료를 해서 낫게 해주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더러운 것이니 결국은 씨를 말려야 할 존재.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일제 시대부터 그들에게 부과된 힘든 노동들과 차별어린 시선들과 급기야는 아이를 못 낳게 하고 키우지 못하게 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할머니가 아이를 빼앗기고 주저앉아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손가락으로 풀을 쥐어뜯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것을 조금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들 마음 속의 인간성에 대한 격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그러한 시선들과 인식들이 가능해지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센병 환자들을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 보는 시선, 따라서 그들은 영혼도 생각도 없는 존재들이며, 독을 퍼뜨리는 존재일 뿐이다라는 인식. 지나친 말처럼 느껴지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이 나라 어딘가에서는 주위에 장애인 아동들이 다니는 학교만 들어서도 시위가 일어나는데, 이를 지나친 말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시선들과 인식들과 이 영화는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있다. 맞서 싸우는 방식은 간단하다. 이들도 인간임을 다시 일깨우는 것. 할머니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남편과 농담을 하고, 농작물을 다듬고, 차에 올라타고 하는 일상의 수많은 장면들. 그리고 스크린 안에서 보여지지 않은 그들의 한숨과 분노와 눈물들. 이 수많은 장면들은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다시 우리들에게 일깨운다. 그들도 인간이라는 것.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에는 묻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될 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지금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모든 다큐멘터리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은 그렇다. 물론 영화 내용적으로 보자면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제시대 강제 격리와 노동에 대한 일본 법정에의 청구, 그리고 아마도 그 뒤로 이어져야 할 한국 정부에 대한 보상 신청.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의미로 보자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인식의 장벽들이 아직은 높기 때문이다.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적대적이고도 차별적인 시선, 그러한 시선들이 장벽을 이루고 있는 한 이 영화의 싸움은 계속 현재 진행형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다큐멘터리들은 현재 진행형임과 동시에 그것이 관객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행동 변화라고 해서 거창한 것만은 아닐 게다. 작지만 커다란 인식의 변화부터가 그러한 것들일 게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스크린에서 보여지지 않은 것들이 덧붙여질 때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 이 영화를 조만간 작은 인디스페이스에서가 아니라 토요일 저녁 7시 브라운관에서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



행복할 행(幸)자에 마음 심(心)자를 쓰시는 이행심 할머니. 그 이름 그대로 앞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사시게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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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 Waltz with Bash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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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다른 일 때문에 재빨리 극장을 빠져나오면서부터, 줄곧 무엇인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을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그 불편한 기억이 남아있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이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찜찜하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이스라엘 방위대에 의해 저질러진 레바논에서의 팔레스타인 양민들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우슈비츠나 광주나, 난징 혹은 코소보 등에서의 그러한 학살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보거나, 듣게 될 때에 느끼는 감정들, 그의 연장선상들일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인하며, 비극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들. 그러한 사건들을 보면서 가질 수 있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나 타인에 대한 공포, 혹은 자신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형이상학적인 질문만은 아닌 듯 하다. 무엇이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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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보다는 훨씬 더 단순한 데에서 답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는 가해자가 나중에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영상이나 문학으로 펼쳐 보일 때, 그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복잡한 감정의 한 부분일런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소위 '용서를 구하는 방식' 그것에서 비롯되는 불편함.

용서를 구하는 방식에도 물론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첫번째는 용서를 구하는 척 하며, 실질적으로는 본인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주장하는 유형. 그리고 그래서 용서의 탈을 쓰고, 사실은 자기합리화라는 얼굴을 들이미는 유형. '통석의 념' 일명 니뽄스타일. 이것은 사실 용서 구하기라고 보기 어려우니 일단 패쑤. 그럼 이건 어떨까.

가해자가 과거의 사건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당사자들에게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는 방식. 그리고 피해자의 용서의 결단,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손 맞잡기. 그리고 물질적인 보상. 이른바 공식적이고도 방송적인 유형. 짝짝짝.

그러나 이를 한편으로 피해자의 시각에서 보면, 억울하기도 한 것이다. 그동안 겪었던 그 무참한 수많은 일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떠올리기 싫은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저 용서 구하기 라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가해자가 자신의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른바 <밀양>의 억울함.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죽은 자는 무엇으로 돌아온다는 것인가.

그래서 여기에서 가까운 데에 도사리고 있는 이 단어가 '용서'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복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지극히 심플하고도 공평한 가르침.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복수담들과 그 복수담의 후일담들과 그 후일담들의 또다른 복수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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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바시르와 왈츠를> 같은 유형은 어떨까. 그러나 이는 왠지 모호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감독 아리 풀만이 레바논 전쟁에서 겪었던 일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음을 떠올리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아리는 옛 전우들, 그리고 전쟁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 종군 기자 등을 만나며, 그것이 그 때 자신이 가졌던 어떤 임무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가 결국에는 기억을 찾았다는 그런 이야기.

물론 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기억 되찾기가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 남자의 심리학적 임상 사례를 다루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왠지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한 남자가 기억을 잊어버렸어. 근데 왜 그랬는지 알아? 그건 심리적인 외상을 입었기 때문이야. 그런 심리적인 외상은 대체로 극단적인 상황에 빠졌던 사람들이 겪곤 하지. 왜 있잖아.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사람들이 거기에서 나온 후 몇몇 부분들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잃어버린다고 하지. 근데 말이야. 그런 심리적인 외상은 피해자만 입는 것도 아니야. 때로는 가해자가 그런 심리적인 외상을 겪기도 하지, 아 그럼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건가. 뭐 그런 이야기.

물론 이는 부당한 공격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는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제목이 의미하는 바시르와 왈츠를 장면이라던가, 무엇보다도 충격을 주는 마지막 장면들. 그러나 그런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제외하면, 군인들은 해변가에서, 혹은 배 위에서 딩가거리며 놀다가 임무를 받고 적에게 진격하고, 퇴각하고, 폭발하고, 총을 맞고, 총을 쏘고, 떠뜨린다. 아 그게 군인의 임무라고? 명령을 받으면 해야하는 군인의 임무라고? 그래서 그러지 말자고, 이런 영화 만드는 것 아니냐고?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이런 영화 만드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울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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