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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안네 - 60년 만에 발견한 안네 프랑크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
베르테 메이에르 지음, 문신원 옮김 / 이덴슬리벨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안네 프랑크를 처음 알게 된 때는 그 소녀 만한 나이였다. 그리고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갔다. 하지만 안네의 나이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젠 안네 만한 나이의 아이들에게 안네의 이야기를 들려줄 나이가 되어버린 내게 안네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만든다. 어른으로서의 시선.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이외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로 이어지는 질문들에 대한 시각.
베르테 메이에르는 동생과 단 둘만 살아 남은 안네 프랑크의 이웃이다. 안네와 그의 언니 마르고와 같은 막사에 있었고 그녀의 어머니와 같은 시기에 죽은 그녀를 기억해내고 있다. 안네가 살았다면 베르테처럼 살았을까.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전쟁 후 유대인 고아원에서 자라났을 것이고 그 시기를 지나 저널리스트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술가로 살았을 것 같았다. 그렇다한들 그 트라우마가 극복되진 않았을 것이다. 평생.
고려시대, 환향녀들의 삶이나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이 선택이 아니었지만 그 불행한 삶이 온전히 그녀들에게 내려졌던 것처럼, 나치의 만행 속에서 살아남은 유대 소녀들의 삶도 치유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야했다는 것을 60여년이 지난 베르테의 고백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동안 안네의 일기 속, 숨어 산 삶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았지 살아남았을 때 주어졌을 잔인한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질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생존을 간절히 바랬던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살아남은 것이 더 잔인한 것인지, 죽음을 맞이한 것이 더 잔인한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p.14 네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렴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후 살아남은 자들이 기억하는 죽음의 시간은 잔인하며서도 무섭고 또 공포스러웠다. 직접 겪지 않았지만 전해 듣는 것 만으로도 충부히 끔찍했다. 이 시간들을 지울 수 없었기에 60년이 지난 지금 베르테는 다시 꺼내 세상에 내어놓았을 것이다. 전쟁에서 살아남는 방법만 배웠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 여인의 고백은 지나온 인생의 것이 아니라 아직 멈추지 않은 삶에 대한 고백이며 고통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도 [사라의 열쇠]라는 책도 실존을 넘어서진 못했다. 살기 위해 견뎌왔던 시간에 대한 고백은 아름답지 못했지만 살아남은 상처를 치유해보고자 했던 시간 역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이들의 삶을 이토록 어긋나게 만들었는가. 한 사람의 그릇된 생각이 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역사에 남겨놓았는지............! 읽는 내내 멈추고 싶은 순간들을 견녀낸 것은 역시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끝까지 읽어달라는 당부 때문이었다. 그 당부로 인해 멈추지 않고 알아야 할 것들을 끝까지 알고자 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까지 무사히 덮고 서평을 쓰고 있다. 참 많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