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 - The Secret in Their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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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보다도 인상적인 구도와 색감과 카메라 워킹. 특히 경기장 씬은 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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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 - The Social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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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데이비드 핀처는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잘도 이렇게 흥미진진한 2시간의 이야기로 만드는구나, 라고 말이다. 사실 이 전체 이야기를 하나의 기업물로 보자면 흥미로운 구석은 있으나, 상당히 밋밋한 쪽에 가깝다. 어떤 하버드 천재가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를 만들어서 성공하나, 2개의 소송을 당한다, 라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를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간단한 한 줄로도 흥미롭기는 하다. 소셜 네트워크를 만들었으나, 실제의 소셜 네트워크는 실패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이야기를 버무려내며,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발시킴은 물론, 관객을 어떤 드라마틱한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이끌고 들어간다. 예를 들어 <부당거래>의 류승완이 아주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하고, 직선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마법을 부린다면, <소셜 네트워크>의 데이비드 핀처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복잡하고 풍성하고 철학적으로 만든달까.

그러나 사실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어떤 기업의 성장과 위기를 보여주는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계, 그것의 어떤 관계들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때로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비쳐지지만, 사실 그것은 매우 비슷하게 닮아 있다. '페이스북(Facebook)'이라는 것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영화 속에 있는 사실들만 놓고 보면 페이스북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배타성이다. 페이스북은 처음에 하버드 아이디를 가지고 있어야만 접속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었으며, 다른 대학들로 그 세력을 넓힌 후에도 이러한 성격은 비슷하게 유지된다(지금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은 온라인 상에서 친구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고 상대방의 일정 정도의 정보를 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수락이 또한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싸이월드'와도 조금은 닮은 점이 있다. 싸이월드 역시 일촌 관계는 상대방의 수락이 있어야 가능하며, 특정 정보를 가까운 사람에게만 공개하도록 설정할 수 있다. 즉 페이스북이나 싸이는 기본적으로 개방적이라기 보다는 폐쇄적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이러한 페이스북이나 싸이는 현실의 관계와도 거의 그대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싸이는 실명으로만 가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페이스북 역시 가명으로도 가입이 가능하지만 대체로 실명으로 가입할 것을 권유하고 있으며,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실명으로 가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페이스북은 현실의 관계를 대체로 반영한다. 즉 많은 경우 현실에서의 인기인이 페이스북에서도 인기인이 된다. 즉 페이스북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세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것은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권력 관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오프라인에서의 어떤 권력 관계는 흥미롭게 보여진다. 하버드대에 다니는 마크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는 보스턴대에 다니는 여자친구를 의식적으로 무시한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마크는 하버드 내 엘리트 클럽에 들어가려고 하는 친구 왈도(앤드류 가필드)에게 신경질적인 심사를 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한다. 이는 한편으로 윈클보스 쌍둥이 형제와 마크와의 대비에서도 드러난다. 윈클보스 형제는 적어도 마크보다는 상당히 상류층으로 보이며, 잘생긴 외모에 스포츠맨으로서 교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어 보인다. 그런 반면 마크는 평소 컴퓨터만 가까이 하는, 거의 외톨이에 가깝다. 이것은 어떤 계급의 세계이고, 권력의 세계이다. 마크는 윈클보스 형제와 태생적으로 다르며, 왈도와 같이 상류층 클럽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마크가 다른 방식으로의 역전을 바라는 것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마크가 이를 역전하는 방식은 분명히 온라인을 이용하는 방식이지만, 그것은 온라인으로 평등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또 하나의 권력 구조를 만들고 그가 이를 소유하는 방식, 혹은 그 권력 구조의 맨 꼭대기에 올라가는 방식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페이스북의 세계 역시 오프라인의 권력을 거의 그대로 승계하고 있으며, 마크는 이를 창조한 일종의 신으로서 그 세계에 군림하며 이것은 다시 역으로 오프라인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마크가 그 온라인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자, 거의 그에게 맹목적인 호감을 표현한다.

사실 이 여자들과 관련한 부분은 이 영화에서 조금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기도 하다. 그것은 명백하게 이러한 페이스북 자체가 어떤 또하나의 권력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이 영화에서 여자들은 거의 일종의 '전리품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옛날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들이 여자를 차지하는 것처럼, <소셜 네트워크> 속 여자들은 남자들의 권력 관계 속에서 아주 수동적인 위치에만 머무른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열심히 헤드셋을 끼고 사이트를 관리하는 남자들 곁에서 여자들은 대형 스크린으로 게임에 몰두하는 장면들도 그러하거니와, 마크가 주위에 선 모든 남자들에게 여러 역할들을 지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를 보여준다. 남자들과 같이 있는 여자들이 이 '미션'에서 자신의 역할을 묻자, 마크는 잘라 말한다. "없어!"



그러므로 여기에서 어떤 질문이 요구되는 것 같다.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는 말 그대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을 탄생시키는가. 누구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동등한 친구가 될 수 있는가. 데이비드 핀처의 대답은 아니오에 가까운 것 같다. 미안하게도 현실에서의 외톨이는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외톨이가 될 확률이 높다. 그것은 트위터 등의 개방형 소셜 네트워크나 블로그 등의 1인 미디어와 다른 페이스북만의 독특한 성격에도 기인하기도 하지만, 왠지 영화는 다른 것을 살짝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이 온라인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즉 현재로서는 가상 온라인에서의 체험은 실제의 체험을 결코 따라가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가상 세계에서 펼치는 게임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현실에서의 실제 체험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가상의 축구 게임에서 아무리 골을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의 축구 게임에서 골을 넣는 쾌감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아무리 온라인 세게에서 총격전 장면을 보고(하고) 일종의 스릴을 느낀다고 해도, 실제의 총격전을 보는(하는) 충격에 이를 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가상의 세계에서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오프라인에서 그 누군가와 만나서 하는 모든 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즉 온라인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대체제이다. 우리가 실제의 관계가 충분히 가능하다면, 굳이 온라인에서 관계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온라인에서의 관계는 실제의 관계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체물이 살아남는 방법은 실제를 충실하게 모방하여 최대한 그 실제에 가까워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를 벗어나고 싶어해도 온라인에서의 관계는 실제의 권력 관계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마크가 온라인에서의 관계망을 꿈꾸는 것은 여자친구와의 오프라인 관계가 실패로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만약 오프라인에서의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잘 이루어졌고, 마크가 거의 외톨이에 가깝지 않았다면, 이 '페이스북'은 탄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했기 때문에 일종의 대체물로서(처음의 '페이스매쉬'가 여자들을 '실제로 놓고' 비교해 보고 싶은 남자들의 권력에의 욕망을 '모방'했던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망이 탄생했고, 이 온라인망은 현실의 권력 관계를 다시 반영하게 된 것이다.

온라인은 현실을 모방하려 하나, 그것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은 여전히 오프라인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이를 데이비드 핀처는 사실 몇 가지 흥미로운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 퍼져나가고, 마크가 유명인사가 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페이스북 그 자신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교내 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교내신문에 페이스북이 보도되고, 마크가 그것의 창시자임이 알려지면서 마크는 단숨의 인기인의 경지에 오른다. 즉 이는 어떤 온라인보다 강력한 미디어 권력의 힘을 보여준다. 또한 데이비드 핀처는 재미있는 장면을 넣기도 한다. 윈클보스 형제의 조정 경기 장면. 이 장면들은 이상하게도 슬로우 화면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약동하는 근육의 꿈틀거림과 게임에서의 극적인 승리와 패배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내게는 마치 이것의 현실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온라인에서의 조정 경기는 이와 비슷할 수는 있으나, 극적인 승리에의 쾌감은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온라인 조정 게임은 영원히 현실의 훌륭한 근육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현실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마크는 처음부터 이를 의도했던 것일까. 즉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고, 그것에서 왕이 되고자 했던 것일까. 글쎄. 꼭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마크는 처음에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서, 그저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일종의 온라인 상의 권력자로 만들어 준 후부터 그는 조금씩 변모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냅스터(Napster)를 만든 숀 파커(저스틴 팀버레이크)였다. 숀 파커는 온라인이 만들어낸 현실의 권력자로서 마크에게 일종의 역할모델이 되었다. 숀 파커와 가까워진 후부터 그는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되어 결국 5억 명의 온라인 친구를 만들어냈지만, 덕분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왈도를 잃어버렸다.
............................................

이 영화의 제목인 <소셜 네트워크>는 그러므로 이제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단순히 온라인의 '페이스북'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넓은 오프라인까지 포괄한 사회적 관계망, 조금 더 좁게는 사회적 권력 관계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나는 묻고 싶어진다. 온라인은 그렇다면 언제가 되어서야 이 사회적 권력을 극복할 수 있는가. 평등한 관계란, 모두가 친구되는 온라인 세계란 여전히 환상인가. 온라인은 결국 오프라인을 영원히 불완전하게 대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데이비드 핀처는 이 영화 전체를 두 개의 거대한 소송으로 만드는 것으로 대답을 하고 있거니와 마지막에 살짝 양념을 뿌리고 있기도 하다. 여자 변호사의 충고를 받고(거의 유일하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동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이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마크는 예전의 여자친구 에리카에게 친구 신청을 하고는 반복적으로 새로고침을 한다.

이것은 희망적인 결말인가. 글쎄. 나는 별로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이것이 조금은 희망적인 결말이 되려면 마크는 적어도 '페이스북'에서가 아니라 에리카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하다못해 전화를 하던가 했어야 했다. 권력자로서의 마크의 '페이스북'에서의 위치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희망적인 결론이 되려면 마크는 적어도 '페이스북'에서의 권력은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다음과 같은 맥락이 다른 질문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많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그들과 친구가 되게 만들지만, 과연 과거의 사람, 혹은 꼭 만나고 싶던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 지금은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 그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인가. ('아이러브스쿨'이 망한 것은 알고 있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5억명의 온라인 친구, 전세계 최연소 백만장자, 하버드 천재가 창조한 소셜 네트워크 혁명!" 그러나 나는 그저 묻고 싶다. 그것은 혁명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방식의 타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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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2-1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11월달에 본 영화들인데, 왠지 밀린 숙제하는 기분으로 쓰고 있음...;;;

네오 2010-12-20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과 타락, 아직 현재진행중이지 않을까여? 소셜네트워크를 좋아하는 핀쳐팬도 많지만, 저는 파이트 클럽의 핀처팬이라서 그냥 이 영화 밍밍하게 봤는데여^^;; 완전 아론 소킨의 영화였어여!!

맥거핀 2010-12-21 18:00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영화 상당히 괜찮게 봤어요. 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화 중 베스트3를 꼽으라면, 이 영화도 한자리에 넣고 싶네요. 말씀하신대로 아론 소킨의 입김도 많이 들어간 것 같지만, 이런 스토리의 이런 내용의 영화를 이정도 퀄리티로 뽑을 수 있는 것은 핀처 감독이라서 가능한 것 같아요.

네오 2010-12-22 18:00   좋아요 0 | URL
아~다시 한번 봐야겠네여,,제가 놓친게 있을 겁니다..베스트3가 몹시도 궁금한,,저는 그냥 마구잡이로 넣어봤을 때 옥희의 영화, 엉클분미, 시리어스 맨인데여^^

맥거핀 2010-12-22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베스트3는 <소셜 네트워크>, <하하하>, <시>입니다.^^
 
골든 슬럼버 - Golden Slu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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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유일한 장점은 "원작도 이래?"라며, 원작을 찾아보게 만든다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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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5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평이 엇갈리네요 ^^ 얼마전에 박중훈이 이 영화평을 주인장처럼 트위터에

소개해서 나름 곤욕(?)을 치른거 같은데 말이죠...

얼마나 엉망인지 궁금해지네요 ㅋ

맥거핀 2010-12-15 14:3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까..박중훈 씨가 어떤 평을 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뭐 그렇다고 곤욕을 치르실 것까지야..;; (요즘에는 심지어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지더라구요.)
나중에 관련된 평들을 좀 찾아보니, 이 영화는 원작소설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들도 어느정도 평들이 갈리는 것 같더라구요. 아무래도 제가 소설을 읽지 않아서 그런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이조부 2010-12-1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중훈도 주인장과 비슷한 평을 했던걸로 기억합니다 ㅎ
 
초능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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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초능력자>가 며칠 전 200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그렇게 탄력있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개봉일에 최다관객수 신기록을 세웠다는 뉴스도 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것 같다. 곧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그 때까지 극장에 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초능력자>는 그대로 묻히기에는 사실 의외로 진중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강동원, 고수라는 꽃미남 배우들을 앞세운 그저그런 슈퍼히어로 영화로만 보기에는 그 질문들이 던지고 있는 깊이가 아쉽고, 그렇다고 좋은 영화로 보기에는 질문들에 대해 내놓은 해답들이 아쉽다. 그저 이래저래 아쉬운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 <초능력자>는 상당히 도식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초인(강동원)의 세계와 그에 맞서는 규남(고수)의 세계는 정확히 갈라져 있다. 초인이 사는 호텔방의 샤프한 세계와 규남이 사는 공간인 뒷골목의 허름한 세계는 그 자체로 대립적이다. 그리고 초인은 혼자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대항하지만, 규남은 외국인 친구들과의 연대를 통해 초인에게 맞선다. 이를 한편으로는 초인은 자꾸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규남은 자꾸 사회속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영화 초반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초인은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괴물과 같은 존재다. 그리고 동시에 초인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반면 규남은 "나 유토피아 임 대리야!"라고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여 설명한다. 즉 규남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유토피아의 임 대리로서, 즉 이 사회 안의 관계망의 일원으로서 보이는 것이다. 

이는 왠지 우리사회의 일면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초인의 초능력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타인의 생각을 조종하여 자신의 뜻대로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단순히 초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굳이 초능력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에 조종당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대부분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한다. 혹은 자각한다고 할지라도 그 감도는 아주 어렴풋하다. 그러므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장면들도 있다. 초인과 규남의 지하철 대결 장면에서 초인의 초능력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규남은 쓰러진 후 겨우 기어서 지하철 벤치까지 오는데, 아무도 그를 돕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길을 바쁘게 갈 뿐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작은 화면을 바라보며. 왠지 이 장면은 초인의 초능력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초인에게 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CCTV가 자꾸 활용되고 있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으로 보인다. '유토피아'에 설치된 CCTV는 물론, 규남과 친구들은 CCTV를 찾아 초인의 자취를 살펴보려 한다. 또한 규남과 초인의 경찰서 씬에서도 CCTV는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조종하는 권력에 대한 대항물로서의 감시의 눈으로 CCTV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규남이 CCTV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처럼, CCTV는 기본적으로 권력 가까이에 있다.) 

한편으로는 규남의 친구들이 외국인들로 설정된 것이 흥미롭다. 이는 어떤 우연의 산물로만 보여지지는 않는데, 예를 들어 유토피아의 사장인 정식(변희봉)의 부인 역시 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들의 (혼혈인) 딸 영숙과 규남을 굳이 영화에서 묶는 것이 그 하나의 증거이며, 굳이 그 이름이 '유토피아'인 것이 또다른 증거이다. 즉 초인의 초능력에 맞서는 일종의 글로벌한 긍정적인 연대가 있는 셈이다. 이것 역시 우리사회의 어떤 일면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무도 그를 돕지 않는 규남 곁에 끝까지 남는 규남의 외국인 친구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 이 장면들은 <괴물>에서 송강호와 외국인이 같이 괴물에 맞서던 초반 장면들을 생각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와는 묘하게 다른 점들이 있다. 그것은 이 장면들에 흐르는 특유의 어떤 정서들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들은 이어지는 몇 개의 코믹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유대를 공고히 하고, 끝내는 그 공감을 관객에게까지 넓힌다. 즉 규남과 그 외국인 친구들이 만드는 연대는 물질적인 관계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닌, 그저 우리네 보통 동네친구들이 보여주는 연대이고, 이들이 만드는 정서는 영화의 전체톤을 지배한다.

이런 대결의 장 속에 또다른 질문들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변형된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이 영화의 다른 부분들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다크 나이트>를 떠올렸다는 분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가 <다크 나이트>와 비슷한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초인은 계속하여 같은 논리로 규남을 밀어붙인다. 그것은 규남이 자꾸 문제를 크게 만들고 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우리사회에서 보수신문들이 잘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왜 시위(점거)를 해서 문제를 크게 만드는가? 그러니까 정부가(혹은 회사가) 강경대응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어쩌면 초인의 말대로 규남이 굳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연이은 사람들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초인은 그저 돈이나 훔쳐가는 데에 만족했을 것이고, 굳이 사람들을 죽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즉 대응하는 선이 커지면 커질수록 악은 계속해서 커진다. 이것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계속 배트맨을 압박하는 논리와 닮아 있고, 배트맨이 계속 고민하던 딜레마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존재가 도리어 조커를 계속 자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이 사회에 존재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조커가 사회의 괴물이고, 도려내야 할 존재인 것처럼, 배트맨 역시 사회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괴물이고, 언젠가 사라져야할 존재이다. <초능력자>에서 초인의 일종의 자포자기적인 삶도 궁극적으로는 여기에 이유가 있다. 그가 아무리 사회에서 조용히 살아가고자 해도, 그가 사회 속으로 스며든 순간 그의 괴물성은 필연적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는 사회에서 괴물로 축출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스스로 격리되어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 아마도 그것이 초인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되는 선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초능력자>가 흥미로워 보였던 이유는 여기에 다른 대답을 던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규남이 초인에게 이름을 묻는 것은, 그를 사회 속의 다른 개체들로, 즉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존재로서 본다는 것처럼 보였고, 초인이 머뭇거리는 순간 <다크 나이트>와는 다른 출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안전한 선택을 한다. 규남은 어느덧 배트맨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좋지만, 아마도 그 순간부터 그도 배트맨처럼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그 딜레마에 대하여 진지하게 숙고해야 될 것이다. 

지금은,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될 것인가를 물을 때보다는,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될 것인가를 물을 때이다. 물론 후자의 질문이 훨씬 답하기가 어렵다. 후자의 질문을 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전자의 질문을 답하고만 영화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덧. 3주 전에 본 영화에 대해 뭔가를 끄적거리기란 상당히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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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5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전후반으로 나누면 초반에는 집중력있게 볼만한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지루해진던데 말이죠~ 음....

맥거핀 2010-12-15 14:3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영화를 상당히 괜찮게 봤습니다. 뭐 굳이 이야기하자면 올해의 발견작(?)이라고나 할까요.
막판에 너무 단선적인 대결 구조가 되고, 대결의 부분만 반복되다보니, 없잖아 후반부에 가서 힘이 상당히 떨어지는 감은 있었습니다.

다이조부 2010-12-1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에 공감해요. 대결 부분이 반복될수록 집에 가고 싶더라구요

주연 배우보다도 고수 친구들이 더 끌리더군요 ㅋ

맥거핀 2010-12-16 12:57   좋아요 0 | URL
매력적인 캐릭터들이었습니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들이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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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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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의 사진을 한참을 들여다 본다. 지젝의 책 <시차적 관점>과 다른 지젝의 책 몇 권, 그리고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책(혹은 그를 다룬 책) 사이로, '한 그루의 사과나무'라는 제목과 함께, 이현우라는 이름이 보인다. 우리 시대의 성실한 북리뷰어, 혹은 '인터넷 서평꾼' 아니면 '서평가' 로쟈의 본명. 한 그루의 사과나무? 출판된 책 같지는 않고, 혹시 기약없는 출판을 기다리고 있는 책인지, 아니면 그의 그저 노트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이 사진은 서평가의 숙명같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서평가의 숙명이란, 결국 언젠가 출판될 자신의 책을 기다리는 것. 그 책의 서평을 써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다른 경우에도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수없는 영화를 본 영화평론가들은 언젠가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정성일이나 김정 등 여러 평론가들의 영화를 우리는 접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요리를 맛본 미식가는, 자신만의 완벽한 요리를 언젠가 만들어낼 것을 꿈 꿀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수많은 책을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써온 서평가는....누군가의 글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읽는 것을 고대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재능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문제다. 재능이 없어도 꿈 꾸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숙명과도 같다.

아마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겠지만, 로쟈의('이현우의'라고 해야겠지만, 우리에게 더 친숙한 이름이니 이렇게 부르도록 하자) 이 책 <책을 읽을 자유>에는 아직 탄생하지 않은 여러 복잡하고도, 흥미로워 보이는 주제를 가진, 미래의 책들이 등장한다. 로쟈가 앞으로 쓰게 되거나, 혹은 결국 쓰지 못하게 될 몇 권의 책들. 언젠가 그 책들이 써질 수 있을까? 글쎄. 뒤의 발문에서 신형철이 그를 '기계'라고 표현한 내용도 있고, 로쟈 자신의 약간은 자조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앞에는 그가 읽는 속도의 몇 배나 될 정도의, 그가 아직 읽지 않은, 그러나 그가 어쩔 수 없이 손을 대고야 말, 수많은 책들이 등장할 것이고, 그는 그 책을 읽고는 무언가 몇 개의 짧은 코멘트들, 혹은 긴 논의들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분명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가 쓰고자 하는 새로운 주제를 가진 책들의 출판 시기는 조금씩 유예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만의 책을 쓰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모든 서평가에게는 또다른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서평가의 일단을 밝힌 바대로, 어쩌면 대다수의 서평가들은 서평을 쓰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며, 최대한 그것을 마감이 다가올 때까지 미뤄두려고 하고, 또한 그 책들의 상당수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좋다, 나쁘다의 기준을 내린 후에는 그것을 합리화하는 작업을 재빠르게 해내는 족속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맞다고 해도, 적어도 확실해 보이는 한 가지는, 서평가들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한 권의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책은 정말 쓰레기군. 이제 다시는 책 같은 것은 읽지 않겠어."라고 결심한다해도, 그의 흥미를 자극할 다른 책은 그가 말하는 그 순간에 어디선가 출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위대한 저작이 말이다.

그럼 서평가의 숙명을 생각해 보았으니, 그런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의 숙명을 생각해보자.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두 가지 부류일 것이다. 소개된 그 책들을 읽을 마음이 있는 사람과 그 책을 읽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 누군가는 읽지 않고서도, 그것을 읽었다는 지식을 내세우려, 혹은 읽었다는 충만감을 느끼려 이러한 서평모음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면 다른 누군가는 앞으로 읽게 될 책들의 어떤 길잡이로 생각하고 이러한 책들을 볼 것이다. 즉 앞으로 읽게 될 책들의 어떤 맛보기로. 아무튼 확실한 것은, 전자이든 후자이든 간에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은 머리 속이 꽤나 복잡해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가 별로 관심없던 주제들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내용을 머리 속에 단편적으로나마 집어넣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앞으로 그가 사게 될 책들의 목록을 생각하고, 그 가격을 어림잡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전자의 사람이나, 후자의 사람이나 이 책 <책을 읽을 자유>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인문학적인 교양에다, 지젝, 데리다, 라캉, 고진 등 주요 현대철학자들의 간단한 이론적 개괄까지 머리 속에 넣게 될 것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구입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책은 전자의 사람들보다는 후자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신형철이 얘기한 바대로, 로쟈 서평들의 강점은 두 권 이상의 책을 무리없이 연결하는 것이다. 즉 로쟈는 어떤 주제에 대한 개괄적인 책들에서부터 심화된 책들까지 부드럽게 독자를 이끌고 간다. 그리고는 그 주제에 있어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책들도 은근슬쩍 끼워넣는다. 그리고 책의 내용에서부터 번역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각 책들을 짚어 나간다(이 책의 또다른 강점은 로쟈의 번역에 대한 지적이다. 로쟈만큼의 인문학적 내공을 갖춘 번역가들이 많지 않은 탓이다 -). 그것은 아마도 로쟈의 오랜 독서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누구나 쉽게 흉내내기란 어려운 것이다.

글쎄.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기에 약간 주저되는 부분은 있다. 전체적으로 주제별로 서평들이 잘 분류되어 있으나, 철학이나 문학비평 등 일부의 주제들로 편중된 경향이 있고, 일부의 글들은 너무 깊게 파고 들기도 하고, 혹은 너무 훑고 지나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표되는 지면들이 달랐던 탓으로 보인다. 그는 책의 앞 부분에서, 서평꾼과 서평가, 서평자와 그들이 쓰는 리뷰를 구분하고 있는데, 지면의 성격에 따라 요구되는 리뷰의 급도 다르며, 내용적인 밀도도 분명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주간지, 문학비평지, 신문, 인터넷 공간 등 여기에 실린 글들이 다양한 매체에 수록된 것이었던 것 만큼, 약간은 산만한 경향이 있고, 중첩되는 내용의 글들도 있다. 즉 그만큼 책의 전체적인 구성의 밀도는 떨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괜한 트집잡기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로쟈의 책읽기 2000-2010'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는 대로, 이것은 그저 지난 10여 년간 로쟈가 성실하게 써 온 독서일기들을 묶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가 요구하는 대로, 다양하게 써온 것이 아마도 로쟈의 잘못은 아닐 터. 그저 독자는 취사선택하여 잘 읽으면 될 일이다.

어쩌면 나의 이 볼멘소리는 다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보다도 로쟈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리송해 보인다는 물음이다. 신형철은 "예나 지금이나 로쟈는 "회색인"이다"라고 썼고, 또 "그러나 나는 인간 이현우가 아니라 필자 로쟈에 대해서밖에 모른다. 인간 김해경이 필자 이상李箱으로 변신한 뒤 김해경을 거울 속에 가둬버린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로쟈의 글에서도 이현우의 모습은 흐릿하다."고도 했다. 내가 보기에도 로쟈는 자신의 여러 글들에서 모호한 입장들을 내비친다. 그것도 아주 군데군데에서만. 그것은 분명 이 서평집이라는 책의 속성에서 기인된 문제일 것이다. 영화평론가들이 영화 뒤에 숨어 있는 것처럼, 음악평론가들이 객석 한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것처럼, 서평가들은 책 뒤에 숨어서 책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자신을 아주 조금씩만 내비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로쟈의, 아니 이현우의 책들을 어서 보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그가 자신의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에 어서 굴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책을 읽을 자유'가 있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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