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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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음)


이창동의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러 가야지, 보러 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이창동의 영화는 늘 그렇듯이 영화관에 앉는 것을 매우 주저하게 만든다. 그러나 약간은 놀라운 것은, 일단 앉고 나면, 이창동의 영화는 늘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신비한 체험을 이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그 무아지경은 사라지고, 다시 모든 것들을 무섭게 헤집어 놓는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이창동의 데뷔작 <초록물고기>부터 시작해서, 모든 DVD를 가지고 있지만, 그 DVD들에 손이 가는 적은 거의 없다. 이창동의 DVD를 집어드는 것은 각오를 해야하는 일이다. 최소 며칠간 머리를 헤집어 놓을 거라는 각오를 해야하는 일이다. 

영화의 시작. 노는 아이들 옆으로 무심하게 강물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 강물에 한 소녀의 시체가 조용히 밀려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평온한 세상, 그 평온한 세상에 밀려오는 무거운 질문들. 이 시작은 마치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의 오프닝을 연상시킨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황금들녘. 아이들이 뛰노는 그 한가운데에서, 박형사(송강호)는 찌푸린 얼굴로 배수로 속을 들여다본다. 거기에 다시 어떤 무거운 질문이 있다. 그리고 약간은 놀랍게도, 이 영화 <시>의 마지막 역시, 조금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박형사는 정면으로 관객을 응시하며, 뭔가를 묻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혹자의 말처럼 범인은 지금 어디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일수도 있고, 관객들에게 던지는 어떤 경고의 메시지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의 마지막에서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소녀는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살인의 추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소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소녀를 구해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소녀가 묻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 질문이 무엇인가.

이 영화는 이창동의 전작들과 약간은 맥이 닿아 있다. 예를 들어 <오아시스>나 <밀양>같은 것들.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오아시스>에서는 가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밀양>에서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다시 <시>에서는 가해자와 연루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연루되었다는 것. 직접적인 가해를 하지 않았지만, 가해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 글쎄. 이창동은 이를 단순히 주인공 미자(윤정희)로 한정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중에 좀 더 말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는 거의 공범에 가깝다고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많은 사람들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무튼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요한 포인트는 어떤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이며, 그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이다. 이 시라는 것의 의미. 많은 리뷰들에서, 이 영화의 도덕과 아름다움 사이의 진동을 이야기한다. 즉 시의 도덕과 시의 아름다움 사이의 진동. 예를 들어 그 진동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장면은, 피해자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 미자가 거의 무의미한 아름다움을 늘어놓은 다음, 뒤돌아 나오다가 아프게 깨닫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시의 이 아름다움이라는 속성, 그리고 도덕이라는 속성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시가 곧 아름다움이고, 그것이 곧 도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의 말들은, 이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은 말한다.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먼저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리고 누구의 마음 속에나 이미 시는 존재하고 있다고, 그를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이 말은 몇 가지를 생각나게 하는 점이 있다. 먼저 하나. 이 말들은 약간은 신기하게도, 도덕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위의 김용탁 시인의 말들에서 '시'라는 말을 '도덕' 혹은 '양심'이라는 말로 대체하여 보라. 거의 의미가 그대로 통한다. 누구의 마음 속에나 이미 도덕은 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공중도덕을 지켜야 하는 것을 알고 있고, 노인을 공경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약자를 배려하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물론 여학생을 성폭행하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끄집어내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 '보는 것'의 문제.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도덕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일까. 그리고 이 '보는 것'의 문제는 대학 시절 교육철학 수업의 어떤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 것은, 영화 속 미자가 듣는 김용탁 시인의 시 강의 형태를 보면서이다. 처음에 나는 약간 웃었다. 참 시 강의라는 게 거저 먹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그저 강의라는 것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사과를 들고 잘 보라고 한다음, 수강생 한 명씩 불러내어 '가장 아름다웠던 일'을 떠올리게 만들면 되는 거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 다음, 조금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시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어떤 은유를 사용하는 기법이나, 운율을 맞추는 법 등등에 대해서는 일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그것으로 쓸 수 있는 것인가. 시가 그것으로 가능한 것인가. 글쎄.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도리어, 어떤 배움으로 가능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천재성의 문제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수학과 조금 비슷한 성질의 것이 아닌가 싶다. 수학의 천재성은 대체로 젊은 시절에 발현되며,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간다. 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젊은 시절에 빛을 발하고 요절한 수많은 시인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소설과의 차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소설은 시와 달리, 나이가 들수록 더욱 원숙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는 시와 달리, 소설은 가르쳐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다시 옛날로 돌아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도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

이는 대학 시절 교육철학 부분에서 상당히 내 흥미를 끌었던 주제였다.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성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결론을 내린다. "덕성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오직 신의 시여(施與)에 의해서 인간이 얻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꽤나 복잡한 문제라, 이야기를 하려면, 비트겐슈타인까지 끌고 들어와야 하며, 잘 얘기할 자신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도덕을 (시와 마찬가지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에는 어떤 의문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반복하자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발휘하는가, 혹은 발현하는가의 문제이다. 배워서 알고 있지만, 전혀 그것을 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튼 이 논의 속에는 '일러주는 것'과 '보도록 하는 것'을 구분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이는 다시 이창동의 <시>의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도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 가르쳐질 수 있다면 그것은 '보는 것'으로 가능한가. 그것이 아니라면, 도덕은, 혹은 양심은 도대체 무엇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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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때문에 우세요? 시 못써서? 영화 속 시 동호회의 일원인 박 형사는 미자에게 묻는다. 그러나 미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 운다. 이 질문은 마치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도덕 때문에 우세요? 도덕을 지킬 수 없어서? 도덕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은 울어야 한다. 그것이 이창동의 하나의 태도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그렇지 않다. 영화 속 시인은 술자리에서 한탄하듯 내뱉는다. 시는 죽었어. 그래도 싸. 그것 역시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린다. 도덕은 죽었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시는 정말 거의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도덕도 거의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도덕이란, 이창동이 말하듯이, 아마도 가르쳐질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여학생을 성폭행해서는 안된다, 는 식의 어떠한 것, 즉 규범을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몇 개의 힌트가 될 수 있는 장면이 영화 속들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부. 미자가 찾아간 병원의 텔레비전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식을 잃은 슬픔,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에 대해 둔감하다. 그리고 이 둔감함은 병원 밖으로 나오며 그대로 이어진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이를 어떤 하나의 구경거리로 바라볼 뿐이다. 이 장면에 조금은 심각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미자 뿐이다. 미자는 심지어 손자에게 그 소녀에 대해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기까지 한다. 그러나 미자도 겨우 그 정도 뿐이다. 그 정도 관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미자는 시 강의를 듣는다. 그러나 여전히 미자는 시를 쓰지 못한다. 그리고 시를 쓸 수 있기를 계속 갈망한다. 그리고 영화의 거의 마지막, 미자는 시를 써내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클래스의 다른 사람들은 같이 시 수업을 들었음에도 아무도 시를 써내지 못했다. 그 차이.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미자가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손자의 문제였기 때문이 아니었겠냐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 기범 아버지(안내상)는 조소하며 되물을 뿐이다. "시를 왜 배워요?"

시를 쓰는 것이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나는 아마도 그 반대가 더욱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도덕적인 인간이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말이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무튼 나는 시에 대해서는 잘 이해해 본 적이 없으니까. 어떤 시가 왜 좋은지 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이창동은 거의 용감하게, 무모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덕적인 인간만이, 시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일단 '잘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잘 보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의 말대로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만져도 보고, 먹어도 보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배드민턴을 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것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이창동은 말한다. '어떤' 도덕이 유지되는 것(혹은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은 아름다움이며, 그 아름다움의 하나의 모습은 시라고 말이다. 가장 도덕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이다. 누군가는 이창동의 이 영화 <시>가 거의 중세의 도덕극을 연상시킨다고 말하였으나, 이쯤되면 거의 이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어떤 말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극도의 아름다움, 즉 완성된 미(美)는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덕이 충일한 것, 그들은 그제서야 그것에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론 여기서의 덕(arete)은 이창동의 '덕'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거의 숨을 쉴 수 없게 한다. 미자의 목소리는 어느틈에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고, 소녀는 고개를 돌려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 때 소녀는 관객에게 거의 정면으로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놀라운 체험. 그렇게 영화 속 관객들은 미자가 가해자와 연루된 것과 같이, 다시 미자에게 연루된다. 그렇게 우리는 이 현대사회에서 공범이 된다. 세상 모든 약자들에 가해지는 것들에 대하여 말이다. 소녀는 묻는다. 당신은 시를 쓸 수 있습니까. 나는 노트에 반복하여 쓴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닙니다. 그러나, 그래도 언젠가는 노력을 해봐야겠지요. 명사를 잃고, 그 다음에 동사를 잃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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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 The housem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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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가 만든 이 서늘한 그림에는 출구가 없다. 마치 이 마지막은 복수가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그것을 복수로 본다면 말이다. 임상수는 설명을 시도한다(<씨네 21> 753호 '임상수 인터뷰'). 은이(전도연)의 마지막 시도는 나미를 괴물로 만드려는 시도였다고 말이다. 그리고 임상수는 싸늘하게 덧붙인다. 이를 봄으로써, 아마 나미는 후에 괴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감독의 이런 친절한 설명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면 좀 좋으련만.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 냉소하는 임상수의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 말을 그대로 믿기도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아니, 임상수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나미를 괴물로 만드는 것이 무슨 복수가 된다는 말인가. 괴물이 넘쳐나는 세상, 괴물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어쩌면, 훈이(이정재)와 해라(서우)는 나미가 괴물이 되는 편이 더 좋을는지도 모른다. 훈이와 해라는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괴물인 편이, 이 세상에서 더 살아남기가 쉽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미는 알아서 괴물이 되줄 터였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자각하고, 자기를 위치에 맞게(혹은 그 위치에서 살아남도록) 만들어가는 법을 배우던 이 아이가 괴물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역으로 말해서, 어쩌면 은이가 살아있었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은이가 마지막 선택을 행함으로써, 나미가 괴물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이 은이가 행한 복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묻지만, 그것은 복수였을까. 

은이가 행하는 이 방식은, 몇 가지를 생각나게 한다. 은이는 말한다. 찍 소리라도 내보고 싶다고 말이다. 군부독재 시절,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찍 소리를 내보려고 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인해 이 정권들이 어떤 반성에 이르렀는가라는 부분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죽음들이 의미없는 죽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혹은 그것을 바보같은 시도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아무튼 간에 그것은 한 사람의 죽음이었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복수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의미있는 어떤 시도였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 시도의 한 가지 부분은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독재정권의 신민으로 살지 않겠다는,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바보같은 인간으로 남지 않겠다는, 혹은 기계부품과 같이 취급되며 살아가지 않겠다는 그런 선언.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그런 선언. 그래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신문에 한줄짜리 기사로라도 취급되지 않아도, 그들은 자신의 몸에 불을 그었다.

아니, 나는 은이가 노동적인 투쟁의 일환으로 그런 마지막을 택했다고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임상수가 파놓은 이 출구없는 마지막에서 조금이라도 기어나와 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중이다. 여러 리뷰들에서 지적하였듯이 임상수의 오프닝 씬은 인상적이다. 떨어지는 여자를 바라보는 무표정한 시선들. 그들의 무표정한 시선들에는 이유가 있다. 일을 해야 하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차피 저 여자가 비워놓은 자리에는 누군가가 들어갈테니 말이다. 그리고 은이는 유아교육과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곧 대저택의 하녀로 채용되고, 다시 그 자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보면, 그 자리 역시 다시 누군가가 채우고 있다. 마지막에 주목해봐야 할 것은 아이의 시선이나, 훈이나 해라의 우스꽝스럽고도, 그로테스크한 행동들이 아니라, 은이와 병식(윤여정)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또다른 하녀들이다. 그 하녀들의 그 무표정한 시선들. 그리고 임상수는 훈이의 입을 빌어, 해라마저도 거의 하녀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기까지 한다. 훈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은이나 병식은 집안일을 해주는 하녀이고, 해라는 아이를 낳아주는 하녀이다. 훈이는 선심쓰듯 말한다. 원한다면 언제든 애를 낳게 해줄께. 그리고 해라와 해라의 어머니(박지영)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참이다. 애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낳아야 한다고 되뇌면서.




이 타의로 빚어진 하녀들이 넘쳐나는 세상, 그래서 어떤 하녀가 곧 다른 하녀로 대체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어쩌면 은이의 마지막 선택은 그저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더 이상 하녀로 남지 않겠다는 하나의 선언 말이다. 그 선언과 조금은 비슷하지만, 또 무엇인가 달라보이는 것에 하녀 병식의 행동들이 있다. 경멸하는 것. 겉으로는 정중하게 행동하지만, 돌아서서 경멸하고 욕하는 것. 이른바 '아더메치'. 그리고 이 방법으로 병식은 아마도 그 긴 세월의 모욕을 버텨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마도 이 방법은 이 세상에서 은이처럼 선언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버텨내는 방식일 것이다. 경멸하는 것. 예를 들어 인터넷 게시판에 넘쳐나는 수많은 경멸들. 

그리고 이 경멸은 왠지 최근의 어떤 사건을 자꾸 떠올리게 만든다. 한 대학에서 여학생이 나이든 청소부를 모욕했고, 네티즌들은 그녀에게 경멸을 퍼붓는 것으로 대응하였으며, 급기야는 그녀의 '신상을 털었다'. 이를 떠올리게 된 것은 거기에 스며있는 계급성 때문이다. 네티즌들이 이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것에 담겨 있는 계급의 문제가 한 몫을 했다. 예를 들어 만약 이것이 나이 어린 청소부와 나이 든 청소부 사이의 문제였다면, 이는 문제거리도 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 경멸은 또 한편으로 보면 위험한 부분이 있다. 경멸은 그 자체에 일종의 계급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녀 병식의 경우. 병식은 영화 초반부에 훈과 해라를 노골적으로 경멸하지만, 동시에 은이도 경멸한다. 즉 병식은 훈과 해라보다는 자신이 낮은 위치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만, 동시에 은이보다는 자신이 높은 위치라는 것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이것의 위험, 즉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이 인간을 경멸한다는 것에 내재된 무언가의 위험성. 다시 현실로 돌아와, 여학생에 대한 경멸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도덕이라는 것의 형태로 포장되지만, 그것이 어쩌면 현대 사회의 어떤 부분을 담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때로는 그 게시판에 넘쳐나는 수많은 경멸들이 무서워진다. 그리고 동시에 그 경멸을 경멸하는 나도 무서워진다.

아무튼 임상수가 그려낸 출구없는 사회는, 매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고, 우리는 은이처럼 할 수 없어서, 그저 경멸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도 임상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한도 내에서 고결한 삶을 산다. 참을 수 없는 기억이 생겼을 때조차 죽음으로써 자신의 고결함을 지키고자 한다. <하녀>는 고결함에 관한 영화다."(<씨네21> 753호 '임상수 인터뷰' 중) (그래서 어쩌면 임상수는 은이를 거의 어린아이와도 같은, 아니 어린아이도 아는 것조차 모르는 그런 캐릭터로 그려냈는지도 모르겠다. 해라의 어머니가 전도연을 떨어뜨릴 때, 쟤들은 당연히 저러겠지, 왜 은이는 일부러 저러는 것도 모를까라고 생각한 나는, 이미 고결해지긴 틀렸다.) 그렇다 해도 나는 묻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은이처럼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고결함을 지키거나, 병식처럼 경멸하거나 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일까. 나는 그저  출구없는 그림의 서늘함이 선뜩하게 느껴질 뿐이다.




덧. 이 영화는 나름 괜찮지만, 괜히 서스펜스니, 에로틱 스릴러니 하는 말을 갖다붙여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영화는 원작 <하녀>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괜히 리메이크 어쩌구 해서는 또 불필요한 욕을 먹고 있다. 이건 그냥 임상수의 새로운 <하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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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6 0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7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로마 제국 쇠망사 - 한 권으로 읽는
에드워드 기번 지음, 나모리 시게나리 엮음, 한유희 옮김 / 북프렌즈(시아)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를 서기 96년 네르바 황제의 즉위, 즉 5현제 시대의 개막에서부터 다루고 있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요약한 이 책 <한 권으로 읽는 로마제국 쇠망사>의 편역자 가나모리 시게나리는 기번이 그 이전의 시대, 즉 포에니 전쟁,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기번이 살았던 18세기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이전의 '역사'는 이른바 상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번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거대한 로마를 돌아보면서 말이다. 이 거대한 제국,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로마가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는 어떤 이유로 쇠약해지고,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일까. 기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의 쇠퇴는 뛰어나게 위대한 문명의 종착지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였다. (중략) 따라서 인공적인 이 대건축물을 떠받치고 있던 각 부분이 시대나 상황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기 시작하자마자, 훌륭한 건축물은 자신의 무게 때문에 붕괴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로마의 멸망은 단순한 요인에 의한 것이고 불가피한 것이었다. (p.288)- '옮긴이의 말' 일부분    
   

 

그래서 아마도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라는 자신의 글을 로마 제국이 가장 융성하던 시기인 5현제 시대부터 다루기 시작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무릇 어떤 것이건 간에 최정점에 오른 시기가 쇠퇴가 시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번의 설명식으로 보자면, 로마를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이 생겨나는 그 순간 이후부터 필연적으로 이 기둥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겨나기 마련이었을 것이고, 그 균열은 결국 로마라는 거대한 건물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로마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기번이 말한 그런 것일 것이다. 즉 로마라는 이 대들보가 너무 거대해졌다는 것, 상대적으로 그것을 떠받드는 기둥들보다도 말이다. 따라서 이민족의 침입과 같은 것들은 근본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그 기둥에 가해지는 도끼질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미 허약해진 기둥들은 몇 번의 도끼질로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로마가 쇠퇴하고 멸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먼저 무상으로 제공되는 밀과 끊임없는 전차시합과 검투시합과 같은 볼거리의 제공이 야기한, 로마 제국민들의 정신적인 나약함, 또 하나는 로마 제국 내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권력 암투, (그리고 그것에 기름을 부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국의 4분할통치책), 부르군트족, 고트족과 같은 이민족들의 거듭된 침입과 로마제국 후기에 이르러 이민족들의 동화와 융합 정책에 실패한 점, 이슬람 세력의 급격한 성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 등등. 이 중 과연 어느 것이 로마 멸망의 가장 큰 이유인가라는 물음에는, 아마도 기번의 말에서 힌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이 중 어느 한 가지가 근본적인 이유였다기 보다는, 로마가 이 모든 것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이미 너무 몸집이 거대해져 버린 거대한 공룡과 같았다는 점 말이다. 다만, 기번이 그 이유 중의 하나를 기독교에서 찾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기번은 말한다. 내세 지향적인 성격을 가진 기독교가 로마에 널리 퍼지고, 국교가 되면서, 제국민들은 현세의 황제에 충성할 필요를 느끼게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 그것이 로마 제국 멸망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흥미로운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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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한권으로 읽는 로마제국 쇠망사>는 제목에서 말하듯이, 기번의 6권으로 된 <로마제국 쇠망사>를 한 권에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5현제 시대 이전의 로마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앞 부분의 역사까지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러다보니 잃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6권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축약하다 보니, 인물들의 등장과 사건의 전개 중심으로 급박하게 설명이 이루어져, 어떤 부분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나,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는 못하다. 즉 가끔 TV에서 시간 때우기 용으로 하는, 몇 부작의 이야기를 짧게 축약한 드라마 스페셜 편을 보는 것처럼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해하게 되지만, 그 안의 세부적인 잔재미(?)들을 놓치게 된달까. 그리고 사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렇게 앞부분의 이야기들을 무리하게 집어넣다 보니,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이 원저의 본질적인 의미, 즉 '로마 제국이 왜 쇠망하게 되었는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기는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즉 각각의 사건들을 흐름을 알게 되기는 하나, 이 모두를 아우르는 근본적인 시각을 얻기는 아무래도 모자르다. 나 역시도 기번의 이 원저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앞에 옮긴이의 말 일부분과 몇 가지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이 무리한 리뷰를 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물론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독특하게 각 장이 질문을 던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사건들에 대한 서술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도 나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용어의 설명들도 충실하게 잘 되어 있는 편이며, 사진이나 연표도 잘 제공되고 있다. (일본애들이 참 이런 거 잘한다.) 다만 나는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 아름답다는 기번의 문장들을 읽지 못해서 말이다. ('훌륭한 건축물은 자신의 무게 때문에 붕괴하고 말았다'라니..아 표현좋고!) 그러니 아마도 언젠가는 그것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조금은 덜 무리한 리뷰를 써야만 할 것 같다.

아무래도 패스트푸드가 가끔 맛있고 편하기는 한데, 배는 금방 꺼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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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05-20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지금 쓰다니..큰일이야..큰일.

cyrus 2010-10-0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떻게 보면 독자들에게 딜레마를 안겨 주는거 같네요.
저도 원전으로 된 6권을 볼 것인지 아니면 축약본을 읽을 것인지 고민을 했거든요.
지금도 고민중이라서 아직도 읽을 엄무도 안 나고 있답니다^^;;
맥거핀님의 축약본 관련 리뷰 덕분에 어느 정도 고민이 해결되었네요.
좀 시간이 걸리고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원전을 읽어봐야겠네요.
안 되면 축약본으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0-10-06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원전을 읽어봐야겠다..계속 그러고 있지만,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뭐 정 안되겠다 싶으면, 축약본이라도 읽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름 이 책은 축약이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구요. (물론 원전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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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할 바에는, 좋은 것만이라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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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웃었다. 하하하.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하하하>는 홍상수의 인장들이 물씬 드러나는 영화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사용한 몇몇 장치들. 등장인물들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나, 다르게 행동하게 함으로써, 거기에서 일종의 '반복과 차이'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밤과 낮>에서 사용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등장인물이 과거를 회상하여 그것에 논평을 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그렇다. 또 꿈은 어떠한가. 이 영화에서도 예전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독특한 꿈 씬이 등장한다. 그리고 또 어떤 장면들은 예전 영화에서처럼 꿈인지 아닌지 약간 모호한 면도 있다. 또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 역시 홍상수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소위 '홍상수 사단'임을 하나의 인장 요소로서 빼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일 것이다. 즉 구조든 내용이든 간에 아무튼 이 영화 <하하하>는 홍상수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 즉 '관객들의 웃음'을 여전히 유발한다는 점. 그런데 그 웃음이 예전과는 약간 다른 점도 있다. 예전의 웃음들이 관객들을 계면쩍게 만들어서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 영화의 웃음은 조금 더 귀여운 웃음이랄까, 상쾌한 웃음이랄까.

그리고 <하하하>는 여름의 이야기이다. 夏夏夏. 여름여름여름. 그 세 번의 여름이야기. 첫 번째 여름은 문경(김상경)의 회상. 어머니를 만나러 간 통영에서 관광 해설가인 성옥(문소리)을 만나, 그녀에게 반해 쫓아다니는 이야기. 그리고 두 번째 여름은 중식(유준상)의 회상. 통영에서 그의 애인 연주(예지원)와 밀회를 즐기며, 후배 정호(김강우)와도 어울리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여름은 우리가 그 두 사람의 이야기로서 추론하여 만들어내는 이야기. 우리는 이 둘의 회상을 통해, 이들 각자가 알지 못하는 몇몇 중요한 사실을 안다. 예를 들어 가장 대표적인 사실. 문경은 성옥과 그녀의 애인에 대해 알지만, 그녀의 애인이 바로 중식이 말하는 후배 정호라는 사실은 모른다. 즉 우리는 두 사람이 하는 몇몇 얘기들을 통해서, 두 사람보다 이 이야기 전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전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 이 두 사람의 얘기를 본다('듣는다'가 아니라 '본다') 어쩌면 이 유머의 상당 부분은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들보다 많이 알고 있을까.

아니,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뭐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왠지 이 영화의 메시지는 전작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 중의 중요한 한 가지는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씨네 21>에서 정한석이 말한 것처럼 좋은 것, 나쁜 것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정한석은 말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도덕은 선악의 가치판단에 관계 되지만, 윤리는 좋음과 나쁨의 질적 차이에 관계된다고 설명해주었다. 좋음과 나쁨! 좋은 것만 보아라! 그러면서 들뢰즈는 "슬픈 정념은 언제나 무능력에 속한다"고 하였으며 윤리학이 해야 하는 삼중의 실천 중 첫 번째로 "(자연 속에서의 우리의 처지로 인해 우리는 나쁜 만남들과 슬픔들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즐거운 정념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할 것인가?"하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을 설명해주는 장면으로 문경이 성웅 이순신과 만나는 장면을 들었다. 그 장면이 이 철학적 내용에 대한 홍상수 식의 설명이라고 말이다. 

그저 몇 가지 잡설을 여기에 덧붙여 보자면, 이 내용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작의 제목을 연상시킨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전체를 온전하게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부분의 문제이며, 동시에 선악, 즉 도덕의 문제 또는 윤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전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때로 누군가를 비난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충고를 건네기도 한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일 수 있지만, 또한 윤리의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에게 동일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만의 윤리의 관점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답이 어쩌면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은 아닐까. 즉 우리에게 누군가가 '이 전체 모든 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의 섣부른 도덕적 혹은 윤리적 잣대를 나에게 들이대지 마'와 거의 비슷한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말고, (도덕이 아닌) 너 자신만의 윤리적 관점을 만들어갈 것,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도 그 사람의 윤리적 관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들여다 볼 것. 그것을 실천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좋은 방법이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방법은 간단하기는 하나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내가 전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좋은 것만 보려 한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홍상수의 관점에서 볼 때, '전체를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순신에게 문경은 묻는다. '아 그러면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는 거...뭐 그런 겁니까?' 이순신은 답한다. '아니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지. 그런 게 어딨냐?')

사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괴이쩍게 생각했던 부분은 이 영화의 구조였다. 즉 두 사람의 여행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형식이 아니라, 두 사람이 여행을 다녀온 후, 술자리에서 만나 지나간 이야기를 주고받는 구조. 그리고 그 형식도 좀 수상쩍은 것이, 굳이 현재의 술자리를 스틸사진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물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야기를 회상하는 형식은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일기를 도입하거나, 씬의 번호를 매겨서 장면을 나누는 형식 같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스틸사진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를 '좋은 것만 보라'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것이 이해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던 것. 즉,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은 한편으로, 실제 그들이 그곳에서 행한 행동과 그 후의 논평과의 불일치 - 예를 들어, 문경이 정호에게 맞았을 때도 문경은 그것을 '의연하게 대처해서 좋았다'고 회상한다. 사실은 어쩔 도리가 없어 맞은 것에 불과했으면서도 말이다 - 에서 생겨나는 솔직함이자, 예의 그 홍상수 식의 유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보다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이 술자리의 대화의 주제는 몇 번 반복되어 제시되듯이, '여름에 좋았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 논평들은 '응, 좋았겠구나' '어, 좋았어'로 마무리되고 있다. 즉 이 영화의 주제인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은 성웅 이순신의 말로써 직접 전달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들의 아주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틸사진들. 사진들이란 결국 무엇인가. 사진들은 결국 '좋았던 것'을 담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행을 다녀온 후, 동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과 사진으로 남기는 것, 그 차이. 동영상과 달리 사진은 철저하게 좋았던 내용만이 담겨있다. 물론 동영상 역시 일정 부분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사진은 거의 철저하게 우리가 원하는 것, 즉 우리에게 좋았던 것만 담기게 된다. 이 두 사람이 술잔을 나누면서 보여지는 스틸 컷들은 어떠한가. 대부분 이 두 사람이 잔을 부딪히고, 웃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이 사진만을 놓고 이 술자리를 판단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 사진들을 놓고서는 이 술자리가 '화기애애하고 좋았다'라고 밖에 추측할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이 스틸사진들을 통해서 이 술자리의 '좋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의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액자인 이 스틸사진이라는 형식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전체 주제를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스틸 사진들과 회상 장면의 동영상들과의 대비, 그 놀라운 형식과 주제와의 결합.

즉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를 주인공들의 성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통영에서와 달리, 서울 근교 어디에선가 벌어지는 이 술자리는 주인공들의 '좋은 것만 보라'의 실천적 체험 현장이다. 좋은 것만 말하고, 좋은 것(사진)만 남기는 자리. 그리고 심지어는 이 술자리는 깔끔하게 끝나기조차 한다. '이제 마지막 잔하고 일어설까' 이런 류의 대사가 맨 마지막에 나오다니, 이게 홍상수 영화에서 가능했던가. 아무튼 망가져서야 끝장을 보는 것이 홍상수 영화의 술자리가 아니던가. 아니, 그것은 어쩌면 통영에서부터 미리 예고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식은 비록 불륜이기는 하나, 연주에게 청혼을 하고, 문경도 성옥에게 같이 캐나다로 가자며, 청혼 비스무리한 것을 한다. 청혼을 하는 홍상수의 주인공들이 다른 영화에서도 있었던가. 그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빨리 넘어뜨리고 보자는 쪽이었지, 청혼을 하자는 쪽은 아니었다. 청혼을 하는 홍상수의 남자들, 그 성장의 표식들은 상당히 놀랍기까지 하다. 이제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이 표식들을 홍상수 영화에서 긍정의 의미로 읽어야 하나, 부정의 의미로 읽어야 하나.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전자 쪽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아무튼 긍정의 의미에서 하하하.

p.s. 이 영화의 문소리의 연기는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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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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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5 1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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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6 0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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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7 0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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