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 Bob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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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미리니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치 영화다. 글쎄. 정치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상당히 노골적인 정치색을 띠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들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여러 리뷰들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영화의 제작을 둘러싼 몇 가지 이야기들. 이 영화는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아직도 추앙받고 있는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의 마지막 날을 다루고 있으며, 영화에 출연한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 마틴 쉰, 안소니 홉킨스, 로렌스 피쉬번, 헬렌 헌트, 샤론 스톤, 데미 무어, 크리스찬 슬레이터, 샤이어 라보프, 린제이 로한, 애쉬튼 커처, 헤더 그레이엄, 프레디 로드리게스 등 -역시 대부분 민주당 지지자들로서 거의 개런티를 받지 않고 출연했다는 점,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에서야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제작되고 개봉한 시기는 2006년,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참고 견뎌야 했던 시기였던 부시의 시대였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굳이 그러한 영화 주변의 이야기들을 끌어모으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정치색은 거의 명백해진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바비, 즉 로버트 케네디는 모사되지 않는다는 점. 즉 이 영화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누군가가 그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당시의 자료화면과 실제 연설목소리로 대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속 로버트 케네디의 연기가 필요한 시점에서도 연기자는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카메라는 교묘하게 그의 얼굴을 피해서 지나간다. 이 이유는 명백하고도 단순하다. 그것은 결국 관객들에게 이 사건이 가짜의 사건이 아님을, 즉 만들어내거나 모사한 어떠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건임을, 그가 행하는 모든 말들이나, 행동이 각색된 것이 아니라, 그 날 것 그대로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마지막에 이어지는 총격 사건에서 계속 울려퍼지는 그의 육성 연설문. 명 연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이 연설은 영화 속 마지막과 어우러져, 관객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아마도 상업영화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정치인의 연설을 십여분 이상 직접적으로 들려주며 영화를 끝내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이것이 노골적인 정치 영화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노골적인 정치영화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 영화가 영화 자체로서의 어떤 울림을 주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는 조금은 산만하고도,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를 실제로 이끌어가는 것은 이 영화의 타이틀 롤인 바비, 즉 로버트 케네디가 아니라, 로버트 케네디가 총격을 받던 그날, 앰배서더 호텔에 있던 여러 인간 군상들이다. 그 인간 군상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돈 드라이스데일의 6경기 연속 완봉 투구를 보러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멕시코인 호텔 직원, 호텔의 지배인으로서 다른 여직원과 불륜 관계에 빠져 있는 남자, 알코올에 찌들어 있는 나이든 여가수, 옛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늙은 호텔 직원, 마약에 빠져 할 일을 제쳐두고 마는 철없는 선거운동본부의 운동원들, 고압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호텔의 또다른 직원,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여자, 항상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상류층 여자, 스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젊은 여자, 새로운 세상을 생각하는 흑인 조리장, 베트남에 남자를 가지 않게 하려고 그다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여자, 로버트 케네디의 인터뷰를 어떻게든 따내려고 하는 체코인 여기자....이 모든 인간 군상들은 여러가지 관계로 얽혀 있기는 하지만, 모두들 모두 별개로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별개로서 작동한다는 것은, 이런 얘기다. 즉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조금은 얽혀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말하고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들 각각의 생활은 분명히 서로서로 그다지 직접적이고 큰 관계는 없고, 직업적 관계로 얽혀있는 않는 한 대부분 앞으로 특별히 만날 일이 없이 서로서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보여주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직접적인 방식. 즉 마지막 총격에서 로버트 케네디와 같이 총격 세례를 받고 쓰러져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별개처럼 보였던 삶이 사실은 얽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공동의 재난에 같이 빠져 있는 모습으로 이들 삶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많은 재난 영화들이 궁극적으로 담고 있는 메시지인 재난에 빠져 있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줌으로써 공동체성의 회복을 묻고 있는 것과 유사한 방식. 그러나 이 방식은 엄밀히 따져 볼 때 여기에서는 가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는 그 총격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재난 이후의, 즉 총격 이후의 그 재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여기에서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총격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저 상징성만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의 여러 다양한 주인공들이 한꺼번에 총에 맞고 쓰러져 있는 마지막 장면들은 그저 시각화된 상징에 불과한 것. 

그보다 궁극적인 것은 로버트 케네디가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 결국 정치란 우리 삶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의외로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그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케네디가 쓰러지는 그 순간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케네디의 연설을 오버랩시킨다. 그러나 하나 아이러니컬한 점은 그 연설의 주된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제 폭력을 중단시키자는 것, 미국 내에서의 인종차별적인 폭력, 베트남에서의 폭력, 그리고 팔레스타인 등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이제는 중단시키고, 이제 평화의 메시지를 서로서로에게 불러일으키자는 것이 그 연설에서의 주된 메시지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전달했던 주체는 이제 또다른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사라진다.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킹 목사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 일어난 또하나의 비슷한 죽음. 이 죽음은 어떤 절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이 절망은 분명히 당 시대의 인간 군상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이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굳이 총에 맞지 않았더라도 이들의 일상은 이 이후에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이것인 듯 하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우리 삶들이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말하는 불륜이니, 직장동료니 하는 관계로 직접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당대의 시대분위기, 시대흐름이라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정치라는 것에 의해서 결국 얽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그것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라고. 당신이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할 때 당신은 자신이 양쪽에 있어서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한 쪽 편을 들고 있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시대흐름을 긍정하는 것, 혹은 조금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지배구조를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떤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니까. 만약 그것이 당신 삶의 어떤 부분에서 심각한 불편함을 야기한다면, 그래도 당신은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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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968년 로버트 케네디는 총격을 받았고, 그 해 공화당의 닉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글쎄. 그 때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즉 예를 들어서 그 이후에 이라크전이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일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아무튼 2006년에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개봉했고, 그 이후에 2009년에 오바마는 처음으로 흑인으로서 미국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2010년 한국에서 이 영화는 개봉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대통령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고, MB 정부는 아직도 3년이나 남았다. 글쎄. 나는 로버트 케네디가 되었으면 미국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리고 세계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겠다. 다른 어떤 것은 몰라도 적어도 던지는 메시지 하나는 천지차이라는 점. '당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메시지와 '우리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메시지.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나라면 후자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당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당연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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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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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는 재미있다. 그것도 무척, 꽤나 재미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애써 <아바타>가 생각보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느니, 기대한 것보다 별로였다느니, 너무 볼거리에만 치중했다거니, 등등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영화인지 수긍이 간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그러니까 주인공의 성장, 가슴 아픈 멜로, 대규모의 전투씬, 약간의, 아주 약간의(절대 무거워서는 안되는) 메시지, 멋진 볼거리, 그리고 악당과의 최종의 일대일 결투까지...거의 모든 것이 이 영화에는 담겨져 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추운 겨울 절절한 멜로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그리고 악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주인공을 보러갔던 관객들도 모두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야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만족스러운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는 몇몇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점들이 있다. <주라기 공원>(괴수에게 쫓기는 주인공들), <브레이브 하트>(전투를 이끄는 영웅적인 주인공)나 <반지의 제왕>(대규모의 전투씬), 혹은 감독의 전작 <터미네이터>(더럽게 안죽는 악당)나 <타이타닉>(신분이 다른, 혹은 처해있는 위치가 다른 남녀주인공의 로맨스) 같은 것들을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를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장점들만을 가져온, 거의 그 모든 것들을 집대성한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씨네 21>의 이동진 평론가의 20자평대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조금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위의 표현대로 이를 어떤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새 이정표'에 거의 가까운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는 자꾸 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창조된 가상의 세계라는 점을 잊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간 가상의 창조된 세계를 감상할 때 느끼는 이질감(uncanny valley)을 우리는 이 영화에서 거의 잊어버린다. 즉 관객은 이것이 마치 실제의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인식해버린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부분에까지 영화가 도달해냈다는 점, 그러한 점에서 이를 하나의 어떤 '새 이정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어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이 영화가 어떤 새로운 이야기, 혹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의 어떤 새로움에 방점을 찍은 부분이 있던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간 존재해왔던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새 이정표'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리어 '새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의 '총 완결편' 혹은 '집대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시 한번 글쎄.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저 여러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게 쉬운 일인줄 아느냐고 말이다. 물론 나는 그것도 대단한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러 이야기들을 집대성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야기의 전체 궤도 속에서 매끄럽게 연결해내는 것은 확실히 대가의 솜씨이며, 천의무봉의 경지이다. 그러나 다만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씨네 21>의 평론가들의 쏟아지는 별점들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신이 질투할까 걱정스러운. Brave New World',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미래의 영화를 선취했다' 등의 20자평을 보면서 말이다. 나는 <아바타>가 뭔가 새로운 이야기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주지 않았다고 징징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이야기적인 안일함, 혹은 그 이야기의 어떤 19세기적인, 20세기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채, 쏟아지는 찬사들이 조금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북부 지역에서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종교의 자유를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메사추세츠에 도착한 영국 청교도들- 옮긴이)가 뉴잉글랜드에 정착해 있었다. 제임스타운 정착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인디언의 땅에 도착했다. 코네티컷 남부 지역과 로드아일랜드에는 피쿼트족(Pequots)이 살고 있었다. 그 땅을 원한 영국에서 온 이주자들과 피쿼트족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쪽 모두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영국인들은 예전에 멕시코에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전투 방법을 사용했다. 적들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전투원이 아닌 일반인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영국인들은 인디언들의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오는 인디언들을 가차없이 칼로 베었다. 

                                        - 하워드 진 & 레베카 스테포프, 살아있는 미국역사, p.28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바타>에서 보아온 그 이야기다. 원주민인 나비 족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하여 원주민들의 신성한 나무를 공격하는 지구인들. 원주민들의 땅을, 그리고 그 땅의 수많은 자원들을 획득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침략자들. 영화가 역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가지다. 역사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원주민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점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원주민들인 인디언은 거의 종족적인 멸종 상태에 이르렀고, 인디언 보호 구역에 갖혀 살아야하는 운명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야기가 다르다.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가 '토루크 막토'로 거듭나고, 그의 지휘로 원주민은 최종의 승리를 거두고, 지구인들을 몰아낸다. 짝짝짝.

사실 이 이야기가 안이하다 못해, 20세기적인, 그리고 더 나아가 19세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 부분이다. 위대한 '토루크 막토'가 사실은 외부에서 온 침략자의 일원? 사실 이렇게 놓고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이상해진다. 살고 있던 보금자리가 무너진 후 나비 족은 거의 대책이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들은 그저 모여앉아, 미스테리한 의식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네이티리의 어머니), 용맹스러운 쯔테이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 여기에 '아바타'를 입은 제이크 설리가 나타나, 이들을 구원한다.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의 상태로 이들에게 점차 동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지구인들을 배신하고, 이들을 이끌며 지구인들에 대항한다. 즉, 거의 무력한 나비 족을 구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온, 사실은 이들의 적인 제이크 설리라는 이 아이러니.

실제로, 미국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 영화 <늑대와 춤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키트 카슨. ‘노래하는 풀’이라는 인디언 처녀에게 반해 그들의 언어도 배우고 결혼까지 하고 아이도 낳은 사람이다. 하지만 인디언들과 친하고 그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그는, 영화 속 제이크처럼 지형을 꿰뚫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서부 정복의 주역이었던 프리몬트 원정대의 안내인으로 일했다. 그렇게 그는 이율배반적으로 인디언 최대 부족인 나바호족을 초토화하는 작전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씨네 21> 부분 발췌) 그러나 영화의 제이크 설리는, 이 키트 카슨의 전혀 반대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서부 개척 시대의 자신들의 역사에 제이크 설리라는 당의정을 입힌, 혹은 면죄부를 주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아메리카에서만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남미에서,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제3세계에서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이러한 일들은 지속되었다. 원주민들과 가깝게, 혹은 거의 원주민들의 편이라고 여겨졌던 대부분의 백인들은 사실은 침략자들의 앞잡이였고, 그들의 제국주의 식민 정책에 본의로, 혹은 본의 아니게 큰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은 결국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 용맹한 여전사 네이티리도 아니다. '하늘에서 온'(물론 표면적인 의미로는 '하늘'에서 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대리자를 일컫는다. 원주민들이 지구인들을 이렇게 부르게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제이크 설리는 토루크를 타는 한 번의 퍼포먼스로(사실 이 부분도 조금은 이상하다. 왠지 이 장면에서의 제이크는 원주민들을 상당히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믿게 하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추장을 뛰어넘는 이들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유유히 거의 쯔테이의 여자인 것처럼 보였던 네이티리를 차지하고, 이들을 이끈다. 이게 무슨 20세기적인, 아니 19세기적인 선민의식이고, 교화의식이란 말인가. 도대체 원주민들의 주체성이란, 그들의 위대한 힘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아바타'라는 것의 구조 자체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는 나비족이지만, 정신은, 아니 영혼은 지구인의 것. 즉 원주민들의 육체란 처음부터 지구인에게 종속적인 것. 원주민들에게 주체적인 사고란, 아바타 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오로지 그 육체의 현시만이 가능한 것.

물론 몇 가지 부분에서 작은 위안거리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그 하나는, 최후의 전투에서 거의 궤멸할 것으로 보였던 원주민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의 괴수들의 도움, 즉 기도에 응답한 신의 대답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최후의 악당과의 대결에서 악당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 것은 제이크 설리가 아니라 네이티리였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야말로 작은 위안거리밖에 안된다. 그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가 이미 제이크 설리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에, 즉 전체 구조에서 원주민들은 그저 조연에 불과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21세기 신 블록버스터가 어딘지모르게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이 전쟁에서 나비 족은 승리하였는가.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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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가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라는 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어떤 극한의 판타지를 제공해주면 되는 것. 그것이 행복한 판타지이건, 혹은 공포의 판타지이건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의 극찬과 무수히 쏟아진 별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2시가 40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관객들을 극한의 판타지 속으로, 그 행성 안 숲 속의 어딘가로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는, 판타지를 스스로 거부하는 중생은 자꾸만 이 석연치 않음이 마음에 걸린다. 이 판타지 불감증에 걸린 중생을 인도할 새로운 판타지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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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식탁 - 사치와 평온과 쾌락의 부엌일기
이주희 글 사진 / 디자인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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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글쓴이가 말하는 파스타계의 디저트, 카르보나라 레시피 

   
  01. 끓는 물에 (늘 말하듯) 짠맛이 꽤 강하게 느껴질 만큼 소금을 넣고 팔팔 끓인 다음 면을 삶기 시작한다. 탈리아텔레의 경우 대강 6분 정도라고 패키지에 써 있으니 물을 끓이고 면을 넣고서부터 소스를 준비하면 대강 시간이 맞는다. (중략)
03. 생크림과 달걀노른자 하나(달걀노른자와 무염 버터를 넣기도 한다. 하지만 난 도저히 그건 못하겠다), 파르미자노 간 것, 그리고 통 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 잘 섞는다.
04. 판체타나 아주 스모키한 베이컨을 준비한다. 뭐 힘들면 그냥 마켓에서 파는 베이컨도 어쩔 수는 없지만 얇게 슬라이스한 스모키한 베이컨이 좋다. (나는 이태원의 '세프마일리스'의 판체타를 쓴다.) 올리브 오일을 아주 조금 두른 팬에 베이컨을 2-3줄 익힌다. 갈색으로 노릇노릇 바삭하게 익을 때쯤 면이 완성될 거다. (후략) (205-207 p)
 
   

 

추측하건대, 요리라는 것은 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정성과 (맛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어느 정도의) 사치(돈)의 산물이다. 나같이 귀차니즘에 빠져 있는 인간들이, 위의 레시피를 보고 그대로 요리를 만들고자 시도한다면, 아주 실패할 확률이 높다. 먼저 어찌어찌해서 탈리아텔레라는 넙적한 모양의 파스타를 구해서 겨우 1번 단계를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3번 단계에 이르면 역시 주춤해지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무염 버터가 상당히 걸리기는 하지만, 저자도 안 넣는다고 했으니, 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근데 통 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라니. 통 후추를 어떻게 갈아 넣지요? (지식인 검색 후) 아..갈아 넣는 도구가 있다구요? 페퍼밀이라나, 페퍼그라인더라나..뭐라나. 인터넷에 찾아보니, X마켓에서 팔기는 파는구나. 근데, 이걸 오늘 사면 어차피 오늘 배송이 안되니 오늘은 못 해먹잖아. 마트에 나가면 팔까. 큰 마트로 나가자면 꽤 시간이 걸릴텐데..아냐, 그래도 배송이 걸리더라도 X마켓으로 사면 카드 할인도 받을 수 있으니 이게 나을 거 같기도 하고...아니, 그래도 어차피 통 후추를 사야하잖아. 그럼 마트로 나가는 수밖에 없겠군...

이렇게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면 결국 생각이 이르는 지점은 한 곳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라는 자괴감. 그냥 가까운 스파게티점에 들러서 까르보나라 한 그릇 주문해서 먹으면 될 것을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 책에 가끔 보면 나오는 구절들과 우리집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냉장고에 남은 소고기를 이용하여..' '야채칸을 열어서 남아 있는 아무 야채나 넣어도 맛있다' 우리집 냉장고 야채칸을 열면 남아 굴러다니는 야채라고는 매우 오래되어 끝이 누렇게 변색된 양파 반 쪼가리밖에 없는데, 설마 이걸 넣어도 맛있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이런 집에 '냉장고에 남은 소고기' 같은 것이 있을 턱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요리라는 것은 결국 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정성과 (맛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충분한 돈의 산물이다. 그리고 사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요리가 맛있을 것이다라는 보장은 없다. 당신은 분명히 레시피를 따라하는 도중 몇몇 사소한 부분들에서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그 사소한 부분들은 당신에게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할지도 모른다. 다 만든 요리를 개수대에 부어버려야 하는 그런 댓가 말이다. 

징징 대는 것은 그만하고, 몇 가지 긍정적인 시선들을 던져보기로 하자. 아마도 3번에 이르러, 내가 귀찮음을 무릎쓰고, 대형마트에 나가 통 후추와 페퍼밀을 사왔다면(그리고 기꺼이 이태원에 들러 '세프마일리스'의 판체타를 사왔다면) 아마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레시피에서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는 편이므로, 이번 요리에 성공해서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먹어 치웠을 것이고, 우리집 부엌에는 페퍼밀이 갖추어졌을 것이고, 남는 판체타는 냉장고에 넣어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음 번의' 요리에서도 페퍼밀을 적당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집 냉장고 안에는 드디어 '남는 판체타'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혹시 다른 요리 프로그램에서 '냉장고의 남는 판체타..' 운운하는 부분이 나온다면 승자의 미소를 날리며, 유유히 냉장고로 달려가 '남는 판체타'를 꺼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책에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나, 피시 파피요트나 누텔라 너츠 토스트나 이태리식 오믈렛 프리타타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 떡볶이나 오뎅국이 나오기도 하고, 달걀비빔라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도대체 요리책들이란, 당최 해먹을 수 없는, 엄청나게 손이 많이가는 요리들만 소개하고 있군'이라는 불평은 때때로 접어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재료들이 가끔 나와서 그렇지, 레시피는 꽤나 세심한 편이라, 재료들과 기구들만 잘 구비해 놓는다면, 살짝 복잡해보이는 요리라고 해먹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아침 10시, 오후 3시, 오후 8시, 새벽 1시로 나누어, 그 시간에 해먹으면 좋을 요리들을 소개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유용하기도 할 것이다. (단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말랑말랑한' 레시피는 사양하고 싶다. 즉 '짠맛이 꽤 강하게 느껴질 만큼 소금을 넣는다'라고 이야기하면 나같은 류의 인간들은 도대체 어느정도 소금을 넣으란 말이야라고 불평부터 늘어놓으니 말이다. 그저 '물 몇 ml에 소금을 2티스푼을 넣으세요'라고 하는게 속편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몇 가지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를만한 재료들에 대해서는 그 내용과 구하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즉 '판체타'가 '이탈리아식 베이컨'이라는 것 정도는 말해주어도 좋지않을까 해서 해본 얘기다. 아...그건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고요?)  
................................

사실 이 책의 매력있는 부분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자가 각 요리의 레시피를 소개하기 전에 각 요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일종의 에세이 부분이다. 작가는 여러 소재들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요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맛깔스런 어조로 전달해주고 있다. 글쎄..솔직히 말하자면, 남자친구를 가진, 요리에 취미가 있는, 고양이를 기르는, 그리고 가끔 낮술도 즐기는 이 저자의 이야기들은 어딘지 모르게 전형적인 부분도 있고, 내가 아는 몇몇 여인네들의 삶과는 조금은 괴리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맛깔스러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던지는 그녀의 몇몇 이야기들은 살짝 미소를 짓게 할 정도는 충분하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주로 지하철에서 출퇴근하면서 잠 자고 있는 인간들에게 상대적 승리감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어대는 나같은 인간들은 이 그녀의 에세이 부분들만 중점적으로 읽을 것. 그 뒤의 소개된 요리들의 레시피는 부디 그냥 넘겨버릴 것. 당연한 말이지만, 엄청나게 배가 고파질 것이기 때문이다. 레시피 옆에 첨부된 사진들에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간다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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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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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당신은 오늘 하루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죄? 난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요..." 그러면 시봉과 나(진만)는 나타나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지하철에서 옆의 사람을 살짝 밀고 빨리 올라탄 것도 죄가 될 수 있고요." "점심 시간에 동료와 밥을 먹으며, 남아있던 마지막 계란말이를 집어 먹은 것도 죄가 될 수 있지요." "엘리베이터에서 앞의 남자에게 살짝 한숨을 내쉰 것도 죄가 될 수 있고요." "회사 상사가 가끔 안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죄가 될 수 있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내가 아까 바퀴벌레를 잡아 죽인 것도 죄가 되겠군..흥." 그러면, 아마도 시봉과 진만은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는 사과를 할 수 없기(사과를 해야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바퀴벌레에게 사과할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즉, 시봉과 진만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그것이 사과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닌가에 있다.

왜 사과를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봉과 나(진만)는 어느 '시설'에 있었다. 그 시설의 남자보육사들은 그들에게 그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라고 늘 강요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고백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사과를 하면, 덜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이후로 늘 죄를 짓고, 사과를 했고, 맞았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은 날에도 그렇게 했는데, 그런 날에는 꺼림칙해서, 맞은 이후에 꼭 해당하는 죄를 짓고는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들은 원생들의 반장이 되어 그들의 모든 죄를 대신 고백하고, 대신 사과하고, 대신 맞아주었다. 시설이 문을 닫게 되고, 그곳에서 나온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행한다. 그것은 '사과'를 하는 것, 즉 남들이 지은 죄를 대신 사과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즉, 그들은 급기야는 이른바 '사과 전문가'가 된 셈이었다.
..................................

이것이 이 소설의 중반까지의 이야기이다. 중반까지의 이야기를 적어 놓고, 읽어보니, 왠지 이 이야기는 말이 되는 것도 같고, 되지 않는 것도 같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의 시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계속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사건들을 서술해주는 나, 진만은 어린아이, 혹은 거의 안이 텅빈 기계와 같은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그것은 그의 절친, 시봉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이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사실 모호하다. 일반적으로는 이들의 이러한 지체에는 다른 어떤 이유가 제시되기 마련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이 '시설'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설이 이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몸에 좋은 것'으로 알고 있고, 급기야는 그것에 의지하게 만드는 알약.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자 보육사들에 의해 행해지는 죄의 추궁과 사과,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린치. 아무튼, 이런 이유로 거의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주인공이 전하는 이야기는,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겉의 의미와는 달리, 계속 그 이면에는 다른 의미들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이 소설의 모호하고도 독특한 분위기와 짧은 문장들로 이어지는(어린아이, 혹은 기계는 긴 문장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듬이 생겨난다.  

 

   
  원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종종 연극을 하자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항상 엄마 역할이었고, 원장선생님은 매 맞는 아들 역할이었다. 대사 또한 매번 같았는데, 우리는 지휘봉으로 원장선생님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그렇게밖에 못 하겠어! 그렇게밖에 못하겠냐고"라고 소리쳐야 했다. 그러면 원장 선생님은 "엄마, 엄마, 더요, 더 때려주세요!"라고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엉덩이를 우리 얼굴을 향해 높이 들어 올린 채, 엉엉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그리고 연극이 모두 다 끝나고 난 후엔, 우리에게 초코 우유나 요구르트를 건네 주었다. (p.51)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일종의 우화(寓話)로 볼 수 있다. 본시 우화에서 즐겨 써먹는 수법 중의 하나는 겉으로는, 어리석은 주인공이 등장하여 벌이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전달하는 듯 하지만, 사실 그 속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교훈을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몇몇 설정들은 상징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서 두 명의 남자 복지사의 외양을 묘사하며, 키가 작은 쪽은 늘 의사들이 입는 흰 가운을 걸치고 다녔고, 키가 큰 쪽은 청바지에 군화를 신고 다녔다고 묘사하는 장면들 같은 부분 말이다(게다가 키가 큰 쪽은 머리숱마저 적다). 이는 한편으로 보았을 때, 흰 가운이 근대적인 문명,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군화가 군대, 질서, 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러한 근대적인 문명과 체제적 질서는 결국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며, 없는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존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남자복지사들보다도 더욱 위험한 존재는 원장이다. 진만이 구치소에 있는 원장 선생님을 찾아간 이 장면을 잠깐 보자.  

 

   
  나는 재빨리 물어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요?"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
원장선생님은 말을 하곤 씨익, 짧게 웃었다. 그러곤 반대쪽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의 등에 대고 꾸벅,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했다. (p.215)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다...요즘에 이 말처럼 맞는 말도 없지 않을까. 자신의 죄를 모른 척하고,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 죄는 더 이상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간다. 누구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자신의 죄임을 고백하고 나선 사람은, 그 죄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거나, 사회에서 추방되기도 한다. 히틀러가 말했던가. '대중은 큰 거짓말일수록 쉽게 속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그에게 짧은 미소를 날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대중은 여전히 어리석거나, 혹은 변하지 않는다. 진만은 '시설'에서 늘상 했던 대로, 등에다 대고, 꾸벅 인사를 할 뿐이다. 그(원장 선생님)의 앞의 모습이 어떤지 전혀 모른채로 말이다.
......................................

이러한 세상 속에서, 나(진만)와 시봉은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과하고, 맞는 것으로 그 죄를 사하려 한다. 자신들의 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현대판 예수와 같다. 다른 모든 이들의 죄를 떠안아, 기꺼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던 예수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찬란한 부활로 마무리되는 성경과 달리, 이 이야기는 석연치 않은 비극성을 남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데, 하나는 이들의 이런 사과는 결국 어떤 파국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파국은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파국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 그것은 복지사들로부터 시작된 폭력의 방식이 다른 더 거대한 폭력으로 확대되어 마무리되는 양상이지만(어쩌면 여기에 작가의 진실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 진실이란 '죄'라는 것은 결국 근원적으로는 '사과'할 수 없다는 것) 실상은 그 폭력의 시작은 그들에게 복지사들이 폭력을 가하던 것보다 더 오래전, 아버지가 진만을 시설에 버려두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의 마무리.  

 

   
  나는 잠깐 뒤돌아, 병원의 파란색 십자가 네온사인을 바라보았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병원의 십자가는 높은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p.220)
 
   


밝게 전달되는 가벼운 이야기인 듯 했던 여기에 이 소설의 비극이 숨어있다. 여전히 병원의 십자가는 가까운 곳에 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사과를 한다 해도, 시봉과 진만이 나 대신 아무리 사과를 한다 해도, 죄를 끊임없이 묻는 사회는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리고 시봉과 진만이 말한대로, 죄는 셀 수 없이 많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급기야는 죄를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당신은, 아니 나는,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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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발칙한 한국학
J. 스콧 버거슨 외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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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J.스콧 버거슨과 친구들'이 지었다고 되어 있는 이 책은, 조금은 특이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1장은 스콧 버거슨을 제외한 여러 친구들이 한국에서 겪은 다양한 사건들을 위트를 섞어 짤막하게 나열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2장은 스콧 버거슨과 다른 친구들의 인터뷰 형식이고, 3장은 다양한 맥락에서 각 친구들이 한국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길게 다루고 있고, 4장에 가서야 비로소 스콧 버거슨 그 자신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앞의 장들도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중에 조금은 생각해 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4장이다. 사실 앞의 장들은 어떻게 보면, 다른 외국인들의 책들에서도 많이 다루어졌던 내용들이다. 한국의 어떤 폐쇄적인 부분들, 혹은 외국인의 눈으로 보는 비합리적인 부분들이나,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겪었던 일들을 다루는 글들은 이제는 조금은 식상해진 감마저 있다. 그래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광우병 파동의 촛불집회 정국에서 자신이 느꼈던 생각들을 스콧 버거슨, 한국명 '왕백수'가 풀어놓고 있는 4장이다.

글쎄. MB의 충실한 지지자나, 조중동 등의 보수신문을 열심히 탐독하고, 그 논지의 정갈함에 감탄해 마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 4장 부분을 읽는 반응은 대체로 2가지로 나누어질 것 같다. 하나는 뭐 외국인이니까,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거지 뭐. 저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흥미로운걸...하면서 살짝 웃으면서 지나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분노하거나 혹은 적극적 또는 소극적인 반박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 생각에는, 스콧 버거슨은 전자의 반응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본인과 한국에 거주하는 다른 외국인들을 '엑스팻(expat)'이라고 부른다. 이 '엑스팻'은 약간은 자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엑스팻'을 이렇게 정의한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expatriate)을 부르는 말로, 한국에 도착한 이래 이 땅의 이상하고 독특한 매력에 사로잡혀 떠나지 못하고, 혹은 떠났다가도 다시 되돌아오지만 결코 이곳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가 본인과 다른 친구들을 '엑스팻'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자신들을 그저 '엑스팻'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어떤 반항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이 '내가 외국인으로 보입니까?'라는 Seoul Don(서울 돈)의 글로 시작하여, '한국말로 이야기해요'라는 스콧 버거슨의 글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즉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 책에서 내내 본인들을 단지 외국인으로만 치부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간에, 그래서 내가 이 짤막한 리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전자보다는 후자쪽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외국인의 글이 아니고, 한국인의 글이라고 생각해 보았을 때에, 그의 글은 흥미로운 관점을 담고 있지만, 어떠한 부분은 경직되어 있고, 또한 어떠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한국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스콧 버거슨은, 적어도 그의 글로만 놓고 판단하자면, 아직은 엑스팻일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

아마도, 스콧 버거슨이 4장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핵심은 4장 맨 처음의 '종로의 이방인'이라는 꽤나 긴 글 보다는, 그 뒤의 '한국에는 사랑의 여름이 없다'는 짤막한 글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는 그 글에서 1968년을 포함한 1960년대 서양(유럽)에서 일었던, 반(反) 권위주의적인 반(反) 문화적인 혁명의 기운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의 여름 이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 다른 여름이 여기 한국에 왔다 갔다. 2008년 여름의 짧은 순간 동안, 종로 거리는 신명나는 음악과 기묘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기쁨으로 생생하게 살아났으며, 나는 애매하고 단순했던 소비자 권리 운동이 어떤 식으로든 전면적인 혁명으로, 마술처럼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시원찮게, 다소 슬프게 끝나버렸다. 이유가 분명치 않은가? 다시 한 번, 사랑의 정치는 언제나 똑같았던 증오의 정치에 맞설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p.429)  
   


한 마디로 말해서, 2008년 광우병 정국 속에 벌어졌던 종로에서의 시민의 쿠데타(그의 표현이다)는 권위주의인 신화에 맞서는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인 신화에 불과했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신화화를 깨부수었던 1960년대 서양에 비하자면 여전히 촌스러운 어떤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2008년 종로는 그렇다. 그것은 보수진영에 대항하는 진보진영의 어떤 헤게모니 싸움이었으며, 정권을 탈취하려는 전(全) 진보진영이 결탁한 일종의 쿠데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폭력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비겁한 폭력이었으며, 그 시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폭력은 진보진영의 언론에 의해서 교묘하게 감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어떤 신화화적인 기제가 작동하였음을 지적한다.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성과는 별개로, 그것을 과장하여 전달하는 신화화적인 기제가 시민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켰다는 것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가로지르는 잠재적 반미감정의 암류는 유명한 '촛불 든 소녀' 로고를 살펴 봄으로써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로고는 잠깐 사이에 광우병 촛불시위 운동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지난 2002년 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촛불시위는 신효순, 심미선 학생의 죽음이 그 불씨가 되었다. (중략) 내가 보기에 2008년의 '촛불 든 소녀' 로고는 도상학적 측면에서 너무나도 비슷해 2002년 촛불시위를 노골적으로, 적어도 잠재적으로 환기시켰다. 이로써 또 한 번 미국 헤게모니의 사악한 음모와 약탈에 맞서 지켜내야만할 한국의 '무구함'과 '순수함'을 표현한 친숙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심리학적 원형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p.404-405)  
   


스콧 버거슨의 주장은 몇몇 부분에서 들어볼 만한 가치는 있다. MB 정권이 왜 광우병 문제로 발목이 잡히게 되었나를 말하는 부분이나, 386 세력의 어떤 한계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에 어떤 신화화가 개입되어 있다고 논증하는 부분에서는 어떤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확실히 지난 2008년의 촛불시위 정국에서 어떤 광우병의 위험이 약간은 부풀려진 것은 사실이며, 시민들의 시위에서도 폭력적인 부분이 있었고, 시민들의 투쟁에도 어떤 신화화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콧 버거슨의 말대로, 시위대 중 일부가 예비군복을 입고 나온 것, 그것 역시 어떠한 의미에서는 신화화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 옷을 입고 나올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의 주장을 귀담아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딱 그 정도이다. 그는 시민들(혹은 진보진영)의 신화화를 깨부수는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꾸만 그 반대의 진영으로 경도된다. 그리고 급기야는 왜곡된 사실, 혹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어떤 진실인 것처럼 호도해 버린다. 어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반박하기 위해서 다른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왜곡된 사실을 그 논증으로 삼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겠는가. 즉, 그는 신화화를 깨부수고 반 신화화의 기치를 높이 들기 위해서 또 하나의 신화화를 그의 글의 주요전략으로 구사하는 셈이다. (또한 한편으로, 촛불시위의 모든 부분을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것 역시 위험한 부분이다. 그가 말한대로, 부시가 이라크 전쟁에 어떤 신화적인 내러티브를 부여하여, 이라크 전쟁을 어떤 현대 문명,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수호로 비쳐지게 했지만, 그것에 어떤 문명전쟁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부당할 것이다. 즉, 2008년 촛불시위에 어떤 신화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것 역시 부당할 것이다.)

   
  나는 2008년 여름 내내 벌어진 주요 광우별 촛불시위에 빠짐없이 참가했는데, 한 번도 경찰이 시위대를 먼저 자극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실제 상황은 항상 그 반대였다. 핵심은 늘 전경으로 하여금 어떤 반응을 보이게 자극함으로써 한국의 자유진보세력 미디어(및 그들과 한통속인 수많은 아마추어 '시민기자')가 '보도 자료로 남기는' 것이었다. (p.392-393)  
   

 

   
  또한 광우병 촛불시위를 조직하고 이끄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진보연대'가 이미 2008년 1월부터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모의를 해왔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중략) '이명박 정부의 저돌적 추진 과정에서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고리를 포착, 대중적 저항전선을 형성해 투쟁을 전개하자.' 이에 이어진 회의에서 '우리의 목표는 이명박 정부를 주저앉히는 것'이라며 공표했을 때, 그들의 의도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것이었다. (p.372)  
   

 

   
  가장 유명한 예로 촛불시위 초기 다수의 여중생과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것을 들 수 있겠고, (중략) 진보적인 손위세대가 가부장적으로 제공한 더 큰 내러티브에 포섭당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386 세대가 대부분인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촛불시위에 참가하라고 '독려'한 사실이 보도된 적도 있다). (p.398)  
   


물론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내용 중의 상당수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거나, 보수진영의 신문들이나 언론들에 의해 과장되고, 부풀려진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일례로, 시위대의 폭력이 있었고, 그것 또한 일부 감추어졌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항상 시위대가 경찰을 먼저 자극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 궁극적인 문제는 그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스콧 버거슨이 '엑스팻'을 넘어서 자신을 한국인으로 보아주기를 원하지만, 그의 시각에는 여전히 엑스팻적인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즉, 스콧 버거슨에게는 결국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한국인적인 시각, 또는 한국인만이 가지는 특수한 역사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1980년대의 원형(原形)을 악의적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6월 항쟁의 경험이 2008년 여름 광우병 촛불시위 기간 중에 자주 언급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아마도, 그것이 한국인에게 왜 자꾸 언급되는지, 한국인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 얘기한 대로, 그가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맥락을 제거한 상태에서, 2008년의 촛불 시위가 1960년대 유럽의 진보적인 기치에 비추어볼 때 권위주의적이고 촌스럽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미 엑스팻의 시각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오로지 이야기하는 것은 그 현상이지, 왜 그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맥락에서(오랜기간 외세의 침입을 받았다는 점, 일제의 잔재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권위주의적인 정부 수립과 남북분단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 왜 한국의 시위 문화가 여전히 신화적인 내러티브 중심이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담고 있는지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것이 가능할 때에만 그가 원하는 진정한 한국인에 그는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두 가지를 여기에 더 첨부할 수 있다. 하나는 1960년대의 유럽의 물결이 그가 생각한 대로 마냥 반 문화적인, 반 권위주의적인, 반 신화적인 내러티브였는가. 그것 역시 어느정도 신화화적 요소가 담겨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도 이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는 것. 이른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투쟁의 양상, 혹은 그 투쟁 조직이 왜 어찌 하여 반 민주적인가.') 그것이 가능해야만, 그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미국이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나, 2008년의 반 한나라당 기치가 단순히 헤게모니 찬탈 움직임에 불과하였다는 주장('한나라당'의 역사성에 대해 그가 한번이라도 공부해본 적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할까)이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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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4장에 있는 스콧 버거슨의 글에만 집중한 나머지 책의 다른 부분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 3장 부분의 엑스팻들이 한국의 살사(salsa) 문화의 성장에 악전고투한 이야기나, 홍대 인디씬에 대한 글은 아주 재미있었고, 흥미로웠으며, 1장의 몇몇 에피소드들도 충분히 공감해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 책의 다른 부분들도 살짝 고개가 갸웃해지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책의 중간에 자주 나오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들. 이 책의 대부분의 북한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 조롱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북한 JI 정권이 조롱할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혹시 이 리뷰를 읽고 혹시 나를 빨갱이로 단정할 사람이 있을까봐 하는 얘기인데, 북한 JI 정권은, 나 역시 그 이상한 체제를 이해하거나 (절대) 긍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끊임없는 조롱이 마냥 유쾌한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결국 조롱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언젠가 북한과 우리가 한 나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 조롱뿐인가. 그(와 친구들)가 자신을 진정 한국인으로 생각했다면 과연 이러한 조롱이 유쾌할까.

그러니 이의 연결 선상에서 이 책이 조금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그는 끊임없이 그를 단지 '엑스팻'으로 보아주지 않기를 주장하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대해주기를 원하나, 그의 책에서 계속 나타나는 '엑스팻'적인 시선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와 친구들)가 한국인의 어떤 편협함, 한국 사회의 어떤 폐쇄성, 또는 문화적인 이상함, 특이함에 대해 말할 때, 한국인으로서 말하는 아픈 비판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엑스팻으로 '한국 살람 참 이상해욜..'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왜냐하면 그것에는 한국에 대한 깊숙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이 책 <더 발칙한 한국학>은 엑스팻적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솔직하고 거침없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미수다'보다는 낫다. 그리고 사실 어쩌면 '엑스팻적인 한계를 드러내보이는 것',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말이다. 

 

ps. 리뷰의 제목에 대해 말하자면, 'The 발칙한 한국학'이란 결국 잘못된 말, 혹은 외국인의 시선으로 쓰는 잘못된 한국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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