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을 산책하다가 ~ > ‘진실’과 ‘진실처럼 보이는 것’을 구별하라


1.

사람의 모습엔 ‘진실’인 것과 진실은 아니지만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P부인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울 거리 거리, 골목 골목을 헤매었다. 불쌍한 거지들을 찾아다니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하면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탄일날에 기쁨을 알릴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P부인은 단 하루저녁만이라도 불쌍한 이들을 위해 따스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는 자기 집을 열어 놓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난로에 불을 많이 피우고, 뜨끈한 국과 밥을 장만하고, 포근포근한 융으로 만든 속옷 한 벌씩을 주려고 준비해 놓고는, 거리에 나와 불쌍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문둥이를 만날 때엔 아무리 불쌍하긴 해도 우리 집으로 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불쌍한 사람 중에도 비교적 몸이 깨끗한 사람을 붙들고 크리스마스에 자기 집에 오라고 친절히 말해 주었다.


크리스마스날 저녁, P부인의 집엔 절름발이, 곰배팔이, 소경, 늙은 것, 어린 것 할 것 없이 모두 모였다. P부인은 밤이 깊도록 손님 대접에 최선을 다했다. 거지들은 속옷 한 벌씩을 얻어 입고 맛있는 음식이 잘 차려진, 눈이 부신 식탁에 둘러앉아 후한 대접을 받았다. P부인은 나중에는 사진사를 불러다가 쾅하고 사진까지 찍고 손님들을 보냈다.


P부인은 자기 방으로 올라오는 길로 침대에 엎드려 감사하였다. 이렇게 기쁘고 의의 있게 크리스마스를 지내보기는 처음이라고 스스로 감격해 눈물까지 흘렸다. 그리고 사진을 많이 만들어 여러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보낼 것을 기뻐하며, 천사 같이 평화스럽게 잠들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천사 같은 P부인의 가슴속엔 뜻하지 않은 분노의 불길이 폭발하였다.


그것은 다른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기 몸둥이처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새 자동차 안에서 엊저녁에 왔던 거지 중에도 제일 보기 흉한 늙은 것 하나가 얼어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태준의 <천사의 분노>라는 단편소설이다. 불쌍한 이들을 돕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던 P부인은 급기야 자신이 아끼던 자동차가 시체로 인해 더럽혀진 것을 보고 가식적이었던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

 



거지들을 집으로 초대해 후한 대접을 했던 P부인의 모습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처럼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2.

월나라 왕인 ‘수’에게는 아들 4형제가 있었다. 그리고 ‘예’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 ‘예’는 왕자 넷을 다 죽이고 자신이 왕의 뒤를 잇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 중 세 명의 왕자를 무고(誣告)하여 죽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지 않게 여기고, 크게 왕을 헐뜯었다. 왕의 동생인 ‘예’는 또 나머지 한 왕자를 무고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그 왕자는 반드시 자기도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 사람들이 ‘예’를 추방하고자 하는 것을 이용하여 왕궁을 에워쌌다. 이에 월왕은 크게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예(자신의 동생)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은 이런 곤란한 일을 당하는구나.”

하였다.


<여씨춘추>에 있는 이야기다. 왕은 어려움을 당하고는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지 못한 것이다. 왕은 애초에 ‘예’가 세 명의 왕자를 무고하여 죽인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나머지 한 명의 왕자마저 죽이지 않은 게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월왕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때가 있지 않을까.


이처럼 인간에겐 당면한 문제의 본질을 꿰뚫을 만한 능력이 부족할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진실’과 ‘진실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듯하다. 어쩌면 세상에는 진실’은 숨어 있고 ‘진실처럼 보이는 것’만 가득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고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도...


 

3.

건강과 장수에 이르는 비결을 80년 동안 조사한 연구가 있다. 터먼 박사는 1910년 전후에 태어난 소년소녀 1,500명을 선발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의 가족관계, 학교교육, 여가활동, 성격 등에 관한 온갖 종류의 귀중한 정보들을 수집해 조사했다. 이 연구는 터먼 박사가 1956년에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후배 연구자들에게 이어져 계속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이 연구의 결과는 건강과 장수에 대한 의외의 진실을 밝혀내면서,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상식과 통념을 뒤집어 버렸다.

이 연구의 성과를 담은 책이 하워드 S. 프리드먼, 레슬리 R. 마틴 저, <나는 몇 살까지 살까?>이다.



활달한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 좀 더 위험한 취미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전반적으로 건강문제에 대해 태평했고 건강을 챙기는 일도 등한시했다. ‘항상 웃고, 활기차게 살면 장수한다’는 통념도 틀렸다는 말이다. - <나는 몇 살까지 살까?>, 85쪽.





건강문제에 대해 태평하여 스트레스가 없는 사람들과 건강문제에 대해 걱정이 많아 스트레스가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더 장수할까. 이 연구는 적당한 ‘걱정’이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걱정하는 만큼 건강을 위해 노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놀랍게도 신경증이 건강을 지켜준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성실한 사람이 더 오래 사는 이유는 건강한 습관과 건강한 두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더 건강한 환경과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었다. 즉 성실한 사람은 더 행복한 결혼생활, 더 좋은 친구관계, 더 건강한 근무환경을 만들 줄 알았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인생경로를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행복하게 산) 그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살았던 까닭은, 건강하고 부유하며 현명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장수에 이르는 길에 얻은 부산물이었다.- <나는 몇 살까지 살까?>, 99쪽.


그들 특유의 사회적 관계, 직업, 취미, 습관의 유형이 건강으로 가는 정말 훌륭한 길을 닦아 놓았던 것이다. - <나는 몇 살까지 살까?>, 99쪽.




결과적으로 사려 깊은 계획과 통제력, 성취감, 인내심, 근면함 등이 장수에 도움이 됐고 직업적 성공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건강에 대한 오류 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첫 번째 오류는 가족력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특정 질병의 성향이 집안 대대로 유전되기도 하고, 분명히 유전적 원인으로 생기는 병들도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가족력으로 심장마비에 걸릴지, 혹은 장수할지에 대해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본인의 인생경로가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두 번째 오류는 건강에 관한 ‘조언 목록’이 건강 증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언 목록’이란 의사로부터 받는, ‘적당히 먹기, 금연, 살빼기, 충분한 수면, 운동’ 등의 목록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이 연구에 참여한, 장수한 사람들은 그런 목록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목록이 장수에 이르는 보편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이 연구는 결론을 내린다.


한 연구의 기록인 이 책은 건강한 사람은 행복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반드시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면서진실’과 ‘진실처럼 보이는 것’을 정확히 짚어 준다.

 

 

<이 책들을 읽고 나서...>

 

누구나 책을 읽을 땐 자신이 읽고 싶은 대로 읽는다. 다시 말해 저자의 의도대로 읽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같은 책이라도 독자들마다 각각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이 책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 : 이태준의 단편 <천사의 분노>는 불쌍한 거지들을 돕고 싶어하는 P부인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여씨춘추>에 있는 이야기는 자신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나는 몇 살까지 살까?>는 하나의 연구결과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건강상식 중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아 준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 이상의 세 권의 책 내용은 그렇게 각각 다르지만 이 책들에서 모두 나는 ‘진실’과 ‘진실처럼 보이는 것’을 구분하라는 메시지를 읽었다. 그것은 중요한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를 나의 삶에 대입하면? : 내게도 ‘진실’은 아닌데 ‘진실처럼 보이는 것’을 진실로 착각하고 지나온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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