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화장실 - The Pope's Toi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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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기다리는 이들이 안쓰럽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나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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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화장실 - The Pope's Toi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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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제목에 촌스러운 포스터에 '<시티 오브 갓><눈먼 자들의 도시>제작진이 만든 최고의 영화'라는 없어 보이는 문구. 감독의 명성을 내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명한 배우의 이름을 걸 수도 없고, 없는 박스오피스 기록을 들먹이며 숫자 마케팅을 할 수도 없는 영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그 홍보 문구를 보며 썩 끌리지는 않는 영화였다. 단지 그 영화를 보러 간 것은 <씨네 21>의 'Must See' 코너에 이 영화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본 후였다. must라..must. 글쎄. 그러고보면 난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꼭..반드시 보라'라고 말해본 적은 없다. 글쎄, 뭐 봐도 괜찮은 영화에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정도. 무엇보다 영화란 것을 '꼭 봐야할 어떤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꼭 봐야할 어떤 것이란 대로 한복판에서 경찰들이 시민들을 때려잡는 영상, 혹은 어느날 새벽 어느 한 망루에 오른 사람들을 누군가가 공격하는 영상이 될지언정, 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하여튼 간에,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 잡지를 줄곧 보면서도 그 must가 꽤나 놀랍고 신기했다. 이렇게 당당하게 'Must See'라는 제목을 붙일 수가 있다니. 이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만큼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의미일까, 혹은 영화에 대해 어떤 애정이 있다는 의미일까.

다시 한 번 뭐 어쨌든 간에. 영화는 귀엽고도 둥글둥글하며, 동시에 슬프면서, 꽤나 웃기는 영화였다. 1988년 브라질과 맞닿은 우루과이의 국경마을 멜로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오기로 결정되면서 작은 마을은 들끓는다. 교황님을 돈벌이로 이용해도 될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집을 팔고, 가진 것을 팔아, 장사를 해 떼돈을 벌 궁리를 한다. 그날 엄청난 사람이 이 작은 마을에 몰려들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들은 먹고, 마시고, 무언가를 살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의 밀수로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는 이 남자 비토(세자르 트론코소)는 기발한 생각을 한다. 난 머리가 참 좋아...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그는 생각한다. 몰려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그러고는...싸기도 하겠지. 그래, 유료 화장실을 차리는 거야. 그래서 아내와 딸에게는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고, 집도 고치고, 나는 오토바이를 사는 거지..오토바이!

기발한 설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물론 실제로 비토처럼 유료 화장실을 차리려고 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당시 그 작은 마을은 떼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꿈으로 부풀었고, 언론에서는 이 사람들의 꿈을 부추기고, 부풀리고,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말하며, 이들을 일확천금- 이라고 해봤자, 얼마 안되는 돈일 테지만 -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 끝은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하기 어렵다면 다음의 영화의 홍보문구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빠의 화장실>은 가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적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영화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 영화가 빛나는 것은 이 모든 소동이 지나간 후일 것이다. 이 아버지 비토는 신성한 교황의 말씀과 그 교황의 말씀을 들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고작 황금색의 똥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 일종의 불경을 저질렀지만, 자신을 괴롭히던 양심과 화해하고, 하나의 작은 악을 뿌리침으로써 선의 세계에 한 발짝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딸 실비아는 자신이 꿈꾸던 저널리스트라는 것이 어떤 허위를 가지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봄으로써, 그것들과 작별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성자와 성부와 성령이 삼위일체임을 이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교황과 대통령과 그들을 괴롭히던 기동순찰대나 국경수비대가 삼위일체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뭐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평화롭고 우습고, 궁상맞게 살아갈 것이다. 뭐 어쨌든, 살아가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에 또다른 교황이나 혹은 록스타나 혹은 미국 대통령이 온다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관객들은...우리들은 그저 키득거리고, 낄낄거리다가, 마지막 자막들을 바라보며 안타깝고 안쓰럽게 웃어제끼면 될 것이다. 아..저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우리랑 크게 다를 것도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더 안쓰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

사실 영화를 보고 영화의 줄거리나 내용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저기 나오는 나쁜 넘들이 요즘 우리 주위에 얼쩡대는 나쁜 넘들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여기 나오는 나쁜 넘들. 나쁘지만, 참 인간적이다. 이들이 인간적인 이유는 대놓고 나쁘기 때문이다. 고작 밀무역하는 것 좀 잡아냈다고(사실 말이 밀무역이지, 조금은 한심하고 소박한 수준이다), 딸을 바치라고 하지 않나...자기 일을 돕지 않겠다고 했다고 해서, 가족을 어떻게 하겠다고 협박하지 않나 말이다. 어쩌면 이는 이 영화 속 세상이 법보다는 폭력이 가까운 사회임을,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이 좀 덜된 사회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 구조 속에서, 일종의 구멍들이 많기 때문에 나쁜 놈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동시에, 그 구멍 속에서 힘없는 서민들도 그 구멍을 역이용하여 살아남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달러의 뇌물, 혹은 위스키 한 병으로서도 뇌물의 기능을 할 수 있으며, 그 뇌물을 이용하여 힘없는 보통 사람들도 조금은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지배체제가 그 지배체제의 기능들을 폭력이나 힘보다는 그들 입맛에 맞춘 법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세상은 조금씩 더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몇 달러의 뇌물은 이제 당연히 통하지 않게 된 사회, 그러나 거대한 재벌의 거대한 돈이나 이상하게 구조화된 법을 내세운 권력에는 너무나도 순응하고, 누구도 그들을 어떠한 이름으로도 제지할 수 없게 되어가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점점 법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지배될 때, 그 지배는 얼마나 무섭고 거대하며, 페쇄되어 있으며, 차가운 것인가.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뒷맛이 영 씁쓸하고 개운치 않다. 모든 소동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교황과 정부와, 그들이 지배하는, 그들이 만들어낸, 그들이 믿어 주기를 원하는 모습만을 앵무새처럼 떠드는 언론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며 비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TV에 병을 던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이들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이 욕하는 정치인들, 이들은 1988년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그 이후에 어떤 정부와 정치인과 언론을 보았을까. 우리에게도 거대한 힘과 투명한 폭력은 가까이 있는 것일까. 극장에 깔린 '대한 늬우스'들이 그런 전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자신들의 정책이 서민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하며, 뉴타운 공약을 내세우고, 그 뉴타운 공약들이 서민들에게 먹혀들어 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보았을 때에 그것들은 더욱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후에 무엇을 보게 될까.

사실 결국에는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다. 작은 힘들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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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7-0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여기선 상영하지 않아 보기 힘들어요.ㅠㅠ

맥거핀 2009-07-06 17:29   좋아요 0 | URL
아..썩 괜찮은 영화이니,
아마 서울지역 개봉이 끝나면 그쪽에도 개봉하지 않을런지요..?
기회가 된다면 보셔도 괜찮을 영화입니다.
트랜스포머 몇 개관씩 틀 때 이런 영화는 반 타임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반두비 - Bandho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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곪아가는 것들, 망가져 가는 사회에 던지는 가볍고도, 유쾌한 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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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비 - Bandho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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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 correctness) 영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간단하게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이 간단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어려운 선택이란, 이런 이야기를 별로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많은 문제들, 그리고 여러 생각거리들이 이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에 대해서 깊숙하게 말하기는 다들 꺼려한다. 아마도 어떤 문제가 어떤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꺼려진다면, 그 문제는 그만큼 곪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불온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관객에게 어떤 지점에서의 작은 불편함을 안겨 준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닫혀 있다, 혹은 조금씩 썩어들어가고 있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말해둘 것이 있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으신 많은 분들은, 이 영화는 또 어떤 우리의 불쾌감을 자극하는 영화로구나, 또는 괜히 무겁기나 한 영화로구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무겁지가 않다.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예상외로 유쾌하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의 상당히 영리한 점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대로, 이주노동자 카림(마붑 알엄)과 여고생 민서(백진희- 여담이지만 원더걸스 소희 양을 닮았다. 목소리까지도.)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 물음표대로, 여기에는 어떤 물음이 따른다.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기도 하고, 혹은 극중 자신들이 표현한대로 '반두비(방글라데시어로 '좋은 친구'라는 뜻)'라고 부를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다. 뭐 어찌되었던 간에,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의 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들 두 사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관계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먼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두 사람은 중첩된 여러가지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여고생과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나이, 신분, 계급, 문화, 인종 등 여러가지 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극중 카림은 본국에서 결혼까지 한 상태이다. 이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위험한 도박이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관객은 이것이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와 동시에 어떤 상당한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가 현실의 하나의 반영으로서의 영화,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현실에의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영화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비현실, 혹은 반(反)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는 상당히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그래서 감독은 아마도 두 가지의 안전 장치를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를 이 영화의 영리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먼저 하나는 위에서 말한 대로 이 영화가 그럼에도, 계속 유쾌하고 가벼운 무게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들 두 사람의 관계를 심각하거나, 혹은 진지한 시선으로만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훨씬 가볍고, 유쾌한 유머들을 지속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이것이 어떤 무거운 이야기가 아님을 상기시키려고 한다(엄마의 남자친구는 거의 웃기기 위해서 나온 캐릭터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가 일종의 에피소드 중심임은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너무 심각하게 마무리되지 않고, 비교적 간단하고 유쾌하게 봉합된다. 물론 뒤에서 좀 더 말하겠지만, 이는 또 어떤 다른 문제를 낳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극중 여고생 민서의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는 일부러 '여고생'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거의 여고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외모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하는 행동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어린 행동과 너무나도 어른스러운 행동이 결합된, 상당히 다른 캐릭터이다. 이 '다른 캐릭터'라는 것은 이 영화의 '위험한 부분'을 상당히 중화시키는 중요한 안전 장치이다. 왜냐하면, 민서가 보통의 여고생을 충실히 반영하는 캐릭터라면, 아마도 관객의 불편함과 비현실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대로 이주노동자 카림과 여고생 민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의 법 없이도 살듯이 보이는 착한 청년 카림과 종잡을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소녀라고 볼 수 있는 민서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보면, 여기에 이 영화의 약간 기이하고도 영리한 점이 드러난다. 역으로 생각해보라. 만약 이 둘의 성격을 뒤집는다면 어떨까. 그랬다면 아마도 이 영화는 관객의 어떤 불편한 점을 더욱 자극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고, 관객은 이 관계를 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즉 여고생 민서에게 이런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영화는 어떤 안전 장치를 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여기에서 야기되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하나는, 여고생 민서가 이러한 캐릭터가 됨으로써 이것이 민서만의 어떤 특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그래 저런 여고생이니까..'라고 생각할 때, 이 말은 동시에 긍정적인 느낌도, 부정적인 느낌도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관계에 어떤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비현실적인 여고생 캐릭터를 부여한 점은 '위험한 선택을 중화시키기 위한 더욱 큰 위험한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이것이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좋은 친구 '반두비'가 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할 것인가. 여고생 민서가 아닌 모두가 반두비가 되는 것이 쉬운 이야기일까. 이 영화는 그런 것들까지 반영하며 나아가고 있는가. 여기에서 생각은 전진하지 못하고, 물음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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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제와는 별개로,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 영화는 일종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고, 이는 아마도 감독의 일종의 고육지책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 중심이라는 것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선까지 흐트려버린다는 것에는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의 가장 중심되는 감정선은 물론 카림과 민서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 둘의 감정은 사실 상당히 모호해보인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왜 서로에게 이런 감정까지 갖게 되었는지 따라가기가 힘들다. 초반의 한 두개의 에피소드가 흐른 뒤에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까지 너무나도 쉽게 도달한다. 이를 카림과 민서라는 두 캐릭터의 어떤 특수성에만 기대어 설명하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또한 이 영화의 결말 역시도 조금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이 두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여기에까지 도달한 것일까. 왠지 이것은 감독의 전작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연상시킨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던 시점에 모호하면서도 약간은 뜬금없는 마무리가 등장했다. 마치 일종의 데우스 마키나처럼 말이다. 왠지 이 영화 <반두비>의 마무리는 그와 비슷하다. 이를 일종의 열린 결말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감독의 노력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리고 전체적으로 감독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그것도 직접적으로 하려 한다. 사실 간단히 스치고 지나가는 이야기들까지 포함하면 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살짝살짝 건드리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계, 그에서 파생되는 어떤 문화적, 인종적, 성(性)적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계급적인 관계, 백인과 그 밖의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중성, 이주노동자들의 임금 문제와 관리 문제에서 어떤 새로운 가족 형태의 이야기, 미성년자의 성과 관련된 이야기, 외국어 교육에 관련된 이야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하려하기 보다는 몇 개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이, 어쩌면 그보다는 두 사람의 감정선에 더 주목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백인 영어강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이야기이는 하나, 이 영화에서는 사족으로 보인다. 그리고 감독은 등장인물의 대사나 행동을 통하여 가끔 주제와 관련된 내용들을 너무 직접적으로 설명하려 든다. 그래서 "마음을 열어."와 같은 대사가 나올 때, 관객의 실소가 터지는 것은 이러한 감독의 계몽 의식이 너무 지나친 결과라 해야할 것이다. 전작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그러더니, 어쩌면 감독은 내용이 중요하지, 그것을 어떠한 형식으로 담는가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일종의 계몽성과 관련하여, 이 영화에서는 몇몇 필요 이상의 장면들이 보인다. 예를 들어 MB를 희화화하여 다루는 몇 장면들이나, 편의점에서 아저씨가 뜬금없이 뉴타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민서가 사장 집에서 신문을 보면서 하는 이야기들이 그렇다. 글쎄. 이 장면들이 꼭 필요할까. 물론 영화의 흐름상 꼭 필요치 않은 이러한 장면들이 어떤 뉘앙스를 전달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단순한 비판이나, 희화화로 그친다는 점에서 왠지 이것은 안 나오느니만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더구나 혹 이런 몇 장면으로 이 영화를 정작 보여줄 필요가 있는 청소년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면(아님 말구), 여러가지로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영화 속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갔지만, 외국인 불법체류와 관련된 문제들, 혹은 카림이 불법체류자가 된 후 공장에서 다시 새로운 계약을 맺는 장면들 같은 부분들을 더욱 확대하여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비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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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도 할 뿐더러, 지나치게 용감함으로써 귀여운 면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은 이야기를 유쾌하고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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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그 미 투 헬 - Drag Me to 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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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샘 레이미 감독들의 전작을 거의 못 봤다. 아마도 이 영화 <드래그 미 투 헬>을 보러 온 관객들 중에는 그의 유명한 전작들, 그러니까 <이블 데드> 시리즈라든가, <스파이더 맨>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블 데드> 시리즈 때는 영화를, 더구나 그런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았던 때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꽤나 어릴 때라 보지 못했고,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워낙 '~맨' 시리즈들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보지 않았다. 그나마 본 것은 그가 기획에 참여한 <그루지> 시리즈지만, 그 때는 원작인 <주온>을 보고 받은 인상이 워낙 강렬하던 터라, 그 영화의 리메이크 작인 <그루지> 시리즈들을 씹기에 바빴을 뿐이다. 아..할리우드는 또 이 무서운 공포 영화를 이렇게 꼬아 비틀어 버리는구나..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니까 다시 조금은 알 것 같다. 샘 레이미와 <주온>은 엄청나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주온>을 비롯하여 한 때 유행했던 일본산 공포물들은 뭐랄까,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는 뭔가 어둡고 무거운 것과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주온에서 출몰하는 토시오를 비롯한 혼령들의 그 원한 같은 것들 말이다. 한 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링> 시리즈라든가, <주온>이나 <검은 물밑에서>와 같은 시미즈 다카시, 나카다 히데오 등의 영화들을 보면,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히고, 그들을 어딘가로 같이 데려가려 하는 혼령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거나, 주위의 따돌림을 받았거나, 학대를 받은, 사실은 불쌍한 영혼들이었다. 여기에는 유머는 없다. 단지 엄숙한 비장미와 감추고 싶은 비밀, 몸서리쳐지토록 슬픈 이야기들만이 남을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공포영화의 계보도를 그린다면 그런 일본산 공포영화들과 상당히 먼 지점에 이 영화 <드래그 미 투 헬>은 위치하게 될 것 같다. 이 영화에는 묘한 밝음이 있다. 또한 상당한 유머가 있다. 물론 이 영화에도 일본산 공포영화들처럼 유령이나, 악귀가 나온다. 그러나 이 유령이나 악귀는 어딘지 모르게 밝다. 예를 들어 일본산 공포영화들의 악귀들이 아주 깜깜한 밤에, 엘리베이터 같이 폐쇄된 공간에서, 혹은 아주 깊은 오래된 우물 속에서 슬며시, 아주 조심스럽게 나타난다면, 이 영화의 악귀는 밝은 대낮에, 낄낄 웃어가면서 쩍 하고 나타나는 식이다. 물론 상당수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공포물은 그다지 어둡지 않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스크림> 시리즈도 사실 얼마나 은근히 밝고 코믹적인가.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이 뛰노는 청춘물 같은 분위기에,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패러디되고 있는 코믹한 대사들과 상황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우스꽝스러운 가면이라니. 그러나 이 영화는 또한 <스크림> 시리즈와도 다르다. <스크림>이 밝은 웃음이라면, 이 영화의 웃음들은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데가 있다. 아마도 그것이 어느 정도는 샘 레이미 본인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미리니름이 시작됩니다)

이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유머들은 영화 곳곳에서 은근히 빛난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일단 첫번째, 이 여자 크리스틴(알리슨 로먼)이 혹염소 악귀(물론 여기서부터 유머다)에 시달리게 되는 이유부터 홀딱 깬다. 혹 일본산 공포영화였으면, 어린시절의 학대 혹은 주위의 왕따 같은 무거운 얘기들이 들어갔을 거다. 그러나 크리스틴이 노파에게 저주를 받게 되는 이유는 너무 현실적이라 픽 웃음이 난다. 바로 은행직원인 크리스틴이 노파의 대출 상환 기한 연장을 거부했던 것. 그후에도 이 현실성은 악귀에게 지옥으로 끌려들어간다는 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계속 나타나며, 하나의 유머 코드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나중 크리스틴과 만나게 되는 영매는 예전 다른 영혼을 흑염소 악귀에게 빼앗긴 사연을 처음에 보여주며 나름 비장하게 등장하지만, 여기에도 여전히 만 달러라는 돈은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어처구니 없게도 꽤나 잘나가는 은행직원인 크리스틴은 그 만 달러도 구하지 못해, 전당포에 가재도구를 넘기며 받은 부족한 돈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아이스크림이나 꾸역꾸역 먹고 있다(전직 뚱녀였던 크리스틴은 스트레스를 먹을 것으로 극복해왔던 것). 아니, 지옥으로 끌려들어간다는데, 집을 팔아서라도 마련해야지, 지금 아이스크림이 넘어가니. 하.

(미리니름이 강해집니다)

유머는 계속되니, 영화의 처음에 '악귀에게 복수할거야'를 외치며, 비장하게 등장한 이 영매는 어처구니 없게도 허망하게 죽어버리고(그것도 일종의 심장마비인 듯 하다), 그 영매를 소개해준 심령술사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영매는 악귀에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사실은 그 저주받은 물건을 다른사람 주면 되는 방법이 있었노라고 뒤늦게야 고백한다.(하..고객 데리고 장난하니?) 옳거니, 그럼 되었구나, 그 물건을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어머니 드리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은 내가 <링>에 너무 빠진 까닭.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일본산 공포물이 아니고, 그런 윤리적인 문제를 슬며시 제기할 만한 심각한 영화가 아니다. 이건 그냥 샘 레이미의 유머 공포물이다. 물론 이후에도 이 유머는 여전히 계속되니, 공동묘지에서 하필이면 십자가에 머리를 맞고, 물속에 빠져들어가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아마도 그 정점이라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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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이 영화를 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거나, 무섭지는 않고 웃기기만 하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샘 레이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아주 약한 공포와 아주 약한 유머, 그리고 그 이후에 약간은 센 공포와 조금은 더 센 유머, 그리고 마지막에는 커다란 공포와 그 이후에 터지는 허탈한 유머를 적절히 배합하는 것이 샘 레이미의 작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작전은 어느정도 꽤 들어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것이 <씨네 21>에서도 지적했던 이 영화의 리듬, 그 리듬의 훌륭함인지도 모른다. 관객을 쥐었다가 놨다가, 다시 조금 쥐었다가, 놨다가 하는 것, 그리고 여기에 소리와 장면전환으로 리듬을 부여하는 것 말이다.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샘 레이미의 소리를 활용하는 방식은 상당히 고전적이다.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사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 "뭐야 괜히 소리로 놀래키기나 하고, 소리없으면 하나도 안 무섭겠네."라고 푸념하는 것은 소리를 그만큼 적절하게 사용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는 은근히 재미있다. 그리고 꽤나 무섭고, 꽤나 웃기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일본산 공포영화들처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기분이 찜찜하다거나 이상야릇하거나, 무겁게 만들지 않고(사실 나는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 그저 사우나에서 땀 뺀 기분으로 상쾌하게 나올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p.s.
며칠 전에 홍상수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대해 이야기하며 남자의 찌질함에 대해 썼었는데, 거기에 하나의 경우를 추가해야 할 듯하다. 바로 남자 둘이서 공포영화 보면서 조잘조잘 떠드는 것. 내 옆자리에 한 칸 띄어 앉았던 어떤 두 녀석 이야기다. 나는 니들이 왜 떠드는지 잘 알지. 입 꼭 다물고 보면 너무 무서워서잖아. 물론 혼자서 보러오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일 테고.
그런데 나가면서 "별로 무섭지도 않네."하고 허세는 왜 부리실까. 에라 이넘들아. 아까 영화관에서 니들이 양 주먹 꼭 쥐고, 팔걸이 움켜쥐는 팔에 힘줄 나오는 거 다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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