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 A Brand New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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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을 걸어나가던 그 불안하고도, 단호한 마지막은 단연 올해의 장면이라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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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 A Brand New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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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리뷰를 쓰기가 난감해지는 영화들이 있다. 이야기가 복잡하거나, 구성의 특이점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적어도 되고, 내가 잘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탐구해보는 내용을 적어도 되고, 그 부분에 담긴 숨은 의미를 읽을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적어도 되고, 영화의 어떤 사적인, 공적인 의미가 있으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지만, 어떤 영화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하기가 난감해진다. 어떤 영화적인 기교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 영화, 그렇다고 복잡하거나 난해한 구성도 아닌 영화, 거의 심심할 정도로, 사건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영화들 말이다. 그런 영화들에 있어서는, 내가 그런 류의 리뷰들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영화의 스틸컷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스틸컷만을 줄줄이 늘어놓고, 그 밑에 그 스틸컷 장면의 간단한 설명을 적는 것을 리뷰를 쓰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리뷰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중에서 또 어떤 영화들에 있어서는 아무 말도 안하고 넘어가기란 여간해서는 힘들다. 의외로 드물지 않은 경우지만, 그런 영화들에서 도리어 어떤 '진심'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실하게도, 영화들에게서 읽혀지는 진정성이란 그 영화적인 기교와는 별개인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때로는 현란한 기교가 적시에 터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쾌감도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 <여행자>가 그런 경우다. 이 영화는 어떤 영화적인 기교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이 영화적인 기교에 능숙하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이 영화의 감독 '우니 르콩트'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어쩌면 그런 부분을 일부러 배제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구성도 거의 평면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보육원에 들어오는 소녀 '진희'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그 소녀 진희가 입양되어, 낯선 공항에 발을 내딛는 것으로 끝난다. 그 안의 이야기들도 그리 특별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사건들은 거의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그 안의 사건들은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사건들이다. 낯선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녀, 그 안에서 싹트는 우정, 그리고 소녀들간의 다툼, 아버지를 찾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소녀, 반복되는 이별, 입양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들...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어디론가를 한없이 건드린다. 수차례의 반복되는 이별을 경험하고, 진희가 드디어 새로운 곳으로 한걸음 내딛으며, 단호하지만, 불안한 발걸음을 보여줄 때, 상당수의 관객들은 그 소녀의 앞날을, 앞날에 계속될 여행을 응원하는 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비슷한 무게의 무거움이 가슴을 짓누른다. 우리는 또 저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낯선 공항에 발을 내딛게 했는가. 그 아이들에게 더 좋은 삶을 살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했는가.

이 영화의 어떤 영화적인 기교, 혹은 낯설은 문법이 드러나는 순간은 영화의 처음 부분이 거의 유일하다. 영화의 처음, 이 영화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케익을 사들고 보육원에 들어가, 보육원에 진희를 두고 나오기까지 영화는 대부분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감추며 세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얼굴이 영원히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두 장면, 영화는 의식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비춘다. 아마, 그것이 성장한 후에도 진희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얼굴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처음 장면들은 결국 진희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처음이다. 실제로는 아마도 그보다 훨씬 자주 그 상황동안 진희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얼굴들은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진희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겨우 그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영화적 기교는 마지막에, 이 영화의 거의 유일한 플래시백 장면으로 등장한다. 공항에 내딛기 직전에 끼워넣어져 있는, 자전거를 타고 가며 뒷좌석에서 꼭 껴안았던 아버지의 따뜻한 등 말이다. 즉 이 영화의 영화적인 어떤 기교(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고, 그저 영화적인 문법)는 오로지 진희의 기억을 나타내기 위해서만 보여지는 셈이다.

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진희의 기억을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와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조금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니 르콩트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던 내용을 보면, 이 영화는 진희, 즉 (어떤 의미에서는)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 아니다. 르콩트 감독 자신이 입양아였고, 영화 속 진희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의 이야기들은 누구 한 명의 특정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 때의 모두의 기억이 결합된 결과라고 감독은 밝히고 있다. 즉 스트레이트하게 아무 기교도 없이 전달되는 이 가슴아픈 만남과 이별의 반복은, 누구 한 명의 특정의 가슴 아픈 케이스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우리나라의 어린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이고, 공적 기억임을 이 영화는 들려준다. 그래서 직선적이고, 단순하게 전달되는 듯 했던 이 영화는 개인의 사적 기억을 넘어서, 모두의 공공의 기억, 우리 역사 속에서 가슴 깊숙한 곳에 담아 놓았던 은밀하고 부끄러운 역사적 기억에까지 그 발걸음이 전달된다. 그것을 영화는 타자화된 시선을 통해, 객관적이고, 무덤덤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 무덤덤함은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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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화 중 Best 3을 꼽자면, 이 영화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진희가 공항을 벗어나 새로운 부모에게 걸어가는 그 마지막 장면은 단연 '올해의 장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아이는 '여행자'가 되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삶은 결국 하나의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본 여행자.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이 아이에게는 결국 하나의 길고도 짧은 여행이라는 것 말이다. 다른 하나는 '여행자'라는 말이 가진 하나의 비극적인(혹은 무한한) 속성이다. 결국 '여행자'라는 것의 말의 안에는 '영원한'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행자가 여행을 멈추는 순간, 그(녀)는 여행자가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녀)가 여행자로 불리는 그 동안은 그(녀)는 결국 여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 영원히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어디론가로 계속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 즉 여행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Camel의 노래대로 'stationary traveller'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떠나는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마지막 노래인 '작별'과 '고향의 봄'은 참 서글프고, 인상적이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단 한 곳, 고향에서만은 아마도 불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노래는 오로지 타향에서만이 그 의미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노래를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부르게 하는 것은 그래서 상당히 잔인해보이기도 한다.

그 '여행자'는 어떤 의미에서의 여행자일까. 이 영화의 영문제목이 <A Brand New Life>던가. 거기에 작은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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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1-24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서글픈 이야기였지만
끝에서 강인한 어떤 희망을 봤어요.
진희가 정말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좀 더 단단해져야 할 텐데..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맥거핀 2009-11-25 23:40   좋아요 0 | URL
진희란 이 소녀는 연약하면서도 참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죠.
어린 나이의 김새론이 그 모습을 120% 잘 그려냈다는 것도 경이롭구요.
저도 진희의 행복을 마음 속으로부터 빌어봅니다.
우리가 이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겨우 그것 뿐인것 같아요.
 
파주 - Pa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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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안개 그 자체인 영화, 그들에게 그 안개가 걷히는 순간이 오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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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 Pa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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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미리니름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그 중 한 대의 자동차 안에는 은모(서우)가 앉아 있다. 그녀는 7년 전에 죽은 언니와 같이 살았던 곳, 그리고 3년 전 같이 살던 형부 중식(이선균)을 떠나 인도로 떠났기전 살았던 그 곳, 파주로 가는 중이다. 그녀의 언니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지금 그 형부 중식이 철거민대책위원회(철대위)를 이끌고 있다. 물론 아직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다. 필시 얼마 후에 그녀는 형부를 만나게 될 터이니, 그것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아직은 베일에 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흐릿한 안개들 사이로 무심하게 파주를 가리키는 안내 표지판이 나타나며 영화는 시작한다.

시작부의 이 이미지들은 영화를 전체적으로 지배한다. 흐릿한 안개들 사이로 나타나는 은모 얼굴의 클로즈업 숏. 흐릿한 안개들 만큼이나 모든것은 명확하지 않다. 왜 3년 전에 그녀는 도망치듯이 이곳을 떠났는가, 그리고 왜 그녀는 다시 파주로 돌아가는가, 그리고 그녀의 언니는 어떻게 죽었을까, 중식은 왜 아직 거기에 남아 철대위를 이끌고 있는가, 그리고 중식은 왜 굳이 언니의 보험금을 그녀 앞으로 돌려 놓았을까,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질문- 그녀는 그를, 혹은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가. 클로즈업된 그녀의 혹은 그의 얼굴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관객은 처음에는 그 얼굴들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고 애쓰다가 이내 포기하고 만다. 그 얼굴들은,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고난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듯이, 어딘가에서 표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독의 자비 뿐이다. 어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주기를-.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친절한 방식으로는 전달되지 않는다. 어쩌면 조금은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은모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잡으면서 마치는 이 영화는, 도리어 중간에는 은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상당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은모는 중식이 서울에서 어떠한 일들을 하면서 지내왔는지 모르고(여자 선배와도 어느 정도의 관계였는지 잘 알지 못하고),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중식이 왜 그녀 앞으로 보험금을 돌려 놓았는지도 모르고, 중식이 어쩌다가 철대위를 이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관객들은 그 중 몇몇의 이야기를 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안다고 생각한다. 이 차이, 은모가 모르고, 우리는 알고 있는 것(혹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 또는 오해하고 있는 것)의 차이, 이것이 은모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몇 개는 명확하지만, 또 몇 개는 여전히 흐릿하다. 그리고 감독은 시점을 흩뜨리는 것으로 모자라, 현재-8년 전-다시 현재-7년 전-3년 전-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기이한 방식의 연결로 이 흐릿함을 가중시킨다(더구나 시점을 과거로 이동시킨 후에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순간은 명확하지 않다). 이 흐릿함은 인물들의 묘사에도 여전히 이어진다.

간단히 말하면, 중식은 선하고,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은 몇몇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가 은모를 위해서 모든 책임을 떠맡고, 철대위를 이끌고 하는 것들이 단지 어떤 고귀한 희생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그 이면에는 왠지 다른 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하나는,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심한 나약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밑에서 화염병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위에서 돌아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표정, 혹은 주차장에서 자동차에 틀어박혀 차를 팔고 있는 그런 모습, 가게에서 혼자 소주병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는 모습, 아니 그런 사소한 것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영화의 시작 부분을 다시 기억해보자. 그는 수배된 상태로, (아마도 자신을 대신해) 감옥에 간 선배의 부인(이자 또다른 선배)에게 얹혀 살고 있다. 아마도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게다가 그는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몇 가지들로만 그를 비난하는 것도 온당치는 않아 보인다. 그는 몇 개의 이질적인 것들이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이 그를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것을 운동권 지식인의 일반적인 나약함으로만 연결시키는 것 역시 또한 부당할 것이다.)

아마도 그의 반대편에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은모에게 짓는 그 미소는 거의 악의 화신에 가까운 미소로 보인다. 그리고 그 미소는 종교적인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한다. 공교롭게도 영화를 본 이날은 일요일이었고, 교회에서의 그 날의 말씀의 소재는 창세기에서 하와(이브)가 뱀에게 유혹을 당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알고, 그녀는 알지 못했던 몇몇 일들 때문에, 그녀는 결국 악마의 화신과 손을 잡은 셈이었다. 박찬옥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아마도 이는 '배덕(背德)'일 것이다. 그리고 박찬옥 감독의 좋은 표현대로, 마지막에 그녀는 그녀 안의 괴물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지 배덕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주저하게 된다. 어쩌면 그녀가 배덕한 것이 아니라, 배덕을 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꺼이 파주로 돌아왔지만, 다시 상처를 안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며.

그러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의 실마리는 은모(서우)가 쥐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결국 중요한 질문은 그녀는 그를, 혹은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는가-이다. 은모는 혼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것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아한다. 그녀와 언니의 사이에 중식이 나타나자, 그녀는 둘 사이를 떠나버렸고, 다시 언니가 죽자 중식에게 돌아왔고, 다시 그들 사이에 중식의 여자선배가 끼어들자, 다시 그들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다시 파주로 돌아왔지만, 결국에는 그를 놓아버렸다. 그녀가 중식에게 한 마지막 질문에 대해, 그녀가 원했던 답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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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이야기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이야기보다도 훨씬 중요해 보이는 것은 그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중요해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계속 반복되는 이미지인 불의 이미지, 들끓어오르는 이미지이다. 이 끓어넘치는 것, 그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불은 이 영화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아이에게 쏟아넘쳐 상처를 입히는 뜨겁게 끓어오르는 물, 그리고 죽은 언니의 등의 화상 자국, 가스 폭발 사고, 불타오르는 화염병...계속 물들은 끓어오르고 넘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음에 가깝게 그들을 데리고 간다. 이 끓어넘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장 간단하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들의 욕망이다. 무엇인가를 향한 그들의 욕망은 그들, 혹은 그들 주위의 어떤 것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다. 그 욕망들은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 끓어오르는 욕망이 없다면 그들은 결코 살아갈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차(茶)를 팔던 중식에게 뜨거운 물이 떨어지던(팔 물이 동나던) 장면은 한편으로는 재미있어 보이기도 한다. 아내도 죽고, 은모도 떠나버린 상태에서 살아갈 희망을 잃고 차나 팔며 살아가는 중식에게, 차를 탈 뜨거운 물이 떨어져 버리는 이 장면은 왠지 중식 그 자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건물 속에서 필사적으로 화염병들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아래에서 또다른 죽음의 사신들은 그들에게 또 죽음의 물줄기들을 쏟아 붓는다. 그 욕망이 꺼지게 하려고, 그 살고자 하는 치열한 몸부림을 멈추게 하려고 말이다. 

그 물들이 끓어오르다 못해 폭발하는 상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개다. 결국 안개라는 것은 수증기. 즉 물이 끓어오르다 못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破)괴되어 가는 도시이자 흐릿한 안개로 낮게 깔린 도시 파주(坡州)는 끓다가 넘쳐버린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도시이다. 그 도시에서의 욕망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아주 저열한 수준에서는 번쩍거리는 나이트 불빛이기도 하고, 누군가에는 땅을 독점하고 그곳에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거대한 이익을 남기려는 욕망이기도 하고, 누군가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무너져내리는 건물에 들어가 포크레인에 맞서야 하는 피맺힌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 욕망의 중심의 한 가운데에, 중식과 은모의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혹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것들을 뛰어 넘어야 하는 그런 욕망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들의 운명의 길이란 그저 들끓는 것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들끓다가 못해, 자욱한 안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그런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야기가 안개가 자욱한 파주에 은모가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해서, 은모가 중식과 아닌 미애와 함께 이곳을 떠나는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마지막 장면에 안개가 있었던가. 기억이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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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1-1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끓어오르는 것들의 이미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들
네, 마지막 장면에 안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제겐..
역시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09-11-20 11: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 마지막에 안개가 남아있었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길을 은모가 달려갔다면,
어쩌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신호일지도 모르지요.
 
문명전쟁 - 알 카에다에서 9·11까지
로렌스 라이트 지음, 하정임 옮김 / 다른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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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9․11이 있은 지, 8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9․11은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은 9․11이후 테러를 지원한 세력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라크, 아프간 등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고, 한편으로 미국 내에서는 이러한 보복 공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또 9․11 사건의 희생자의 가족 및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200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을 꼽자면 9․11이 거의 그 첫손에 꼽힐 것이다. 따라서 이 9․11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2000년 이후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하나의 커다란 단초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9․11은 안개에 싸여 있기도 하다. 사건의 자세한 배후 및 내막은 물론이거니와, 9․11이 미국의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음모론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한 때 사망설이 제기되었던, 배후의 중심축인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도 여전히 묘연하다. 여기에 이 책 <문명전쟁>은 밝고도,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세심한 불빛을 제공한다. 이 책은 5년 동안에 걸친, 11개국 6백 여명의 인터뷰를 통해 알카에다의 발족 이전부터 9․11에 이르는 성실하고도 자세한 길을 추적한다. 그 길에서 저자 로렌스 라이트는 길의 전체 여정을 요약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중간중간 옆으로 살짝 눈을 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길의 중간에 머물러 발 밑에 차이는 돌부리를 자세히 관찰하기도 하면서 길의 끝까지 독자를 성실하게 안내한다. 그러나 그 길은 명확한 단선주로가 아니다. 그 길은 복잡하고 군데군데 깊이 파인 러프가 있는 으슥하고 여러 갈래가 나뉘어진 오래된 길이다.

그 하나의 길은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와 그와 함께 여러 가지 것들을 계획하고 실행한 아이만 알 자와히리의 알 지하드를 세심하게 추적하는 길이다. 저자 로렌스 라이트는 사우디에서 성장한 빈 라덴과 이집트에서 세력을 키운 자와히리를 그 출생부터 조금씩 추적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 더 거슬러 오르면 이들에게 어떤 영감을 준 사이드 쿠투브가 있다. 저자는 이들의 출생에서부터 그들이 살아온 경로,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여러 일들까지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다양한 자료를 통해 밀도 있게 조명해 보인다. 이집트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의사로서 여러 사람의 생명을 살린 자와히리가 왜 알 지하드를 조직하고 거대한 지하드(성전)에 나서게 되었는가, 그리고 사우디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사우디 왕가와도 깊숙한 관계를 맺고, 크게 사업을 일으킨 명망있는 사업가 빈 라덴은 왜 알 카에다를 만들고 동굴 속에 숨어 지내게 되었는가.

그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문명전쟁'이다. 즉 이들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물질주의적이고 세속적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탐욕적인 향락적인 문화에서 금욕적이고 신실한 이슬람 문화를 지켜내는 것을 어떤 하나의 사명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의 뿌리는 위에서 말했던, 사이드 쿠투브의 사상과도 일치한다. 어렸을 때부터 사이드 쿠투브의 저작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들이 사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코란의 말씀을 그대로 체화하는 거대한 이슬람 제국의 건설이었고, 그것의 반대편에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미국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니더라도, 미국은 또한 이슬람 세력에게 눈의 가시인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보면, 이들의 적은 꼭 미국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눈으로 보면 혁명적이고 이단적인 의미를 가지는 공산주의 세력 역시 이들의 적이었고, 그외 이슬람 신자이지만, 이단이거나 이슬람의 하나의 분파인 시아파 세력 역시 이들의 적이었다.

   
  신병은 끝없는 육체적 훈련을 견뎌내야 했을 뿐 아니라 알 카에다의 세계관도 주입 받았다. 그들의 강의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조직의 유토피아적 목표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1. 전 세계에 신의 지배를 확립한다.
2. 신을 위해 순교한다.
3. 모든 타락으로부터 이슬람을 정화한다.

이 세 가지 목표에서 알 카에다의 매력과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알 카에다는 정치의 유일한 목적이 종교를 정화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신의 지배가 어떠한 모습일지 의문을 가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상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 개인의 목표인 순교는 여전히 많은 신병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p. 446-447)
 
   


그러나 저자가 이들을 어떤 악마로서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또한 한편으로 자와히리와 빈 라덴의 수많은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이들을 다각도로 조명하려 노력한다. 이들은 또한 한편으로 가족들에게 따뜻한 아버지이기도 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선뜻 내어주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잘 도와주는 그런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것은 단지 자와히리나 빈 라덴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그들 주위에서 같이 테러를 계획하고 실행한 많은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생활을 해나가는 인간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빈 라덴의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빈 라덴을 신앙심이 깊고 비타협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파티마가 카세트테이프를 빌리려고 할 때였다.
"네 아빠가 못 들으시게 해야 한다."
자이나브는 빌려주는 조건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빤 그런 거 던져 버릴 사람은 아니야. 실제로 그렇게 엄격하지 않으시거든. 남자들 앞에서만 그런 척하실 뿐이야."
"노래도 들으신단 말이야?"
자이나브가 놀라서 물었다.
"그럼, 전혀 신경쓰지 않으셔."
말을 좋아한 빈 라덴은 움 칼레드의 집에 말에 관한 책들로 서재를 만들고, 말 사진이 있는 책이나 달력도 걸어두었다. 자이나브는 빈 라덴이 아주 마음이 넓다고 결론지었다. (p. 372-373)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길은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반대편에 있는, 즉 미국에서 이들을 잡기 위해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테러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FBI나 CIA, NSA(미국국가안전보장국)의 여러 인물들, 특히 그 중에서도 그의 중심에 있었던 FBI의 존 오닐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다. 미국은 사실 초창기에는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이슬람 세력을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몇 테러들이 일어난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탐색은 꾸준히 이어지기는 했으나 그다지 높은 강도로 행해지지는 않은 듯 하다. 실제로 9.11 직전에도 이들의 이러한 테러를 암시하는 몇몇 징후들이 감지되었고, 9.11의 실행에 직접적으로 간여된 몇몇 인물들이 미국에 입국한 정보도 수집되었지만, 이러한 정보들은 때로는 묵살되고, 때로는 별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것에는 한편으로 CIA와 FBI의 오랜 반목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관이 가진 정보를 상대방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때로는 정보를 교묘히 감추어 버렸고, 그 때마다 테러 세력들은 새로운 일을 하거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들은 물론 큰 사건에는 공조하기는 했으나, 때로는 거의 공조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중심에는 FBI에서 이들을 꾸준히 추적한 수사관 존 오닐이 있다. 그는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여러 조직들을 이끌어 나가며, 이들을 꾸준히 추적하였고, 예멘에서 미 군함 콜호가 테러 공격을 받아 거의 침몰할 뻔한 상황에서는 직접 현지로 날아가 관련자들을 심문했고,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존 오닐이라는 인물은 또한 한편으로는 세속적이고 향락적인 미국을 대변하는 듯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여자들과 동시에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많은 빚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는 그는 한편으로 불안한 상태였고,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여러 불안함을 잊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러나 그는, 거의 빈 라덴에 비견할 정도로 머리가 좋고, 추진력이 뛰어났으며, 여러 지략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의 빈 라덴을 잡거나, 혹은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빈 라덴이 어떤 거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거의 9.11을 암시하는 발언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선택 몇 가지가 빈 라덴이 9.11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했다. 

존 오닐은 그러나 공교롭게도 9.11이 일어난 날 세계무역센터 안에서 죽었다. 그는 이런저런 문제가 겹쳐 그 이전에 FBI에서 사직했고, 그가 새로 시작한 일의 사무실은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었다. 9.11이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대목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상당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는 건물이 비행기와 충돌한 당시에 건물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으나,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다시 건물로 돌아갔고, 그의 시신은 10여 일이 지난 후에야 잔해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공격을 예견했고, 그 공격을 막아내려고 온 힘을 다해 애썼지만, 바로 그 공격으로 인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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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문명전쟁>은 그 외에도 많은 흥미진진하고도 숨겨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중심축은 자와히리와 빈 라덴, 그리고 존 오닐이라는 세 인물이지만, 그 세 명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알려진,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뒷 배경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때로 표면에서 하나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전달되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서서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 이면의 의미에 대해 독자에게 묻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개의 생각거리들을 제공한다. 자살을 금하는 이슬람의 계율을 반하는 자살 폭탄 테러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되었는가, 왜 테러 세력들은 미국을 주 타깃으로 삼게 되었는가, 그리고 하필이면 왜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를 그 공격목표로 삼았는가, 그리고 빈 라덴이 만약 없었다면, 이 테러들은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등등. 그리고 이 책은 그 나름의 답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 질문의 제시하는 답은 이렇다.

   
  그러나 빈 라덴이 없었다면 이집트인은 단지 알 지하드에 그쳤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의 정적이었을 것이다. 많은 이슬람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 그들의 목표는 민족적인 목표에 집중되어 있었고, 국제적인 지하드 연합을 창출한 것은 빈 라덴의 비전이었다. 몰락하여 사그라져 버릴 수 있었을 조직을 다시 결합한 것은 그의 지도력이었다. 수많은 살인에 뒤따르는 도덕적 논쟁에 귀를 막고 반복된 실패에 무덤덤할 수 있었던 것도 빈 라덴의 불굴의 의지였다. 이는 종교 지도자나 광인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엄한 효과를 얻을 뿐 아니라 목숨을 내거는 상상력을 부추길 수 있었던 데에는 예술적 수완도 한몫했을 것이다. (p. 486)  
   


이 책은 9.11 이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이 끝나는 시점은 9.11이 발생하고 그에 대한 추적이 막 시작되며, 빈 라덴과 자와히리가 어디론가로 종적을 감춰버리는 시점이다. 빈 라덴은 결국 9.11을 일으킴으로써 그가 바라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은 단지 미국의 심장부를 파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목표는 여러 해외에서의 테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미국의 심장부를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거대한 보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국이 이슬람 세력들을 공격하게 하여, 전 이슬람적인 대항을 불러일으키는 것, 전(全) 이슬람 세력을 미국에 대항시켜 미국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목표였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보았을 때 빈 라덴의 계획을 완성시켜준 것은 미국이었다. 여러 이슬람 세력에 거대한 보복을 행함으로써 전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 거대한 보복은 진행중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 한 축에 끌려들어가 있다. 아프간 재파병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해답은 자명하지만, 그의 실행은 쉽지가 않다. 우리도 이 거대한 문명전쟁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선택은 또 앞으로 무엇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이 책 <문명전쟁>은 9.11에서 끝나지만, 9.11 이후의 세계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시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수십명에 달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책 뒤에 색인으로 제공하고 있고, 성실한 색인을 덧붙임으로써 이슬람 지하드 세력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백과사전으로써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분명히 기대만큼의 역할은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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