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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 PDE
이혜경 지음 / 북레시피 / 2026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 치유가 목적이 아닌 상담
정신과 의사 이수현에게는 따로 보관 중인 파일이 있다.
병원용인 하늘색 파일에도, 개인 연구용인 검은색 파일에도 똑같이 PDE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미는 간호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
Patient Diagnosis & Evalation(환자 진단 및 평가)가 아닌 Psychic Domination Experiment(심리/지배/실험)의 약자.
상담 중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남몰래 '타인의 심리를 조종하는 죽음의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수현이 친 거미줄에 너무나 쉽게 걸려든 선영은 폭력을 일삼던 남편을 결국 살해했다.
분명 수현은 결코 살인을 명령한 적이 없다
그저 죽음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그 사후의 풍경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로 인해 선영에겐 범죄 이후에 대한 공포는 소멸하고
오직 죄에 대해 벌하는 행위로서의 차가운 계산만이 남을 것이었다
이 모든 지식은 선영이 인지조차 못 한 채 무의식의 밑바닥에 자리 잡아, 오직 그녀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p203
선영 자신이 수현의 살인 유도 실험 세 번째 성공작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박민석을 살해한 전선영의 이야기는 <처방> 안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울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소설의 분위기를 장악해 버리면서.
고아로 자란 선영은 같은 대학 선배인 민석을 만나 결혼했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수현의 병원에서 상담을 받을 무렵 결혼생활은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은 잘 안 변합니다. 특히 타인의 고통을 양분 삼아 사는 악인들은 더욱 그렇죠. 하지만 선영 씨, 지옥을 끝내는 방법이 꼭 본인의 소멸일 필요는 없어요."(p161)라는 위로 속에 담긴 악의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선영은 벼랑 끝에 서 있었고 등 뒤에 온 손이 두드리는 손인지, 떠미는 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두 목숨이 끊어졌다.
그에 비해 존속살해범 김지우의 이야기는 비중이 높진 않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독톡히 해낸다.
복역 중에 계속 편지를 보내오던 지우가 출소 후 아빠를 죽였고, 탐욕과 목적을 드러내며 수현을 찾아와 칼을 휘두른다. 자신이 심신미약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달라면서. 환자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에게 다정하고 좋은 이미지를 구축해온 수현. 모든 판이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 했지만 선영와 지우의 사건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으면서 소설의 후반은 갑자기 나타난 약혼녀 혜리의 주도하에 흘러가게 된다. 사랑하는 남자를 향한 강한 의심은 그녀를 코난급 추리녀로 거듭나게 하고 너무나도 쉽게 그의 가면을 벗겨내면서 철옹성 같던 수현을 무너뜨리고 만다.
<처방>은 가장 농밀한 지옥 속에서 점점 더 강도가 쎈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으로 전개된다기 보다는 다른 농도로 반전되는 분위기라 살짝 이질감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 권선징악의 결말로 마무리 되는 듯 했다. 오히려 소재가 강렬했던 만큼 그 결말 역시 지독했다면 어땠을까. 혹은 한니발급 캐릭터의 여운을 남긴다거나.
<처방 PDE>는' 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은 반드시 선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진 이야기여서 흥미롭게 탐독했던 소설이다. 물론 책을 읽기 전부터 도덕적으로는 답이 정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소설적 허용 아래, 스토리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캐릭터 같의 케미가 얼마나 녹진할 것인지 궁금했다.
한 권의 이야기가 여러 독자에게 남기는 인상의 갈래는 다양하겠지만 '지배','자살','파멸'의 향이 짙었던 <처방>은 매혹적인 금기의 향으로 가득 채워져도 괜찮았을 법한 소설이라 살짝 아쉽다. 타인의 생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 마리오네뜨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자만. 잔혹하게 묘사되는 범죄소설보다 이 대목이 더 무서운 건 어쩌면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이 될까봐서다. 있을 법한 사실이 몇 년 뒤 뉴스를 통해 진짜 사실로 들려오게 될까봐. 그정도로 소설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명령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에겐 생존 본능이라는 최상위 제어 장치가 있기 때문이죠
본능을 이길 수 있는 암시는 존재하지 않아요
악인의 폭주를 내 인내심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며 끝까지 견디는 거에요
하지만 그건 인내가 아니라 방조입니다
자신을 해치는 존재에게 자비로운 건, 미덕이 아니라 자학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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