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가지에 만족하면 행복할까, 불행할까
어떤 한 가지에 철저하게 만족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개 다른 것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 버트런드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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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광이든, 낚시광이든, 골프광이든, 무엇을 광적으로 좋아하며 한 가지에 빠져 드는 사람은 분명 행복한 사람이지만 반대로 불행한 사람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한 가지의 즐거움에 빠져 사는 사람은 다른 다수의 일에서는 즐거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애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연애 이외에 다른 일들이 시시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연애하기 전에 좋아했던 친구들의 모임이나 여행조차 재미없어진다는 것이다. 그 무엇이든 연인과 함께 하지 않으면 흥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독서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책과 연애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 읽는 일 이외의 일엔 흥미가 없어 무관심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귀찮게 느껴지는 일이 많아진다. 누군가의 방문이 있거나 전화가 오거나 또는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나 할 때, 그런 일들이 성가시게 느껴지는 것이다. 무엇이든 책 읽는 일을 방해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의 생활에 충실하려면 한 가지에서만 아닌,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꼭 참석해야 하는 결혼식에 가는 날이면 결혼식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결혼하는 신랑과 신부를 축하해 주는 즐거움, 지인들을 만나는 즐거움,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등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온 정신이 몰입되어 있으면 그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그 자체도 귀찮을 뿐이다.
책에서 읽었는데, 혹자는 한 달에 삼십 권의 책을 산다고 한다. 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책을 좋아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삶의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적당히 좋아하길 바란다.
그리고 생각한다. 독서처럼 한 가지에만 만족하는 삶이 행복할까, 불행할까.
2. 사람이 두 번 할 수 없는 것
옛 철학자가 말하길,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뛰어들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럼 내가 말하리라.
‘사람은 결코 같은 풍경을 두 번 볼 수 없느니라.’
-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저, <아미엘의 일기>, 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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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물에 두 번 뛰어들 수 없는 것은, 강물은 흐르기 때문에 두 번째 뛰어든 강물은 첫 번째 뛰어든 강물과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설사 고여 있는 물이라고 해도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왜냐하면 만물은 늘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 본 나무와 오늘 본 나무는 같은 나무일지라도 정확히 말하면 같은 나무가 아니다. 어제 본 나무의 나뭇잎의 개수가 1000개였다면, 오늘 본 나무의 나뭇잎의 개수는 바람에 날려 떨어져서 900개인지 모른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의 개수도 늘 변한다. 또 멀리서 나무의 겉모습만 봐도 같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조금 전 본 나무는 바람에 움직이는 나무였는데, 지금 본 나무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 나무일 수도 있고, 조금 전 본 나무는 햇볕 속의 나무였는데, 지금 본 나무는 그늘 속에 있는 나무일 수도 있고, 비 맞고 있는 나무일 수도 있다. 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기온이 25도일 때의 나무와 기온이 26도일 때의 나무가 같지 않으며, 습도가 많을 때의 나무와 습도가 적을 때의 나무가 같을 수 없다고. 그러므로 사람은 결코 같은 풍경을 두 번 볼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시간은 소중하다는 것. 왜냐하면 한 번 가고 나면 같은 시간은 오지 않으니까. 하루는 소중하다. 왜냐하면 한 번 가고 나면 같은 하루는 오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1분1초가 다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가고 나면 다시 오지 않을 이 소중한 시간에.”
3.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경우
언젠가 어느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78세 된 어떤 노파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78년 동안의 내 생애를 돌이켜 볼 때, 자기가 죄를 범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나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바보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는 이 나이가 되어도 자기를 용서할 수 없군요.”
-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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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짓을 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바보짓을 하는 게 제일 싫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자기가 죄를 범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기분이 좋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도 바보짓을 많이 하고 산다. 그럴 때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왜 그렇게 바보짓을 하고 살까?, 하면서 도대체 그동안 읽은 책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인가, 그동안 지나간 세월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책을 읽은 만큼, 또 보낸 세월만큼 지혜를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도 또 세월이 흘러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해도 나의 바보짓은 계속 될 것만 같다.
어느 블로그에 들어갔더니 책을 많이 읽었으나 별로 이득이 없는 것 같아 앞으론 읽지 않겠다는 글이 있었다.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사실은 이에 공감했다. 나의 경험상으로도 독서는 삶의 지혜를 발휘하는 데에 별로 소용이 없었다. 또 노인의 지혜란 것도 믿을 게 못됨을 알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경험으로부터 지혜가 생길 것도 같은데, 실제는 오히려 속이 좁아지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용서의 문제에서는 어떤가. 난 나의 바보짓은 용서할 수 있다. 어리석어서 저지르는 바보짓은 연민의 대상이지 미움의 대상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는 건 죄를 범하는 경우일 것 같다. 도덕적 잣대로 봤을 때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경우다. 예를 들면 한 회사의 공금횡령을 했다거나 몸에 해로운 가짜 참기름을 만들어 파는 일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손실을 생기게 하는 일이다. 만약 이런 죄를 범하게 되면 뉴스에서 보는 어떤 범죄자에 대해서도 나는 비난할 자격이 없어진다. 어떤 범죄자도 비난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는 것, 이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 있을까. 그러므로 내가 가장 조심하고 싶은 것은 올바르게 살지 않고 죄를 범하는 것, 그것이다. 내가 잘 살기 위해, 내가 행복하자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일을 가장 피하고 싶다.
바보짓을 하는 자신을 사랑할 순 있지만 죄를 범한 자신을 사랑할 순 없지 않은가.
4. 고뇌하는 나의 벗이여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간이 마치 방탕한 아들처럼 본래 악에 물든 세상에 태어나서 불행하고 비참하게 살다가 끝내는 죽어야 한다며, 그 이유는 삶의 죗값이라고 하며, 우리는 그 점을 인정해야만 살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내 말대로라면 세상은 이미 죄의 텃밭이다. 그리고 인간이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가련한 존재라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우리가 상대방을 부를 때 아무개 씨라고 부르지 말고 그 대신 ‘고뇌하는 나의 벗’이라고 서로 불러 주자.
고뇌하는 그대여! 처음에는 습관이 안 되어서 좀 어색하겠지만 나중에는 서로 참아주고 위로하는 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덕성을 갖지 않고는 살아가기가 힘들다.
- 쇼펜하우어 저, <사랑은 없다>,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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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 삶이란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며 살아봤자 ‘죽음’을 향해 가는 삶에 불과하다.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이 가는 삶이니까. 또 삶은 유쾌한 일은 적고 불쾌하거나 걱정스러운 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유쾌한 일을 되새기기보다 불쾌하거나 걱정스러운 일을 더 많이 되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뇌하며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서로를 부를 때 ‘고뇌하는 나의 벗이여’라고 불러 주자는 게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부름으로써 좋은 점은 상대방의 허물이나 악의마저도 연민을 가지고 볼 수 있다는 게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벗을 향해 불러 보자. “고뇌하는 나의 벗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