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5) 삶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살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우연’이 삶에 끼어들기 때문이다. 이 우연에 의해 애초 가고자 했던 삶의 방향이 틀어져서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한다.



1.

한 여성은 잡지사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우연이었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 김수현 작,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었는데, 그 드라마 속의 여성 기자가 멋져 보였던 것. 그때부터 잡지사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되고 싶은 직업이 있다고 해서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모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나면 몇 백 대 일의 경쟁률에 깜짝 놀라곤 하였다. 그래서 한두 군데 이력서를 낼 게 아니라 아예 여러 장을 써서 여기저기 내기로 하였다. 그것도 기자직만 겨냥할 게 아닌 것 같아서 사무직의 직원을 구하는 회사에도 여러 군데 이력서를 내어 보았다. 그런데 먼저 합격한 곳이 어느 잡지사였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잡지사의 기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연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그때 만약 여성 기자인 주인공이 멋진 배역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기자직을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 실제로 기자직을 멋지지 않은 직업으로 그린 드라마나 영화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하필 그 드라마가 방영되어 그 여성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합격 통보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녀가 사무직의 합격 통보를 먼저 받았다면 사무직에 취직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내는 일을 그만 두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우연이 만든 일이다.


어느 유능한 영업사원(남자)은 이렇게 말했다. “난 처음부터 영업직에서 일할 생각을 한 게 아니었어요. 다만 여러 군데 회사에 이력서를 냈는데, 이곳에 먼저 취직이 되어 영업직에 근무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어느 연예인(여자)은 이렇게 말했다. “연예인을 해 보겠단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어요. 그냥 길을 지나가다가 어느 유명한 감독님의 눈에 띄어 연예인으로 데뷔하게 되었죠.”


“일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의 선택이다. 그런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우연이다.(파스칼)”



2.

혼자 사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화투’를 너무 좋아해서 그 도박에 빠져 전 재산을 날렸다. 그리고 노숙자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수중에 돈이 없었으므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래서 여러 막노동을 하며 돈을 열심히 벌었는데, 6개월쯤 지나니 삼백만 원이라는 목돈이 만들어졌다. 그 돈을 생각하니 어쩌면 그것은 그동안 화투판에서 잃었던 돈을 찾을 수 있는 액수 같았다. 그래서, 이건 운명이야, 하는 생각으로 다시 화투판을 찾았다. 그러나 결과는 애석하게도 돈을 다 잃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뒤, 재미로 사 두었던 복권이 당첨되어 또 돈이 생겼다. 오백만 원이었다. 그건 다시 화투를 해서 그동안 잃었던 돈을 찾으라는 ‘신의 계시’ 같았다. 신의 계시를 어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또 화투판을 찾았다. 결과는 어이없게도 그 돈을 다 잃었다.


그는 한낱 우연일 뿐인 일들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맘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다시 화투판을 찾은 것을 후회하였다.



3.

어느 인터넷 블로거의 이야기다. 그는 현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데, 자신이 블로그를 스스로 만든 게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블로그든 홈피든 그런 것을 갖는다는 것은 부담스런 일이었다. 왜 그런 걸 가져서 거기에 매어 보내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으로부터 리뷰를 작성해 보라고 하는 메일을 자주 받았다. 아마 그곳에서 책을 자주 구입하니까 그런 광고 메일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메일들을 삭제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리뷰를 써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침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어 그것에 대한 리뷰를 한 편 써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그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리뷰를 올리면 자동적으로 ‘서재’라는 개인 블로그가 생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졸지에 생각지도 않은 블로거가 되었다.


그는 말할 것이다. “내가 블로거가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아”라고.




4.



숲속에 마른 열매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무 밑에 있던 여우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호랑이가 그 여우를 보았다. 꾀보 여우가 저렇게 다급하게 뛸 때는 분명 굉장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도 뛰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뛰는 모습을 숲속 동물들이 보았다. 산중호걸인 호랑이가 저렇게 도망을 칠 정도면 굉장한 천재지변이거나 외계인의 출현이다. 그래서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 다 뛰었다. 온 숲이 뒤집혀졌고 숲은 그 숲이 생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은희경 저, <새의 선물>에서.




5.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면 삶은 그저 우연들이 이뤄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떤 일이 발생할 때마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사람들의 버릇일 뿐이지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들일 때가 많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삶은 그저 우연의 연속이다. 삶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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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최근 몇 년간 ‘우연’이 만든 무의미한 일들이 많아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앞으로 필연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생기게 되면 그것에 대한 글도 써 보겠다. 그 글의 제목은 이렇게 될 것이다. ‘삶은 필연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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