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슬러 - The Wrest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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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 머틀리 크루(Motley Crue), 본조비(Bon Jovi), 데프 레파드(Def Leppard)를 좋아했던 적이 있는가. 이 물음에 '그래'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보고 슬플 것이다. 그리고 '그래'라고 대답한 당신은 영화 속 랜디(미키 루크)와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의 대화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건즈 앤 로지스의 음악을 들으며) 이런 게 음악이라구. 너바나(Nirvana)가 망쳐버렸지. 우울하기나 하구...그랬다. 그들의 매력은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술이나 마시고 놀자고, 즐겁게 파티나 하고 섹스나 하자고, 내가 왕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난 너바나는 반항하는 10대가 되어 출구가 없는 미래에 절망했고, 라디오헤드(Radiohead)는 자기는 바보고, 패배자라고 자학했다. 80년대와 90년대는 그렇게 달랐다. 그리고 또 90년대 전반과 90년대 후반은 그렇게 달랐다. 나는 어중간했다. 파티하는 건즈 앤 로지스를 좋아하며 중학교에 입학했고, 반항하는 너바나를 들으며 고교 시절을 보냈으며, 자학하는 라디오헤드를 흥얼거리며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을 다 어느 정도는 좋아했다.

랜디 램이 말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프로레슬링의 시대는 건즈 앤 로지스와 머틀리 크루의 시대였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어느정도는 그러시지만, 전쟁물과 격투기와 스포츠를 좋아하신다. 아직도 생각이 난다. 토요일 낮에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머나먼 정글>을 보며 점심을 먹고, 잠시 기다렸다가 오후 3시쯤 AFKN으로 채널을 돌려 프로레슬링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가 열심히 보셨고, 나는 아이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 조금은 억지로 보았다. 그것을 보지 않으면 월요일에 학교에 가서 아이들과의 대화에 낄수가 없었다. 그들은 워리어와 헐크호간 중에 누가 더 멋진 피니쉬 블로를 가지고 있는지 말싸움을 벌였고, 이번 로얄럼블에서는 누가 우승할지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러다 말싸움이 격렬해지면 그 중에 누군가는 직접 기술을 시연해보였고, 기술을 당한 누군가는 아픔보다는 쪽팔림에 이를 갈며, 새로운 기술을 연마해올 것을 다짐하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도 지치면, 건즈 앤 로지스의 슬래쉬와 머틀리 크루의 믹 마스 중 누가 더 나은 기타리스트인지를 놓고 이야기를 했고, 본조비 따위는 듣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몰래 집에서 혼자 본조비를 들었다.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 랜디 램의 링 등장음악이 건즈 앤 로지스의 'Sweet child O' Mine'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좋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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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 앤 로지스와 너바나의 거리만큼이나 프로레슬링과 K-1, 프라이드 등의 격투기의 세계는 멀다. 나는 그 둘의 차이는 그들의 이름에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레슬러의 이름들을 먼저 보자. 워리어, 헐크호간, 달러맨, 홍키통크맨, 빅보스맨, 브렛하트, 그리고 이 영화의 랜디 램과 아야톨라. 그들의 이름은 대체로 만들어진 가명이자, 하나의 캐릭터이다. 워리어는 전사답게 무서운 가면을 쓰고 등장하고, 헐크호간은 헐크처럼 티셔츠를 찢어발기고, 달러맨은 비서를 데리고 달러를 흩뿌리면서 등장한다. 그들의 그 캐릭터는 강렬한 판타지를 구축한다. 그들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 대결하고, 구축된 캐릭터는 그 안에서 거대한 힘을 발휘하고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기꺼이 그 만들어진 판타지를 즐기며 선인이 악인을 벌하기를 원한다. 캐릭터와 환영의 힘이다.

그래서 프로레슬러에게 기술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랜디 램은 바쁘다. 그는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 약으로 근육을 만들어야 하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해야 하고, 기계에 들어가 태닝을 해야한다. 그래서 트레일러에서 사는 퇴물 레슬러일뿐인 그는 '로빈 람진스키'라는 본명으로 불리우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다. 프로레슬러에게 본명은 수치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랜디 램이거나 또는 워리어거나 헐크호간이어야 했다. 링에서 '텍사스에서 온 로빈 람진스키'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것은 달러맨이나 언더테이커의 희생양이 되는 신출내기 무명레슬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전설의 랜디 램이거나 '중동의 짐승' 아야톨라이어야 했다. 그저 나이든 중고차 판매상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K-1이나 프라이드의 스타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싸운다. 그들은 효도르이고, 최홍만이고, 레미 본야스키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별명이 붙을 수는 있다. 크로캅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는 만들어진 캐릭터와는 다르다. 크로캅이라고 해서 경찰복을 입고 곤봉을 돌리며 링에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판타지와 캐릭터와는 반대 지점에 있다. 그들의 싸움은 만들어진 판타지이기를 한사코 거부한다[각주:2].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혹 그들의 이 차이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차이를 말해준다면 지나친 말일까. 만들어진 판타지 안에서 그것을 고양(高揚)함으로써 적과 우리를 갈라놓고 그안에 숨어있도록 했던 20세기 말, 그리고 명확한 적은 사라지고, 깨어진 판타지 안에서 그저 실물로써 적의 잔상들과 마주해야 했던 21세기 초의 차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허술하고 초라한 진짜보다 잘 구축된 가짜가 더 좋은 것으로 대접받았던[각주:3] 80년대에서, (90년대의 혼돈을 거쳐) 모든 것이 리얼이어야 했던, 심지어는 TV 쇼마저도 리얼이어야 하는 21세기의 반영으로써의 효도르와 최홍만. 그 차이는 너무나도 먼 것이다. 작은 TV로 하는 옛날 닌텐도 레슬링 오락과 1080i 화면으로 즐기는 '콜오브듀티 4' 만큼이나 먼 것이다[각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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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램은 링을 떠나려고 한다. 그에게 링을 내려오는 것은 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무서운 현실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휘장을 걷고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는 않지만, 마트에서 샐러드 파는 일을 하러 들어가며 휘장을 걷을 때에는 약간은 주저한다[각주:5]. 그는 가능하다면 이 곳에 들어서고 싶지 않다. 설혹 링에서 철심이 몸에 박힐지라도 그에게는 그곳이 낫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의 몸 상태는 더 이상 링에 서기를 그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캐시디와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도 그는 마트라는 사각의 링에 들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 현실의 링은 허용되지 않는다. 덜어내면 더 달라고 하고, 더 담아주면 덜어내라고 말하는 깐깐한 아주머니도 잘 버텨내던 그는 누군가가 그 자신, 랜디 램을 알아보자 더 이상 그곳에서 버텨내질 못한다.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그가 유일하게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방식은 이제는 허물어진 예전의 판타지 스타로서임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제는 허물어진 예전의 판타지로만 기억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 슬픈 세상에 엿먹이는 유일한 방법은 그 판타지에 복종하는 것. 그래서 언젠가 링에서 심장이 터져나가는 영웅이 되는 것. 예전에 바스라졌다고 생각한 그 판타지가 언젠가는 영원한 신화가 되는 것. 바로 램 잼을 날리는 것이다.

뭐 더 이상 덧붙일 말은 없다. 다만 이 말 한 마디만은 해두고 싶다. 나에게는 미키 루크를 보는 것보다 마리사 토메이를 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나는 <나인 하프 위크>의 미키 루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온리 유>의 마리사 토메이는 기억한다. 그래서 어찌 되었거나, 마지막에 랜디와 캐시디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잘 되었을까. 나는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 희망이란 캐시디가 랜디의 경기를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경기장을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캐시디가 랜디의 손님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각주:6]. 랜디나 캐시디에게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모욕은 마치 '손님처럼' 구는 것. 그것을 캐시디가 거부했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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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건즈 앤 로지스의 앨범을 들었다. MP3에 담아두고 거의 듣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손이 갔다. 그러나 왜 이렇게 들리는 것일까. 이렇게 비장한 건즈 앤 로지스라니. 그리고 뭐? chinese democracy? 아..정말 싫다. 그저 술이나 먹고 마약이나 하며 파티나 하자고 해야하는데, 이렇게 정중하고 비감한 건즈 앤 로지스라니.

그래서 영화를 본 후 워리어나 헐크호간, 달러맨과 홍키통크맨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하는지 궁금해졌지만, 찾지 않기로 했다. 보고 싶지 않다. 그게 무엇이든, 영화보다 훨씬 더 슬플 것이기 때문에.







1. 예전 AFKN에서 본 많은 게임들은 이미 양 선수의 소개에서부터 누가 이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헐크호간과 본명 레슬러 누구, 그리고 워리어와 본명 레슬러 누구의 게임의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모든 관객들과 시청자들은 이미 그것을 다 알고 있다. 그들은 '누가' 이길지 궁금해서 그것을 보지 않는다. 그 '승리' 자체가 보고 싶은 것이며, 그 승리를 같이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볼 뿐이다.

2. 어쩌면 그래서 예전의 프로레슬러들은 그렇게 링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떠벌이기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선인, 혹은 악인임을 그들은 계속 관객들에게 증명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K-1 같은 데에서는 이런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마이크를 잡는 효도르의 모습이 있었던가. 그리고 한편으로 이와 관련해 가끔 격투기 게시판에 올라오는 우스꽝스러운 질문들이 흥미롭다. '효도르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와 같은 질문들. 그렇다. 그들에게는 그저 효도르는 리얼일 뿐이다. 반면 그 당시의 우리들에게는 이는 금기시되는, 혹은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헐크호간과 호랑이를 비교하다니. 헐크호간은 호랑이를 찢어발길거야.

3. 여기서 조금은 동떨어진 얘기지만, 어쩌면 이는 <씨네 21>에서 제기했던 잘 구축된 환영의 농촌이 강조된 <워낭소리>와 배우들이 다큐멘터리처럼 연기를 하는 <24 시티>의 차이. 그리고 그 둘 중 어디에 손을 들어줄 것인가의 문제.

4. 랜디 램은 동네 꼬마에게 같이 닌텐도 게임을 하자고 한다. 요즘 나오는 그 '닌텐도'가 아니라 작은 화면에서 큰 도트로 움직이는 그 옛날 닌텐도 말이다. 꼬마는 지겨워하며 '콜오브듀티4'가 훨씬 재미있다고 말하지만, 랜디 램은 발음조차 잘 못한다. 랜디 램이 콜오브듀티(Call of Duty) 4를 잘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마도 별 재미를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그에게 판타지가 없어진, 진짜와 거의 같은 전쟁은 힘겹고 무서운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요즘에 모든 게임들은 진짜가 되기를 원한다. '콜오브듀티'마저도 지겨워지면 그들은 뭐를 하려고 할까. 진짜 전쟁을 하자고 할까.

5.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의식적으로 이 두 장면을 같은 각도로 찍는다. 그리고 영악하게도 마트로 들어가는 랜디 램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귀에 링의 환호성이 환청으로 들리도록 한다.

6. 랜디의 직업은 프로레슬러, 캐시디의 직업은 스트리퍼. 둘다 이른바 '몸으로 말하는 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항상 랜디가 손님이었다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이 관계는 역전된다는 점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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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시티 - 24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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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지 2주 가까이 된 영화인데, 별로 할 말이 없어서 계속 쓸까말까 망설이다가 이제서야 적고 있다. 무엇인가를 적어 놓지 않으면 잃어버릴 것 같다. 그래,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잃어버릴 것 같다. 잃는다는 것은 기억 속에서 무엇인가를 잊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다. 내게 있어 잃어버리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내용은 잊어도 되지만, 그 영화로 인해 느끼게 된 어떤 것은 잃어버리면 안될 듯 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할 말이 없다기 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너무나도 잘 구축한 두 편의 글을 보았기 때문에 뭔가를 더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씨네 21>에 실린 두 편의 글. 허문영 님의 글과 정한석 님의 글. 허문영 님의 글은 전문배우가 마치 다큐멘터리인 양 비전문배우임을 가장하고 구술하는 이 영화의 방식에 대해, 영화에서 말해진 구술 이상의 것, 구술 이외의 어떤 것, 프레임의 바깥에 있을 어떤 것을 주목해서 볼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정한석 님은 이 영화의 운동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지한 듯 보이지만, 프레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운동성에 대해, 그리고 스크린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작은 지점들에 대해,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을 넘나드는 이 영화의 움직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때로는 잘 구축된 글은 영화만큼 아름답다. 영화에 대해 논하고 있는 글에서 영화를 빼고도 남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어쩌면 그것은 그 영화를 보는 화자의 태도이다. 그 태도가 그 글에 절실히 묘사될 때, 그 글은 영화가 무엇이든지 간에 의미를 획득한다. 뭐 읽고 판단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허문영 님의 글
정한석 님의 글

며칠이 지났는데도, 영화의 음악들이 머리를 떠돈다. 이 영화는 음악영화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 음악들이 머리에 계속 맴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의 음악들을 모아놓은 앨범이 있다면 구해서 계속 듣고 싶다. 영화 수입사의 홈페이지에도 가보았더니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질문도 있다. 그러나 영화사 측의 대답은 기대를 무너뜨린다. 국내 OST 발매 계획도 없고, 중국에도 발매 계획은 없다고. 어쩌면 이 영화의 OST를 찾는 것이 조금 우스운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음악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original'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인민들 속에서 흘러나오는 구전의 음악.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기원이 존재하지 않는, 혹 기원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전해내려오는 도중 어딘가에서 달라진 그런 음악들일 것이다. 그 음악들은 모두 멜로디도 다르고 느낌도 약간은 다르지만, 대체로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다. 삶은 비루하고, 주위의 여러 난관들은 많지만, 나는, 혹은 그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그들은) 때로는 여러 어려움을 겪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자신을 지키면서 꿋꿋하게 살아나겠다는 것. 그러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도 오겠지요..하는 구슬프고 안타깝지만 낙관적인 노래. 어쩌면 이 스크린을 보면서 그 음악들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공간, 지금 무너져내리고 있는 공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그 음악이 무엇인가 달랐던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명동 스폰지하우스 1관 2층에서 봤다. 2층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옛날 일들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교 때 한 달에 한 번 꼴로 학교 문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을 열심히 챙겨보곤 했다. 그럴 때,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항상 2층에 올라가서 영화를 보았다. 항상 아슬아슬 늦게 가서 자리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2층의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을 수도 있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2층은 뭔가 특이한 느낌이 있다. 나른하고 지루하고 소외된 느낌. 나혼자 외따로 떨어져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랬다. 2층에 있으면 1층에 있는 관객들과 분리되, 마치 나 혼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2층의 관객들은 대체로 잠을 청하러 올라온 친구들이 많다. 대부분 잠든 와중에 혼자 영화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뭔가 나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유치하게도 그 때는 그런 것을 멋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거기서 참 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록물고기>와 그 커다란 버드나무는 기억에 남는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그 영화를 보는 도중 "이 2층은 언제 없어질까. 그리고 나는 그 이후에 이를 무엇으로 기억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사라져가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24 시티를 만들기 위해 허물어지는 공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던 420 팩토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안 첸과 같은 전문배우들이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마치 실제로 자신들이 겪은 일처럼 이야기를 하는, 즉 가짜의 구술을 하는 이 특이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이 영화가 진행되는 것도 아마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즉 지아장커는 이를 각각 인물들의 분절된 이야기로 보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보다는 이 공간에 대해 증언하는 증언자로서의 의미, 이 공간에 대해 구술하는 단순한 구술자로서의 의미에 더 큰 뜻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이 2층의 의미를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영화에 구술된 진짜처럼 구축된 가짜의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2층에서 옛날의 기억 속의 2층을 불러와 되새김질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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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지아장커가 사라져가는 중국에 대해 추억하고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다. 사라져가는 공간,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제거되는 과거의 기억들에 대해 지아장커는 이렇게 추억하고, 이렇게 애도를 보내고, 이렇게 안타까워한다. 어쩌면 누구나가 그렇지 않느냐고 말할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장소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누구가 과거의 공간을 추모하고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어떤 공간을 기억하기 보다는 그 공간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그 공간에 같이 있었던 사람만을 기억한다. 그것은 과거의 사람만 존재한다면 고스란히 리플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공간은 그것이 사라져 버리면 더 이상 기억에 남지 않는다. 공간을 위주로 기억하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어떤 것을 제거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섭다. 내가 옛날의 문화관을 찾아간다고 해도 그것이 더 이상 2층이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기이하게 생각한 장면은 영화 중간에 곳곳이 삽입되어 있는 사람들의 정지장면이다. 마치 스틸 사진을 찍는 듯, 모여 서서 카메라를 조용히 응시하는 정지의 몇 초의 순간들. 아마도 이를 가지고 2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것이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지는 하지만, 자꾸 이는 다큐멘터리가 아님을 관객들에게 일깨워주는 것. 즉 조용히 응시하는 정지의 순간을 삽입하는 것으로, 이것이 외부의 카메라로 구축된 극영화의 세계임을 관객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카메라를 사진을 찍는 것처럼 몇 초간 조용히 들여다 보겠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이는 위에도 말한 것처럼 결국 스틸 사진이라는 것이다. 곧 허물어질 공간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우리가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그 공간을 기억하기 위함에 있다. 사진으로 고정시켜두지 않으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그 공간들을 영원히 남겨두기 위해서 우리는 사진을 찍고 기록하고, 기억에 남긴다. 예를 들어 싸이월드에 올라와 있는 많은 사진들이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영화 안에서의 스틸 사진 씬은 사라져가는 공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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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너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영화는 묻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이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과거에 대해 기억하고 애도한다고 해서 미래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 과거의 기억에서 얻는 것으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으로 삼자는 것일테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24 시티>임을 기억해야 한다. <420 팩토리>가 아니라 말이다. 이제 곧 사라져갈 420 팩토리를 기억에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24 시티에서 또다른 기억을 만들어나가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허물어져 가는 420 팩토리,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지는 24 시티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허물어질 24 시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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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트 - Dou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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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난 생각이 많은 편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의심이 많다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것과 의심이 많은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냐고? 글쎄, 어쩌면 생각과 의심이란 것은 거의 동의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해도, '의심을 하고 있는 내 존재'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의 사상(생각)의 출발은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그의 생각의 출발을 의심에서 시작한 것처럼, 이 '의심'이라는 것은 실로 오래된 듯 하다. 그 기원을 찾기 어려운 인류의 오래된 저작인 <성경>에도 '믿음'의 반대로서 '의심'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거론된다. 믿음을 보여주는 자, 그 반대편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가까이에서 그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그의 존재를, 그의 말을 의심한다. 예를 들어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그렇지 않은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나는 종교적 믿음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이 의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어쩌면 인간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생겨난 것이 의심이 아닌지...의심하는 중이다.

뭐 아무튼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의심이 많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보면, 내내 머리가 아프다. 내가 말하는 '이런 영화'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영화. 이와 반대로, 어떤 영화들은 영화보기가 안락하다. 나의 감정을 대입시킬 수 있는 주인공이 존재하는 영화. 대체로 착한 누군가가 존재하는 영화. 이런 영화들을 보면, 나는 그저 그 주인공에게 내 감정을 그대로 의지하면 된다. 뚜렷한 선과 악 속에서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선과 함께, 나도 그 승리에 밥숟가락 하나 올리고 같이 가는 것이다. 물론 가끔 안락함이 지나쳐 꿈의 세계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위에도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없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진실은,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 간명하게 원하는 선과 악은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정말 그 소년에게 '어떤 행위'를 했을까. 그 이전에 플린 신부가 있던 성당에서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가 생각한 것은 단지 오해에 불과했을까. 그녀는 왜 플린 신부에게 계속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일까[각주:1]. 알로이시스 수녀가 말하는 '자신이 저질렀던 부도덕한 일'이라는 것은 어떤 일일까. 그녀는 결혼을 했었던 적이 있는데, 왜 수녀가 되었을까[각주:2]. 과연 그 소년은 정말 동성애적 성향이 있을까....단지 의심만 끊임없이 늘어날 뿐이다. 우리의 이 의심을 끊어줄 '확실한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 아니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나는, 단지 의심할 뿐이다. 영화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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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영화의 목적은 '우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신부가 충돌하는 것은 그들이 '의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충돌하는 지점은 그들의 '확신'에 있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어떤 아동들에게 '어떤 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반면, 플린 신부는 그의 행동은 자비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알로이시스 수녀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두 개의 확신은 영화 내내 충돌하며,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의심의 최종의 단계가 확신이다. 인간이 의심하다가 어떤 근거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의심은 확신으로 돌아선다. 그러나 이 확신이라는 것이 반드시 근거를 동반하는 것인가 라고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알로이시스 수녀도 어떤 결정적 근거 없이 플린 신부를 몰아붙일 뿐이다. 제시되는 증거들은 빈약하고, 어느 한 구석이 무너져 있다[각주:3]. 그래서 그녀의 이 확신은 영화 내내 불어오는 세찬 바람과 맞선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 세찬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다가, 때로는 부러지기도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의심이 필요하다. 과연 나의 확신은 어떤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것인가. 과연 우리들이 그렇게 믿을 만한 무엇인가가 확실히 있는 것인가. 이 '건전한 의심[각주:4]'은 해도해도 모자르다. 우리는 계속 물어야 한다. 의심하는 나 자신에 이르를 때까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마지막이 이 영화에는 있다. 바로 알로이시스 수녀가 자신의 의심이 맞는 것인지 자신을 의심한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이 마지막 장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확신에서 의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람이 멎었다. 이 마지막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는 처음으로 '인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미사 시간에 조는 학생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식사 시간에 덜익은 고기를 내뱉는 제임스 수녀를 말없이 쳐다보던, 마치 인간의 감정이 거세된 하나의 기계처럼 보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인간답게 보였다. 이는 명백한 사실 하나를 떠오르게 한다. 의심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것이란 점. 의심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다운 것이라는 점.

그랬다. 기계는 YES와 NO의 분기에서 어느 길이 더 빠를지 의심하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은 남부순환도로를 탈지, 올림픽대로를 탈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계산된 더 빠른 길로 갈 뿐이다. 만약 그 순간에 의심하는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계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느 길로 갈지 고민하는 내비게이션을 본다면, 그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무서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의심하라, 의심하는 나 자신까지 의심하라. 인간이고 싶다면.

 

 


1. 그녀가 플린 신부를 의심하는 것은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가 사건을 이야기하기 훨씬 전부터다. 플린 신부가 다른 소년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을 본 이후부터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게 어떤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그 기원은 무엇일까.

2. 그런데, 결혼했던 사람도 수녀가 될 수 있나요? 잘 몰라서...

3. 그래서 제임스 수녀는 단지 의심에 머물러 있다. 그녀는 알로이시스 수녀처럼 확신하지 못한다. 단지 의심할 뿐이다.

4. <씨네 21> 694호 '전영객잔'에서 정한석 기자님은 이를 '회의(懷疑)'라고 말했다. 아마도 '회의'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적확한 표현인 듯 하다. 가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해 놓은 이런 글을 보면 맥이 풀린다(방금 전에 봤다). 그래도 나는 쓰련다. 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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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 Revolutionary Roa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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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오래전 얘기다. 대학 2학년 때의 어느 술자리. 갑자기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말이야. 어딘가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매사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러는 것처럼, 정곡을 찔린 사람은 화를 내기 마련이다. 나는 아마도,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 너나 잘 하시지 같은 뻔한 대사를 내뱉었던 것 같다. 20살의 인간들이란, 돌려서 말하는 법을 잘 모른다. 더구나 술에 취한 상태였으니, 그저 내뱉고 지르고 만다. 그리고 그 날의 술자리는 어그러졌고, 나와 그 친구의 관계는 그날 이후로 조금 서먹해졌다.

그리고 나는 조금 놀랐다. 그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에 대해서. 글쎄, 내가 놀란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그 친구가 나의 진심을 몰라줬기 때문에? 그 친구가 나를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것 보다도, 나의 놀라움은 이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내 연기가 그렇게나 어설프다니.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저 친구도 이 연기의 어설픔을 알아차렸을 정도였으니,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랬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그 방법을 잘 몰랐다. 단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는 좋은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지만, 20살의 인간이다. 실체가 없는 모방은 한계가 있고, 그 모방마저도 어설픈 모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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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 꽤나 오래전 일이 생각난 것은 전적으로 이 영화 때문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처음부터 나는 프랭크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이 두 사람이 뭔가 '연극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두 남녀가 차를 옆에 두고 다투는 장면에서도 합(合)이 딱딱 맞는다고나 할까. 그 적절한 대사들과 과장된 손동작과 고함들. 그리고 이 연극적인 연기는 그 이후에도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이 연기들은 그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프랭크와 에이프릴 부부의 옆집 부부 혹은, 이들에게 집을 소개한 여자도 이 예의 연극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이들의 말투나 행동은 어딘지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이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은 무슨 이유때문인가[각주:1].

이의 해답은 곧 밝혀진다. 이들이 사는 세상은 하나의 매트릭스(Matrix)였던 것. 에이프릴이 이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하나의 매트릭스임을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 갑자기 깨달았을 때, 이들의 부자연스러움은 설명이 된다. 즉 이들의 부자연스러움은 정교하지 않은 소스코드였던 것. 혹은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와 같은 것[각주:2]. 물론 나는 에이프릴이 진짜 매트릭스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녀가 이 세계를 매트릭스와 비슷한 어떤 것, 즉 실체가 없고, 가짜만 존재하는 세계, 위선과 위악과 공(空)만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각주:3]. 그리고 에이프릴은 이 매트릭스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에이프릴의 말에 진정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없다. 일견 에이프릴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던 프랭크도 이미 매트릭스에 길들여져 있는 것. 프랭크가 이것이 매트릭스임을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가벼운 마음에 장난처럼 내뱉었던 기획안이 사장에게 엄청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이한 세계. 그것을 가까이에서 보고도 이것이 매트릭스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단지 그는 그 매트릭스를 선택한 것 뿐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와 무리들을 배신한 남자가 스미스 요원을 만나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내뱉는 대사처럼. "나는 이게 가짜임을 잘 알고 있지. 그러나 맛있단 말이야. 너무나도." 에이프릴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집을 소개한 여자가 데려온 '미친 남자' 뿐이다. 어찌보면 역설적이지만, 어찌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내가 거리로 나가 '이 세상은 매트릭스, 가짜로 만들어진 세계'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어떨까. 대부분은 피할 것이고, 친절한 몇몇은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줄 것이다. "여기 미친 사람 있어요!"

그래서 이 마지막은 숨이 막히게 한다. 에이프릴의 이 선택이. 매트릭스에 길들여지지 못한 그녀의 선택이[각주:4]. 그러나 이 선택만 있었을까. 매트릭스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죽거나, 미치거나, 길들여지거나의 답지만 있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청기를 끄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적당히 골라서 보고 듣는 것. 물론 나이가 들고 보청기를 낀 연후에만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전까지는? 그저 계속 어설픈 연기를 선보이는 것 밖에. 완벽한 연기보다는 어설픈 연기가 낫다고 생각하면서. 물론 완벽한 연기를 할 능력도 안되지만.

 

p.s.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두 번째 만남. 이 둘이 처음에는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둘은 세트로 있는 것이 나아 보인다. 디카프리오의 불안한 에너지를 잡아주는 케이트 윈슬렛의 묵직한 덩치. 뭐 아무튼 이제는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읽어야 할 때.




1. 그러고보면 이 영화의 배우들은 고난도의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것.

2. "나는 로봇이 점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친밀도가 증가하다가 어떤 계곡에 도달하는 것을 관찰했다. 나는 이런 관계를 '섬뜩함의 계곡'이라 부른다." 계곡의 발견자는 일본의 로봇공학자 마사히로 모리(政弘森). 처음에는 로봇의 인간유사성(human likeness)이 친밀도를 증가시킨다. 하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그것이 외려 혐오감을 준다. 그러다가 인간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지면, 친밀도가 회복되어 정상에 도달한다. - 진중권, <진중권의 Imagine>에서

3. 아마도 그녀는 이를 깨닫는 감각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발달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극 중에서 연극배우로 나오는 그녀의 연기가 형편 없음이 이해가 된다. 부조리극이나 일부의 실험극을 논외로 하고 본다면 모든 연극에서 최고의 연기는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그것이 '실제 감정과 거의 같은 것'이라고 믿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꾸만 이것이 하나의 연극임을, 이것이 거짓 세계임을 깨닫고 있는 것. 본인이 이를 거짓 세계라고 생각하는데, 소위 말하는 '진실된 연기'가 나올 턱이 없지 않는가.

4. 이 선택은 아래의 질문에 조그만 암시를 준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음에도, 그들은 왜 거의 나오지 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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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3-0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초반에 에이프릴이 연극연기를 보고 관객들이 말하길 참 연기 못하다고..
그녀는 삶에서도 연기를 계속해야하는 걸 견디지 못했어요.
매트릭스로 푼 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요. 첫인사 드려요, 맥거핀님^^

맥거핀 2009-03-05 00:41   좋아요 0 | URL
아..네 반갑습니다. 혜경님.^^
안그래도 혜경님이 이 영화에 대해 쓰신 글도 봤는데, 저도 그 글에 여러가지 공감했습니다.
아무튼 이 영화는 여러가지로 마음을 건드리는 영화예요.
요즘의 마음이 에이프릴의 마음과 비슷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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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이 시계는 전쟁에 나가서 죽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시계공의 소망을 담아 만들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 해에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은 태어났다. 죽을 날을 앞둔 노인의 몸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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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이런 기이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제목은 조금 이상해보인다. 과연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의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직역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신기한(기이한) 사례' 정도 될 것이다. 아마도 수입하는 측에서는 벤자민 버튼의 '육체'가 점점 젊어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였겠지만, 이 제목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오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정말 과연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거꾸로 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죽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시계공의 소망처럼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 오늘의 나는 어제 알았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내가 되어 어제의 인생을 사는 것. 즉 육체적으로만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포함한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어제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벤자민은 그렇지 않다. 그는 다만 육체적으로 '젊어질' 뿐이다. 그의 정신과 삶의 진행은 보통 사람과 동일하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였던 벤자민은 조금씩 집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집을 떠나 세계를 알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게 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부모의 죽음을 알게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삶도 약간은 다르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삶을 살게 된다. 즉 보통 사람들에게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면, 벤자민에게도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나는 수입사의 한글 제목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게는 이 벤자민 버튼은 하나의 거대한 맥거핀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이 벤자민 버튼도 결국은 태어나고, 삶을 살고, 죽는다는 것. 그가 육체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시계공의 질문에 대한 신의 답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나요?'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는 없나요?' 라는 질문을 시계공이 자신이 만든 시계를 통해서 신에게 던졌을 때, 신은 벤자민을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답했던 것이다. '이 기이하게 보이는 벤자민도 남들과 같단다. 태어나고, 배우고, 사랑하고, 주위 사람을 잃고, 죽는단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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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았을 때 아마도 이 영화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그 두 가지는 각각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연결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는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에게 세상을 가르쳐 준 선장 마이크가 죽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이 말은 그 후에도 여러 번 반복된다. 벌어놓은 많은 돈으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이 이승을 떠나고 싶지 않은 벤자민의 아버지. 그러나 그도 최후에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신은 시계공에게 했던 답을 선장에게도, 그리고 벤자민의 친부에게도 들려주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신 앞에서, 신의 세계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말해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영화 중간에 제시된다.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교통사고 장면. 감독은 이 교통사고가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인가를 자세한 장면으로 제시한다. 벤자민은, 그리고 우리는 가정을 해볼 수는 있다. '...했었더라면'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우연의 결합으로 사고는 일어났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우연이었어. 우연이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또다른 장면도 있다. 지금 데이지가 누워서 딸에게 벤자민의 일기를 읽어달라고 하는 이 병원. 이 병원에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닥치고 있다. 그러나 그 폭풍우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른 곳으로 피하거나,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죽음이든, 또다른 어떤 것이든 인간이 맞설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맞설 수 없는 것에 맞닥뜨릴 때는 방법은 없다. 그저 '받아들일 뿐'.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조용히 '받아들이는' 캐릭터인 벤자민의 양모 '퀴니'의 존재는 인상적이다. 그녀는 벤자민 같은 '괴물'이 태어난 것도 모두 신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저 그를 잘 키울 뿐이다.

또다른 하나는, 따라서 결국 모든 인간은 단 한 번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와 남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삶을 산 피그미족 청년도, 버튼 공장을 운영하며 부유한 삶을 산 실업가도, 예인선 선장으로 여러 곳을 구경하고, 2차대전에도 참전했던 용감한 선장도, 볼쇼이 발레단과 처음으로 협연한 발레리나였던 호기심많은 여인도, 누구보다도 강단 있는 여성이었으나, 또한 그저 '엄마'였던 어느 여인도, 그리고 벤자민도.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것. 삶의 중간에는 여러 분기가 있을지언정, 그 분기를 되돌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는 것. 하나의 인생을 다시 살 수 없다는 것. 누구나, 결국 벤자민에게도 시간은 거슬러 오를 수 없는 일직선이라는 것. 즉,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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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대다수의) 인간은 처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벤자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양 손에 지팡이를 끼고 네 발로 걷다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살펴보다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벤자민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여러가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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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삶의 대칭성(아침부터 엉뚱한 소리)
    from 삶의 환희 그리고 열정 2009-03-04 04:37 
    늙은 아이로 태어나 어린 아기로 삶을 마무리한다. 얼마전 이 영화를 보는네네 무엇인가 머리속을 톡톡 건드렸다. 남들과 다른 벤자민은 어려서는 타인에게 연륜을 존중받았고, 나이 들어서는 귀여운 아이로 대해졌을 것이다. 영화속에 벤자민은 사랑도하고 여행도 하고 전쟁도 겪으며 그렇게 살았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거짓"으로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평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작은 노인으로 태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