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그 미 투 헬 - Drag Me to 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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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지의 선택을 강요하던 화장실 귀신 이후로, 이렇게 웃기게 무서운 얘기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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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 Like You Know It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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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자기보다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 재미있다. 그러나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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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 Like You Know It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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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이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말에는 명백하게도 그 뒷부분이 숨어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아는 척을 하세요?) 그래서 이 말은 영화 속 고순(고현정)의 대사와 사실은 같은 의미라고 봐야할 것이다.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 라고 했던 그 대사 말이다.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한다....간단하고 당연한 말 같지만, 어떻게 보면 매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려면, 우리 자신이 어느만큼 아는지를 본인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판단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에서부터, 매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자주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잘 아는 것들이라도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은 대체로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기준에 따르게 된다. 어떤 새로운 것, 혹은 새로운 상황이 나타났을 때, 과거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때 이렇게 말한다. "아! 나, 저거 알아, 저거 본 적 있어." 그것은 간단한 문제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된다. 즉 이는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반복의 형태를 띠게 된다. 과거의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의 비슷한 상황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슷하다'라는 것에 있다. 즉 비슷한 것이지,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상황이란 실험실이 아닌, 실제의 경우에서는 거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체로 이 반복은 차이를 불러 일으킨다. 예전의 어떤 것과 비슷하기는 하나, 같지는 않은 상황. 이 상황에서 과거 행동의 반복은 성공할 때도 있으나, 실패할 때도 많다. 그래서 실패했을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기는 왜 나서.

그래서 이 홍상수 감독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주제,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는 그간 감독의 전작들이 가진 공통의 형식적 특징, '반복과 차이'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 즉 주인공에게 어떤 상황을 반복해서 만나게 하며, 그 반복된 상황에서 주인공이 벌이는 비슷한, 그러나 또 약간은 다른 행동을 살펴보면서, 소위 '인간성'을 탐구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이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는 전작 <극장전>이나 <생활의 발견>과 유사하게, 거의 같은 형태로 반복되는 1, 2부로 나뉘어진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작들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주인공은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사태와 유사한 사람에 직면하며, 비슷한 패턴으로, 그러나 또 동시에 약간은 다른 패턴으로 행동한다. 즉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영화의 형식을 통해 말해진다.

그런데 상당히 재미있었던 것은 이 영화는 왠지 주인공들에게만 이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를 요구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 관객들에게도 '너는 어느 정도나 알고 있지? 사실 니가 아는 것은 별로 없어. 그러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지마.'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영화의 상당수의 사건들이 상당히 묘하게 처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사건인 주인공 구경남(김태우)이 제천에서 후배 부부 부상용(공형진)과 유신(정유미)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만 해도 그러하다. 과연, 구경남은 왜 부상용에게 그렇게 인간 쓰레기 대접을 받으며, 거기서 도망쳐야 했을까. 과연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길래 말이다. 이는 비단 이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또다른 경우, 예를 들어 제천에서 공현희(엄지원)가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며, 구경남에게 화를 내는 장면. 과연 실제로 이 사건은 일어난 것일까. 그렇게 믿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도 의심스럽다. 더구나 공현희 자신도 본인이 술에 매우 취했었다며,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일은 이 영화에서 비일비재하다. 또다른 경우로 구경남은 아침에 여배우가 흥행감독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그것이 구경남이 생각하는 그런 일일까.

이 영화에는 이러한 이른바 '모호한 상황과 모호한 사건들'이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을 구경하는 남자인 구경남은, 아니 우리는, 계속적으로 어떠한 판단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판단은 따라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과연 당신은 어느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다음의 말이 뒤따를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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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몇 마디 한 김에, 한 마디 더 해야겠다. 이번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의 숨겨진 뒷부분인 (왜 아는 척을 하세요?)에 살짝 주목해서 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늘상 그렇듯이 '찌질남'이 등장한다. 물론 '찌질녀'도 나온다. 그러나 대체로 이 '찌질남'들의 포쓰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찌질녀'들은 묻히는 경우가 많다. 이 찌질남들은 왜 이렇게도 찌질해 보이는 걸까. 글쎄. 내 생각에는 그 포인트가 이 '아는 척'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척'에 있다. 사람이 가장 찌질해 보일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아마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무언가 '척'을 하고자 할 때, 그러나 이 '척'이 너무 낮은 수준이어서 그 의도가 빤히 보일 때일 것이다. 이 '척'은 '아는 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센 척, 고상한 척, 깨끗한 척, 배려심 많은 척, 여자 안 밝히는 척, 모르는 척, 안 졸리는 척, 재미있는 척....여기 영화를 통한 몇 개의 경우를 보자.

[경우 1] 센 척

제주에서 선배(유준상)의 학생들과 만난 구경남은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이 때 학생 하나가 다가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구경남은 자유가 어떻고 하는 시답잖은 말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이 학생은 그에게 팔씨름을 청하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한다(센 척).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경남이 양천수에게도 나중에 이 팔씨름을 청하는 것을 그대로 써먹는다는 점이다. 양천수에게 거부당하자, 이번에는 양천수의 성 기능을 운운하는 것으로 그를 당황하게 만들려 한다. 물리적인 힘으로 경쟁하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하자, 그를 다른 방식의 힘으로 제압하려는 시도가 드러나는 재미있는 장면.

[경우 2] 고상한 척 또는 여자 안 밝히는 척

제주에서 만난 구경남의 선배(유준상)는 밤의 술자리에서 여학생과 양천수와의 어떤 불확실한 관계가 일어난(났다고 추측되는) 다음날, 구경남에게 전화로 그 여학생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이는 그 여학생의 평소의 부도덕한 행실을 말하며 선배를 걱정하는 방식이지만, 아마도 이의 내면에는 자신은 왜 그 여학생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구경남은 선배에게 욕을 하는 것으로 대응하지만, 사실 이에도 구경남 역시 그 여학생과 어떤 관계를 가지지 못함에 대한 분노가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구경남이 그 전날 술자리에서 떠나온 방식은 그 전 제천의 술자리에서 흥행감독이 사용한 방식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먼저 잘께.")

[경우 3] 깨끗한 척

제주에서 조씨(하정우)는 구경남과 고순의 관계를 적발한 후, 양천수에게 전화로 울면서 말한다. 더럽습니다, 억울합니다...글쎄. 더러운 건 그렇다치고, 억울하다는 것은 도대체 뭐가 억울하다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는 예술계의 위대한 선배에 대한 애정심의 일부로 보이기도 하나, 아마도 그보다는 조씨의 욕망과 관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조씨는 아마도 고순에 대한 어떤 욕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선배에 대한 존경심 혹은 권위에 짓눌려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고순은 저렇게 처음 만난 남자와도 자는 그런 여자였다니(조씨는 구경남과 고순의 예전의 관계를 모르므로). 지금까지 괜히 참고 살아왔지 않은가...나도 한 번 자달라고 할 것을, 그깟 선배가 뭐라고. 혹 이런 억울함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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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 위의 3 경우 모두 참 찌질하지 않은가. 그러니 실제로 세지도, 고상하지도, 여자를 안 밝히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면서 '척' 하지 말자. 그게 조금이나마 덜 찌질해 보이는 길이다. (왜 '덜' 찌질해 보이는 거냐고? 아예 찌질하지 않는 법은 없냐고? 어차피 세지도, 고상하지도, 여자를 안 밝히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면 가만히 있어도 찌질해 보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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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6-10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정우가 '억울합니다'라고 울먹이는 장면이 너무 웃기더라구요.
하여튼 홍상수 영화 속 그 찌질함과 능청스러움이란 참..ㅎㅎ
비슷비슷한 구조와 인물과 대사로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도
참 신기해요.

맥거핀 2009-06-10 22:53   좋아요 0 | URL
음..그렇죠? 사실 맨날 홍상수는 똑같은 얘기 하고 있는데
볼 때마다 꽤나 빵빵 터져요. 요즘에는 더 그렇구요.
늘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과연 어떤 사람일까 매번 궁금해하고는 하는데,
홍상수는 그 궁금증의 정점에 있어요.
홍상수의 영화는 자기반영적일까요.
하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말하면 안되겠죠.ㅋ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 Terminator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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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의 'You Could Be Mine'을 다시 듣는 것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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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09-06-06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즈의 'You Could Be Mine'을 다시 듣는 것은 즐겁다. 새로운 시작으로 모자라지 않은.
이라고 쓸려고 했는데, 뒤의 부분이 무슨 오류인지 계속 잘린다.
이렇게 해놓고 무슨 40자평을 올리라 하는지..-_-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 Terminator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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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절대 있음)





시작부터 어쩔 수 없이 니름질을 상당히 하면서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화는 미리 내용을 알고 보았을 때의 느낄 수 있는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허나,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다른 재미'를 별로 원하지 않을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되도록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읽지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이 영화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이하 T4로 지칭)'을 비롯한 터미네이터 시리즈에는 묘한 결정론적인 세계관이 있다. 전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살펴보아도 그러하고, 각 편의 이야기를 따로 떼놓고 보아도, 각각의 이야기에는 일종의 결정론적 세계관, 즉 '이미 정해진 미래(혹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식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터미네이터 3'의 경우에도 결국 존 코너는 스카이넷이 일으킨 전쟁을 막지 못한다. 존 코너는 마지막에야 벙커 안에서 깨닫는다. 터미네이터의 임무는 전쟁을 막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보호하는 것 뿐이었다는 점을. 전쟁을 막는 것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이미 불가능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영화 T4는 어떠한가. T4에서는 존 코너(크리스천 베일)가 아니라 마커스(샘 워싱턴)가 마지막에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것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그가 카일 리스를 만나고, 저항군 본부에 찾아가며, 탈출하고, 존 코너를 스카이넷 본부에 오도록 만드는 이 모든 것이 사실 이미 스카이넷의 거대한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는 점, 그는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침투형 로봇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프로그래밍 되어있다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대로 안 된다면, 그건 일종의 프로그래밍 오류인 셈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이의 반대편에 존 코너를 비롯한 저항군 세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존 코너와 저항군 세력은 신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 영화의 존 코너의 마지막 대사가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설명해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운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한다는 것, 이미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영화 중간에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예를 들어 존 코너가 다른 저항군 세력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그렇다. 명령에 불복종하라는 것, 우리가 정해진 명령에만 무조건 따른다면 그것은 기계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느냐고 항변하는 것 말이다. 존 코너의 이 말들은 비정결론적인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것, 그것은 기계다. 인간이 가장 인간적으로 보일 때는 예측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일 것이다. 그것이 한편으로 실수가 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는 거야, 거참 얼마나 인간적이니.

그러나 이 존 코너의 세계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점이 있다. 그것이 내가 묘한 결정론적인 세계관이라고 말한 이유다. 시리즈 전체적으로 보면,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존 코너를 살리려고 하는 인간들과 죽이려고 하는 기계들간의 대결이다. 그래서 기계들은 존 코너를 아예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어머니 새라 코너를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그 아버지가 될 카일 리스를 새라 코너와 만나기 이전에 죽이려고 하며, 어린 존 코너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맞서서 2018년 현재의 존 코너의 가장 큰 임무는 자신을 태어나도록 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머니 새라 코너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버지가 될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내야 한다[각주:1]. 이렇게 보면, 앞의 이야기들은 역전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기계들은 현재의 존 코너가 있는 이 저항군의 세력 자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뒤바꾸어야 하며, 존 코너는 결정되어 있는 과거를 확고히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즉 카일 리스라는 자신의 아버지와 새라 코너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는 이 과거, 결정되어 있는 이 과거가 있어야 결정되어 있는 이 미래의 저항군 세력 및 자신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계들이 결정되어 있는 미래(존 코너가 존재하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에, 인간들이 결정되어 있는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오도록 하기 위해(존 코너를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는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기계들이 미래를 새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에 반해 인간들이 정해진 미래를 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기계와 인간은 뒤섞이고 역전된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이 시리즈의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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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이와 연관지어 재미있던 것은 기계가 인간을 닮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T4의 현재 시점(2018년 시점)에서 가장 발달된 터미네이터인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맡았던)은 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어야 할까. 그것도 근육이 아주 우락부락한,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의 형상으로 말이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T-800의 이전 모델인 T-600은 마치 골격이 전부 드러난(인체해부도에 등장하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영화에 더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이전의 모델들은 더욱 인간답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스카이넷과 기계들이 그렇게 인간을 잡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이용해서 더욱 인간에 가까운 터미네이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또, T4에 등장하는 여러 인간을 공격하는 기계들의 형상을 보면 왠지 이것이 인류의 어떤 진화과정, 혹은 자연세계를 연상시킨다. 마커스 일행을 공격했던 거대한 기계(아마도 '하베스터'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는 과거의 시기에 있었던 거대한 맘모스나 공룡들을 연상시키고, 물에서 인간들을 공격하는 그 기계는 큰 벌레나 피라니아를 연상시킨다. 즉 이것들은 자연의 어떤 세계와 그 형태와 발달 모습이 비슷하게 조응한다. 왜 이것들은 기계이면서도 인간이 존재하는 이 자연세계와 그 형태와 기능을 닮으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는 단지 그 형태와 간단한 기능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스카이넷 본부의 그 구조. 밑에는 총을 든 T-600 감시병들이 포로들을 지키고, 위에는 작전실과 실험실(?) 등이 존재하는 그 구조 말이다. T-800이 생산되는 그 밑의 공장의 검고, 뜨겁고, 약간은 더럽고, 불이 활활 타오르는 이미지와 그 위의 작전실의 깨끗하고 하얗고 샤프한 이미지의 대립. 이것이 보통의 인간 사회의 이미지와 거의 같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연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스카이넷의 본부가 꼭 이렇게 생겨먹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음이 생긴다. 왜 이렇게 그 형태나 기능 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조마저 인간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는 우문(愚問)일지도 모르겠다. 기계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것, 따라서 그 기계가 인간을 닮아가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믿는 인간들이, 한편으로는 신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각주:2].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가 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기계가 인간들을 아무리 닮으려고 애써도, 하나 결코 닮을 수 없는 게 있다는 점 말이다.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예측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커다란 실패가 될지라도,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나아가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기계들이 존 코너를 결국 죽이지 못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영화에서 기계들은 존 코너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게 성공했다. 다만, 그들은 한 가지를 결코 고려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마커스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편으로 궁금해졌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그 인간이 결코 고려할 수 없는 점이란 어떤 걸까. 


 





1. 이와 관련하여 영화 속에서는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 문제를 자세히 다뤄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존 코너가 그 자신이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카일 리스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과거로 보내야 하는 것 말이다.

2.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가 흥미롭다. T-800의 다음 모델인 T-1000이 형상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형상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 그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3편의 T-X가 처음 여자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것도 재미있다. 신은 아마도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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