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리본 - The White Rib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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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상당 부분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당신의 모든 예측을 뒤집어 놓을 최고의 걸작!'이라는 이 영화의 카피 문구가 조금은 의아하게 보인다. 물론 여기서의 의아함은 그 카피 문구의 '걸작'이라는 말보다는 나머지의 말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과연 이 영화는 무엇을 예측하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관객의 예상을 뒤집는 어떤 반전에 가까운가? 영화를 보고 나면, 반전이라는 것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도리어, 영화는 약간 의아하게도, 그 결말 이면의 어떤 것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약간은 특이한 구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마을 학교 선생의 술회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마을 학교 선생은 시작부에 의미심장한 말들을 한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부분을 담고 있으며, 풀리지 않은 비밀을 담고 있으나, 마을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이야기는 이 나라(독일)에서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들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연이은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마을 의사는 누군가가 몰래 설치해 놓은 줄에 걸려 낙마하고, 마을 지주(남작)의 아들은 납치되었다가 돌아오며, 또 누군가는 사고로 죽고, 누군가는 불을 지른다. 그리고 급기야는 한 장애 소년의 눈이 도려내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을 주민들은 불안해하며, 공포를 느끼고, 남작은 마을 주민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며, 범인을 찾으려 애쓴다. 즉 이 영화는 한편으로 추리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과연 그 일련의 잔혹한 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화자인 선생은 마침내 범인을 밝혀낸다. 이것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전체 틀이다.

그러나 왠지 이 영화는 그 전체적인 구조를 스스로가 부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유사 추리물에서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그러나 감독은 거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하나의 예. 영화의 초반 시퀀스에 사건을 보여준 후, 감독은 마을 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며, 화자에 의해 그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클라라의 옆에 모여서 걸어가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고 화자는 술회한다. 이것이 범인 찾기라면, 이 시퀀스야 말로 의심스러운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화자에 의해 지목되는 범인은 범인이 아니며 이러한 시퀀스는 관객의 의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또 하나의 이상함.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마을 선생에 의해 서술되는 1인칭 화자의 시점(視點)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이 영화에는 마을 선생이 결코 볼 수 없는, 알 수 없는 장면들이 자꾸 서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끝까지 이 1인칭 시점의 구성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짐짓 아이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화자의 입으로 다시 서술하도록 한다. 즉 영화는 전체적으로 전지적 시점의 장면들을 꾸준히 보여주면서도, 화자의 1인칭 시점을 끝까지 가지고 있는 것처럼 관객을 믿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그 1인칭 시점을 의심하게 한다. 그 시점 구성의 기이함.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추리물이라면 우리는 그렇다면 이제 화자에 대해 의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실일까. 우리는 그가 내놓은 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아니,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화자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감독은 그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당신이 답을 못찾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들이 모두 일을 벌였다라고 생각한다면, 답은 도리어 간단하고, 간명하다. 그러나 영화를 그것으로만 단정짓고 영화관을 나서는 것은 감독이 원하는 바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영화 안에서 제시된 사실로만 보자면, 아이들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마을 선생의 의심은 어떻게 보면, 잘못된 추리, 혹은 불충분한 추리 쪽에 가깝다. 아이들이 그곳에 나타났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도리어, 몇몇 씬들이 더욱 모호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에바는 왜 그토록 호수로 가는 것을 꺼렸던가. 산파와 의사는 왜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는가...등등.



...................................

그러므로 가장 올바른 길은 범인 찾기에 골몰하는 것 보다는, 아마도 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다시 곱씹어 보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노린 점처럼 보인다. 아주 평화롭고 조용해보이는 이 마을은 이중의 지배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남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제적인 지배와 목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지배. 그러나 이 지배 구조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다. 남작은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에 의한 지배를 공고히 만들려고 한다. 목사는 종교적인 엄숙주의에 빠진 나약한 인간이다. 그리고 마을에 역시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낙마했던 의사는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지르고, 그보다 더한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이중적인 위선은 폭력의 지배에 의해, 그 하위로 조금씩 번져나간다. 물론 그 지배 구조의 가장 하위에 있는 인물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폭력의 지배가 불안하고 기이한 틈새를 펼쳐 보일 때, 오스트리아에서 황태자는 살해당했다. 이제야말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파시즘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일까. 글쎄. 다른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보인다고 해도, 적어도 파시즘이 일반 대중의 불만과 불안,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동요를 그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것만큼은 명백하다. 폭력적인 지배가 공고한 이러한 구조에서 불만이 극도로 응축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불신들이 커져간다. 이때에, 그 폭력적인 지배의 정점들이 갑자기 해체되고 나면, 사람들은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을 걸러내고, 허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물론 사실 파시즘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이외에도 다른 여러가지 것들이 여기에 결합된다. 그러나 아무튼 이 영화는 질문을 하고 있다. 왜 파시즘이 하필이면, 이곳 독일에서 출현하여,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그것의 뿌리의 일부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이 묵직한 질문들을 추리극의 외피를 두른 후, 조금씩 조금씩 슬며시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가 던진 이 차곡차곡 쌓인 질문들은 종내에는 관객을 어디에도, 그 어느 인물에도 마음을 둘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화자인 마을 선생마저도, 관객이 믿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다. 추리극의 구성으로 보자면, 그가 내놓은 해답을 관객이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는 그가 불충분한 추리를 하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이 영화의 구조도 한 몫을 한다), 한편으로 보자면, 그 역시 모자란, 혹은 사려깊지 못한 어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꿈을 꾸었다고 항변하는 제자를 경찰에 신고하는 선생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는 그 역시 목사와 남작의 이중의 지배구조에 갇힌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무거운 이야기를 더욱 묵직하게 하는 것은 음악 없이 진행되는 이 이야기의 서술 방식과 흑백의 하얀 화면이다. 미카엘 하네케는 그 소년과 소녀에게 하얀 리본을 둘렀을 뿐만 아니라, 흑백의 화면을 통해 우리 관객들에게도 하얀 리본을 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무거운 어조로 덧붙인다. 그 하얀 리본은 순수를 상징한다고. 파시즘의 광풍에 섰던 자들이 순수한 혈통을 그토록 부르짖은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어느 곳에서도 순수함을 그 주무기로 내세우는 자들이 있다.


덧.
제6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인데, 글쎄, 좋은 영화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황금종려상 감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유럽 애들의 파시즘에 대한 어떤 공포, 그것에 대한 일종의 위약효과가 작용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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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07-15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5개를 줘야 하나, 4개를 줘야 하나 다시 생각했지만, 이 영화에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어떤 부분이 있다. 그래서, 다시 4개로 수정.
 
나잇 & 데이 - Knight &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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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스토리를 논하는 건 부질없지만, 하하 웃기도 민망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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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길 - Hosu-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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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물이 되버린, 지금 여기 존재하는 어딘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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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길 - Hosu-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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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하게 진행되는 다큐멘터리라 생각했다. 이상하다 못해 괴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늘어선 연립들을, 양 옆에 펼쳐진 집들 사이에 난 길을 고정된 카메라는 몇 분간 그대로 바라본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 전환. 길 아래로 어떤 할머니가 힘겹게 내려간다. 카메라는 그 뒷모습을 무리한 줌으로 당겨서 찍는다. 너무 당기다 못해, 무너진 픽셀이 선명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다시 거칠게 화면 전환. 다시 아까 그 연립. 이번에는 밤이다.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연립의 5층에는 유일하게 불켜진 창문이 보인다. 카메라는 다시 말없이 그 불켜진 창문을 응시한다. 그러나 그 불켜진 창문에서는 관객들이 기대하는 어떤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화면 전환. 이번에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뛰어논다. 아주 오래, 지치지 않고 뛰어논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카메라는 그 아이들을 비춘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일이 있던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것도 불꺼진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통해서 말이다. 정말, 아이들은 지치지 않는다. 경사진 길을 아이들은 쉼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그리고 웃으면서 쫓고 쫓긴다. 쫓겼던 아이들이, 쫓기 시작하고, 쫓았던 아이들이, 쫓기기 시작한다. 계속 웃으면서. 여전히 줌은 반복된다.


그리고, 영화는 급속히 후반부로 넘어가 버린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몇몇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 결정적인 몇몇의 차이점. 영화 후반부에는 예의 그 줌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거의 유일하게 등장하기는 한다. 바로 조금 전의 장면에서만 해도 사람을 경계하며 움직이던 고양이의 사체. 그 줌 된 화면속에 사체 위로 날파리들만 어지럽게 움직인다. 아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고양이 뿐만이 아니다. 화면 속에서 움직이던 할머니와 아이들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을 극명하게 대비해주는 장면. 다시 어둠 속이다. 이제 더 이상 불켜진 창문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검은 암흑 속에서 오로지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러나 이 개 짖는 소리마저도 묘하게 증폭되어 있다. 아니, 나의 착각인가. 암흑 속에서 개 짖는 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리니까 말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에서 문이 쾅 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 역시 나의 착각일까. 그리고 계속 모든 것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아니. 움직이는 것은 있다. 더 이상 줌 하지 않는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기계. 물론 이것은 잘못된 진술이다. 기계 같은 것이 '살아'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지붕을 무너뜨리고, 건물벽을 부수는 저 기계는 실제로 이 마지막에서 '마치 산 것처럼' 움직이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는 필연적으로 질문이 생긴다. 저 기계 외에, 살아 움직이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여기까지가 이 영화 <호수길>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괴이하게 느껴졌던 이 처음의 장면들이 마지막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 줌들을 보고나서야 마지막에 질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니, 다시 정확하게 질문하자면, 어디로 보내진 것일까.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아마도 그 줌들은 '이 아이들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아이들을, 노인들을,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감독의 필사적인 외침을, 그 무너진 픽셀이 선명하게 보이는 줌은 담고 있다. 그리고 물으라는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보내진 것일까.



.............................................

처음에는 거의 기교가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 영화는 관객을 마지막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계속 켜켜이 장면들을 쌓는 영화다. 그 줌의 활용은 물론이거니와, 사운드의 활용 역시 심상치 않다.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의 차이점을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후반부에 들어서 사운드와 화면과의 불일치가 심해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암흑 속에서 개의 짖음과 같이 특정의 사운드가 증폭되기도 하고, 화면과 전혀 상관없는 효과음이 느닷없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불꽃의 이미지를 슬며시 끼워넣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마지막에 묘한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그 공간을 매우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할머니가 지팡이를 집고 힘겹게 걸어가고, 아주머니들이 잡담을 나누는 일상의 평범한 공간. 그 공간들은 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순간, 거대한 유령처럼 변하여 관객들을 습격한다. 공간은 순식간에 곧 무엇이라도 나타날 듯한 이상한 폐허가 되고, 그 속에 유일하게 기계는 살아 꿈틀대며, 조금씩 폐허를 확장해 나간다.

평론가 허문영은 지아장커 감독의 말을 빌려, 다큐멘터리를 두 종류로 나눈 바 있다. 그 하나는 기다림(wating)의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making)의 다큐멘터리이다. 그리고 지아장커가 구축의 다큐멘터리를 보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허문영은 덧붙인다. "이 말은 적어도 지아장커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준다. 그는 다큐멘터리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록은 언제나 기록하는 자를 함께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 <호수길> 역시 굳이 나누자면 구축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줌들의 활용이나, 사운드와 화면의 불일치, 혹은 끼어든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장면을 가지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픽셀이 무너질 정도의 줌으로 아이들을 잡는 장면에서, 어느 순간 화면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해진다. 놀이터의 노는 아이들을 잡는 장면들에서 아이들을 잡는 크기는 그대로인데, 화면은 깨끗해졌다. 좋은 카메라를 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은 카메라가 훨씬 더 대상 가까이로 다가갔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아이들은 카메라로 다가와서 웃으며 카메라를 가리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것의 의도는 사실 명백하다. 기록하는 자와 기록의 대상이 처음보다 훨씬 물리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심리적으로 가까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이 다큐멘터리가 잘 구축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분명히 영화 처음의, 멀리 줌으로 잡은 장면들보다 관객들을 그 아이들에 더욱 가깝게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그 다음 장면들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에 관객들이 가지게 될 감정은 거의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러한 구축의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의 대상보다 기록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다시 지아장커의 말을 상기하자. "기록은 언제나 기록하는 자를 함께 기록하기 때문이다." 즉,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기록하는 자의 태도, 혹은 위치이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감독은 몇 번이나 '우리 동네'라는 말을 썼다. 감독은 이 동네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그 동네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감독은 그 동네의 주민이었다. 은평구 응암 2동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 동네. 다른 어떤 설명을 가타부타 붙일 필요 없이 이 영화는 우리 동네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물론 동네의 모든 집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은평구 응암 2동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호수길'도 존재할 것이고, 어쩌면, 그 길 옆에는 진짜 인공호수라도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예전의 그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 동네를 더 이상 '호수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을 더 이상 '우리 동네'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밀하게 축조된 마지막의 SF적인 공포는 아마도 감독의 내면의 반영일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덧붙였다. 그 마지막의 불꽃 이미지는 그냥 '악!'같은 거라고. 그 비명. 악, 악, 아악.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감독은 말했다. 어느 날 동네에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를 찍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 우리는 어쩌면 이 기이한 낯선 다큐멘터리를 이런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동네에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한 가운데에 거대한 기계를 던져 놓고 그것을 조종해 집을 하나하나 부수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서 어디론가로 보내졌고 기이한 표정없는 사람들이 새로 생겨난 집들을 하나하나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가면을 쓴 사람들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그것에 신경쓸 틈이 없다. 곧 그들은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 좋은 영화를 보게 해주신 인디포럼 및 알라딘 관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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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작가 - The Ghost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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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감상을 방해할, 심각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유령 작가(Ghost Writer)란, 유명인의 뒤에서 유명인의 이름으로 글을 써주는 대필 작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에서는 이를 활용한 영국식 유머가 등장한다. 영화 내내 본명도 등장하지 않는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가 본인을 유령이라고 소개하는 장면. 이 유령작가는 전 영국 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집필하던 전임 유령작가가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려 고용되었다. 즉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유령작가는 이중의 유령인 셈이다. 전면에 나온 아담 랭의 유령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임 작가의 유령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유령작가가 네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미지의 장면을 찾아가는 장면은 꽤나 흥미로운 설정으로 보였다. 죽은 자의 지시를 받는 죽은 자의 유령이라. 그래서 어쩌면, 이 유령작가의 운명은 거의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은 전임 유령작가를 대신하여,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로 결심하던 때부터 이 유령작가의 마지막 운명은 아마도 거의 정해진 것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더구나 이렇게 사람 쉽게 믿고, 쉽게 말하는 유령작가라면 말이다. (아니, 그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진실을 밝혔는데, 입다물고 도망가지 않고, 그 쪽지질은 뭐람. 아무리 정치를 모른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유령작가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은 거의 히치콕식 맥거핀을 쫓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히치콕식 스릴러에 비교하는 리뷰들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자동차 추격씬이나, 주인공의 성격과 같은 몇몇 부분들을 짚어야 하겠지만, 이 맥거핀들의 활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범인찾기와 같은 것들. 전임작가를 죽인 것이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일련의 과정들은, 사실 이 영화에서는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를 죽였는가가 아니라, 왜 그를 죽였는가이다. 사실 누가 그를 죽였는가라는 질문은 거의 답이 나와있는 쉬운 질문이다.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담 랭은 범인이 아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장 그를 죽일만한 개연성이 높은 인물은, 거의 대부분 답이 아니다. 뭐 아무튼 간에. 중요한 것은 왜 그를 죽였는가이다. 그리고 거의 늘상 그렇듯이, 그 단서는 매우 가까운 것에 있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그것에 말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의 성패는 그 마지막 진실이 얼마나 무게 있는 펀치인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글쎄. 하지만 나로서는 그에 있어서는 좋은 점수를 주지는 못하겠다. 영국이 거의 미국의 2중대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뉴스거리인가. 전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의 얼굴을 한 개가 부시의 손에 들려있는 사진은 이미 더 이상 조롱거리도 아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그보다 약간 반 걸음 정도 더 나아가고는 있지만, 그렇게 묵직한 펀치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것을 말해주는 장면이 영화에는 이미 있다. 유령작가가 구글링을 통해 몇몇 결정적인 단서들을 찾아내는 장면들. 구글링만 해도 나오는 것이 무슨 그리 대단한 펀치? 그리고, 솔직히 나는 약간 실소가 나왔다. 고용된지 며칠되지도 않은 유령작가는 구글링을 통해 중요한 단서들을 잘도 찾아내는 데, 그의 오래된 정적(政敵)들은 도대체 그 오랜 시간, 무얼하고 있던걸까.
 
아마도 이 영화의 의미는 그보다 다른 데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튼 그 모든 진실이 결국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다는 사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알아볼 수 있는 유령작가는 결코 전면에 나설 수 없다는 것,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진실의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거의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유령 작가라는 의미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유령 작가는 뒤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때만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유령 작가가 전면에 나서려고 한다면, 그 유령 작가의 운명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진짜 유령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쩌면 가장 큰 맥거핀은 이 영화의 제목일 것이다. 과연 진정한 유령 작가는 누구인가? 아담 랭의 뒤에서 그의 삶을 써내려가던 거대한 유령 작가는 과연 누구인가.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를 히치콕식 정치 스릴러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약하지만, 아마도 영국식 블랙코미디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에 의해 반복되는 몇몇 말장난들도 그렇고, 몇몇 정치적인 유머들도 그렇다. 예를 들어, 전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를 연상시키는 배우를 미국 국무장관 역에 배치시키는 것이나, 국제사법재판소를 따르지 않는 몇몇 나라들이란 오로지 미국과 그 적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이는 로만 폴란스키의 미국에 대한 영화적인 소심한 항변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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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17: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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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6 15: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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