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 I Just Didn't D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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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언젠가부터 법을 싫어했다. 글쎄,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본 경험도 없고, 주위의 아는 친척이 소송을 당한 후, 판사와 변호사 간의 결탁으로 부당한 판결을 받았고 그 후에 자살에 이르렀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더더구나 없다. 아무튼 간에 말이다- 법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대학시절 '법학개론' 수업의 최종 기말 레포트 주제는 '법의 필요성에 대해 논하시오' 였는데, 나는 온갖 이상한 논리를 가져다 붙인 끝에 법은 곧 사라져야만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뻔뻔스럽게도 우쭐해져서는 그걸 제출했다. 글쎄. 아마도 다른 걸 쓰기도 어지간히 귀찮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로써 법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한다는 이상 심리도 거기에 들어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아무튼 나의 이 삼류 최후 진술을 들은 판사는 기꺼이 C학점의 판결을 내려주었고, 나는 항소는 포기하고, 그 강사는 고시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변태들 같이 생겼다는 둥, 평생 강사나 해먹고 살으라는 둥의 같은 악담을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것으로 울분을 삼켰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로써 나의 법에 대한 언페어한 태도는 더욱 심해졌는데, 급기야는 고시 공부하는 친구들을 불러내서는 술을 사준다는 핑계로 취조를 행하기도 했다. 너 말야. 왜 멀쩡한 전공 놔두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거야. 니가 법을 좋아해. 뭐. 공정한 판결. 웃기는 소리 하지마. 니가 다른 사람을 단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니가 고시 공부하는 건 딱 하나 이유밖에 없잖아.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싶은거지. 사회에서 대접받으면서. 너 같은 썩어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무슨 다른 사람을 심판한다는 거야. 웃기지마.

물론 이 말들은 공정하지 못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는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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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제목만으로도 이미 명확하게 그 주제를 내비치고 있는 이 영화는 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깨닫지 못할까 저어하는 감독의 친절한 배려로, 시작부터 결론을 내리고 시작한다. 열 사람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벌해서는 안된다는. 그리고 시작에서 예고한대로, 한 선량한 청년이 성추행범으로 몰려 부당한 판결을 받게되기까지의 과정을 환부에 메스를 들이대듯, 세밀하게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미리 말해두지만, 이 영화는 그 과정을 결코 공정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글쎄, 과연 공정함이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제쳐두고라도, 그럼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영화가 공정할 필요가 있는가. 영화는 지극히 편파적인 주제를 편파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나도 그걸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영화 역시 지극히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편파적임을 교묘하게 숨기려고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정말 불공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판단으로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벌하게 되는 것과, 죄 있는 자에게 속아 넘어가 죄있는 자를 벌하지 않는 것 중의 어떤 것이 더 큰 문제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그 문제까지 여기에 가져오고 싶지는 않다. 사법제도의 폐해? 영화의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영화는 줄곧 하나의 관점을 지지하고 있는데, 그 관점이 마치 공정한 관점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일견 주인공 텟페이를 관찰하는 시점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 텟페이가 사건에 휘말릴 때, 그리고 경찰에 붙잡힐 때, 그리고 유치장과 법원을 오갈 때, 카메라는 한 걸음 물러서서 이 모든 사건을 조용히 바라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카메라다. 카메라는 실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텟페이가 실제 사건에 휘말리는 그 순간. 실제라면, 우리는 절대 그 순간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카메라는 전철에 따라들어가 기어이 그 장면을 잡아낸다. 이는 판사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우리가 실제의 이 사건의 판사라면 무죄를 내릴 수 있을까.

게다가 주인공 텟페이는 카세 료가 맡고 있다. 유약하고 선량한 청년의 이미지가 다시 이 영화에서 비슷하게 활용된다. 여기에 판사의 교체 전 후의 극명한 대비, 목격자가 나타나는 극적인 시점, 착하고 힘없는 주인공 텟페이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더해지며 이 영화는 선량한 청년을 범죄자로 만드는 비극물이 된다. 즉 텟페이라는 착하고 성실하며, 아무 죄없는 청년을 법이라는 국가 시스템이 판사와 국선변호사와 경찰이라는 하수인을 이용하여 무너뜨리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야기인가.

그러나 이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야기를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보여준다. 어쩌면 여기에 가장 기이한 점이 있다. 극적이고도 화려하게 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제의 사건을 다루는 양 이를 보여주는 태도.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이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다큐멘터리인 척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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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런 얘기일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 말이다. 우리 삶에도. 그것이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저 상대방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으려 드는 악마같은 판사, 그냥 죄를 인정하는 것이 낫다고 심드렁하게 얘기하는 국선변호인, 어떻게든 죄를 인정하게 만들려는 폭력적인 경찰. 이들은 모두 과장된 캐릭터이지만, 이 시스템 속에 이 과장된 캐릭터들은 실제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는다. 당신이 판사라면 무죄를 내려줄 것인가. 글쎄. 나라면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그것이 실제로 만들어진 이 사회의 시스템이기에.

그래서 아마도 나는 옛날의 친구에게 다시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다. 너는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아마도 그건 거짓일거야. 너는 그저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정보처리기계일 뿐이지. 그것도 불확실한 판단을 내리는.

물론 이것은 또 하나의 불공정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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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물론 나는 감독에게 낚인 것이고, 그냥 파닥거리면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왠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입 안에 물린 갈고리에서 쓴 맛의 피가 솟아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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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2-11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범죄자를 만들지 말라."는 말은 요즘 우리나라 법을 보면 전혀 통용이 안되는 것 같더군요.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형사사건의 유죄판결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기도 하고요. 재판이라는 보여주기 쑈 이면에서는 회유와 협박도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인정해..그럼 형량을 조금 감면해줄께...이런 회유죠..

맥거핀 2009-02-11 19:40   좋아요 0 | URL
네.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성 관계 사건들 경우에는 양형이 일반적으로 너무 낮아서 문제가 되기도 하구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하기는 인간이 인간을 벌하는 이상은 계속 말이 안나올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르지요.

Mephistopheles 2009-02-12 09:25   좋아요 0 | URL
성범죄자들의 천국이죠 우리나라는. 비교적 형량도 적고 재범방지를 위한 고강도의 규제도 없다 보니...전자발찌가 있으나마나 더군요. 아무래도 사법부쪽이 굉장히 보수적인 집단이라는 것이 이런 부분에서 약간이나 보이더군요. 일방적인 성피해자인 여성에게도 '여자 행실이 나쁘서'란 꽤 황당한 단서가 앞에 붙기도 하는 나라고요.
 
이스턴 프라미스 - Eastern Promis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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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경고: 스포일러 만땅)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멍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안 맞아 영화관에서 핫도그를 하나 허겁지겁 먹고 들어갔는데, 안 먹느니만 못한 거였다. 영화관에서 파는 음식들은 겉보기에 비해 대체로 터무니없는 맛과 가격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날씨가 추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위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간에 아무튼 멍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무엇이 이처럼 멍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일까. 

1. 기독교와 예수의 탄생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건 쉬운 선택이 될 것이다. 이미 <필름 2.0>에서 논증한대로, 이 영화는 기독교의 여러 알레고리들을 느슨하게, 때로는 옥죄이며 펼쳐 보인다. 그 중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물론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 뭐 일단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라는 제목 부터가 박해받는 유대인 백성들을 동방에서 온 메시아가 구원할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니콜라이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문신들, 그건 왠지 카타콤의 여러 표지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일견 이러한 연결은 안이하고 도식적이며 조금은 기이해 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며 들어온 여자가 낳는 아기가 예수의 상징이라고 보았을 때,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영화 속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동정녀로서 이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악의 축 '세미온'이다. 이것은 왠지 이 도식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다.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악의 중심'이라면, 이 아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 몸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몸이 먼저였다. 그 몸을 가진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보다는 몸 자체의 부피와 무게와 질감으로 항상 우리를 압박해왔다. 이제 이 영화에서, 그 몸은 다시 한 번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이 되었다. 러시아 감옥에서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문신으로 온 몸에 남긴다. 그리고 결국 그 문신들에는 또다른 문신들이 새겨진다. 깊게 패인 칼자국들이.

이것이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크로넨버그의 전작들에서 유래된 바도 크지만, 한편으로 이것이 앞으로의 우리 인간들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면 불온한 상상인걸까. 우리들 역시 많은 문신들을 온 몸에 지니고 있다. 그 문신들은 잉크로 명징하게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대신 명징한 로고들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는다. 그리고 그것을 잃을까봐 잠자리에서도 전전긍긍한다. 이건 어쩌면 크로넨버그의 미래에 대한 묵시록인지도 모른다.
 

3. 세계의 충돌 

명확한 두 세계가 충돌한다. 안나의 세계와 세미온의 세계.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조금만 가면 닿는 가까운 세계. 그리고 안나는 누르지말아야 할 초인종을 누르고 또다른 세계의 문을 연다. 여기에서 세계의 충돌이 일어난다. 물론 세계의 충돌은 여기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다 못해 아스날과 첼시의 세계에서도 충돌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경기장을 나오며 목이 터져라 각자의 응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친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로.

그리고 니콜라이의 안에서도 충돌은 일어난다. 그는 이 운명을 감내해야 할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양 쪽 모두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 쪽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쪽 세계를 부정해야 한다. 그 부정(否定)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그 부정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가 조직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정부의 개라고, 어머니는 창녀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가 원하는 대로 한 쪽 세계를 차지했을 때, 그는 반대쪽 세계로 나올 수 있을까. 아니 그 상태에서는 반대쪽 세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는데.


4. 세계의 혼합 

그래서 바로 여기 니콜라이에서부터 세계는 서서히 혼합되기 시작된다. 아니 그 혼합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분을 영화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처음, 살인이 일어나는 공간은 누구나가 쉽게 드나드는 이발소이다. 평범하고도 선한 세계의 어디에나 있는 이 공간은 그러니까, 악이 진두지휘되는 공간인 셈이다. 여기에서 머리를 깎아주는 무딘 칼은 목으로 파고드는 날이 선 칼이 된다. 동시에 구슬픈 선율이 울려퍼지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서로 식사하는 러시아 식당은 모든 악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 된다. 즉 굳이 안나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열어젖히지 않았어도 또다른 안나가 아마도 쉽게 문을 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세계의 혼합의 중심에 니콜라이가 있다. 그가 악의 세계의 우두머리에 올라섰을 때, 우리는 그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선의 중심이자 악의 중심인 세계.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5. 영국 

영화 내내 보여지는 영국의 거리는 차갑고, 젖어 있고, 음울하다.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영국 특유의 날씨는 잘 어우우려져 영화 내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영화 <프롬 헬>이나 <스위니 토드>에서 보는 그러한 거리들의 연장선상에서 위의 영화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습한 지옥도의 풍경이라고 하면 과장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체가 내던져지는 그 곳은 지옥의 입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넘실대는 물결은 마치 일렁이는 불꽃같고 말이다. 오 주여.

아기를 낳고 죽어간 그 여자는 러시아를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녀가 일기에 쓴 대로 모두가 죽어 있던,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던 땅속의 땅, 러시아를 떠나 따뜻하고 새로운 기회의 땅, 새로운 신천지를 꿈꾸며. 아마도 그녀는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끌려온 이곳 영국은 또다른 차갑고 축축한 지옥이다. 안타깝다. 차갑고 어두운 곳을 지나 새롭게 오게 된 곳이 그만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차갑고 어두운 곳이라니.

니콜라이는 안나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아기를 키우는 것이 낫다고. 러시아보다는 이곳에서 당신이 키우는 것이 낫다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따스한 햇빛 속에서 아이는 안나에게 안긴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 이어지는 장면은 기이하고 무섭다. 니콜라이는 세미온이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고,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린다. 아버지는 이미 죽기 전부터 죽어 있었다고(탄광에서),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어 있었다고.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는 왠지 불길한 요한계시록의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곳 역시 선의 중심이자 동시에 악의 중심인 세계. 가까운 곳에 또다른 이발소와 러시아 식당들이 있는 세계. 이 세계에서 아기는 어디로 가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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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칠드런 - Goodbye Childre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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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그들의 마지막은 주인공 줄리앙의 입을 통해 몇 마디의 나레이션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관객들의 한숨과 함께, 영화는 끝나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선율이 울리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음악은 가정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던 슈베르트의 생애와 겹쳐져 관객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마침내 엔딩크레딧도 끝나고 관객들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무거움과 한숨. 이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무기력함의 공유

영화는 두 소년의 우정을 담담한 어조로 시종일관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영화적인 수식이나 그럴듯한 사건은 없다. 두 소년은 보통의 소년들이 그러하듯이 한 두 가지의 비밀을 공유하며 친해지다가도, 금새 자존심을 내세우며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 말다툼은 주먹다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며 이 이야기가 1944년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보네가 유태인 소년이라는 것을 관객들이 알게 되면, 관객은 다가올 파국을 예감하게 된다. 두 소년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세계의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이 위험은 엔딩이 다가오기 전까지 조금씩 이 두 소년 곁으로 다가오지만, 이 파국은 이 두 소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결말이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주인공 보네도 알고 있다. 보네는 담담하게 짐을 싸며 줄리앙에게 말한다. "언젠가는 잡힐 줄 알았어."

이 마지막을 어쩔 수 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은 줄리앙과 보네 뿐만이 아니다. 스크린 밖의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관객은 줄리앙과 함께 보네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이 때부터 관객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저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중반부 관객은 한 차례의 위기의 순간을 경험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된 줄리앙과 줄리앙의 엄마와 형, 그리고 보네. 여기에 일단의 군인들이 나타나 신분증을 검사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유태인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는 곳. 이들은 한 유태인 노신사를 발견하고 그를 다그치기 시작하고 관객은 점점 불안해진다. 다음 차례가 보네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관객은 무기력하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그들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 다행히 한 독일 군인의 객기로 사태는 무사히 종결되지만, 관객은 서서히 그들의 무기력함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식당 안의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무기력함은 영화의 엔딩에 정점에 이른다. 줄지어 선 소년들은 잊을 수 없는 한 순간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은 오롯이 관객들에게도 전이된다. 무기력함과 공포. 그들에게는 친구를 구하고 싶은 심정과 살아남고 싶다는 심정이 교차하지만, 그 순간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가는 친구의 손을 한 번 잡아주거나, "잘 가세요. 신부님."을 외치는 정도. 이 경험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관객은 순간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그 소년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일 뿐이다. 스크린 밖의 관객의 지독한 무기력감.  

이 무기력함은 필연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죽은 자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연결된다.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그래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책임이 있다는 그런 생각. 그래서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었고, 우리 나라의 많은 작가들 역시 "광주 이후에 문학이 가능한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이 무기력함과 죄책감은 자기합리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많은 사람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유지함으로써 유태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방조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이 '침묵의 카르텔'과 자신들의 이성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유태인들과 자신들을 애써 분리시키고, 유태인들이 탐욕스럽고, 자신들밖에 모르는 존재들이라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다.


무기력함의 이후는

결국 비밀을 공유하면서 시작된 주인공들과 관객들의 공유 의식은 엔딩 장면에서의 무기력함의 공유로 이어진다. 이 순간을 어쩌면 영화라는 공적체험이 관객 개개인의 사적 체험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고보니 <굿바이 칠드런 An Revoir Les Enfants>라는 제목이 심상치 않다. 이 말은 떠나는 신부가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간 마지막 말임과 동시에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스크린 속의 아이들에게 겨우 던져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독한 무기력의 체험 이후는, 즉 엔딩크레딧 이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두 갈래의 길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해하는 것. 그러나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그 때의 경험을 이야기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다고. 인간의 의도와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즉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이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거기에 줄리앙의 꿈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줄리앙은 오줌싸개이다. 번번이 꿈을 꾸다가 침대보를 더럽히곤 한다. 그가 보네에게 들려준 이유는 간단했다. 꿈 속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데, 꿈에서 깨어나보면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꿈과 현실의 연결. 꿈에서의 행동으로부터 이어지는 현실에의 결과. 이것을 관객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린과 현실의 연결. 스크린에서 벌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들이 관객 각자의 현실에서도 여러 다른 양상으로 일어난다. 그것을 이해하려들지 말고 스스로가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으로 옮길 것. 그것이 스크린 속의 소년들과 스크린 밖의 관객들을 무기력함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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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질링 - Changelin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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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아주 가득함)


글쎄. 무엇을 얘기해야 할까?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맥주를 한 캔 마시고, 비스듬히 누워 핸드볼 경기를 보았다. 그러나 경기를 보면서도 줄곧 머리 속으로는 영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모호한 상징이나 느슨한 알레고리, 혹은 꼬인 이야기로 머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명확하며, 주인공들이 부딪히는 지점도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도중에 조금씩 관객을 끌어당겨 결국 일정 지점에 이르러 모호한 어떤 방으로 관객을 내몰고는 살짝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면 관객은 깜깜한 방 안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멍한 머리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본다. 이것은 기이하다. 그저 맥주 맛이 살짝 쓰게 느껴질 정도로 기이하다.

영화가 2시간 정도에 이르렀을 때, 영화는 마무리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당한 형사는 영구 정직당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고, 살인마는 사형을 언도받고,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되었던 안젤리나 졸리는 이제 재판정에 앉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라면, 여기서 끝내야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 그러나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아닌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기어이 나머지 장면들을 채워넣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는 많은 관객들의 희망을 무너뜨린다. 졸리는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사형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이 한 명은 살아 돌아와 부모 품에 안기고, 졸리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영화를 끝낸다. 이것은 나를 멍하게 만들고, 질문을 하게 한다. 왜 이 장면들이 필요한 것인가? 모든 관객들은 이미 그 살인마가 사형을 당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굳이 그 장면을 꼼꼼하게 관객들에게 지켜보도록 한다. 그리고는 월터의 용감함을 이야기하며 졸리의 '희망'을 이끌어내고 영화를 끝낸다. 이제서야 희망이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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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부분에 졸리가 아들 월터에게 하는 말이 있다. "네가 먼저 싸움을 시작하지는 말아라. 그러나 시작된 싸움은 네가 끝내라." 그리고 이 말은 영화 중반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글쎄. 왠지 몇 년 전에 이스트우드로부터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늙은 관장 프랭크는 매기에게 여러 번 반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싸움은 피할 것.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었으면 네 자신을 보호할 것.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싸움은 결국 자신이 끝내지 못하는 싸움이다. 매기는 결국 이 원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을 끝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졸리는 싸움을 끝냈는가. 이 질문은 아마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졸리는 자신을 보호하였는가.

물론 여기에는 하나의 요소를 고려하여야 한다. 그 싸움은 공정한 싸움인가. 사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는 자신을 보호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매기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순간은 불공정하게 진행된 순간이었다. 공이 울리고 매기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에 상대는 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매기는 쓰러졌다. 한편 졸리는 어떤가. 졸리 역시 매우 불공정한 위치에 서 있다. 졸리는 하나의 도시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야 한다. 그래서 졸리 역시 쓰러진다. 정신병원에 갖히고, 강제로 약을 먹어야 하고, 급기야는 침대 위에서 치료를 가장한 전기 고문을 당해야 하는 위치에까지 온다. 그렇다면 졸리 역시 이 거대한 불공정한 싸움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불공정한 싸움에서 개인은 보호될 수 없는 것일까.

이 극적인 순간에서 졸리는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승리한다. 그러나 이 승리는 어쩐지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찾아온다. 졸리를 구해내는 것은 한 장의 신문이다. 그 순간 우연히도 살인마가 잡혔고, 살인마의 공범이 월터를 알아보았고, 결국 졸리의 말이 입증되는 것이다. 즉 이 승리는 졸리 내부에서 온 승리가 아니라, 외부에서 가져다 준 승리다. 우연으로 빚어진 승리. 결국 이 승리로 부당한 형사는 정직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면서 시스템이 살짝 무너지지만, 이 승리로 졸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이 승리가 덧없음은 어쩌면 이 장면으로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승리한 졸리에게 변호사(목사였나?)가 찾아와 월터가 죽었으니 그만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졸리는 아직 월터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며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그는 아마도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글쎄.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처음에도 보았다. 졸리는 데려온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형사는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라고 일축했다. 결국 그녀가 승리한 이후에도 월터의 생사는 여전히 모호하며,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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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마도 이 두 장면이 필요할 것이다. 졸리는 살인마의 전보를 받고 살인마를 찾아가 그에게 진실을 말하라며 다그친다. 이 죽음 며칠 전의 졸리와의 대면 순간에도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던 살인마는 교수대가 눈앞에 보이고서야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삶을 구걸한다. 그리고 졸리는 강인하고 단호한 태도로 그것을 지켜본다. 옆에 서 있는 부인의 손까지 잡아주며 말이다. 이는 부당한 시스템의 공격 속에서 우연으로 가져온 승리와는 다르다. 졸리는 기꺼이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최후를 지켜본다. 그녀는 이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년 후 극적으로 살아난 한 소년은 죽음과 삶의 교차하는 순간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월터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리고 졸리는 그제서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계속 끝까지 아들을 찾아다녔다는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가 자막으로 올라가며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두 장면은 영화가 그 이전에 끝났으면 가져오지 못했을 새로운 희망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 희망은 불공정한 시스템에 맞서서 얻은 승리로 주어진 게 아니다. 즉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떠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로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승리와 패배가 모호한 이 세계에 맞서는 개인의 자유의지이며, 옆 부인의 손을 잡아주는 졸리의 손이며, 되돌아와 철조망에서 소년의 발을 꺼내준 월터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공화당 지지자이면서도 이라크 전쟁은 반대하는, '건전한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스트우드는 아직 '매그넘 44'를 내려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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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발키리 - Valkyri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포일러 있음)



브라이언 싱어는 솔직한 감독이다. 이번주 <씨네 21>에 실린 인터뷰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말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전기영화가 아니라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거다." 역사에 기록된 실패한 작전. 이 작전을 영화화하고자 했을 때 브라이언 싱어는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역사의 재현인가, 역사의 제거인가. 감독이 선택한 건 후자였고, 그 후자의 극대화였다.

글쎄. 이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히틀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슈타펜버그 대령과 그의 동지들. 영화에 묘사된 대로,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 역사적 범죄자인 히틀러를 죽이고, 정의를 되살리려다 희생당한 영웅들인 걸까. 어쩌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들이 거사를 실행했던 1944년 7월, 독일은 침몰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었다. 독일은 구멍이 뚫린 배였고, 침몰이 서서히 가까이 오고 있다고 배에 탄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슈타펜버그와 그의 동지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전범(戰犯)이 되어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그 전에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냥해야 할 운명이었다. 어쩌면 그 전에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히틀러를 죽이고 나치 정부를 전복한 후 연합군과 휴전을 맺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급해한다. 연합군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연합군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전쟁을 끝낸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그들은 어쩌면 한편으로 침몰하는 배에서 빨리 탈출하려고 하는 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러한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니 이러한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은 비망록을 적고 있다. 반(反) 히틀러의 결연한 의지. 이 의지에는 어떤 인간적인 고뇌나 의심은 묻어나지 않는다. 나치당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가하였던 슈타펜버그 대령은 왜 반 나치 전선에 서게 된 것일까. 영화는 이를 묻지 않는다. 대령은 이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그보다는 어떤 더 큰 대의를 위한 것임을 비망록에 적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이는 왠지 슈타펜버그 대령이 비망록을 적으며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브라이언 싱어도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의 재현이 아니라고. 아마도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인 것 같다. 영리한 브라이언 싱어는 이 영화를 성공시키려면 역사를 제거하고, 그 작전을 마치 하나의 허구적 사실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는 실패한 작전이니까. 여기서의 역사의 재현이란 결국은 실패한 작전임을 잘 알고 있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의 실패의 체험을 고스란히 바라보게 하는 무기력의 경험이니까. 그보다는 서스펜스의 극대화라는 자신의 장기를 드러내보이는 것이 브라이언 싱어에게는 좋은 선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예의 그 장기를 드러내보였고, 관객들은 결말을 알면서도 혹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마지막까지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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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브라이언 싱어가 역사를 제거하기 위하여 쓴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의 전략은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화(化)하는 것이다. 발키리 작전의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슈타펜버그 대령은 시종일관 확신하고 있다. 이 확신은 그를 조금씩 인간이 아닌 신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의 신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장엄하고 영웅적인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혹 그것으로 모자랄까봐 감독은 엔딩 자막으로 이 신화에 토핑을 올린다. 신화화함으로써 역사를 제거하기. 어쩌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라면 이를 필연적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두 가지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는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 <슈퍼맨 리턴즈>와 같은 전작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를 극복하고 승리를 성취해내는 영웅들의 모습. 그것은 슈타펜버그 대령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전쟁에서 한 쪽 눈과 한 쪽 팔과 세 개의 손가락을 잃은 전쟁영웅. 그러나 그가 이를 극복하고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이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는 인물은 톰 크루즈이다. 확신에 찬 미소를 가지고 있는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 신화화된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배우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작전명인 '발키리'는 의미심장하다. 북유럽 신화에서 용감한 전사자의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발키리(Valkyrie). 그것은 명백하게도 슈타펜버그 대령의 상징이다. 결국 슈타펜버그는 작전의 실패와 함께 그와 그의 동지들의 영혼을 고스란히 천계로 데려갔으니까. 그러나 뭐가 어찌되었던 간에 '발키리'도 결국은 신화 속의 인물이다. 즉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의 하나로 봐주기를 계속적으로 항변하는 중이다.

그런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신화화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 이 신화화야말로 나치즘의 중요한 거점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나치주의자 혹은 파시스트들은 신화가 가진 힘을 알고 있었다. 파시즘(나치즘)이 신화의 세계를 개척했던것은 부분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신화의 세계를 비합리적인 요소로 가득한 불가해한 영역으로 보아 단념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신화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나치즘 혹은 파시즘은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이미지와 상징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신화화된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선 한 남자의 행동을 그리는 데에 신화화의 전략을 사용한다- 나의 석연치 않음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고보니 화면가득 줄지어 나부끼던 나치 깃발이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브라이언 싱어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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