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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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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1903년에 태어나서, 1950년에 죽었다. 1903년에서부터 1950년은 전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유럽에 있어서는 격동의 시대였고, 구체제가 몰락하는 시기였으며, 일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였다. 책 뒤의 조지 오웰의 연보를 살펴보면, 그가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서 얼마나 다이내믹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명문 이튼 스쿨을 졸업했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하였고, 유럽의 밑바닥 생활을 스스로 자원하여 체험하였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였다가 적과 내통하는 자로 몰리기도 하였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BBC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의 다양한 경험들은, 그가 집필한 수많은 에세이에 여실히 녹아들어가 있다. 그 일부인 29편의 에세이를 묶은 것이 바로 이 책 <나는 왜 쓰는가>인데, 이 에세이집은 그간 <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로만 널리 알려졌던 조지 오웰의 여러 다른 면모를 잘 드러내 준다.

먼저 드러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및 '정치와 영어', '작가와 리바이어던' 등에서 보이는 엄정한 작가로서의 면모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의 글을 쓰는 동기를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의 4가지로 나누어 말하면서, 본인이 지난 10년을 통틀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중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정치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비추어 보듯, 그가 정치적 사유와 그에 따른 태도를 글쓰기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놓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글들이 어떤 정치적 팜플렛이 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글들이 정치적인 팜플렛의 지위를 벗어나는 순간은 그것이 하나의 예술이 될 때이다. 그의 그런 태도는 짧은 에세이 '작가와 리바이어던'에서 적확히 드러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정치와 영어'를 보면, 그의 작가로서의 언어를 다루는 태도, 그리고 동시에 그가 하나의 예술가인 작가로서, 좋은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가가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 번의 붓터치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단 한마디의 글에도 가장 최적의 표현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작가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또다른 면모는 그의 정치 저널리스트로서의 면모,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가로서의 면모이다. 그의 정치적인 에세이들을 읽어보면, 사실 그의 정치적인 소견이 상당히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자신이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라고 밝힌 것처럼, 그는 생애 내내 전체주의에 맞서는 것을 일종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또한 식민지 시대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지만,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졌으며, '간디에 대한 소견'에서 밝히는 것처럼. 맹목적 평화주의에도 그것의 비현실성을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숙청 등을 예로 들며, 공산주의에도 내내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애국주의에 찬성하였으며, 본인 스스로 2차 세계대전 중 국가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좌절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사실 그가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것도, 이에 비추어 보면 조금은 모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가진 정치적 견해의 의미보다도, 이러한 견해들의 원천이 된 그의 경험이다. 즉 그의 이러한 일견 복잡해 보이는 정치적인 스탠스는 그의 철저한 경험의 산물이다. 이 말은 역으로 그가 그저 앉아서 사색과 글쓰기에 몰두하는 그런 류의 인간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소위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고, 그가 쓰는 거의 모든 글들은 그가 휘두르는 일종의 무기였다. 그는 그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가 글쓰기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꽤나 강력한 무기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스페인 내전에 달려가 직접 총을 들고 전장으로 나서기도 하였고, 전쟁 기간 중 국가의 선전물로 이용되는 BBC에 기꺼이 군에 복무하는 심정으로 일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전생애에 걸쳐 글과 그의 온몸으로 일종의 정치적인 투쟁을 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그럴싸한 철학 이론을 내뱉다가, 스위치 하나를 바꿔다는 것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하게 그와 가장 극에 있던 이론을 내뱉는 '앉아서 말만 하는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이었다.  

동시에 이 에세이집의 많은 글들에서 그의 통찰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것은 어떤 정치적인 통찰에서부터 미래 세계의 세상에 대한 통찰, 우리 일상 생활에 대한 통찰에까지 미쳐있다. '당신과 원자탄' 같은 글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통찰이 소름을 돋게 하며, 일부의 글들은 지금 시대에도 어떤 미래 리포트의 일부로 가져다 놓아도 손색이 없다. '코끼리를 쏘다', '행락지'와 같은 글들은 우리 미래의 생활에 대한 일종의 예언으로서, 더 나아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숙한 통찰로서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며, '"물속의 달"'을 통해 일종의 자기반영적 예언이 된다. 

   
  (전략)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락지' 中, p. 247-248.
 
   

 

한편으로, 그는 현실을 꿰뚫어보는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 냉소적이었다. 그의 어떤 냉소들은 그가 쓴 글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미래 사회의 끝을 어느 정도는 예견하고 있었고, 동시에 현 시대의 세상이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막연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그의 그런 깨달음은 분명히 막연한 것이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막연한 깨달음이나마 갖추고 있지 못하기에 그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것이었고, 동시에 그를 괴롭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가 이튼 졸업생으로서 유일하게 식민지 경찰 생활을 택하고, 그 이후에 빈민의 삶에 스스로 뛰어든 것은 천재적인 통찰가들이 흔히 보여주는 일종의 '부조리함에 스스로 처하기' 혹은 '운명에 맞서기'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많은 글들은 그가 밝힌대로, 전체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이지만, 동시에 어떤 불안한 예감 같은 것들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냉소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려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1984>와 같은 소설을 구상한 것도 아마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그는 우리의 세계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분명히 1984년에는 그와 같은 전체주의의 세계가 거대한 권력을 이루리라고 믿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글로서, 그리고 온 몸으로서 끊임없는 투쟁은 나에게는 어떤 두 가지의 심상을 불러 일으킨다. 그 하나는 일종의 연민이다. 이미 끝을 아는 사람들, 혹은 전체적인 면모를 아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일종의 패배주의가 깃든 자기방어. 그리고 현실주의자들이 가지게 되는 냉소들과 그것이 자아내는 일종의 자기 혐오들이 일으키는 연민 말이다(물론 이것은 조지 오웰에 대한 연민만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귀함이다. 패배가 주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병약한 몸의 뼛가루를 재료 삼아 글을 쓰며, 계속 맞설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고귀함 외에 다른 무엇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는 현실의 통찰을 통해 인간이 결코 선한 동기로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 선함을 믿으려고 애썼다.

오웰의 예상과는 달리 1984년에 우리는 조금은 다른 세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조금은 다른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1984년도 세계의 상당수는 전체주의의 세계였으며, 전체주의의 세계는 아직도 여기저기 곳곳에 그 기운이 남아있다. 그리고 내가 오웰만큼의 통찰력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적어도 거의 확실해보이는 것은 이 전체주의의 기운은 영원히 어딘가에는 남아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지나간 역사를 바꾸려 들 것이고, 단어의 의미를 바꾸고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아직도 수많은 오웰들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오웰들에게 깊은 연민을. 그리고 고귀함을.   

   
 

스코티 말고는 모두가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압수당해 혼자만 담배 없이 있는 그를 보기가 너무 딱해서 나는 담배 말아 피울 재료를 그에게 좀 주었다. 우리는 부랑자 감독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린 학생들처럼 숨겨가며 담배를 피웠다. 담배는 묵인해주되 공식적으론 금지였던 것이다. (중략)
그 때 뒤에서 서둘러 다가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누가 내 팔을 두드렸다. 키 작은 스코티였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우릴 쫓아온 것이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녹슨 깡통 갑 하나를 꺼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신세 진 걸 갚으려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자 이거, 친구."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한테 담배를 좀 빚졌잖아. 어제 나한테 선심을 썼지. 아침에 나올 때 부랑자 감독이 내 담배꽁초 갑을 돌려주더라구. 친절은 베풀면 돌아온다니까. 자 여깄네."
그러면서 그는 내 손에 눅눅하고, 다 썩어빠지고, 구질구질한 담배꽁초 4개를 쥐여주는 것이었다.

                                                                               '스파이크' 中, p. 1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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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1-13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다 쓰고 나니 조지 오웰이 가장 쓰지 말라는 식의 글이 되어 버렸음..허허허;
 
부당거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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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스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제목에서 말하는 '부당거래'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어떤 거래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문제는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커넥션'들은 불법과 범죄와 폭력과 비리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아울러야만 그 거대한 부당거래의 끄트머리라도 조금이라도 끄집어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즉 이것을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것을 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스크린 밖으로 나와서 차가운 관객이 되어 이들을 들여다보아야만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것을 안다. 부당거래를 하는 자들은,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건설회사 사장의 손에서 검사의 손에서 넘어간 시계가, 다시 기자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의 역방향으로 검사는 사장을 위해 적당히 누군가를 '손봐주고', 기자는 검사를 위해 기사를 써준다. 그들은 그저 어떤 것을 주고받는 '정당한' 거래를 한다. 단, 여기서의 정당함이란 그로 인해 쓰러지게 되는 스크린에서 밀려나 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스크린 외곽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스크린에서 밀려난 자들(아마도 상당수의 관객들)이 '위에서 들여다보았을 때' 이것은 부당거래가 된다.

아니, 여기서 다시 복잡한 스토리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복잡한 이야기들보다는 그저 다른 얘기 몇 가지를 하고 싶다. 먼저 이 영화의 뚜렷한 장점들. 스토리를 죽 써내려가는 것으로 200자 원고지를 몇 장이나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스토리는 꽤나 복잡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스토리의 복잡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 묘한 마법을 부린다. 그 마법은 몇 가지로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한 가지는 캐릭터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스토리를 캐릭터들의 관계 중심으로 구축함으로써 스토리를 최대한 캐릭터에 밀착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각 캐릭터를 정지 화면으로 잡고, 간단한 캐릭터 설명을 자막으로 붙이는 것은 이 영화를 캐릭터 중심으로 보라는 감독의 친절한 부연설명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그 캐릭터들의 특징을 잡는 것이나, 각 캐릭터들의 관계를 한 가지의 아주 인상적인 숏이나, 대사로 처리해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팜플렛에 나온 다음의 대사들. 주양 검사(류승범)의 "한번 까드려야 내가 뭐하는 놈인지 아시겄어?!!" 나, 장석구(유해진)의 "절대 나 혼자 못 죽는거 알죠?"같은 것들을 보면, 그 캐릭터의 어떤 특징이나, 관계 같은 것들이 오롯이 드러난다. 즉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도나 사건들의 관계를 설명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든다. 이건 절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영화는 초반에 상당한 리듬감도 덤으로 얻게 된다. 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지나가고, 여러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등장함에도 관객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초반에 만들어놓은 캐릭터들의 힘이고, 처음에 구축한 리듬의 덕이다. 즉 이 영화는 에너지가 넘쳐나고, 그 에너지들이 영화에 지속적으로 힘을 부여하지만, 그것이 너절하게 이어져있다거나, 혹은 뭔가 불안하게 엮어져 있다거나 하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도리어 상당히 '웰메이드'하다는 느낌을 준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들은 지금껏 어떤 불균질하게 넘쳐나는 에너지로 승부하는 것들이었지, 이 영화처럼 매끄러움으로 승부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예를 들어 최동훈 감독이 <타짜>나 <범죄의 재구성>에서 보여준 매끄러운 세공술사 같은 느낌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 감독의 공이라기 보다는 시나리오를 쓴 박훈정 작가의 공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내에는 관객이 어느 캐릭터도 좋아할 수 없도록, 혹은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몇몇 캐릭터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즉 대부분의 대중영화들은 관객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끼워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관객이 온전하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는 없다. 아마도 그래서 에필로그와 같은 영화의 마지막 씬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류승완 감독이 <무비위크>와 한 인터뷰를 보면 봉준호 감독이 대호 형사(마동석)가 죽는 장면에서 영화를 끝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봉준호 감독의 충고를 따랐더라면, 분명히 관객들에게는 덜 환영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 영화와 같은 캐릭터들의 집합이라면, 마지막의 친절하게 정리하는 장면들은 대중영화에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즉 마지막의 몇몇 씬들은 대중적인 결점에 발라주는 일종의 호랑이 연고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금은 과잉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조금은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과도 관계된 것처럼 느껴진다. 류승완 감독이 전작들에 보여줬던 어떤 여러 단점 중의 하나는 작위적인 구성이 자꾸 엿보인다는 점이었다. 물론 영화란 (어느 정도는) 작위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작위성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기어나와보려고 버둥대는 것이 영화의 숙명이고, 이것을 어떤 핍진성이라고 부른다면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런 핍진성이 조금은 의도적으로 결여되었다고 보이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렇게 불평하는 자들에게 에라 엿먹어라 라는 심정으로 밀어붙인 것이 한편으로는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아니었겠는가.) 이번에는 그러한 것들이 최대한 자제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몇몇 마음에 걸리는 장면들이 있다.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질문들. 살인범 이동석의 아내는 왜 그런 캐릭터로 설정되었는가(물론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과 연관된다 - 최철기(황정민)는 왜 그런 이동석을 '찜'하는가), 대호 형사의 장례식 장에서 다운 증후군 아이는 왜 스치고 지나가야 하는가, 황정민이 마지막에 울부짖는 씬에서 굳이 그런 음악을 깔아야만 했을까....등등. 이 첨가물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그러나 아무튼 이것은 <PD수첩>도 아니고, <시사매거진 2580>도 아니고, <뉴스 후>도 아니다. 그저 잘짜인 대중영화이다. 아니, 그저 이 모든 내용이 단지 영화에 불과하다는 닭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대중영화에는 대중영화에 맞는 문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잉이 가져다주는 효과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그럴까. 그러한 과잉은 다른 어떤 것을 약간은 덮으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어떤 묘한 패배의식이나 냉소주의 같은 것들과 연관된 부분이다. 결국 영화가 마지막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결말은 사실 친절한 듯 보이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냉소적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깃털들만 다 부러지고, 몸통은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누군가는 이 말에 이렇게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잖아요! 나의 대답은 그저 위의 말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PD수첩>이 아니다.) 어쩌면 그저 우리 모두는 공범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는 몇몇 선택들이 있다. 처음 장면의 지하철 역과 쏟아지는 뉴스와 신문들의 조합. 살인범 이동석을 다시 비틀어버리기. 주양 검사와 장인과의 마지막 대화 같은 것들.  

꼭 이것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사실 나는 류승완 감독의 능력이 여전히 의심스럽다. 사실 박훈정 작가라는 시나리오 블루칩에(이 매끄러움은 분명히 류승완의 공이라기 보다는 박훈정의 공이다), 주연배우들로 한 연기하기로 소문난 황정민, 류승범, 유해진의 쓰리 콤보 조합에, 요즘 충무로에 연기 좀 한다 싶은 명품 조연들은 거의 모아놓은(한국영화들을 좀 보아온 분들이라면 얼굴들 찾기가 재미가 쏠쏠할 거다. 심지어 안길강은 대사 한 마디 없다) 이 영화이고 보면, 거의 실패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오랜만에 평론가도 관객도 만족할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류승완 감독의 최고작이라는 데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이 영화가 구리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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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5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작년 이랑 2년전에 비해 좋은 영화(?)가 상대적으로 조금 모자라지 않았나

싶어요. 방화에만 한정지어서 말이죠~

어쩌면 올해의 한국영화로 꼽아도 무리는 없을것 같아요. 아직 황해를 안봐서 장담은 ㅎ

맥거핀 2010-12-15 14:31   좋아요 0 | URL
<황해>가 올해 안에 개봉된다해도, 관례상(?) <황해>는 2011년도 후보작으로 올려야할 듯..^^;
꼭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연기의 앙상블이 이보다 더 맞아떨어지는 영화는 찾기 힘들죠.

다이조부 2010-12-15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극장에서 다시 볼까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더군요~ 이 영화에 관하여

반론성격의 글 그러니까 금태섭변호사 가 전직검사 출신인데, 영화의 리얼리티에
관한 문제제기를 한 글을 읽어봤는데 재미있더군요.

맥거핀 2010-12-16 12:57   좋아요 0 | URL
아..그런 글이 있었나요. 재미있겠네요. 찾아서 읽어봐야겠습니다. 뭐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조금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해도, 이 영화의 가치가 그로 인해 훼손되는 부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흐 이전의 침묵 - The Silence Before Bach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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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로서 적을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글쎄.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아니, 몇몇 이미지나 짧은 이야기들은 내뱉을 수 있어도, 영화 내내 흐르던 바흐의 음악들은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는 왠지 '영화'라는 것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영화란 보고, 듣는 것이라는 것. 즉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줄거리를 따라잡거나 해서 없는 무언가를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보고, 들어야 하는 영화이다. 그것을 애써 이해하려고 아등바등 노력해서는 안되는 영화이다. (그러므로 긴 말은 하지 않겠다.)

2.
<바흐 이전의 침묵>. 어쩌면 그 이전을 완벽한 침묵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오만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바흐 이전의 소위 '음악 이전의 세계'가 어떤 형태였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형태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의 세계의 존재 여부를 믿을 수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바흐의 음악들은, 그리고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후기의 음악들은 이 세계의 어느 곳에나 완벽하게 스며들어가 세계와 조응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첼로 연주자의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팔의 움직임에도 있으며,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에도 있으며, 아이들의 합창 속에 나란히 움직이는 입에도 있으며, 조율사의 떨리는 세심한 손길에도 있으며, 고속도로 위의 달리는 트레일러에도 있다. 그것은 기쁨 속에도 있으며, 그리고 영화 속 2차대전 중 유대인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극한 고통 속에도 있다. (개인적인 궁금증. 바흐와 헨델 중 왜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고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인지? 찾아보니 몇몇 흥미로운 대답들이 있기는 한데, 딱 이거다 싶은 거는 없던데.)

3.
우리가 이전에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음악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음악 외부를 도는 기존의 방식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 즉 기존의 클래식 음악 영화들은 작곡가를 둘러싼 어떤 드라마틱한 내용을 재현하거나, 음악 그 자체가 가진 어떤 이야기를 형상화해내는 것으로 음악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어떤 위험이란, 우리가 받는 감동이 그 음악 자체의 감동인지, 아니면 그것의 외부가 우리의 상상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어떤 유사한 감동인지 구분해지기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도 '마태 수난곡'의 발견을 둘러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일부 나오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거의 비디오 아트나 설치 미술에 가깝다. 그저 그것을 듣고 받아들여라! 영화는 말한다. (일부의 지적대로 이러한 것들이 지루함만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있어보이려는 시도'에 불과한가 라는 항변은 그저 카피와 예고편이 불러일으키는 오해라고만 해두자.)

4.
한 가지는 흥미롭다. 그것은 바흐의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만이 아니라 그 음악을 다른 것으로 치환하여도 여전히 일종의 예술품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을 나타낸 악보들. 그 악보들만 바라보아도 어떤 일정한 규칙이 엿보이며, 그 악보를 전혀 읽을 줄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그것에는 일종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대칭의 미학이며, 신이 숨겨놓은 균형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왜 어떤 멜로디의 조합은 음악이 되며, 어떤 멜로디의 조합은 불협화음이 되는가. 왜 어떤 특정한 화음만이 우리 귀에 듣기 좋은가. 왜 어떤 균형만이 우리에게 듣기 좋고, 보기가 좋은가. 아마도 영화에 난데없이 누드가 등장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흐 음악의 예술성은 심지어, 그 음악을 연주하는 자동 피아노에 사용되는 일종의 전자 악보에도 여전히 드러난다. 그 천공(穿孔)들의 오묘한 흐름이라니.
 
5.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나온 당신에게 평균율 클라비어니, 대위법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아마도 바흐의 음악을 듣고 싶어질 것이다. 영화에 아무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없어서 그 감동이 전혀 없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 감동을 다시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내고 싶어서. 그리고 그 반대의 사람들은 반대의 이유 때문에. 바흐 이후의 음악의 세계는 그렇게 당신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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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25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바흐의 음악과 관련된 영화가 있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바흐와 그의 음악은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는 받고 있기는 하나,
그의 작품은 제대로 듣는 사람이 잘 없을 겁니다. 그나마 대중적으로
알려진 미누에트나 G선상의 아리아를 듣기는 하겠지만,,
이 음악만 듣는다고 바흐의 음악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은 저도 바흐의 음악이라곤 이 두 곡이랑 토카타와 푸가 뿐이랍니다.^^;;
바흐의 음악이 위대한 것은 일정한 규칙으로 흐르는 멜로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맥거핀님의 글을 읽고 나니 바흐의 음악을 듣고 싶은데 , , ,
스피커가 먹통이네요-_- 그래도 멋진 글 덕분에 잊혀지고 있었던 바흐를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맥거핀 2010-10-25 23:26   좋아요 0 | URL
몇군데 안하는 영화예요. 안 그래도 곧 내려갈 것 같기도 하고, 생각보다는 평들이 많이 갈리더라구요. 상당수의 분들이 <아마데우스> 같은 어떤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하셨던 것 같은데, 그런 류의 영화는 아닙니다.^^
저도 바흐 음악은 잘 모르구요. 몇 개 들어본 음악들이 있지만, 아직도 음악과 제목들을 헷갈리고 있습니다. 바흐하면 저도 왠지 엄정한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이 영화를 보고서는 바흐의 핵심은 '균형과 대칭'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위의 이미지 처럼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 - Wall Street: Money Never Sleep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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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 있음)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고, 20여년 전의 영화 <월 스트리트>는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예전의 악당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 역시 돌아왔다. 그는 달라져 있을까. 일견 보아서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강연을 하며, 탐욕에 대해 경고하고, 앞으로 탐욕이 낳은 버블 경제가 무너질 것을 예견한다. 그리고 곧 이어 최대의 투자은행은 무너지고, 올리버 스톤 감독은 조금은 유치하게 아이들의 비누방울과 극적으로 떨어지는 주가 그래프를 오버랩시킨다. 그렇다면 그들의 앞날에는 투자은행의 대표 루이스 제이블이 그랬던 것처럼, 지하철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길 밖에는 남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역으로 고든 게코 속에 그 답이 있다.

무너지는 투자 은행과 그로 인한 세계 경제의 침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겪었던 일들이다. 리만 브러더스 사의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경제 광풍은 곧 전세계를 집어 삼켰고, 그것은 이 작은 땅까지 지독한 칼바람이 되어 몰아닥쳤다. 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조용히 모두를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몇 가지의 익숙한 컷으로 보여준다. 급격히 떨어지는 꺾은선 그래프와 소리를 지르는 증권맨들의 모습과 심각하게 머리를 부여 잡은 투자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영화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실제로 그 위기는 어떤 방식으로 전가되는가. 그 경제 위기 속에서 진짜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말이다.

위기가 닥치자 월 스트리트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사실 이것은 진지한 위기 타개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게임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공적자금'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회사의 직원들과 투자한 선량한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라는 진지한 위선을 얼굴에 깔 수 있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캐릭터가 죽으면 순간 실망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충격은 받지 않는다. 실망스럽지만, 그저 다시 새 캐릭터를 만들면 그 뿐이다. 올리버 스톤은 그것을 마지막 인상적인 숏으로 보여준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그 때마다 회의장에서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하는 것처럼 보였던 월 스트리트의 원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지막에 고든 게코와 손을 잡는다. 그는 지금껏 수차례 그러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개책 덕분에 수많은 개미투자자들은 이중의 고통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영화의 중간, 한 아주머니가 게코에게 '모랄 해저드'의 뜻을 묻자, 게코는 '그것은 누가 아주머니의 돈을 가져가서 쓴 다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에 가까운 진실이 있다. '모랄 해저드'는 영화 속에 나온대로, 무너진 투자은행에 공적자금을 무리하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월 스트리트의 그들은 모두들 고통에 신음하는 그 순간에도 최고급 양복을 차려입고,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자선파티에 가서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비싼 바이크를 타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그저 게코처럼 몇 년 살짝 살다가 나오면 된다. 그리고는 게코처럼 비싼 저택을 '비록 전세나마'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내면 그뿐이다. 그리고는 강연회를 돌면서 다음의 세 마디를 선전하면 된다. "내, 책을, 사세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은 무너져 내린다. 뜻조차 모르는 '모랄 해저드' 때문에. 그러므로 '머니 네버 슬립스'라는 이 제목은 왠지 중의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지만, 절대 잠들지 않는 것은 돈 뿐만이 아니다. 그들 역시 절대 잠들지 않는다. 월 스트리트 불패 신화! 여의도 불패 신화! 그것은 영원히 이어진다. 잠드는 것은 그들에게 돈을 맡긴 다른 사람들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온건하나, 너무 급작스럽기 때문에 도리어 냉소적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올리버 스톤은 아예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부동산 투기로 먹고 사는 제이콥(샤이어 라보프)의 어머니(수잔 서랜든의 깜짝 등장)마저 굳이 병원으로 돌려보낸 것을 보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걸어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되었던 간에, 모든 이의 욕망이 이 월 스트리트를 혹은 여의도를 만들어내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미국의 월 스트리트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의 비슷한 월 스트리트들이 공통적이다. 그리고 그 곳들은 또한 비슷한 한 가지의 속성을 공유한다. 그것은 그것 자신들이 어떤 모호한 베일 속에 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 역시 그 모호한 베일을 살짝 들추어보려고 나름 애쓰지만, 그것은 여전히 흐릿하다. 악성 채권이니, 공매도니 하는 말들을 완전히 이해하여 우리가 그 외부의 곁껍질을 살짝 까고 들어가도, 그 내부 깊숙한 곳은 회의실의 검은 벽들로 여전히 둘러쌓여 있다. 우리는 그 내부의 회의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에서 의미있는 눈짓을 주고받고는 자선 파티 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파산의 구렁텅이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들어간다. 그러므로 그 게임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게이머들에게 자신의 게임칩을 맡긴 너희들은 그렇게 당해도 할 말이 없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

영화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 것 같다. 주식 시장에 일시에 퍼지는 괴소문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등등을 보여주는 몇 개의 장면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지만, 몇 개의 장면들은 우리가 수많은 뉴스 클립에서 보아왔던 익숙한 클리셰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전체 내용 역시 그동안 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어왔던 사람들이라면 익히 아는 내용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경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라면 영화가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보이는데, 아예 아무런 설명이 없거나, 전체 이야기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맥락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사건의 흐름을 너무 설명식으로 나열하는 것 보다는 조금은 영화적인 구성들이 필요다고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 어찌되었거나 이것은 대중 영화이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의 흐름을 설명조로 보여주는 다큐물이 아니라 말이다. 돈은 절대 잠들지 않을지 몰라도, 관객은 잠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에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다시 온건하지만 지겨운 할리우드 식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이 영화의 무엇을 해결해주는가.) <7월 4일생>이나 <플래툰>, 혹은 <유 턴>에서 보여줬던 그 반항기나 똘끼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올리버 스톤 감독도 나이가 드니 달라진 것일까. 기껏 마지막에 던진 승부수를 감독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그저그런 대중영화에 스스로 머물고 마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마지막을 예전의 올리버 스톤 식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언젠가 그 아이도 자라서 경제 주체가 되고, 다시 비슷하게 모든 것들은 반복될 것이다. 세계 경제가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돈은 잠들지 않고, 비슷한 게코들은 다시 돌아온다. 게코의 강의를 들으며 공감을 표시하는 학생들과 게코의 책에 싸인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을 또한 마지막의 버블들은 말하고 있다. 버블은 부풀어오르다가 언젠가는 터질 것이고, 터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버블에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전편의 버드 폭스(찰리 쉰)와 찰리 쉰의 아버지 마틴 쉰 등이 깜짝 출연하는 것은 나름의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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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0-20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면서 별 세 개는 안 주기로 결심했더니 별 줄 때마다 아주 애매하네..별점 척도를 10개로 늘려주셈!!
 
옥희의 영화 - Oki`s Movi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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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글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옥희(정유미)는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목소리를 덧붙인다. 나이든 남자를 보고서는 자기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다고, 그리고 젊은 남자를 보고는 언젠가는 그와 헤어지게 될 것을 알았다고. 옥희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들의 어떤 무엇이 그녀에게 그것을 예감하게 했을까. 글쎄. 아마도 어떤 것을 가져다 붙인다해도 그것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옥희 자신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그저 예감하는 것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 그것과 비슷한 하나의 형태를 우리는 때로 '우연'이라고도 부른다. 홍상수의 새 영화 <옥희의 영화>는 알려진대로 여러가지 우연이 겹쳐서 탄생되었다. 우연치 않게 폭설이 내린 사실은 영화의 한 이야기 '폭설후'가 되어 그대로 되살아났고, 이 영화의 세 주연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도 몇 가지 우연이 겹쳐서 캐스팅되었다. 물론 사실 모든 영화들은 우연의 힘이 어느 정도는 개입될 수밖에 없다. 우연한 어떤 일로 주인공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홍상수의 이 영화는 그런 우연성의 힘이 어느 영화보다 크게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문성근의 경우에도 당일의 전화로 급하게 캐스팅이 되었다. 만약 문성근이 그날 어떤 다른 중요한 스케줄이 있었더라면, 이 영화는 또 다른 결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홍상수 감독은 영화의 주요 이야기를 당일에 작성하기로 유명하다. 우연성에 대해서는 일종의 도가 튼 감독이다. 그런 그조차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일종의 그 한계에 가깝게 가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계. 우연이라는 것은 때로 그 한계를 절감케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연은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 애써도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 그것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우연'이다. 영화 속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두번째 이야기 '키스 왕'에서 영화과 학생 진구(이선균)는 벤치에 놓인 우유곽을 보며, 치기가 살짝 섞인 생각을 한다. 이 우유곽이 여기에 놓인 이유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하필이면 그것이 하필이면 그 시간에 하필이면 거기에 놓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다른 확실한 것 하나는, 그것이 거기에 그 시간에 놓인 데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확실한 것 사이의 어떤 갭(gap). 그것에는 이유가 있으나, 우리는 그 이유를 어쨌든 알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가져다주는 어떤 한계를 절감하는 것.

이 영화를 본 며칠 후에 우연히 박성원의 단편소설 <하루>를 읽었다. 여러 사람들의 하루. 그들의 하루는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여러 가지 일을 빚어낸다. 그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무엇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도 해준다. 박성원은 말한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모두 알 수 없고, 세상은 여전히 그 나름의 메커니즘으로 삐그덕거리며 굴러간다. 이 진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말의 의미.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홍상수는 지금껏 여러 영화에서 말해왔다. 그런데 홍상수는 그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가 영화임을 다시 우리에게 일깨운다.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말한다. "배우 해주실 분은 최대한 원래 모델이 된 분과 비슷한 인상의 분을 선택했습니다. 그 비슷함이란 한계 때문에 제가 원래 보고 싶었던 붙여놓은 두 그림의 효과를 절감시킬 것 같습니다." 여기서의 절감은 홍상수의 말대로 여러 해석을 할 수가 있겠지만, 비슷하지만 결국 다르기 때문에 그 효과를 절감(節減)시킨다는 말로 들린다. 홍상수는 '옥희의 영화'라는 특정한 영화를 말하고 있지만, 모든 영화는 '옥희의 영화'의 속성을 공유한다. 모든 영화는 결국 현실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찍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홍상수가 결국 영화의 어떤 한계를 넌지시 드러내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 우연이 빚어내는 한계와 영화가 자아내는 한계가 중첩하는 지점-. 그것이 이 영화에는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이 어디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여전히 요원하다. 더구나 그것을 이렇게 몇 마디의 글로 밝혀내는 것은 말이다. 왜냐하면 글은 언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비트겐슈타인을 데리고 오지 않더라도, 그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려는 몇몇 글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를 보기 전에 한편 흥미로워 보였던 것은 이 영화를 다룬 몇몇 글들에서 이 영화를 어떤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공들인 리뷰 중의 하나인 <씨네 21>의 정한석의 글에는 재미있는 형태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고, 김혜리도 뭔가 그림을 삽입하려고 했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왜 그럴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니,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스토리. '주문을 외울 날', '키스 왕', '폭설후', '옥희의 영화' 네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어 보인다. '주문을 외울 날'을 '키스 왕'과 '폭설후'의 나중의 이야기로 보고, '옥희의 영화'를 극중 극의 형태로도 볼 수 있겠으나(이건 한편으로 '주문을 외울 날'이라는 흥미로운 제목과도 연관된다. '외운 날'이 아니라 '외울 날'이라는 미래형을 굳이 왜 썼을까), 그것에는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점들이 존재한다. 아니 굳이 그것을 설명하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예를 들어 '폭설후'의 경우 그렇다면 이 내용을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러므로 오로지 영화가 스토리만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거부하는 정성일의 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세가지의 겹침. 우연의 한계. 영화의 한계. 그리고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의 한계. 그 한계들은 일종의 절망감을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쓸쓸함은 영화의 겨울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우연이 내포한 어떤 한계는 그러나 절망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영화를 본 후 몇몇 재미있는 글들을 읽었다. 개중에는 그런 글도 있었다. 이 영화는 급하게 찍은 티가 나며, 나에게도 그런 시간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그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다고. 글쎄, 그럴까. 우연히 우리 손에 카메라가 들린다면, 우리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우연은 우연 그 자체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우연에는 직관이라는 것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이 <옥희의 영화>는 전적으로 우연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그저 우연 근처에 가깝게 가 있을 뿐이다. 그것에는 우연 외에 홍상수의 직관(直觀)이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비슷한 내용과 비슷한 배우와 비슷한 스탭과 비슷한 시간으로 이런 내용을 찍는다 해도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고, 불러일으키는 것도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그 누군가의 직관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저 찾아오는 것. 그것을 아까는 '우연'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직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우리는 그 직관의 메커니즘을 세밀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설명 없이 찾아오는 것이며, 예고 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것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설명해 주어도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홍상수는 그것을 영화 속 옥희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끄트머리에서 옥희는 늙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알며, 젊은 남자와는 언젠가 헤어질 것을 안다. 그것은 그저 아는 것이다. 설명할 이유도 없으며,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 주어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옥희의 직관이다.

그리고 그런 옥희의 직관은 관객의 직관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영화의 스토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어떤 심상(心象)을 획득한다. 그 심상은 무엇으로 획득되는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저 그것을 직관으로 부르고 싶다. 우리는 그 직관의 힘으로 우연에 맞선다. 아니 맞선다기 보다는 그 우연을 보충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우연을 보충한다고 말하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연은 한계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다음 날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 도중 '우연히' 그런 말을 들었다. 행복(happiness)이라는 말의 어원은 Hap, 즉 '우연(행운)'이다. 행복은 우연히 찾아온다. 그러나 찾아온 행복이 모두에게 반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 우연이라는 행복은 물론 그것을 알아본 자에게만 받아들여진다. 그것을 알아보는 힘, 그것이 직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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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2-15 0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무척 좋아하는데 반갑네요~ 이달의 당선작 이라 ㅋ

저는 평생 도달하지 못할 상이네요 ㅎㅎ

맥거핀 2010-12-15 14:29   좋아요 0 | URL
이제 확실히 홍상수 감독은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것 같아요.
이 영화 좋아하신다니, 저도 반갑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을 보면 늘 반가워요.^^

다이조부 2010-12-15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영화 중에서 생활의 참견 아니 생활의 발견을 가장 좋아합니다

영화를 반복 해서 보는 스타일이 아닌데도 3번이나 봤어요 ㅎㅎ 유일하게 3번 본 영화

영화광들은 똑같은 영화를 100번 도 되풀이해서 본다고 하는데..... 영화광은 아니라서

홍상수의 3번째 영화 오수정을 봤을때 이 인간은 거장 이구나 싶더라구요~ 젊은 거장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