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 The Yellow Se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황해>, <추격자>, <부당거래>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본 이후에 질문이 넘쳐나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게 하는 영화보다 질문이 많아지는 영화는 좋은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누가 누구를 왜 죽였어요?"와 같은 류의 질문들이라면, 그것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이 가지는 무시무시함은 차치해 두고라도, 그것은 한편으로는 관객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로서 어떤 허점을 담고 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이상해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사실 이런 류의 상당수 이야기들이 '꼭 그래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상당히 단순한 이야기의 기본축을 가지고 있다. 그 단순한 이야기 축의 빈틈을 이 영화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메운다. 즉 이야기의 중간에 특정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거나, 앞 뒤의 이야기들을 필요 이상으로 혼재시키는 방법을 택함으로서, 짐짓 복잡한 척 한다. 인물들은 평면적이 되고, 그 반면에 인물들간의 관계는 감추어진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들은 전혀 필요하지 않지만, 빈 틈들을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관객과 두뇌 게임을 벌인다.

이것은 분명 최근의 경향들이다. 그런데 이 경향에는 한편으로는 관객과 이 영화들의 어떤 '결탁'이 엿보이는 것 같다. 요즘의 관객들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본인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본인이 전체적으로 숨 고르며 잘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식상하다' 여기고, 짐짓 복잡한 체 하는 영화들을, 사실은 거의 잘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좋은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한다. 글쎄.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앞 뒤를 툭 잘라 버리고, 이야기의 결락들을 일부러 내비치는 영화들이 좋은 이야기들일까. 관객과 필요하지 않은 두뇌 게임을 벌이고, 결국에는 어리둥절해 하며 영화관을 나선 후 인터넷에 질문을 올리게 하는 영화들이 좋은 영화들일까. 맥락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정성일 씨도 트위터에 이러한 경향들에 대해서 짧은 멘션을 남겼다. "지난 일년 동안 본 한국영화의 특징은 장르 불문하고 <본> 시리즈의 아류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방법이 눈을 홀리기는 한다. 특징은 보고나면 뭐가 뭔지 알수가 없다는 점이다."

<황해>를 본 후 그 리뷰들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황해'라고 검색어를 넣으니, 친절하게도 '황해 결말', '황해 줄거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만큼 <황해>의 황량한 결말의 의미나, 줄거리의 의문점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일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 쓰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의 머리 속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어서 관객에게 그 영화의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게 하고, 다시 그것을 확대 재생산 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홍보에는 결정적인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황해>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하고, 정답을 알게 하는 것은, 다른 결에서 참 딱한 일이다. 왜냐하면 <황해>의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그 결말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되면 될 수록 그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은 더 황량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바로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달았건, 혹은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인터넷에서 확인해보고 알았건 간에)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떤 치정극임을, 아주 작은 것들이 확대되어 결국 이 같은 결말을 낳았음을, 구남(하정우)의 사투는 아무 것도 다시 황해를 넘어 가져오지 못했음을 말이다. 2시간 30분이 넘는 사투 끝에 얻은 이 황량한 결말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빈 껍데기들. 흘러넘치는 피와 사라져버린 육체들.

특히 아내의 귀환이 이루어지는 이 결말은 조금은 이상해보인다. 구남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실제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영화 속 몇몇 장면들의 잉여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라고 생각한다면, 이 결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씨네 21>의 안시환의 평(no. 786 전영객잔)에서는 이를 구남에 대한 감독 나홍진의 최대한의 배려라 했지만, 동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은 구남이 절대 알 수 없는, 즉 구남과 완전히 유리된 사건이며, 구남이 혹시 그것을 바랬다고 해도, 그것은 구남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결은 조금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그 아내의 귀환은 구남이 죽어 황해로 던져진 이후에 바로 연결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아내의 유골함과 같이 말이다. 이 씁쓸한 결말은 무엇을 노린 것인가.

사실 이 장면은 명백하게도 관객에게만 보여지기 위한 장면이다. 죽을 때까지 구남은 몰랐지만, 관객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된 채로 영화관을 나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결말은 이야기의 흐름으로 봐서는 거의 다른 장면들과 분리된 이질적인 장면이다. 즉 이야기의 흐름으로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에게 보여지기 위함이다. 구남에게는 혹시 위로일 수도 있겠지만 관객에게는 그것은 가혹한 결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객을 참으로 안타깝게 만들기 때문이다. 구남이 애당초 면가(김윤석)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아무 것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 죽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죽음이란 말인가. 그 아이러니와 가혹함 속으로 이 결말은 관객을 몰아넣는다. 즉 이 결말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관객을 당혹함의 늪으로, 가혹함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부당거래>에서 살인범 이동석이 진짜 살인범이라고 밝혀지던 장면과도 유사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장면 역시도,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혹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가혹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를 일종의 관객에 대한 가학(苛虐)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마지막 장면들은 구남에게 이어져 있던 관객의 심리적 정서를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끊어버리는 기능을 한다. 즉 관객은 결론적으로는 아무 것에도 동의하지 못한채로 황량한 마음을 안고 영화관을 나서게 된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며, 점점 구남의 처절한 사투를 보는 것은 관객들에게도 힘겨운 일이 된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것에는 구남의 사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남이 목숨이나마 부지해 살아돌아가는 것이며, 아내의 유골이라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구남을 황해에 수장시키고, 아내를 살려 돌아오게 함으로써, 구남의 사투는 의미가 없어진다(즉 구남의 사투와 별개로 아내의 귀환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결말은 확실히 관객에게 가학적이다. 이 가학적인 결말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이 영화의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가학성이다. 이 영화가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초중반에 쌓은 정서를 후반부에 가서는 스스로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서가 무너진다기 보다는 아예 사라져 버린다. 초중반부에 쌓은 그 정서란 역동적이고, 이질적인 것이며, 동시에 한 남자의 비극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라면 영화의 4개의 챕터 제목을 연결하면 된다. '조선족' '택시운전수'는 '황해'를 건너 '살인자'가 된다(그러나 사실 이 제목의 기능은 관객의 이질감을 높여주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제목 밑의 그 중국어 간체자 말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핵심적인 이야기를 한 후부터 영화는 표정을 바꾸어 모든 것을 깡그리 없애고, 텅 비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정서를 없애고, 피와 뼈의 세계로 달려간다. 이후부터 이야기는 오로지 살인 장면들을 어떻게 하면 많이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장면들이 가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동진의 말대로 장르적 제스처가 제거되어 있는 데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다른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런 장면들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예를 들어 구남이 김승현을 죽이는 시뮬레이션을 실제의 장면처럼 만들어 관객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동시에 거의 숨돌림 틈이 없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래도 감독의 전작 <추격자>와 비교를 하게 만든다. <추격자>에도 몇몇 가학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황해>보다 심리적 타격이 적은 것은, 호흡을 위한 장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추격자>에서 그런 기능을 맡고 있는 것은 김윤석과 여자아이가 만들어내는 장면들인데, 이 <황해>에는 그런 기능을 맡고 있는 장면들이 거의 없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나홍진 감독이 가지는 특유의 어떤 세련함이다. <황해> 및 <추격자>의 액션 장면들은 에너지가 넘친다기 보다는, 잘 세공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며, 뜨겁다기 보다는 차가운 인상을 준다. 즉 이 장면들은 면밀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며, 어딘가모르게 매끈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어떤 예술가의 활동처럼 보이게 하는 측면까지 있으며 그 자체로서 아주 잘 꾸며져 있다. 즉 역으로 말해서 이 장면들을 위해 나머지 이야기들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추격자>의 '개미슈퍼' 씬을 떠올리게 한다. 그 씬은 사실 그렇게까지 표현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나홍진은 기꺼이 그 장면을 스토리의 결함이 생겨나는 데도 집어넣었고, 그런 방식으로(냉소하는 지영민의 얼굴에 예술적으로 느리게 뿌려지는 피들) 찍었다. 그 장면에 대한 허문영의 글을 조금 길긴 하지만 인용한다. 이 글에는 한 가지 힌트가 있다.

   
  이 시퀀스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우연과 작위들이 갑자기 출몰해, 그 시점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서사의 물줄기가 갑자기 탁한 웅덩이에 갇혀버린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명백한 몇 가지 우연이 있다. 왜 하필이면 그때 지영민은 담배가 떨어졌을까, 또 왜 하필이면 그때 출동 명령을 받은 형사들은 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물론 미진은 하필이면 그 직전에 밧줄을 풀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 가게에 도착해 있다. 게다가 그녀는 상처투성이의 몸인데도 왜 가게 여주인에게 경찰 신고만 부탁하고 119를 부르지 않았을까. (중략)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이 이어진다. 지영민은 가게 여주인과 미진을 죽인 뒤 집으로 간다. 그런데 그냥 가지 않았다. 몇 장면 뒤에 드러나지만 그는 미진의 시체를 들고 갔다. (중략)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대목을 납득하기 힘들다. 지영민은 미행 사실을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 가게 여주인으로부터 "경찰에 연락한 지 한참 됐다."는 말을 들었다. 경찰이 언제 도착할지, 그리고 미행하던 형사가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두 여인을 죽인 뒤에, 피범벅이 된 채로 피가 줄줄 흐르는 한 여인의 시체와 함께 창문을 넘었고, 그 시체를 들고 주택가 골목을 걸어갔다. 그가 개미슈퍼에서 미진의 머리와 손을 잘랐다면 그건 더 위험천만한 일이 될 것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중략)

이 시퀀스의 결과는 미진의 불운한 죽음이다. 미진은 피투성이가 되어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지만 여러 '하필이면'이 중첩된 그 시공간에 살인귀를 다시 만나, 다섯 번의 망치질 끝에 비참하게 죽었고 그녀의 잘려나간 시신은 '화려하게' 전시된다. 꼭 그래야 했을까? (중략)

실제로 <씨네 21>이 개최한 한 시사회에서 한 관객이 그렇게 물었다. 나홍진 감독의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였다. 그는 "밝은 대낮에 평화로운 주택가에서 한 여자가 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시작'은 이야기상의 시작이 아니라 구상의 시작이며, 이야기 상으로는 결말부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결말은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헛된 기대에 이끌려 중호와 함께 밤거리를 헐떡거리며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혹시 우리의 기대와 달리 그녀가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죽음이 우리가 말하지 않은 마음속 기대를 충족시키는 건 아닐까?

-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p.34-36. 부분발췌.
 
   


가학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감(無感)해지는 것이다. 즉 감각의 자극이 계속되면, 대부분의 인간은 그것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그 감각을 없애는 방법을 택한다. 예를 들어 그 하나의 전조. <황해>에서 구남이 어리숙한 조선족들에게 습격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조선족 사내가 구남의 기에 눌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떨어져 죽는 씬이 있다. 그 남자가 떨어질 때의 관객의 짧은 웃음과 떨어진 그 남자를 보여줄 때 관객에게서 흘러나오는 '어'하는 소리. 그 '어'하는 소리는 왠지 TV예능 프로그램의 방청객들이 안좋은 장면이 나올 때 내는 즉각적이고도, 만들어진 놀람과 닮았다. 그 짧은 웃음과 짧고도 기계적인 놀람. 우리들은 그렇게 연이은 죽음들에 눈살을 찌푸리고, 탄성을 보내고, 웃기도 하고,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기도 하다가, 종내에는 무감해진다. 그 무감은 어쩌면, 우리의 기대가 이미 충분히 충족되었다는 신호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2시간 30분 동안 감독의 가학에 시달리게 하고, 종내에는 가학에 무감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 불러야 할까. 글의 처음에 말한, 영화관을 나온 관객들이 "누가 누구를 왜 죽였어요?"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 질문 참,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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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의 시작 부분에 구남의 나레이션이 있다. 그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병이 돌아 개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물어 죽여, 결국 사람들이 개들을 땅에 묻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그 시체를 땅에서 다시 꺼내 먹었다.' 그것은 <황해>의 내용을 줄여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미친 개들의 먹이가 되고(이 영화 <황해>에도 개의 먹이가 되는 인간이 있다), 개는 다시 (개에 물려서, 혹은 굶주림에) 미쳐버린 인간들의 먹이가 된다. 미쳐버린 인간들이란, 곧 괴물이다.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인간은 개의 먹이가 되고, 개는 괴물의 먹이가 되고, 괴물은 무엇의 먹이가 되는가.

그러나 이 나레이션은 이 <황해>의 내용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왠지 요즘의 한국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요즘의 한국영화들은 이야기의 다른 무엇보다도 '무엇으로 인간을 죽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같다. 그것은 칼(<아저씨>)이기도 하고, 총(<무적자>)이기도 하며, 초능력(<초능력자>)이기도 하고, 된장(<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한 장치(<악마를 보았다>)이기도 하며, 소뼈다귀(<황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을 죽이는 장치가 기발하게 진화하는 것의 반대편에 인간은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제 아까의 질문에 지금의 한국영화들이 내놓는 답을 보자. 아까의 질문. 인간은 개의 먹이가 되고, 개는 괴물의 먹이가 되고, 괴물은 무엇의 먹이가 되는가. 정답: '다른 괴물'의 먹이가 된다. 그러니 그 먹이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인간이 괴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의 한국영화들이 내놓는 무시무시한 대답.

2010년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그런 대답을 해왔다. 괴물에 맞서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되는 자들. <악마를 보았다>, <아저씨>, <부당거래>, <파괴된 사나이>, <무적자>, <초능력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황해>.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수동적으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능동적으로) 괴물이 된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지금의 어떤 징후들일까. 2010년 풍경들은 이미 괴물이 된 자들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되려는 자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메시지들이 들려온다. 괴물이 되어라. 괴물이 되어서 다른 괴물들을 짓밟아라. 그 밑의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건 이미 영화가 아니다. 우리 곁의 현실이다. 이것은 2010년의 징후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누군가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 좋은 생각만 하자고 하였으며(<하하하>), 괴물 같은 세상에 맞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으며(<하녀>), 또 괴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 괴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눈물을 흘려가며 시를 썼다(<시>). 당신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덧.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밑의 이야기를 길게 써보고 싶다. 2010년을 덮은 어떤 한국영화의 징후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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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1-04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주의라는 말에 본문은 읽지는 않았으니만 선추천여~~

맥거핀 2011-01-04 22:15   좋아요 0 | URL
추천 감사합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안 읽으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2011-01-05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6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잘 모르겠다. 이 '잘 모르겠다'는 것은 책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책을 둘러싼 다른 여러 것과 연관된 물음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0년 서점가를 주름 잡았고, 급기야 마이클 샌델은 한국에도 다녀갔다. 나는 사실 그런 열풍이 미스테리했다. <시크릿>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1Q84>가 일종의 신드롬이 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난데없는 '정의론'이 2010년의 우리나라 서점가를 주름잡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푸른 기와집에 계신 그 분이 새로운 정의론을 내뿜으며 독야청청한 이 시대에. 물론 모든 의문은 그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트렌디한 열풍에 맞추어 책을 구입하였음에도, 대책없는 게으름으로 끝끝내 책을 펼쳐들지 못했고, 뒤늦게 그 후속작 격인 <왜 도덕인가?>를 억지춘향의 심정으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왜 이 책이 그렇게 놀라운 화두가 되고 있는지. 그리고 총체적 난국의 우리사회에 어떤 비전을 던져줄 수 있을지. 아니, 거꾸로 말해보자. 우리 사회에서 '정의론'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은데, 왜 우리 사회는 어떤 '정의'를 찾아보기 어려운지 잘 모르겠다.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 현재 미국의 상황에 대해 내내 우려를 표한다. '옳음(정의)'이 '좋음(선)'에 우선했던 지난 시대, 즉 어떤 공동체적인 가치는 쇠퇴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의 개인의 권리만이 우선되었던 지난 시대의 빈 가운데를 스며든 것들에 대해 마이클 샌델은 걱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 '스며든 것들'이란 절대적인 거대한 시장의 힘이기도 하고, 거대기업들에 의한 권력의 집중 현상이기도 하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가치관이기도 하고, 공화당 정부이기도 하다. 또 때로는 그 스며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일정한 조류의 흐름이기도 하다.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미국의 거대한 두 정당은 때로는 '옳음'을 강조하면서 그 대세를 장악하기도 하고, 그 장악된 대세 속에서 '옳음'만이 강조되면서 사라져간 공동체의 종교와 도덕적 가치들을 재빨리 선점하면서 다시 다른 대세를 가져가기도 한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은 걱정한다. 앞으로 이 오바마 행정부가 그간 민주당 정부가 해온 대로 '옳음'만을 강조하면서 공동체안에 그야말로 공동(空洞)만 남겨놓는다면, 공화당의 무책임한 시장주의와 근본적인 보수주의적 가치들이 그 공동을 채우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러나 나의 이 어리둥절함, 혹은 부러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럼 우리는 뭘까. 우리는 그저 비어있기만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우리 푸른 기와집 사시는 분과 그들의 친구들은 그저 비어계실 뿐이라는 점이다. 즉 문제는 그들이 '나쁜 철학' 혹은 '동의하지 못할 철학'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그 '철학'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은 그 '철학'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4대강을 위한 힘찬 발걸음이기도 하고, 북한에 대한 단호한 의지이기도 하고, '공정 사회'를 향한 멋진 슬로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아무리 잘 봐준다고 해도, 그것을 '철학'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들이 공정 사회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공정 사회'라는 것이 그간 전통적으로 무엇을 의미해왔는지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니 그저 부럽고 어리둥절할 밖에. 부럽다는 것은 그 정도 '철학'이라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부럽다는 것이고, 어리둥절하다는 것은 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심심한 인기를 끌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상황과 그간 미국사회에서 논의되었던 맥락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금의 한국사회는 이 책에서 말하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맥락과는 상당히 다른 맥락에서 형성된 사회다. 길게 논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일본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오랜 독재정치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지형도는 상당히 왜곡되어 버렸다. 즉 우리에게는 현재 '옳음'도, 그렇다고 '좋음'도 없다.

또 철지난 패배주의의 관점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운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그야말로 들끓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사실은 대부분 텅 비어있는 한국사회에 마이클 샌델의 이 트렌디한 정의론은 조금은 수상해 보인다. 왠지 이 정의론은 익지 않은 라면 위에 올려놓은 양냄새 나는 치즈조각 처럼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고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오지만, 속에는 익지 않은 면발이 꼬들거리는 그런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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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잡설이 이 책 <왜 도덕인가?>가 '읽을 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의 흥미로운 정의론이다. (책 제목은 <왜 도덕인가?>이지만, 도덕론이라기 보다는 정의론에 가깝다.) PART 1은 일종의 워밍업 단계로서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이슈들에서 왜 사회에 도덕적 가치가 우선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한다. 즉 이 부분은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전 단계로서 독자에게 한 가지 사태를 여러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며, 동시에 일종의 논리적 사고를 위한 연습문제들이다. 마이클 샌델의 본격적인 자기목소리는 PART 2의 말미와 PART 3에 집중되고 있는데, PART 2는 지난 여러 철학적인 논의들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정의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거들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그것은 칸트의 선험적 주체와 무연고적 자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고, 권리를 집착하는 자유주의를 버리고, 듀이의 공동체적 자유주의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며,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종교 및 도덕성 간의 대립에서 도덕성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PART 3에서는 그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한 번 요약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그간 정치적 자유주의가 초래한 공동체의 비어버린 중심에 도덕적 가치를, 즉 공공선을 불어넣자는 것이다.

사실, 진정으로 궁금했던 것은 그 마지막에 관계된 것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책의 내내 공동체의 중심에 공공선이 자리잡도록, 즉 미국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자리잡도록 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 공공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소개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4가지이다. 첫째, 자유주의 진영은 시민자치와 공동체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 둘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해하고 거기에 참여할 이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간곡한 권고로도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 셋째, 정치권은 현대 경제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소비 중심의 경제가 아닌 자치 중심의 경제로), 넷째, 도덕적인 혹은 종교적인 담론을 공공생활과 분리시키려는 충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 즉 정부가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 혹 마이클 샌델의 다음의 정의론에 관계된 내용이 또 출간된다면, 그것은 이 4가지의 요점을 다채롭게 논의 발전시키는 내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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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간에, 나는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이러한 일종의 작은 독서 열기가 공정하지 않은 공정사회에 저항하는 어떤 심리들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글쎄. 적어도 이 책만 놓고 본다면, 이는 절대 푸른 기와집과 친구들에 반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는 트렌디한 전범(典範)에 가깝다. 우리에게는 아주 잘짜인 본보기보다 조금 더 거친 목소리들이 필요하다. 원래 잘 치던 타자가 타격폼이 무너지면, 깨끗하고 교과서적인 타격폼을 다시 유심히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폼을 되찾을 수 있지만, 기초가 아예 없는 타자에게는 혹독한 러닝이 때로 답일 수 있다. 아,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깨끗하고 교과서적인 타격폼을 가지고 있다고 꼭 안타를 많이 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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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2-27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 글을 읽다보니, 제가 쓴 리뷰에 잘못된 부분이 있네요. <왜 도덕인가?>가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먼저 쓰여진 책이랍니다. 그러니, '후속작 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겠네요.

반딧불이 2010-12-2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네요.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맥거핀 2010-12-27 15:3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반딧불이 님의 리뷰를 보고 많이 공감했습니다.^^ 공감의 리뷰를 만나는 일은 늘 즐겁습니다.

꽃도둑 2010-12-2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들! '철학없음'에 한표 던집니다. 책 한 권이 사람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그런것에 회의적인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정말 그건 지대로 된 뻥일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에는 순기능이 있는가 하면 역기능도 있는 법이지요. 저는 이번 센델의 책이 갖는 의미에 대해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어요. 짧은 시간안에 사람은 변하기 어렵죠 더욱이 사회는 더 느리고요. 변화되려면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인식의 틀이 바뀌어야만 의식과 행동의 변화가 오잖아요. 센델 책의 붐이 그 역할을 미미하나마 하리라 보거든요...^^

맥거핀 2010-12-27 15:37   좋아요 0 | URL
물론 저도 적어도 <시크릿>이 베스트셀러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혹시 또 그분들은 이것마저 자신들의 공으로 생각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네요. 이것봐라, 공정사회를 이야기하니까, 이런 책이 많이 팔리지 않느냐..이러면서요.ㅋ) 그래서 때로는 개인적으로는 붐비는 서점을 아주 싫어하는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붐비는 서점이 반갑기도 합니다. 뭔가를 읽으려는 시도는,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것보다는 낫지요.
다만 저는 조금은 답답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샌델의 이번 책이 우리가 필요한 정의론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네오 2010-12-30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봤습니다..맨 마지막 구절, 야구의 잘 비유하셨네여, 양준혁이 우리나라에서는 배울만한 타격코치가 없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맥거핀 2010-12-31 13:59   좋아요 0 | URL
조금은 무리한 비유가 아닐까..생각했는데,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연말 보내시구요. 따뜻한 새해 맞으시길 바랍니다.^^

네오 2010-12-31 16:38   좋아요 0 | URL
네 새해복 많이 받으세여~~
 
<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참으로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었다. 이 책은 왠지 그 자신 '바다'를 닮은 것 같다.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저자 쥘 미슐레는 거대한 폭풍우의 무서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아름다운 바다생물의 모습을 찬양하기도 하고, 믿기 힘든 인어의 모습을 닮은 바다생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다가는, 그 모든 가설들에 갑자기 의심어린 시선을 던진다. 그 때마다 책장은 내 손 끝에서 조금씩 부서져 하얀 포말로 변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버리고, 여전히 나는 바다 안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바다 주위에서만 맴돈다. 그리고 바다는 여전히 먼 곳에 떨어진 어딘가에 있다.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단순한 이유 몇 가지. 이 책은 바다의 거의 전부를 담으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대담한 시도를 하고 있고, 저자는 그 시도를 완수하기 위해, 당시(이 책이 출간된 것은 1861년) 존재하고 있던 바다와 바다 주변에 관한 상당수의 문헌들을 자유롭게 이 책에 인용하고 있다. 그 자유도는 생각보다 꽤 높은데, 아주 널리 알려진 책들도 있는 반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들도 있고, 후에 다른 책에 인용된 내용들이 재인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19세기 중반부에 출간되었으며, 당시 최신의 과학적 지식을 담고 있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심쩍거나 아리송해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만큼 책에는 확인할 수 없는, 동시에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내용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그것은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지속적인 어지럼증을 안긴다. 또한 저자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묘사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프랑스의 어느 한 해안가이기도 하고, 때로는 알려지지 않은 바다생물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물의 모습을 닯은 무엇인가이기도 하고, 가끔씩은 실체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 예를 들어 폭풍우의 형상 - 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누구나, 끊임없이 머리 속에 어떤 심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심상의 모습은 항상 흐릿하다. 우리 머리 속에 박힌 몇 가지의 관념들이나 그간 알고 있던 바다생물들의 모습은 그 심상들을 그리는 데에 계속 방해만 줄 뿐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묻고 싶어진다. '그라브의 환한 곶'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뗏목처럼 생긴 '벨렐'은 어떠한 모습인지, '캉크르'는 상대방을 위협할 때 어떤 '폼'을 잡는지 말이다. 조악한 그림이라도 좋으니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사실 보다 근본적인 책읽기의 난관은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의 주된 글쓰기가 그간 우리가 접해왔던 글쓰기와 다른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1800년대 중반은 낭만주의가 절정을 지나고, 거의 끝마무리에 이르던 시기였고, 새로운 기술과 과학문명의 발달로 실증주의 및 사실주의가 촉발하던 시기였다. 이 책에서도 그런 사조의 분위기가 여실히 녹아들어가 있다. 즉 이 책 <바다>는 멸종해가는 바다생물에 대한 과학적 보고서이기도 하고,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과 과학적 발견들을 전하는 탐험기이기도 하고, 바다를 둘러싼 인간들의 사투와 침략을 보여주는 문명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의 예찬이기도 하다. (각 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부는 바다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그것의 거대함과 위엄에 대해, 2부는 생명의 원천인 바다의 신비함에 대해, 3부는 바다에 대한 인간의 정복욕과 그것이 불러온 비참한 실패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생명(다른 류의 인간을 포함한)의 고갈에 대하여, 4부는 (은유적인 의미가 아닌) 치유의 힘을 지닌 바다에 대하여) 즉 이 책은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가지의 글쓰기 방법론을 동시에 실천하고 있다. 그것은 정밀한 분석과 아름다운 예찬이다. 저자 쥘 미슐레는 대상을 캔버스 가까이에 올려놓고는 아주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로 그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묘사하고는, 뭉툭한 유화물감으로 그것을 뭉게고 덧칠해버리고는 우리에게 그것의 아름다움을 볼 것을 주창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당연히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세밀화인가, 아니면 어떤 인상파 화가의 작품인가, 아니면 그 둘 다 아닌가.

그것의 답을 모른다고 해도, 적어도 한 가지 거의 확실해보이는 사실, 혹은 이 책에서 얻는 교훈은 있다. 그것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들에서 우리 인간들은 지금까지 그다지 많은 발걸음을 해나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심쩍거나 아리송해 보이는'이라는 오만한 표현을 나도 썼지만, 우리가 그 이후에 바다에 대해 알게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노력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다가 그만큼 거대하고, 수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폭풍의 회전 법칙을 처음으로 찾아낸 쥘 미슐레의 시대보다 폭풍에 대해 무엇인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폭풍을 두려워하고, 폭풍이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힘을 넘어선 어딘가에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천재지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저 수동적인 시도만이 가능할 뿐이다. 우리들은 그저 여전히 예보를 듣고, 그것에 대비하는 것 외에는 큰 방법이 없다. 인간은 여전히 바다의 바깥에서 바다를 바라볼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3부에서도 새로운 바다길을 찾기 위한, 또는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가보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 나온다. 그러나 그 탐험기들은 사실 대부분이 나약한 인간들이 거대한 바다에 부딪힌 실패의 기록들이다.

그리고 조금 더 엄밀히 말한다면, 우리 인간들이 바다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이 바다에도, 그리고 이 지구에도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읽기 얼마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전"을 다녀왔다. 그 사진전들의 수많은 사진들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은 자연 그대로 놔두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의 자연을 향한 많은 시도들은 자연을 망가뜨렸고, 수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위기에 빠뜨렸다. 자연은 그 나름의 자정작용으로 근근히 버텨왔지만, 그 한계는 거의 가까이에 보인다. 그것은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저자인 쥘 미슐레는 마지막 4부에서 바다의 치유의 힘에 대해 말하며, 해수욕을 적극 권장했지만, 나는 그것에는 별로 동의하지 못하겠다. 바다의 치유의 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치유의 힘이 너무 강력한 것을 우려하는 탓이다. 

그 바다의 거대한 힘을 말하는 미슐레의 문장들을 사진전에서 보았던 몇 장의 사진들의 설명으로 마지막으로 붙여본다.   

   
 

지난 세기 동안 엄니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사냥당해야 했던, 평균 몸무게 1,000킬로그램의 바다코끼리 떼가 이제는 미국 알래스카 주 인근 추코치 해의 한 작은 부빙 위에서 또 한번의 위기를 맞고 있다. 태양계의 한 작은 행성 위에 앉아 있는 인간 떼의 모습이 이럴까? 지금 당장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다. ⓒ Alaska Stock Images / National Geographic ('지구를 담은 사진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展 도록에서) 

 
   

   
  그 옛날 생물 가운데 가장 자유롭게 바다를 누비던 선량한 해표와 정다운 고래, 대양의 태평한 자부심, 이 모든 것들이 극지의 바다로 얼어붙은 살벌한 세계로 도망쳤다. 그렇지만 놈들은 그토록 힘든 생활을 모두 견딜 줄 안다. 여전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놈들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쥘 미슐레 <바다> p.232)
 
   

 

   
  바닷물 한 방울 속에도 생명의 드라마가 가득하다. 약 15배로 확대한 바닷물 속에 벌레처럼 생긴 요각류, 화살벌레, 필라멘트 같은 시아노박테리아, 직사각형 조류(藻類), 물고기 알, 쌀알만한 게의 유생 등이 보인다. 거대한 것에서 미세한 것까지, 인간에서 미생물까지,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찬란하다. ⓒ David Liittschwager / National Geographic ('지구를 담은 사진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展 도록에서)
 
   

   
 

그 표면에 젤라틴 성분의 도톰한 박피가 형성되었다. 나는 바늘 끝으로 그 작은 티끌을 떼어내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이런 모습이 나타났다.
통통하고 작달막하며, 힘차고 악착같은 소용돌이가 생명에 취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기묘한 바쿠스 축제로 탄생을 축하하는 듯했다.
그 배경에서, 아주 작고 미세한 장어나 뱀 같은 것들이 헤엄친다기 보다는 그냥 앞으로 튀어나오려고 떨고 있었다(이것을 '비브리오' 또는 콤마균이라고 한다). (쥘 미슐레 <바다> 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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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2-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편집기는 참 부드럽게 다뤄줘야 하는 것 같다. 글 하나 올리기 힘드네...ㅎ

2010-12-24 0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0-12-24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보고 갑니다,,추천 꾸우욱~~

맥거핀 2010-12-24 17:02   좋아요 0 | URL
항상 글에 좋은 평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투어리스트 - The Tou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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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상영종료


[나잇앤데이]의 남녀 바꿈 버전. 그래도 귀여운 구석은 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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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2-22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가 안 써지는지..?
 
더 콘서트 - The Conc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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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현재상영


평이하고 예상가능하지만, 마지막 차이코프스키의 선율 속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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