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광선 - The Green 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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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카메라로 보는 고정될 수 없는 미묘한 심리들. 마지막 녹색광선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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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살의 - Intentions Of Mu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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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작 미니시리즈를 압축한 느낌. 이 여자, 웃기고도, 안타깝고도,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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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2-1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봤습니다..단 한번의 줌인에 그냥 쓰러졌습니다..심리 스릴러 서스펜스라면 이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여? :)

맥거핀 2011-02-14 21:42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에 하나네요. 지금까지 이번 영화제에서 본 작품 중 가장 좋아요. 이마무라 쇼헤이의 초기작들이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명불허전이더군요.
 
<진보집권플랜>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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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 때때로, 아니 의외로 꽤나 자주,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도마 위에 오른다. 그리고 술자리에서건 어디에서건, 많은 경우 그것은 의도치 않은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성있는 논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것은 어떠한 '반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그래서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하자는 거야,라는 말에 이르면, 논쟁은 이미 김이 빠져 버리고 만다. 뭐..그걸 내가 꼭 신경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 건 정치인들이 열심히 생각해야지. 그러나 아주 불행하게도, 사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런 건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책 <진보집권플랜>을 읽기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는 MB정부의 실책들이 들어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주를 이루겠지, 그리고 말미에는 그래서 진보가 집권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논의하고 있겠지. 그러나 이 책의 전체 줄거리는 내가 생각한 내용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오마이뉴스의 기자 오연호가 서울대 법대 교수인 조국과 문답을 벌인 이 책 <진보집권플랜>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앞으로 진보가 만들어가야할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이는 것이다. 조국 교수는 사회 경제 민주화, 교육, 남북 문제, 권력의 크게 4가지 부분에서 앞으로 진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 진보가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진보 세력이 실제로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을 짜야하는지, 실제의 인물들과 조직들을 거론해가며 논의를 펼치고 있다. 즉 이 책의 제목인 '진보집권플랜'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플랜'이란 '진보가 집권하기 위한 플랜'이 아닌 '앞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법(디자인)'이라는 측면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자면 '권력'이라는 말보다는 '정의'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단, 물론 이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권력이든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이 '反 MB'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음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좋은 세상은 '反 MB'로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좋은 세상을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것인가라는 디자인이, 플랜이 필요하다. 그것은 진보가 흔히 공격을 받는 지점과도 맥이 닿아 있다. 진보는 대체로 '듣기 좋은 소리를 하지만,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즉, 되면 좋기야 한데, 그것이 실현 가능하냐,는 논리이다. 그러나 조국 교수는 이 책에서 현재의 실정들을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부분에까지 새로운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제시된 대안들의 상당수는 정책의지만 있다면 실현 가능성이 높고, 일정 부분에서는 기존에 논의되지 않았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엿보인다. 즉 조국 교수의 말들은 과거에 무게중심이 놓여있다기 보다는 명백히 현실지향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그러나 한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마음에 걸리는 점도 있다. 먼저 한 가지는, 미래에 대한 논의는 과거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소위 '진보 정권'(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동안에 이루어진 몇몇의 실정(失政)들에 의한 비판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두루뭉술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미 FTA 문제,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문제, 카드 대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등. 물론 몇몇 말들을 첨언할 수 있다. 먼저 조국 교수가 사실 이에 대한 반성을 할 직접적인 의무가 없다는 점을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이 실정인지 아닌지의 문제도 여전히 일종의 진행선상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문제들을 보는 시각이 앞으로의 진보 세력의 연합에 있어서 하나의 무게추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단적인 질문들이 그렇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민주당 정부를 진보 세력과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조국 교수는 이에 대해 사실 이미 '그렇다'라는 답안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짜여진 정치지형에서 '反 MB'의 구도에 주목하면 민주당을 넣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조국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사실 '反 MB'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점이 아닌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를 첨언하고 싶다. 하나는 전체 논의의 틀을 '진보'가 아닌 '진보, 개혁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조국 교수의 단적인 선택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 한편으로는 책의 전체 논의가 너무 故 노무현 대통령의 유산에 기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점이다(오연호 기자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은 이외에도 있다. 예를 들어 아직도 남아 있는 민노당의 북한에 대한 태도, 국민참여당과 민주당과의 차별성의 문제, 진보신당의 비유연성 등등.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같이 그려나가야 할 좋은 세상을 이야기하려면 그 좋은 세상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만들어놓고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정권을 잡기 위한 연대는 긍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자면 현재 진보 진영의 각 당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세상들의 '다른 점' 그리고 연대가 어려운 점들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그 다른 점들을 깎아 나가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감춘 연대는 언젠가 깨질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이는 점은 또 있다. 좋은 세상도 좋은 세상이지만, 그 좋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만 자꾸 보이는 탓이다. 오연호도 뒤의 에필로그에서 말했지만, 조국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조국 교수에 주목하게 된다. 진보 진영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책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 조건들에 부합하기로는 조국 교수만한 인물도 몇 없다.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문제점을 이렇게 조목조목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면도 그렇거니와 (약간 농담을 섞자면) 그의 외모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꼭 농담만은 아닌 것이, 정치에 있어 겉보기의 중요성은 한나라당의 모 의원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은 조국 교수의 전체적인 틀을 딱히 가늠하기가 주저되는 면도 있다. 그의 전체적인 논의 중에는 우리나라의 아직 수준으로는 이 정도, 더 나아가고 싶지만 이 정도..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종종 있다. 물론 그의 말에는 우리의 현 지점에 비추어 긍정되는 면도 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는 실제로 더 나아가고 싶은 것일까. 그는 처음부터 이 정도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과연 그에게 그가 말한 세상의 조건들이 일정정도 성립되면, 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니 그의 앞날이 궁금할 밖에. 책의 말미에 그는 '폴리페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폴리페서가 된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하긴, 누구에게나 정치 행위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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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2-0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읽었습니다..아~ 요새 글쓸시간이 없어서 후속글 남겨지는게 계속해서 미뤄지네요^^ 그리고 영화보러 영상원, 아트시네마 열심히 다녔습니다. 감독들 GV있을때마다 거의 참석을 하면서 도대체 무슨이야기 하는지 궁금해서요,,맥거핀님도 아트시네마에서 이마무라와 에릭을 보셨군요^^, 그럼 좋은 구정 되시길~

맥거핀 2011-02-02 21:35   좋아요 0 | URL
후속글은 천천히 쓰셔도 됩니다^^. 저도 뭐 그렇게 열심히 글쓰는 편도 아니니, 다른 분 탓할 거리도 못됩니다.아..좋은 영화 보러 다니느라 바쁘시군요. 저도 말씀하신대로 시간이 좀 있어서, 이마무라와 에릭 로메르를 만나고 왔습니다. 좋더군요. 특히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위 영화는 상당히 감탄하면 봤습니다.
좋은 영화들 많이 만나셨으면, 언젠가 그 얘기도 좀 들려주세요. 이거, 요청만 많아지는 것 같네요. 연휴 잘 보내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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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라는 이 책은 1971년 네덜란드에서 벌어졌던 미셸 푸코와 노엄 촘스키, 두 사상가의 TV토론을 기본 축으로, 인간성과 정치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대비하여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토론의 사회자 폰스 엘더르스는 이들 두 사람을 소개하며 흥미로운 비유를 한다. 그는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분을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 오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반대쪽 방향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부분을 보고 두 사람이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결국 동일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다보니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가 결국 어떤 하나의 목표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두 사람이 뚫는 터널이 언젠가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두 사람이 하나의 산을 서로 반대편에서 오르고 있다면 두 사람은 과연 정상에서 만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다.

인간성에 관련된 부분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먼저 벌어진다. 뒤의 '옮긴이의 말'에 잘 정리되어 있지만, 촘스키는 '인간성'이라는 어떠한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또는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방식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주전공인 언어철학의 문제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그는 어떠한 문명의 어떠한 어린이라도 언어를 배울 때에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내는 도식 체계(schematism)를 가지고 접근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도식체계야말로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인간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인간성의 요소가 있으며, 그것은 어떤 하나의 구체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푸코에게 인간성의 개념은 미심쩍은 것이다. 푸코에게 인간성은 어떤 시대상과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의 틀이 반영된 인식론적 지표에 불과하다. 즉 인간성은 어떤 하나의 과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어떤 특정 유형의 담론이 신학, 생물학, 역사학 등과 어떤 관계 혹은 갈등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는 지표인 것이며, 매우 가변적인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여 말한다면 촘스키는 관념론적 입장에 서 있으며, 푸코는 경험론적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내 주전공인 교육학 식으로 (거칠게) 말하자면 촘스키는 객관주의적 입장에 서 있고, 푸코는 구성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입장은 그들이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두 사람의 의견은 충돌되지만, 예를 들어 다음의 부분만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촘스키는 어떤 실체적인 정의에 입각한 긍정적인 미래 사회가 존재할 수 있으며, 개혁가나 혁명가는 그 정당성에 입각하여(즉,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정당성에 입각하여) 혁명이나 투쟁을 행한다고 보았다. 반면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은 권력을 잡은 계급 혹은 권력을 잡으려는 계급이 내놓은 일종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개혁가나 혁명가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하여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 즉 권력을 잡기 위해 혁명이나 개혁을 행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푸코는  "만약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지 확신이 안 선다"라고까지 말한다. 반면 촘스키는 인간성의 내부에 절대적인 기반이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바탕으로 정의 관념이 인간성의 바탕에 깔려 있다고 말한다.  

 

   
 

푸코: 하지만 저는 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을 하는 목표가 더 큰 정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현재의 지배 계급을 축출하고 스스로 집권하게 되면 모든 계급의 권력을 억누르려 들 겁니다.
촘스키: 그러니까 미래를 위한 정당화라는 거지요.
푸코: 물론 그런 정당화를 내세우겠지만, 실제로는 정의보다 권력에 더 관심이 많을 겁니다.
촘스키: 하지만 정당화는 언제나 정의를 내세웁니다. 그렇게 해서 성취된 결과가 정당한 것으로 주장될 수 있어야 정당화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레닌주의자든 누구든 감히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잡을 권리가 있고, 모든 사람을 화장장으로 보낼 권리가 있다." 만약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집권의 결과라면, 그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1장. 인간의 본성_정의와 권력 中 (p.79)

 
   

 

이 부분은 이 토론에서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극명한 지점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우리도 숙고해 볼만한 부분이다. 푸코는 프롤레타리아건 부르주아건 간에 계급투쟁은 정의의 문제라기 보다는 권력의 문제를 담고 있다는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반면 촘스키는 계급투쟁이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해도, 그것은 정의의 이름을 걸고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당한 것, 정의로운 것으로 주장되어야(즉,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인간성 내부에 있는 정의의 관점과 부합하여야) 정당화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푸코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어떤 계급이 권력을 잡는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한 계급의 지배가 되고, 각 개인이 그것에 영속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그의 관점에서는 계급투쟁이란 감시의 주체가 바뀌는 것에 불과한 것이며, 목자권력이 바뀌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5장과 6장을 보면). 반면 촘스키의 입장에서는 어떤 계급투쟁이 진정한 정의를 바탕으로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그 계급투쟁은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 집권은 긍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정의란 "모든 사람을 화장장으로 보낼 권리가 있다."라고 말해지는 것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칠게라도 다음의 몇 가지를 이에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니 내가 우리나라에서 진보 세력의 집권을 바란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기 때문인가. 혹은 그것이 나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가.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 혹은 좋은 사회를 말할 때의 그 좋은 사회란 어떠한 형태의 사회인가. 그 집권한 세력이 내가 원하는 사회와 다른 모습의 사회를 구축하려고 할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푸코 식대로 좋은 사회란 것은 어떤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어떠한 지배 세력이든 감시와 국가이성을 가지고 개인을 옭아맬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그것을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 <진보집권플랜> - 과도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보가 집권을 해야 하는 것은 어떤 사회를 만들기 위함인가. 우리는 그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진보의 집권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사회의 모습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푸코가 암시하는 대로 진보의 집권이란 환상에 불과한가. 혹 그것이 환상이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

너무 1장의 두 사람의 TV토론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다른 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2장은 촘스키의 정치적 견해를 중심으로 촘스키와 프랑스 언어학자 로나 미추와의 대담이 이루어지는데, 촘스키는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비판을 허용하지만, 경제적 모순에 대해서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미국의 이중적 모습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3장에서는 촘스키와 로나 미추와의 대담이 계속 이어지는데 촘스키의 언어철학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1장에서 이루어졌던 푸코와의 대담을 요약하여 촘스키 자신이 정리하고 있다. 4장은 1976년 이탈리아에서 폰타나와 파스퀴노에 의해 이루어진 푸코의 대담이며, 담론의 지배(담론에 작용하는 권력의 문제), 감시와 억압 등의 푸코의 개념들을 푸코 자신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한 푸코는 자기 분야의 전문가나 학자를 의미하는 국지적 지식인과 전통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 가치와 의미를 담지하는 저술가로서의 보편적 지식인을 구별하며, 진리와 관련된 이 두 가지 타입의 지식인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5장은 1978년 푸코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으로 그는 이 강연에서 원시 기독교가 목자(牧者)권력을 행사하게 된 역사적 기원 및 방식과 이러한 목자권력이 그리스 사상과 이질적인 것임을 밝히며, 이러한 목자권력 체제가 현재의 국가이성과 단속 이론(경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6장은 푸코의 간단한 성명으로 이 성명에서 그는 정부의 권력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권리, 그리고 그러한 권리에 기반한 개인들의 연대를 주창한다.

다른 부분들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간 가지고 있던 의문의 실마리를 조금은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촘스키의 여러 저술들을 보면서 그의 언어철학에 대한 생각들과 정치에 대한 발언들이 어떻게 연관될까 궁금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가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본바탕 생각들이 그의 언어학이나 정치적 저술 모두에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언어학 역시 상당히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촘스키와 푸코의 사상에 담긴 기본의 밑받침을 살펴볼 수 있는 대략적인 개론서의 역할로도 손색이 없으며, 한편으로 이 두 사람의 사상이 충돌하는 지점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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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1-2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제목이 좋은데요. 서로 반대편 쪽에서 터널을 뚫고 오다가 언젠가는 서로 만날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말이긴 하지만 맥거핀 님이 말한 산 정상에서는 여차하면 서로 어긋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여하튼 그들은 만날 것이라 봅니다. 만난 지점에서 무척이나 놀라겠죠? 와~ 당신과 내가 생각하는것이 놀랍게도 맞닿아 있었다니?... 저도 이번에 받은 책들이 다 흥미로웠습니다..^^

맥거핀 2011-01-25 23:16   좋아요 0 | URL
읽기 전에는 두 사람의 사상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서는 생각보다 두 사람의 간극이 꽤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왠지 TV토론에서는 푸코가 그걸 알아차리고(?) 별로 말을 많이 안하는 듯한 인상도 있구요. (물론 제 개인적인 인상이지만.) 조금 더 불꽃튀는 토론을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저는 이 책은 괜찮은데, <진보집권플랜>은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어요. 뭐가 나를 불편하게 할까..생각하는 중입니다.^^

네오 2011-02-0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책을 지금에서야 읽기 시작했습니다. 감시와 처벌을여ㅎㅎ, 촘스키는 상당히 좋아하는 분인데,,푸코와 다르다니 ㅋㅋ, 아 미셀공드리가 노엄촘스키 다큐멘타리를 만드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번 영화 좋지 않다고 계속 떠들던데요,,주위에서요 ㅎㅎ

맥거핀 2011-02-02 21:38   좋아요 0 | URL
저도 푸코 책은 대학 때 (어쩔 수 없이) 조금 읽은 게 다입니다. 항상 뭔가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여의치 않네요. 어렵다고 느껴지는 책은 점점 피하게 되고 말이죠. 그러면 안되는데.
음..맞아요. <그린호넷>평이 꽤 별로더군요. 저는 사실 공드리 영화는 좀..<수면의 과학>도 좋다는 평들이 조금 있었는데, 저는 별로였어요. 촘스키 다큐멘터리도 찍나요. 공드리하고 촘스키는 좀 안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카페 느와르 - Café N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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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이 다수 들어있지만, 스포일러라 불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한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햄버거를 먹고 있다. 햄버거를 먹는 것은 아주 흔한 일 중의 하나지만, 이 장면은 낯설어 보인다. 낯설어 보이게 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공간과 시간, 그 자체이다. 먼저 공간의 문제. 이 장면은 피사체를 아주 가깝게 당겨 찍고 있으며, 렌즈의 사용으로 소녀와 소녀 뒤의 공간은 왜곡되어 보인다. 그러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낯설어 보이는 것은, 소녀 뒤의 배경이다. 아무도 없는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있으세요? 소녀가 앉은 햄버거집에는 아무도 손님이 없다. 그리고 저 뒤에서 종업원들만 바쁘게 움직인다. 글쎄. 십년을 넘게 패스트푸드점을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공간이지만, 낯설게 왜곡되어 있는 이 공간의 의미. 그리고 시간. 당신이 소녀가 햄버거를 먹었다는 내용을 영화에 반드시 넣어야만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집어넣을 것인가. 어쩌면 당신은 소녀가 햄버거를 물어뜯는 단 하나의 컷만 집어넣을 수 있다. 또는 햄버거집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부감숏으로 보여주는 컷 뒤에, 바로 소녀가 휴지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을 넣을 수도 있다(즉 굳이 먹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또는 햄버거를 먹는 장면을 6개의 쇼트로 나누어- 정성일은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장면을 6개의 쇼트를 나눈 어떤 영화를 말하며, 왜 아무도 그 장면의 이상함을 말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장면의 의미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 찍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성일은 소녀가 햄버거의 종이껍데기를 벗기고, 햄버거를 꾸역꾸역 다 먹기까지 단 하나의 컷으로 이 프롤로그를 구성하고 있다. 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막막한 시간. 이 장면의 의미는 아마도, 소녀는 앞으로 이런 시간들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의미일 게다. 그 길고 긴 시간들을.

그러므로 이 영화 <카페 느와르>의 시작부분에 관객과 맞닥뜨리는 이 장면은, 관객을 향한 일종의 정성일 식 선전포고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는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공간과 시간이라는 이 두가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먼저 공간의 문제부터. 이 영화는 많이 알려진 대로, 서울의 몇몇 랜드마크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일단 먼저 특이해 보이는 것은 이 영화는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서울은 사대문 안의 공간으로 한정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에 옛날 지도를 삽입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말해지고 있기도 하고, 굳이 그 지도가 아니더라도, 서울에서 몇 년간 살아온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느끼게 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쩌면 거대한 빌딩숲으로 도배되어 버린 강남의 복제된 세계는 더 이상 서울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비슷한 것을 우리는 영화 속 남산타워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속에 수시로 등장하는 남산타워는 홍상수 영화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디서나 우리를 굽어보는 남산타워는 일종의 감시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 한 장면. 영수(신하균)와 관계를 맺은 미연(문정희)의 남편(이성민)은 차창 밖으로 서 있는 남산타워를 바라본 후 조금 있다가 안전벨트를 매고는 운전대를 꺾는다. 여기에 첨언할 수 있는 것. 남산타워는 1969년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굳건하던 시기에 서울의 가장 중심에 세워졌다는 사소한 사실.

어쩌면, 그러므로 우리는 비슷한 방법을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다른 공간들- 예를 들어 청계천 - 에도 적용할 수 있다. 누군가는 리뷰에서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청계천 홍보물이 아닌가..라고 썼던데, 그것에는 별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영화 속 청계천은 위험한 공간으로 보여짐이 그 하나의 증거이다. 다리 아래의 청계천은 선화(정유미)가 이상한 남자에게 쫓김을 당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소복 입은 여자가 서 있는 공간이기도 하며, 등불을 들고 지나가야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속에 흐르는 청계천의 트래킹 숏으로도 말해진다. 이것은 통상적인 청계천의 역방향 트래킹이기도 하려니와, 이 장면에서 청계천 다리 아래로 끝끝내 카메라는 돌아가지 않는다. 오로지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청계천 위의 여러 오래된 상점과 건물들의 모습이다. 마치, 이 때의 카메라는 청계천에서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청계천 홍보물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된다면, 농담 한 마디를 덧붙이겠다. 영화 속에서 청계천이 등장할 때 내뱉어지는 첫 대사는 무려 "나쁜 새끼"이다. (물론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대사는 영화 속 다른 미연(김혜나)이 영수에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더욱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공간보다는 시간이다. 이 영화의 시간은 상당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다. 시간은 한없이 늘어나기도 하고, 한없이 줄어들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버리기도 한다. 그 몇 가지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상한 장면은 영수가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 드는 장면일 것이다. 영수가 망치를 내려치려 할 때 멈춰선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층계참에 멈춰선 아이들은 멈춰버린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상한 것은 동시에 TV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멈춰버린 것 같으나, 사실은 멈추지 않은 시간,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수의 시각에서 본 주관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영수의 주관적인 시간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또 있다. 영화 속에서 미연(문정희)이 큰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영수에게 전하는 또다른 미연(김혜나). 그러나 우리는 몇 장면 지나지 않아, 미연이 멀쩡하게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글쎄. 이 장면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소식을 들은 이후 여러 개월이 지난 것으로 이 장면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사라져 버린 여러 개월의 시간들 - 그것 역시 영수의 시각에서 본 주관적인 시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의 장면은 어떨까. 청계천의 24시간을 빠르게 돌려서 보여주는 장면들 같은 것. 그것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지 않을까. 날림으로 지어진 청계천. 물론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시간.

물론 영화 속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시간들은 영수가 사경을 헤매는 며칠이다. 이 며칠은 다시 현실의 시간들과 대응한다. 그것은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가 오기 전까지의 며칠이다(이 시작은 흑백으로 시작하여, 칼라로 돌아왔다가 다시 흑백으로 끝난다). 영수는 사경 속에서 크리스마스날 선화를 만나고(그는 거기에서 동방박사들을 본다), 동지(冬至)에 선화를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만나게 하며(밤이 가장 긴 날), 그것을 이룬 후에 결국 숨을 거둔다. 그리고 2009년이 오고, 보신각에서 KBS가 숨긴 사운드를 이 영화는 복원하여 보여준다. 즉 2009년을 상징하는 이 장면들이 굳이 필요한 것은, 이것은 현실의 시간이라는 말이며,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의 시간과 이 시간을 대응하여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굳이 이 시간들을 현실의 시간과 대응하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정성일은 다른 인터뷰에서 가능하면, 최대한 영수의 죽음을 지연시키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즉 그는 아마도 가능했다면, 이 며칠의 시간을 실제의 시간과 동일하게 만들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영화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의 관객은 3시간 18분을 앉아있는 것조차 거의 임사체험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쓴다. 그것은 이 시간들이 현실의 시간과 그대로 대응함을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이 시간과 공간들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들은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때로 정치적 메시지이기도 하고, 도덕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며, 주인공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동진 씨의 표현을 조금만 빌리자면,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은 다른 어떤 것들로 물화(物化)되어 있다. 즉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들은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숨어들어가 있지 않고, 앞에 툭 튀어 나와 자꾸만 그것을 바라보게 하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며, 관객들에게 자주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보면 거의 시간과 공간이 주인공이고, 등장인물들은 그 시간과 공간들이 육화(肉化)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등장인물들이 때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백야>에서 나온 대사들을 그대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심상치 않다. 19세기에 쓰여진 말들을 21세기의 사람들이 그대로 내뱉을 때의 이 시간의 교호작용들. 이것은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약점이기도 하다. 영화의 리듬이 일관적이지 않은 것도 어떻게 보면 그 때문이다. 지속적이지 않은 리듬은 때로 영화의 장면들이 거의 분절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런 영화의 리듬은 이 영화가 다른 수많은 영화들의 일종의 메타 텍스트가 되어버린 데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에는 <살인의 추억>, <괴물>, <올드보이> 등등의 여러 영화들이 직접적으로 인용되고 있고, 다른 수많은 영화들이 격자처럼 수놓아져 있다(정성일 감독은 시네마톡에서 혹시 이 영화의 DVD를 발매하게 되면, 영화의 중간에 영향을 받은 장면들의 본래의 영화 제목과 그 장면을 같이 볼 수 있는 부가기능을 넣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많은 영화들의 특정의 장면들, 혹은 특정의 느낌을 이 영화에서 살려내려는 시도는 이 영화의 리듬을 불균질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영화에는 그 영화 나름의 리듬이 있고, 리듬을 제거한 그 장면이란 이미 '그 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만이 강조되고, 스토리와 리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해서 이 영화를 나쁘게만 볼 필요가 있을까. 이 영화는 대신 태도를 가지고 있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시간과 공간만을 가지고 이 영화는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첫 장면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무엇이 이 소녀에게 햄버거를 먹게 하는가. 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꾸역꾸역 햄버거를 먹고 있는가. 해답은 마지막에 밝혀진다. 그녀 뱃속의 아기와 함께 말이다. 그것은 신하균의 죽음을 어떻게든 유예시키려는 태도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것은 정성일의 태도이다. 그 태도는 예를 들어 다음의 한 장면이 암시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영수가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 할 때 실제 죽이지는 않지만, 피 대신에 바닥에 흩뿌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와인, 혹은 미연의 얼굴에 뿌려지는 붉은 피와 같은 것들. 아니면 이런 것은 어떨까. 영수의 죽음이 유예되어야 하지만, 그가 끝내 죽어야 하는 이유. 청계천에서 영수를 극도로 증오한 후, 차에 치일 뻔한 다른 미연(김혜나)의 모습.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아니 남아있는 것이 있을까를 예수의 수난극에서 묻는 소녀. 이 모든 것은 영화를 대하는 정성일의 태도이기도 하며,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할 태도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 그들이 시간과 공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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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잡설, 또는 의문을 덧붙인다.

1.
'세계소년소녀교양문학전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영화에서 제목이 역설적으로 말하는 대로, 누구보다도 가장 교양을 갖추고 있는 것은 소녀들인 것처럼 보여진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의 대비는 흥미로워 보이는데, 남성들은 그다지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지 못하다. 남성들은 청계천에서 여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따라가거나, 동물원에서 쓸데없이 말을 걸면서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하거나(이 장면은 또한 <살인의 추억>의 한 부분을 은근슬쩍 담고 있다), 술이나 마시며 지나간 사건을 한탄하거나, 아니면..딸을 욕망한다. 반면, 여성들은 대체로 긍정적인데, 특히 이 영화에서의 여성들은 연대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미연의 딸과 친구의 대화, 그리고 은하(요조)와 미연(김혜나)의 멋진 오토바이 터널 씬, 그리고 에필로그에서의 소녀들의 연대.

2.
이 영화에는 의미심장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미연의 남편이 한 때 사회주의자였다고 고백하는 장면. 변절한 사회주의자, 또는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중요한 것이 거세된 사회주의자는 때로 어떤 것보다도 위험할 수도 있다.

3.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떠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박쥐>를 오마주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박쥐>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영화니까. 그런 오해는 전적으로 신하균 때문이다. <박쥐>에서 수장된 후 유령이 되어 나타난 신하균은 이 영화에서도 물에 빠지고 나서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 신하균이 물에 젖은 몸으로 서점을 돌아다닐때 나오는 그 음악과 그 장면의 숨막히는 공포감, 그리고 '카페느와르'라는 제목이 나타날 때의 그 압박감은 압도적인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견뎌야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그것은 단지 3시간 18분의 물리성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죽음이 정말 무섭다.

4.
이 영화의 텍스트의 활용은 상당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영화에는 종종 소설의 텍스트가 손글씨로 등장하는데, 이 때 지속적으로 사운드가 텍스트와 불일치한다. 즉, 목소리는 텍스트를 읽어주지 않음으로써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유일하게 텍스트를 읽어주는 것은 마지막 한 번 뿐이다). 동시에 텍스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린다. 그 시간은 그저 이해 없이, 물리적으로 읽을 수 있는 시간밖에는 안된다. 마치 이는 이 텍스트를 절대 읽지 말라는 의도가 담긴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손글씨를 그저 모양만으로만, 고유의 느낌으로만 이해하라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미연(김혜나)이 다른 미연(문정희)의 남편에게 보내는 육성 편지는 화면을 암전해버림으로써 주목하여 들으라는 듯이 느껴지는 반면에, 이를 이렇게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5.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좋은 반응들과 함께, 예상대로 개봉 후 몇몇 신랄한 평을 받고 있다. 그것은 영화 자체의 문제가 물론 1차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편으로 정성일의 위치에서 비롯된 문제가 개입된 것처럼도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정성일이 잘나가는 영화평론가이자, 이미 일종의 권력이 된 것도 그 하나의 이유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의 말실수 때문인가. 그는 한 영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영화에 별점 5개 만점 중 몇 개를 주겠는가라는 질문에 5개라고 답했다고 한다. 글쎄. 나로서는 이것이 왜 공격받아야 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도리어 자신의 영화에 3개나 4개를 주는 감독이 있다면, 그에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왜 그것을 잘 알면서 5개 짜리 영화를 만들지 않으셨어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모든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작물이 사실은 가장 좋다(물론 나도 그렇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일기조차 스스로 써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빈정을 담아 말했다. 정성일 씨가 어서 자신만의 방에서 나오기를 바란다고. 글쎄. 자신만의 방이 잘 구축되어 있다면 굳이 그 방에서 나올 필요가 있을까. 방의 보호벽이 없는 그 세계에 굳이 나와 이전투구를 벌일 필요가 있을까. 정성일은 시네마톡에서 "이런 말을 하면 욕을 먹을 것이 뻔하지만, 이 영화는 나와 영화적 피를 나눈 관객을 위한 영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방을 나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방에 들어오라고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그 방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신만의 영화들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영화에는 있다. 선화가 택한 그 남자는 바로 앞에서 영수와 미연이 본 영화 속의 남자, <극장전>의 김상경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정성일은 우리에게 힌트를 주었다. 그는 시네마톡에서 말했다. "통상 영화 속에서 영화를 보여줄 때는 영화가 나오는 스크린과 그 영화를 보는 관객을 같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 <극장전>을 삽입할 때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즉, <카페 느와르>)의 한 장면처럼 영화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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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1-12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에서 놀라운 통찰력을 보게 되었습니다..본문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잡설에서 1번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2번은 신동일의 나의 친구,그의 아내에서 장현성과 겹치며, 3번은 많이 놀랐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며, 저는 단지 박찬욱이 비발디를 재발견했다면, 정성일은 재배열을 통한 영화듣기를 시도했다라는 글을 써보려고 했으나 흑흑, 4번은 저도 대단히 흥미롭게 봤습니다.진짜로 그 텍스트를 외울때까지 영화를 계속해서 보고싶어지더군여, 그리고 김혜나의 암전이 3번이더가여?, 저는 그 부분이 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습니다. 저의 생각과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마음의 육성이었습니다. 5번은 음, 저는 적극적인 정성일 지지자지만, 그의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비판도 어는정도 수용합니다. 어는 정도,,글 잘봤습니다..그리고 이번달 페이퍼의 선정되신것을 축하드립니다.(음악, 영화 베스트 선정 아직 유효한가요?^^)

맥거핀 2011-01-12 19:09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을 못했네요. 그 사회주의자 아버지 캐릭터는 장현성 캐릭터를 연상시킨다는 점을요. 정성일이 재배열을 통한 영화듣기를 시도했다는 것은 재미있어 보이는데요? (그러니 기회가 되면 글을 써주세요.)
텍스트의 활용에 대해서는 영화 종료후 시네마톡 시간에 묻고 싶었는데, 저까지 질문 기회가 오지를 않더라구요. 저도 그 텍스트를 다시 한 번 보고싶어요. 어떤 내용이었는지,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조차 잘 안나지만. 김혜나의 암전된 육성 편지는 아마 3-4째쯤 나왔던 것 같아요. 연민이 느껴졌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기호로만 된 말들이라고 할까요. 아마 그 편지를 듣는 그 남자도 암흑 속에서 자기 마음 속 깊은 동공을 봤겠지요.
저 역시도 정성일의 영화를 비판하는 목소리 자체는 존중합니다. 다만, 요즘에는 왜 그렇게 빈정대며 글을 쓰는 경향들이 많은지 잘 모르겠어요. 물론, 글을 쓰다보면 빈정대는 표현이 들어갈 수는 있겠지요. 제가 쓴 어느 글들에도 있을 것이구요. 인간이니까요. 다만, 글들 내내 빈정대는 것으로만 일관하는 글들을 보면, 저까지 불쾌해지고는 합니다. 그건 이미 견해의 문제가 아니지요.
이달의 페이퍼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러 글 중에서 하필이면 정성일 님의 말들을 그대로 옮긴 글이라, 민망하네요. 상당히.) 저는 최근에는 옛날 음악들(90년대 중후반)만 들어서 요즘 음악은 베스트를 할 만큼 많이 알지 못해요. 네오님이 혹시 좋은 요즘 음악들을 아신다면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구요.^^

네오 2011-01-13 12:30   좋아요 0 | URL
아~ 빈정대는 글들이 많나요?? 참,,저도 종종 카페느와르를 블로그들이 어떻게 쓰나하고 웹핑을 합니다만,,일관적으로 빈정대는 글을 발견하지는 못했네요,,음,,카페느와르(를 방어하는) 글 반드시 쓰겠습니다..아직은 마구 생각중이라서요TT, 음악 제가 너무 보채는게 아닌지 걱정이네요^^; 지송여,,음악와 영화베스트10 선정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음악선정 대단히 신중해야 겠네여,,참고로 지금생각나는대로 에미넘과 카인웨스트, 벨앤세바스찬, 뱀파이어 위크랜드, 그리고 아케이드 파이어가 베스트5요)

맥거핀 2011-01-13 23:33   좋아요 0 | URL
몇몇 글들을 봤는데, 그런 방식의 글들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그런 방식들의 리뷰가 요즘 대세인것 같지만). 아무래도 저는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네오님의 후속작 글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카페 느와르에 대한 연작글을 쓰신다는 말씀 아직 유효한 거겠지요?
말씀해주신 밴드들과 뮤지션들은 대부분 낯익은데, 뱀파이어 위크랜드는 잘 모르겠네요, 솔직히. 좋은 앨범 추천해 주시면 꼭 들어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다른 음악들이 듣고 싶던 참이었어요.

2011-01-12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2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4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6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7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