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강탈자 - 당신의 심장은 나의 것
딘 R. 쿤츠 지음, 김진석 옮김 / 제우미디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스릴러 혹은 추리물적인 성격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읽어보면 이러한 성격 규정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실 일종의 스릴러나 추리물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원하는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않을 것 같다.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 강도는 낮으며, 어떤 명확한 적이나, 혹은 보이지 않는 적들이 주인공을 뒤쫓는 것도 아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갈 때까지 주인공 라이언 페리는 몇 번의 이상스런 심장발작을 겪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어떤 그를 도사린 음모나, 보이지 않는 적들이 존재한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가 여러모로 미약하다. 대신 소설은 주인공 라이언 페리의 심리묘사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조밀한 심리묘사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 그 힘을 발휘한다.

사실 결국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면, 약간은 맥이 빠지는 부분이 있다. 그 결말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맥빠짐은 적어도 우리가 그 결말에만 주목할 때만 그렇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그가 나중에 겪게 되는 일들은 부수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가 후에 겪게 될 여러 일들이 단지 그가 모르는 어떤 일들(혹은 그가 어쩌면 예상했음에도 애써 모르는 척 했던 어떠한 일들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제외하기로 하자)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다. 그러한 결말은 상당히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상당한 부분에서 우스꽝스럽게 보이기조차도 하다.

아마도 그에 대한 해답은 소설 중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제시되는 이 말 “폭력의 가장 근원적인 원뿌리(‘근원적인 원뿌리’? 이상한 번역이다)는 진실에 대한 증오다.” 속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나중에 당해야 했던 일들, 그리고 그가 행한 죄악들이 이 말 안에 있을 것이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 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 합리적으로(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공정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는 적어도 돈의 힘은 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을 또 적절히 이용할 줄 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주위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다. 여자친구인 사만다를 매우 사랑하면서도, 자신에게 계속 심장발작이 일어나고, 점점 자신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자, 그녀를 의심하고, 그녀의 어머니나 주위 사람을 의심한다. 그리고 집안일을 해주는 싱 부부도 철저히 뒷조사를 하고 채용했음에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래서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스꽝스러워지지 않으려면, 주인공 라이언 페리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을 때에만 이 마지막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도달해서야, 즉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서야 진실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진실을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그는 또다른 변명으로 또다른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 진실의 일부란, 이런 것이다. 그가 쌓아온 부가, 그가 사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가 살아나가는 세상에 그 자신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가 결국 보아야 하는 진실은 그가 구축한 세상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 어쩌면 그가 진실을 깨닫고 살아나가는 그 후의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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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사실 이야기의 중간에 약간 모호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간호사 이스메이 클렘을 둘러싼 이야기들이라든가, 사람들의 자살(혹은 안락사)을 도우며, 그 사체를 수집하는 스티브 바게스트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 부분을 둘러싼 어떤 상징성들은 강하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 이야기인가를 생각해보면, 약간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것에 대한 어떤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작가의 철학적인 사유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자극적인 도구로만 이러한 이야기들을 억지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판단은 딘 쿤츠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본 후에 행해야 할 듯하다. 책 소개에 보면, 오컬트적인 요소를 잘 사용하는 작가이나,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요소가 상당 부분 배제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난 소설들이 어떤 이야기들인지 궁금해진다. 구미권에서는 스티븐 킹과 비슷한 명성을 지닌 작가라고 하는데, 이것이 출판사의 어떤 선전문구에 불과한지, 아니면 스티븐 킹이 지닌, 어떤 불가해한 일들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서 어떤 철학적인 상징성을 끌어내는 능력을, 이 작가도 갖추고 있는지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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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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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에게 묻고 싶다. 영화가 어떻게 변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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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0-14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변하지 않는 건 없지요.

맥거핀 2009-10-14 23:26   좋아요 0 | URL
아..물론 그렇지만요, 예전의 허진호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조금은 달라진 영화톤이 살짝 예전 생각들을 나게 하더라구요.ㅎㅎ
 
호우시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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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의 장점은 그의 어떤 디테일함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디테일하다'라는 것은 봉준호 감독이나,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처럼, 영화적인 디테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표현할 마땅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는 '감정의 디테일함', 즉 감정의 미세한 부분을 잘 포착해내는 능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첫사랑을 만났을 때의 아련한 감정, 사랑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할 때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심정, 자꾸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두근거리는 설레임..이런 것들을 어떤 사물이나 상황이나 대사들을 이용하여 잘 형상화하여 우리 눈에 드러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허진호 감독이 지닌 장점들이었다. 그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아있어야만할 아버지를 위하여 비디오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세심하게 적어내려가던 남자의 모습을 잡아내는 것이나, 인구에 회자되었던 <봄날은 간다>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면 먹고 갈래요?"와 같은 대사들, 혹은 <행복>에서의 산길을 걸어오다 슬며시 손을 잡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이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 좋은 장면들이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장면의 감정들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는지 싶다. 즉, 아..나도 언젠가 저런 적이 있었지, 혹은 저런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대강 알 것도 같다..라고 어느 틈에 생각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한편의 이유는 그것이 전체적인 드라마의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진호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쪽에서 무언가(아마도 '사랑'이) 얻어지고 있는 그 순간에, 다른 한쪽에서는 또다른 무엇인가가 상실되고 있는 것을 그려내보이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녀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조그만 발걸음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남자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봄날은 간다>에서 다가가는 한편, 동시에 멀어지려고 하는 여자의 모습과 세상이나 사랑에 대해 알아가면서 어떤 것(순수?)을 잃어버리는 남자의 모습(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장면도 그렇고), <외출>에서 완전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황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그리고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의 집약판이라고 느껴지는 <행복>. 즉 사랑과 그 사랑을 이루어 내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는(그러나 사실 한편으로 보면 허진호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은 이 방해요소에는 왠지 상당히 초연한 듯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 <호우시절>에서도 그렇다)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상실들, 그리고 한편으로 충족되면 충족될수록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사랑 그 자체의 속성을 잘 버무려내어 보여주면서, 신파로 흐르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허진호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고, 그것 자체가 감독의 역량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아마도 한국 감독 중에, 사랑에 대한 어떤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사랑 그 자체의 감정과 진행양상에 대한 보고서를 써내라면 가장 잘 써낼 수 있을 듯한 감독이 허진호 감독이라고나 할까.




근데 왠지 이번 영화 <호우시절>에서 허진호는 상당히 다른 노선을 취하는 듯 하다.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그에 관계된 주변사람들을 상당히 시시콜콜하게 보여주면서, 즉 이야기를 초반부터 만들면서 시작하는 전작들과 달리, 이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에게는 어떤 개인사를 보여주는 별다른 장면을 할애하지 않고, 대뜸 두보초당에서 남녀주인공을 대면시킨다. 청두로 출장차 온 동하(정우성)와 두보초당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메이(고원원). 그리고 그 이후에 두 사람의 어떤 밀고당기기(?)를 통해 관객은 조금씩 몇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된다. 동하의 유학시절, 이미 이들은 만났던 사이라는 것, 서로 간에 어떤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여차저차첫차막차하다보니, 이들은 연인이 되지 못하고, 서로간의 다른 인생길로 접어들어야 했다는 것 등등 말이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것은,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과거의 추억들만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되새겨질 뿐, 정작 중요한 현재의 이야기는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서야 숨겨진 이야기들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그러고는 짧은 시간 속에서 몇 가지 감정의 파고를 급속하게 보여준 후, 다시 중간을 생략해버리고, 마무리를 제시한다.

즉 이 영화 <호우시절>이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추어 볼 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드라마를 처음부터 밀도있게 쌓아나가며, 관객들에게 그 감정선을 서서히 따라오도록 했던 전작들에 비해, 중반을 넘어 갈 때까지 일종의 로맨스코미디 식으로(정확히 말하면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남녀주인공의 일종의 '사랑만들기(혹은 밀고당기기)'를 보여준 후, 정작 드라마는 후반 짧은 시간에 몰아넣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는 초중반의 밝고 싱그러운 분위기에 비추어볼 때 후반부의 급격한 감정의 변화들을 따라잡기가 어려워지는 면이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후반부의 동하 역의 정우성의 연기가 많이 아쉬웠는데, 한편으로는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이렇게 이어지는 몇 개의 장면들로 감정선을 만들어내기에는 많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즉 정우성에게 관객을 그 감정으로 끌고 갈 수 있도록 배정된 공간들이 후반부에 짧게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연기를 설혹 보여줬다고 할지라도, 관객이 그것에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말이다(물론 이 말은 정우성의 연기 '자체'가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후반부의 몇몇 씬들이 - 예를 들어 정우성의 급정색 씬 같은 - 조금은 이해되지 않으며, 혹은 약간은 우스워보인다면, 그것은 감독에게 더 책임을 물을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뭔가 좀 어정쩡해진 감이 있다. 어떤 잘 짜인 드라마라고 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고, 그저 아름다운 풍광들 속에서 남녀주인공이 귀여운 대사들을 내뱉는, 풋풋하고 상큼한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그것도 어색한 감이 있다. 그렇다고, 중국 청두에 대한 관광홍보물이라고 말하거나, 아님, 남녀주인공의 좋은 비주얼을 감상할 그냥 눈만 즐거운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또 이 영화에 대한 너무 가혹한 평가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본 영화의 예고편에서 이미 이 영화에 대한 큰 기대를 버렸기 때문에, 그저 중국 청두의 멋진 풍광이나, 정우성, 고원원 그 자체의 청두라는 공간에 못지 않은 비주얼을 감상하자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의 포스터에 박힌 '허진호 감독 작품'이라는 문구와, 그의 필모그래피들을 살펴보면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의 그 좋은 감성들은 다 어디에 던져두고...허진호 감독도 나이를 먹은 것일까. 그의 필모의 정점은 여전히 <봄날은 간다>다.

(비주얼이 좋은 영화니 사진이나 많이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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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0-14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전 '행복'보다 훨씬 좋았어요.^^
맑고 담백하고 아릿한 감흥이 있더군요.
화면 가득한 연초록 진초록 물빛 색감도 좋았구요.

맥거핀 2009-10-14 23:30   좋아요 0 | URL
그렇죠. 두보초당도 그렇고, 팬더들 나오는 부분도 그렇고, 자전거 타는 장면들도 그렇고..전체적으로 자연의 풍경들이 아름답게 찍힌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살짝 관광홍보물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요.)
저도 개인적으로 맑고 담백한 감성은 느꼈지만, 너무 맑고 깨끗하다고나 할까요..그래도 허진호 영화의 몇몇 인장들은 여전하더군요.
 
내 사랑 내 곁에 - Closer to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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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끼리 사랑하게 만드려면, 감독이 먼저 그 캐릭터들을 충분히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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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내 곁에 - Closer to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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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 21>에 소개된 이 영화의 소개 중 일부분은 이렇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특별한 메시지 또한 담지 않은 영화다. 그렇다고 그가 과거와 완전히 결별했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세련미있게 가공되지 않은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 세상의 순정함에 대한 믿음, 영화적 스타일보다는 배우 연기의 극대화 등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해야 할 것 같다. 박진표 감독의 작품들은 그간 직설적이지만 약간 촌스러운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노년 부부의 사랑이야기, 농촌 총각과 다방 처녀의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 유괴된 아이를 구출하기 위한 부모의 사투...이러한 약간은 신파가 섞일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건 캐릭터에 대한 세심한 묘사와 그 묘사를 완성시켜주는 배우들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번의 이야기 역시 스트레이트하지만, 역시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 루게릭병 환자와 그를 사랑하는 아내의 이야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정도 이야기이고 보면, 신파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이 영화의 요건은 어떻게 하면 신파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영화야말로 캐릭터에 대한 개연성 있는 구축이 어느 정도는 필수적이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래야만 눈물이 흘러도 그것이 관객에게 어떤 개운하지 않은 뒷맛을 남기지 않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박진표 감독의 이번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조금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시작 부분의 몇몇 장면들은 당황스러웠다.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드는 이지수(하지원)와 백종우(김명민)는 몇몇 물음들을 제기할 틈도 없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물음들. 이지수는 백종우를 왜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여기에 박진표 감독은 대답한다. "종우가 지수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이라고 해주잖나. 나는 지수가 거기서 확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랑을 안 해본 사람이겠지.(웃음)- <씨네 21> 인터뷰 중에서" 글쎄. 영화를 본 한 관객의 대답이라면 수긍하겠지만, 이 영화를 직접 만든 입장에서의 대답으로는 불충분(불성실)하다. 아니 단지 이 부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의 영향도 있지만, 이지수 캐릭터는 평면적으로, 지나칠정도로 착하게만 보이는 측면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여성 캐릭터가 감독의 입장에서는 보고 싶었는지 몰라도, 이야기의 측면에서라면 매력적이지 못하다. 더구나 평면적으로 그려진다면 말이다. 

물론 이 이지수라는 사람이 원래 천성 자체가 착하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천사 같은 캐릭터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그 캐릭터를 어느정도 그렇게 '보이도록' 설명하는 장면들이 있어야 한다. 설명 없이 시작하는 초반부부터 이미 짜여진 틀 속에서 이지수 캐릭터는 답답하게 정해진 동선으로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틀 속에서 끝내 헤어나오지 못하고 영화는 마감된다. 다른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것이라면 이지수가 굳이 장례지도사로 나와야 했던 이유 또한 잘 알지 못하겠다. 삶과 죽음과의 대비, 타인을 고이 떠나보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조금씩 죽음에 가까이 가는 백종우가 이지수에게 느껴야하는 감정들...아마도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라면 미안한 말이지만 일본 영화 <굿'바이>에서 훨씬 맛깔스럽게 잘 풀어냈다. 주인공 캐릭터를 아주 잘 성장시키면서 말이다. 성장하고 변화하지 않는 캐릭터가 그려내는 이지수의 장례지도사라는 설정은 단지 어떤 생계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예를 들어 중간에 이지수가 노인들에게 얻어맞는 장면 같은 것들. 이 장면에서도 생계를 꾸려나가려는 억척스러움만 느껴질뿐 그 이상의 '무엇'이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은 말한다.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가 내 영화에선 굉장히 중요한 설정이 된다. (중략)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니까. 안락사나 존엄사에 관한 문제를 애초엔 좀더 하려고 했다. 시나리오에도 있고 찍기도 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방해되는 느낌이 있었다. 편집과정에서 들어낸 것이다. - <씨네 21> 인터뷰 중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몇몇 이야기들이 잘리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두 캐릭터를 조금 더 구체화시키는 좋은 계기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두 캐릭터의 사랑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두 캐릭터의 조금 더 명확한 형상화가 필요했다. 왠지 박진표 감독은 오로지 '사랑'만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웃긴 말이지만, '사랑'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두 캐릭터가 '사랑'을 하는거지. 사랑하는 과정이 힘을 받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왜 서로를 사랑하는가, 무엇을 이겨내고, 혹은 무엇을 극복하고 이들이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낫다. 주구장창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관객들이 그 사랑에 감동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 이렇게 곁가지를 쳐내는 와중에서 잘려 나갔을 몇몇 이야기들이 그래서 아쉽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았을 때 중반 이후로는 오로지 이 영화를 지탱하는 동력이 김명민이 몸으로 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더 그렇다. 6인 병실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들, 이지수의 아버지(강신일)와 관련된 이야기들에 조금 더 살이 붙었으면, 김명민의 점점 쇠약해져가는 몸만을 안타깝게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몇몇 빛나는 장면들도 있지만, 덕분에 조연들 캐릭터도 조금은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병문안 온 친구들에게 침을 뱉는 표독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즉 돌변한다고 느껴지는) 착해지는 젊은 여자 환자(가인)도 그렇거니와, 왠지 숨겨진 많은 이야기를 담아 놓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저 지나가는 조연에 불과한, 장애가 있는 다리로 어렵게 살아가는 이지수의 아버지('지뢰마을'을 언급하는 감독의 인터뷰로 볼 때 아마도 이 다리는 지뢰사고로 인해서일 것이다. 이 부분이 잘 설명되었으면 초반부 마을에 들어가는 장면에 나왔던 시위대의 풍경이나, 법 공부에 집착하는 백종우의 모습이 조금은 더 잘 이해되었을 것이다) 같은 캐릭터들은 그저 고정된 주변의 풍경에 머물고 만다.

아무튼 중반 이후로는 영화가 전체적으로 힘이 떨어진 와중에 김명민의 몸과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만이 영화를 지탱해 나간다. 여러 매체들에서 언급되었지만, 김명민의 몸은 형상 그 자체로서 연기를 하고 있고, 그랬기 때문에 몇몇 가능한 감정들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김명민이 알몸으로 수술대에 눕혀지고 나서 이어지는 "불편한 데 없으시죠?"와 같은 대사들. 그 짧은 장면만으로도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김명민이 만든 '몸으로서의 형상화'의 힘이다. 그 밖에도 기억나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짧은 순간에 깨어난 아내의 모습을 놓치고, 망연자실하게 복도 구석에 쭈그려앉은 남자(임하룡)의 모습이라든가 백종우의 뺨에 붙은 모기씬 같은 것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몇몇 장면들에서 다시 모기의 앵앵거리는 소리로 돌아오는 이 장면은, 여러가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보는 사람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는 것이 결국 영화가 할 일이라는 것과 그 만큼의 무게로 반대쪽에서 다시 저울을 가라앉히는 절망감의 무거움. 그 환상과 잔인함의 대비- 그것을 제공하는 영화라는 것의 이 아름다운 잔인성.



..............................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영화는 몇몇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그중 가장 큰 질문은 '이 영화는 과연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 걸까'다. 삶과 죽음에 대해,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 루게릭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초점이 아니라, 그 속에서의 남녀 주인공이 벌이는 사랑, 그나마도 설명도 제대로 안해주는 사랑이 그 초점이라면 이 영화의 주무대가 굳이 병실일 이유가 있을까. 단지 어쩌면 그 무대가 병실이 되어야 할 이유는 그 곳에서의 사랑이 다른 어떤 사랑보다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에...가 아니었을까. 다큐멘터리 <사랑>에서 우리를 가장 많이 울렸던 이야기가 병실에서의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왠지 이 영화는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더불어, 영화의 어떤 윤리성에 대해서까지 생각을 미치게 한다. 예를 들어 루게릭 환자는 이 영화를 좋아할까, 우리가 우는 사이에 그들도 울었을까, 우리의 울음들의 어떤 부분은 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들.

아니 바보 같은 질문들은 하지 말자. 박진표 감독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했으므로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에 몇 번 '헌신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헌신적이라면, 그 반대편에서는 이기적인 모습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왠지 이 영화에서의 백종우의 모습은 허진호 감독의 영화 <행복>에서의 황정민 캐릭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황정민 캐릭터를 박진표 식대로 해석한 것이 이 백종우의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예전에 <행복>에 대해 별로 안 좋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는데, 왠지 이 영화를 보고 나니 <행복>이 땡긴다. 그 영화가 왠지 상당히 괜찮았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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