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연애조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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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YMCA 야구단>,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의 김현석 감독의 신작 <시라노;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를 보았다. 김현석 감독은 야구를 다룬 영화들을 주로 만든 감독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 늘 야구는 일종의 가림막에 불과했고,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것을 조금은 다른 방식의 어떤 사랑이야기, 혹은 일종의 로맨틱코미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상처 입은 남자들의 성장기'라고 부르고 싶다(물론 거의 모든 로맨틱코미디는 성장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김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것이 더 강조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YMCA 야구단>의 선비 호창(송강호)은 유일한 꿈이었던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삶의 목표를 잃은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소일한다. 그러던 그가, 야구를 만나고 신여성 민정림(김혜수)을 만나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YMCA 야구단>의 중심축이다. 비교적 최근 영화 <스카우트>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영화가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영화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혹은 '인간에 대해 예의를 지켰던'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서 스카우터 호창(임창정)이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그저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거의 무의식 속에서 잊어버렸던, 혹은 애써 잊고자 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호창이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이며,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에서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는 없었지만, 호창은 아주 중요한 것 하나를 대신 얻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이 영화 <시라노>도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상처입은 남자의 역할은 시라노 에이전시의 대표 병훈(엄태웅)이 맡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상처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프랑스 희곡 <시라노>의 '시라노'는 추한 남자라는 것이 가장 큰 상처였지만, 이 영화의 병훈은 그보다는 어떤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 마음의 문제 때문에 오래전 여자 희중(이민정)을 놓쳐 버렸다. 그런 그에게 남자 상용(최다니엘)이 그 여자 희중과의 연애를 이루게 해달라고 찾아온다. 병훈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는 그 여자 희중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영화는 짐짓 묻는 척을 한다. 글쎄. 김현석 감독의 전작 <스카우트>를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영화에서도 호창은 선동렬을 스카우트하지 못하는 대신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얻었다. 아무튼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라노>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진심을 '어떻게' 전달하는가를 말하기 이전에, 그 진심이라는 녀석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이다. 그것을 극의 후반 상용의 말들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믿음이 우선이 아니라고, 사랑하니까 믿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영화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이들이 하고 있는 '시라노 에이전시'의 활동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한 가지. 영화의 제목은 <시라노;연애조작단>이지만, 이들의 연애조작 사업은 사실 번번이 실패한다.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연애조작은 결국 실패가 되어 그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그리고 그 덕분에 어떤 이름모를 커플의 연애조작 역시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상용은 그들의 연애조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박작가(박철민)가 그토록 싫어하던 애드립을 현란하게 구사한 덕분에 연애에 성공한다. 즉 이 영화에 의하면, 이들의 연애조작은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 진심이라는 녀석은 그런 방식으로는 조금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른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병훈의 축이다. 젊은 병훈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몰랐고, 자신의 진심을 대면하는 법도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나이든 병훈은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이전에, 먼저 그 마음이라는 녀석을, 혹은 진심이라는 녀석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러나 때로 그 마음은, 그 진심은 아마 무척이나 두루뭉술할 것이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기도 할 것이다. 하나, 그것을 다른 형태로 애써 바꾸려 들지말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것. 그리고 계속 들여다 볼 것. 아마도 그것은 앞으로도, 극 중의 병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필요할 것 같다.

그러므로 이들의 마지막 연애조작이 병훈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조금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영화는 결국 병훈에게 이루어지는, 혹은 그것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이루어지는 거대한 연애조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다른 연애조작들과는 달리, 이 연애조작은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이야기의 곁가지가 조금은 많아 보이기도 하고, 그 덕분에 러닝타임이 필요이상으로 긴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감독이 몇몇 장면들은 마지막까지 잘라내야 할지 고민했을 것 같기도 하다. 송새벽, 권해효, 박철민 등의 명품조연들이 벌이는 장면들은 거의 모두 잘라내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의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특히 권해효의 '후자'씬은 흐름상 거의 필요없는 장면이지만, 살려낼만 하다), 조금은 산만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영화는 안전한 선택을 하고 있으며, 매끄럽고 무리없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것이 감독의 능력이었다. 오버하지 않으면서, 생뚱맞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감독의 내공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감독이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로 비유하자면, 김현석 감독은 꾸준히 안타를 생산해내는 타자다. 단, 장타력이 떨어지고, 개중에는 빚맞은 안타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어쩌면 2루타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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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8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9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2-15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도 올해의 한국영화 후보로 손색이 없지요 ㅋ

최다니엘 보러 갔다가 박신혜한테 푹 빠졌어요 ㅎ

맥거핀 2010-12-15 14:27   좋아요 0 | URL
저도 올해의 한국영화 후보로 올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김현석 감독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이조부 2010-12-1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라노도 좋지만, 스카우트도 곱씹을만한 매력이 있어요

맥거핀 2010-12-16 12:55   좋아요 0 | URL
음..맞아요. <스카우트>도 아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탈주 - Break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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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뚜렷한 몇 가지의 단점들이 있다. 이야기의 리듬이 일정치 않은 것도 그렇고, 주인공들이 때로는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다. 영화 중간에 갑자기 서정적인 장면들이 빈번하고, 약간은 느닷없게 스며들어가 있는 것도, 좋게 보면 이송희일 감독 특유의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쁘게 보면 조금은 잉여의 장면들로 보인다. 인물들을 뒤에서 잡는 빈번한 시점숏이나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장점들도 있지만, 조금은 촌스러운 구석도 있다. 글쎄.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몇 개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건드린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는 어떤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런 영화들이 있다. 정말 어떤 영화들은 아주 촌스러운 화면들을 가지고 있고, 이야기의 흐름에서도 뚜렷한 단점들이 엿보이지만, 기어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들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군대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글쎄. 내가 군대에 대해 감사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쁜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어떤 개인적인 인성의 문제 때문일까.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군대라는 조직의 어떤 문제일까. 글쎄.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가끔 군대를 둘러싼 어이없는 주장들이 난무하는 광경을 본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하다. 그런 주장들을 펼치는 상당수의 남자들을 비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 그들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싹튼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철저하게 타의에 의해 군대라는 아주 어이없는, 비정상적인 조직을 경험했으니까 말이다. 아니 그들의 정신이 군대에 의해 망가졌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군대라는 것은 우리 한국 사회에서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강제로 행해지는 아주 비이성적인, 잔인한 경험들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군대를 어떤 편법을 이용하여 가지 않는 연예인들에게 쏟아지는 지나치다 싶은 잔인한 비난들조차 때로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 이면에는 권력이나 금력의 문제, 이 사회의 계층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나마 가장 만만하고 간편하게 비난을 할 수 있는 계층이 연예인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탈영을 감행한 세 청년도 그러하다. 이병 동민과 일병 재훈(이영훈), 그리고 상병 민재(진이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일면에도 아마 그러한 것들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동민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재훈과 민재는 모두 가난한 청년들이다. 재훈은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다가 군대에 왔고, 민재는 자동차 정비소를 차리겠다는 일념으로 힘겹게 기름밥을 먹다가 군대에 왔다. 그들의 탈영에는 각자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지만, 그들이 탈영한 이후 보여주는 분노들은 그 사연만으로는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일면에는 그러한 가난한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분노가 들어 있을 것이다. 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송희일 감독은 이 문제를 조금 더 확장해 보고 싶은 것 같다. 다시 한 번 제목을 생각해보자. '탈영'이 아닌 '탈주', 그리고 영화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박혀 있다.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아'. 그들이 말하는 여기란 단지 군대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속 동민은 탈영하여 산 속을 맴돌면서 어차피 여기를 나가도 자신에게는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집에 계시는 아버지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가정에 있는 아버지와 군대라는 곳에 있는 다른 아버지들.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이 갈 수 있는 최대한의 땅끝까지 달려간다. 그리고 너른 바다를 만나고, 힘없이 되뇌인다. 한국이 좁긴 좁네.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한민국은 거대한 병영 사회에 불과하다.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만 지옥이 되는 작은 병영 사회. 어디로 나갈 수 없이 3면이 바다로 막혀진, 숨막히고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거대한 감옥. 가난한 젊음들에게 출구란 있을까.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 세 청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그들을 돕는 소영(소유진)의 도움 없이는 아주 좁은 공간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을 돕는 소영 역시 비정규직인 가난한 또다른 청년에 불과할 뿐이다. 그 연대는 아주 작은 것으로도 쉽게 깨질 수 있는 아주 불안한 연대이다. 소영의 또다른 (비정규직) 친구가 도움을 거절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군대와 경찰은 그들에게 소리친다. 영창 좀 갔다오면 끝날 일을 크게 만들지마,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마지막 기회를 줄께. 그러나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없는 것은 소리치는 군대도, 그 소리를 듣는 그들도, 관객들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경고도 없이 사격을 가하던 처음부터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강력하다는 것. 그들이 죽어도 며칠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강력함은 어쩌면 그들 목에서 빛나는 군번줄이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작 부분에 조금 이상했던 것은 그들이 도망치고 사복으로 갈아입으면서도 그 군번줄을 계속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그만큼 이 국가에 길들여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이곳에 어떤 희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재훈은 도망치다 어느 한 순간 군번줄을 던져 버린다. 아마도 그 순간이 재훈이 이곳에 대한 희망을 버린 순간일 것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잔혹하다.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잔혹한 결말이 상징한다. 최근에 이보다 더한 잔혹한 결말을 본 적이 없다. (잔혹하게 피를 뿌려대는 것이 잔혹한 것만은 아니다!) 이송희일 감독은 아마도 작심하고 이러한 결말을 만든 것 같다. 감독은 그만큼 이 사회에 대해 뿌리깊은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아무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잔혹한 결말은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텅빈 극장 안에서 엔딩크레딧을 지키며 앉아있을 수 있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다. 어디로도 탈주할 수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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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 South B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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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이상으로 말랑말랑해진 우에하라 이치로, 그래도 남쪽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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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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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영화의 중요 내용과 원작 웹툰의 중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끼>는 재미있는 스릴러다. 그러나 다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몇몇 석연치 않은 장면들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몇몇 사소한 장면들에서도 그렇고, 인물들간의 관계나 캐릭터들의 모습도 그렇다. 먼저 몇 가지 사소한 장면들. 전석만(김상호)은 왜 갑자기 유해국(박해일)을 습격하는가. 그리고 그는 그날 유해국이 찾아올 것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을까. 하성규(김준배)는 죽어가면서 왜 그렇게 벽에 걸려있는 사진들에 집착하는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유해국은 왜 맨 처음에 이영지(유선)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박해일 정도의 캐릭터라면, 이영지에게 전화를 받았다는 그 사실부터 충분히 의심해보아야만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가 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실 사소한 장면들보다는 조금은 더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캐릭터의 어떤 일관성이나, 그로 야기되는 인물들간의 관계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이 유해국이라는 캐릭터. 그의 전사(前事)는 영화 속에 매우 짤막하게 처리되며, 그와 박민욱 검사(유준상)와의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뉘앙스로만 짐작할 뿐인데, 이것만을 놓고보면, 사실 이야기의 중심 흐름은 약간은 의아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 유해국은 왜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리고 박민욱 검사는 왜 유해국을 그렇게까지 돕는가. 뭔가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이끼>는 이야기의 힘이 캐릭터를 끌고간다기 보다는, 캐릭터의 힘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구조이기 떄문에 캐릭터의 어떤 비일관성, 또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은 이야기의 흐름을 심하게 어지럽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제일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유해국의 아버지 유목형(허준호)이다. 영화만을 놓고 보자면, 이 영화는 거의 유목형의 '실패의 기록'이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유목형은 결국 아무도 교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목형은 영화 속에서 사실 그다지 강해보이는 캐릭터는 아니다. 극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유목형에게 감화되지만, 그 감화의 이유마저도 사실 모호하다. 그리고 유목형은 결국 천용덕 이장(정재영), 전석만, 하성규, 김덕천(유해진) 그 누구도 교화시키지 못했다. 유목형은 영화 속에서 거의 '유약한 선인(善人)'으로만 보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뒷방 늙은이 신세는 사실 거의 정해진 수순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천용덕과 같이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천용덕 이장에게 그는 과연 가치가 있었을까. 영지에게 유목형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면서까지 지켜낼(혹은 현혹될) 가치가 있었을까. 계속 이어지는 질문들, 그것에 대한 어떤 불충분한 해답들. 


..................................

그것들이 기어코 원작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가지 이유들을 어렴풋하게 알겠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강우석 감독이 이 좋은 원작에 무리한 메스를 가져다댔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썼듯이 원작에 메스를 가져다댔다는 사실만으로, 감독을 비판할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화에서 원작에 대한 메스질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원작의 이야기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뒤에 나온 이야기에 비판을 하는 것은 그리 온당치는 않아 보인다. 원칙적으로는 뒤에 나온 이야기는 어떤 새로운 창작을 거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의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 내부의 것만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원작의 어떤 부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모호한 원형같은 것만이 이 영화에는 남아 있으며, 그 남아 있는 원형과 새로운 것들이 이질적으로 섞여 영화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리고 원작과 이 영화를 그저 단순하게 두 개의 이야기로만 놓고 비교해보아도, 원작의 이야기에 손을 들어줄 여지는 충분히 많다. 

먼저 사소한 것들은 패스. 앞에서 제시한 사소한 의문들은 사실 원작을 보면, 거의 해소가 된다. 그래서 나머지 굵직한 것 몇 가지. 먼저 유해국과 박민욱 검사의 앞의 이야기들을 대폭 들어내 버린 것. 이것이 야기한 문제는, 뒤의 문제들과도 연관되지만, 이 두 캐릭터의 행동에 어떤 단순함만을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원작의 훌륭한 점 중의 하나는, 이 앞의 이야기가 계속 뒤의 이야기, 즉 유해국이 아버지 죽음의 미스테리를 캐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데에 어떤 힘의 원천을 부여한다는 것에 있다. 원작에 존재하는 이 앞의 이야기와 유해국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은 유해국의 계속된 행동에 어떤 개연성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며, 동시에 박민욱 검사의 캐릭터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원작 웹툰의 주된 메시지에 강한 알레고리를 제공한다. 즉, 마을 사람들과 유해국은 종내에는 매우 비슷해진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유목형을 강하게 연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박민욱 검사와 유해국의 관계는 느슨하게 천용덕 이장과 유목형의 관계를 다시 연상시키며, 따라서 박민욱 검사가 유해국과 연대하는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어떤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두 사람의 전사를 아예 들어내버렸기 때문에, 유해국은 마을에 들어와 쓸데없이 의심만 하고 사고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이자 좌충우돌 돌진하는 활기찬 인물이 되어 버렸고, 박민욱 검사는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멋진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아마도 박민욱 검사의 몇몇 씬들에서 감독의 전작을 떠올린 사람은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이 이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것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란 유목형이 원작과 달리 유약하지만, 너무 착해진 것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원작과의 차이. 원작과 영화와 가장 달라지는 캐릭터라면 아마도 유목형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유목형은 원작 웹툰에서는 영화와는 달리 상당히 강력해지고, 선악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 영화의 몇몇 설명되지 않은 점들이 이해된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 '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유목형은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도 하필이면 왜 그 구절을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유목형의 감화력. 웹툰에서 유목형의 감화력은 어떤 두려움과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때로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대상이 두려움을 주면, 그 대상을 분석하여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그를 도리어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것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려 한다. 이른바 <미스트>의 세계. 그리고 유목형의 칼질. 영화에서는 이것은 약간은 느닷없어 보이고, 도리어 유약한 자의 어떤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웹툰에서는  이는 충분히 설명이 된다. 유목형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용덕 이장과의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볼 때에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사실 명확해진다. 강우석 감독의 행위는 관객들에게 선악과를 먹이는 것이다. 즉 관객들에게 선악과를 먹여, 관객들이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을 명확하게 가려내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서 관객들이 이 영화의 캐릭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의 스릴러성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 아무래도 강력한 악이 있을 때에 스릴러는 더욱 강해지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솔직히 강우석 감독의 오판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원작의 눅진한 공기에서 오는 어떤 끈끈한 긴장감과 불길한 메시지에서 오는 묵직한 뒷맛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원작의 가장 큰 긴장은 마지막에 찾아온다. 그것은 유해국을 다시 뒤집어 보았을 때에 생긴다. 유해국은 유목형의 모든 행위들을 다시 비슷하게 반복하였으며, 결국 천용덕 이장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상쾌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독자들에게 어떤 불길한 뒷이야기들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를 연상시킨다. 니콜라이가 세미온의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에 그 묵직하고도 불길한 끝맺음. 그러나 강우석은 유해국에게 상큼한 승리를 전달해주고는 느닷없이 이영지에게 그 마지막 자리를 맡긴다. 이 이탈이 가져다주는 어리둥절함.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를 <이끼>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원작 웹툰에서는 그 제목 '이끼'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이끼는 음지에서 자라고, 조금씩 조금씩 바위를 침식해들어가며, 종내에는 그 바위를 망가뜨린다. 그리고 이끼는 아무리 씻어내려고 해도 잘 씻겨내지지 않는다. 다 씻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틈에 다시 그 바위를 조금씩 침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끼낀 바위와 그렇지 않은 바위를 쉽게 구분해내기는 힘들다. 아니, 이끼가 하나도 끼지 않은 바위가 있을까. 이끼는 항상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끼는 누구도, 심지어 바위 그 자신마저도 볼 수 없는 곳에 위치하여, 어느 틈에 그 자신을 파멸시킨다. 그러나 이는 영화 속에서는 박민욱 검사의 말을 통해 그 의미가 너무나도 간단하게 축소된다. 이끼처럼 달라붙어서 살라고, 하찮게. 그러나 이끼는 그렇게 하찮은 것이 아니다. 이끼는 어느 바위에나 존재하며, 결국 바위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끼가 완전히 달라붙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이끼의 확산을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

원작 웹툰의 여러 팬들이 지적한 바대로, 이 이야기의 영화화를 강우석 감독이 맡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원작의 팬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 이야기 자체에도 불행한 일이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모호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있는 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팬들의 지적대로(무리한 바람이겠지만), 이 이야기에 봉준호 감독이 메스를 들이댔으면 어떨까. 아마도 이 영화는 원작의 공기를 간직하면서도, 그 내면에 더욱 묵직하고도 눅진한 이야기들을 담아냈을 것이다. 강우석 감독의 실패한 수술. 수술실에 들어간 복잡한 인간 머피는 단순하고 명쾌한 로보캅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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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4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4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환상의 빛 - Maborosi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을 보았다. 감독의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부터 그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는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세계는 '남은 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계'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세계는 남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우리 인간들이란, 어쩔 수 없이 떠나간 사람들과 이별하여야 하며, 남은 자들이 되어 떠나간 사람을 추억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떠나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죽음일 것이지만, 죽음만이 떠나감의 모든 것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모른다>의 어머니의 부재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영화란 '모든 남은 자들의 이야기'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그 영화들 중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특별한 위치의 일부분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이 가진 어떤 특유의 세계관이 한 몫을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영화 <환상의 빛>에서도 왠지 그것을 말해주는 것 같은 장면이 있다. 주인공 유미코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 남편이 거의 자살과 같은 죽음으로 떠나간 이후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에는 한편으로는 단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막연한 답답함도 있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즉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일종의 죄책감도 있는 듯 하다. 물론 직접적으로 유미코는 남편의 죽음에 아무 책임이 없다. 그러나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곁에서 생을 스스로 마감함을 선택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일종의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유미코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도 관련되어 있다. 집을 떠나는 할머니를 끝까지 막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길로 어디론가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던 것. 유미코는 여전히 자책하고 있다. 내가 그 때 할머니를 필사적으로 막았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새로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된 그 후의 어느날, 그가 죽던 날처럼 어디선가 자전거 방울 소리가 들리고, 옆집의 해녀 할머니는 궂은 날씨에도 물질을 하러 가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날씨는 급격히 나빠지고, 할머니는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그 할머니도 남편과 어린 시절의 할머니처럼, 자신이 막지 않아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되어 있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할머니는 거짓말처럼 살아 돌아오고, 남편은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그 할머니, 불사신이라니까. 이 장면에는 묘한 감흥이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람들이 돌아오거나, 혹은 돌아오지 않거나 하는 것은 남은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남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책감을 느끼거나, 그것 때문에 남은 삶을 괴로워한다고 해도, 그것과 그 사람들이 떠나간 것은 거의 별개의 문제와 같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유미코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막았어도, 할머니는 기어코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고, 남편도 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유미코가 아무리 어떤 저주를 내렸어도, 그 할머니는 살아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기적이나, 미신이나, 노력의 부족이나, 불사신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이 그런 것이다. 삶은 그런 불가해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많은 것들로 이루어지고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 모든 아픈 기억에도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남은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 기억을 떼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픈 기억을 떼어내고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 유미코는 죽은 남편이 남긴 유물인 자전거 열쇠에서 방울만 떼어내려고 하지만, 그 방울만 떼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마도 방울을 떼어내어도 그 자전거 열쇠에서는 방울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숭고하다. 우리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떠나간 사람들을 따라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숭고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는 모두들 어떤 아픈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억들을 품어 내고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이 영화의 후속작 <원더풀 라이프>에서와 같이,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행복한 기억만이 남으면 남은 삶은 과연 행복할까. 혹여 행복할지는 몰라도, 아마도 그것은 숭고한 삶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혹 우리가 원한다 해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 <환상의 빛>에서 장터의 할머니는 유미코에게 넌지시 말한다. 남은 아들은 아주 어릴 때에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아, 나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아들은 아버지의 애초의 부재(不在)는 기억할 것이고, 언젠가는 어머니의 죽음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즉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유미코가 남편의 기억을 잊는 것도 불가능하고, 남편이 왜 죽었는지를 밝혀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어쩌면 새 남편이 내놓은 답이 그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미코가 괴로워하자, 남편은 유미코에게 말한다. 환상의 빛이 있다고. 죽은 사람들은 가끔 그 환상의 빛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간다고 말이다. 어쩌면, 아마도 어쩌면, 그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답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답을 찾아내고, 그 떠나간 사람들의 기억을 가슴 속 어딘가에 담고, 남은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 그것이 아마도 유미코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환상의 빛은 아마도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떠나간 사람들을 붙잡아 두지 않고, 떠나 보내는 하나의 길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이러한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 삶의 어떤 제의들은 떠나간(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어떻게든 우리 삶과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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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감독은 이 담담하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재주를 지닌 감독이다. 그는 롱테이크와 독특한 화면 구성을 통해, 이 이야기들이 관객의 마음 속에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오도록 한다. 그러나 이 화면 구성들은 단지 어떤 스크린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빛이 쏟아지는 외부와 어두운 실내를 분리하고, 창이나 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도록 화면을 구성하고, 주인공을 어두운 실내에 위치시키는 것은, 이동진 평론가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설명한 대로 고레에다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구도이기는 하지만, 밝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갖혀 있는 주인공의 심정을 그대로 표상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밝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주인공은 관객의 마음마저도 괴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아이들이 어두운 터널 안에 있다가 터널을 빠져나가 밝은 빛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여기에 또한 한편으로 주인공들이 입고 있는 옷은 그들의 심리 상태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유미코는 처음에는 계속 어두운,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옷들만 입고 나오다가, 중간에 새 남편과의 안정을 통해 조금은 옷의 톤이 밝아지다가, 다시 괴로움에 빠진 후, 옷이 검어진다. 그리고 가장 괴로움을 느끼고 미친 듯이 따라가는 누군가의 장례식 장면에서 그녀의 옷의 괴기함은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나중 작품들의 원형과 같은 장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유미코의 친정 엄마는 왠지 <걸어도 걸어도>의 어머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머니들이란 사실 어찌나 그렇게 무섭고, 강인할 수 있는지. 사위의 죽음을 맞고도, 태연하게 딸의 곁에서 딸의 앞날을 이야기하는, 그 태평스럽고도, 무심하게 보이는 말투. 그것은 아주 복잡하게 느껴진다. 그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 소소한 솔직함과 따뜻함, 그러면서도 그것은 동시에 무섭고 강인하게 보이기도 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왠지 쉽게 갖출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숭고함의 다른 형태일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유미코도 아마도 언젠가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유미코의 엄마도, 언젠가 그렇게 남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유미코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꼭 남편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나 보내면서 그녀는 가슴 속에 아마도 굳은 살들을 조금씩 쌓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버텨내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앞날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미코도 앞으로도 꽤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버텨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미코도 그렇게 살아낼 것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밝은 빛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우리는 다른 이름의 '환상의 빛'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환상의 빛은, 떠나간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환각의 빛 뿐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안고, 어떻게든 그곳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그 곳에 있는 그 환상의 빛, 유미코가 앉아있던 어두운 방 바깥에 있던 그 환한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 시사회를 보게 해주신 시사회 주관 출판사와 알라딘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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