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분토론에서 20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우리가 이런 테마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은, 결국 누가 냉소와 회의를 섹시하게 표출할 수 있는가에 있다는 점이다.어떤 긍정과 어떤 부정이 다 쳐들어와서 가장 무기력한 상태가 된 20대 담론에서, 섹시한 냉소주의는 그나마 지금의 20대가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소심한 나르시시즘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냉소주의의 승리를 통해 기성세대 패널은 20대의 그 어떤 발언이든, "맞다, 우리가 잘못했다"라는 반성의 발언으로 대응한 채, '착한 토론자'가 되기에 급급하다.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의 차원보다,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의 차원까지 넓게 퍼진 냉소는, 요구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불신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2 

내가 보기에 오한숙희 선생이 이 토론에 참여하기 전에 20대 학생들에게 받았던 우려라는 "꼰대형 발언'의 진실은, 사실 "너 이렇게 개념없이 살지 말아라"라는 훈계의 측면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가장 식상한 꼰대는 자신이 생각하는 20대에 대한 시선을 이야기하자마자, 함께 자리에 참여한 20대에게 반박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그래, 사실 난 너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어. 너 세상살기 많이 힘들지?"라고 갑자기 자신의 견해 수정에 급급한 그 모습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게다. 

3 

이번 백분토론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인간'이란 것 자체가 수사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홍대에서 밴드를 하고 있다는 어느 여학생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런 발언은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늘 카운터 펀치 흉내를 보여준다는 느낌만을 주는 또 하나의 '수사'같아서 싫다)

가장 실망했던 장면은, 가장 꼰대와는 거리가 먼 생물적 나이를 가진  한 패널이 갖고 있는 '꼰대'스러운 현실 감각의 배설이었다.  '방황의 권리'를 가져보라는 신문과 잡지에 무수히 게재된 칼럼보다 더 늙고 주름많은 '방향을 생각해보라'는 대안 제시는,그가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에 쓰고 싶었던 책 속 구절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4 

홍윤기 선생이 계속 '솔직하게 말해보자'라고 하면서 던진 "이러다 망할꺼다"라는 말이 차라리 더 위로가 된다. 망하거나 죽은 자리에 꽃이 피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내가 갖고 있는 대안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지 2010-08-0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했던 일이지만, 손석희 이후 백분토론이 실망스럽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저도 이전에는 일부러 챙겨서 보다가 요사인... 얼그레이님 글을 읽으니, 짐작이 갑니다만.

얼그레이효과 2010-08-01 23:14   좋아요 0 | URL
박미지님이 짐작하신 대로일겁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를 장악하는 사회자의 맛이 없어졌습니다.
 

난 '큰 일'을 볼 때, 변을 확인하고 물을 내리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그런 습관이 들어서, 어른이 되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그러다보니 하루에 몇 번은 똥의 모습을 본다. 문득 똥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밥의 미래는 다양하겠지만, 주로 '나'라는 놈을 통해 '똥'이 될 운명에 처한다. 내 입에 들어가기 전, 밥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원하는 존재지만, 정작 내 몸에 들어가면, '밥'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기피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것이 '똥'이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똥보다는 밥을 더 가치있게 생각한다. 삶을 말풍선으로 그려본다면, 우리는 그 '삶'을 위해 말풍선 안에 밥을 채워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 '똥'을 그리워하진 않는다. 똥은 피하고 싶은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똥보다 못한 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농담 수준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그것은 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모욕이다. 많은 이들이 이 모욕을 듣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다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 밥상을 엎어버리다  - 더 불쌍한 똥이 되기 위해 

 

하지만 스스로를 똥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고다 요시이에의 만화 <자학의 시>를 보면서 밥과 똥의 생각을 더 깊이 해봤다. <자학의 시>에는 날마다 밥상을 엎어버리는 재주(?)가 있는 남편 이사오가 등장한다. 그는 소위 "밥먹을 가치도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쓰레기도 제대로 못버리고, 아내 유키에가 어렵게 벌어온 돈을 경마와 빠진꼬,술에 다 써버리는 특기(?)만 있는 남자에게 남은 건, 남에게 받는 스트레스 집에선 받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자존심'뿐이다. '밥이라도 먹을 가치가 있는 놈"과 "똥보다 못한 놈"의 사이에서, '자학'이 남편 이사오와 아내 유키에에게 스며든다. 이사오의 '신경질 놀이'인 밥상 뒤엎기는 단순히 아내 이사오에게 부리는 신경질이라곤 볼 수 없다. 만화를 침착하게 보다 보면, 이사오는 결국 스스로에게 "내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있는가"를 매번 밥상을 뒤엎어버림으로써 묻는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밥상을 뒤엎으면서 그는 '밥이라도 먹을 가치가 있는 놈"이라는 걸 스스로 부인하고 만다. '자학'인 것이다. 자신이 하고 다니는 짓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내 유키에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밥상에 대한 분노는 더 차갑다. 만약 아내 유키에가 이사오의 이런 짓에 분노로 맞대응했다면, 이 만화는 재미없는 홈드라마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 유키에는 밥상이 매번 뒤엎어져도 그것에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이사오가 자신을 더욱 사랑해주길 원한다. 이웃들이 남편과 헤어지라고 해도, 또 그 어떤 험담을 해도, 유키에는 그것에 대해 "맞아요, 맞아,못살아"하지 않는다. 그녀의 자비로움은 이사오의 자학 강도를 더 세게 보이도록 한다. 

밥상을 뒤엎으면서, 이사오는 밥을 먹을 권리를 포기한다. (물론 그 이후의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그는 밥상을 엎어버리면서 똥을 쌀 권리를 유보한다. "똥보다 못한 놈"이라는 소리를 집에서라도 듣기 싫어서. 그렇게 그는 스스로의 생존을 '짠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주위를 휘감는 건 "더 불쌍한 똥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다. 





 

 

 

 

 

 

# 자학과 나르시시즘  - 맹정현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 경쟁적 나르시시즘, 냉소적 나르시시즘' 

<자학의 시>를 통해 밥과 똥, 그리고 나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어떤 텍스트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에서 맹정현 선생이 기고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 경쟁적 나르시시즘, 냉소적 나르시시즘>이 그 주인공이다.   

 
맹정현 선생은 오늘날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기획 속에서 '나르시시즘'의 유형과 한국 사회의 '오늘'을 연결지어 이야기한다. '나르시시즘'은 자학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아니다. 오히려 '자학'은 생존과 자살 가운데, 사는 자가 취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나르시시즘적인 태도일지 모른다. 자살은 할 수 없는(왠지 모르게 삶에 대한 그런 식의 종말은 스스로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듯한, 더 나아가 그런 식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주체) 그러나, 생존에 대해 그렇게 큰 확신도 없는 주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자학은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부정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학에 중독되었을 때, 그것의 결말은 죽음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학은 더 괴로운 결말을 보여준다. 이 삶에 살아가긴 하지만, 그 삶에 대하여 힘이 생기지 않는 현실, 그 체감. 자학의 종말은 무기력으로 치닫는다. <자학의 시>에서 남편 이사오는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캐릭터다.  

 

하지만 스스로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냉소적 대상화는 그나마 이 사회를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편입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지 않은 더 어린 세대,즉 사회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감을 잡(480)지 못한 세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남근에서 찌꺼기로 추락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무리짓기'와 '따돌리기'가 유래한다.자신이 똥으로 추락하는 체험을 잊기 위해 무리를 지으면서 타자를,자신의 희생양을 똥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 – 480,481쪽



- 아내 유키에가 보여주는 '복합적 나르시시즘'

 

아내 유키에는 매번 웃는 모습,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남편과는 다른 '건강함'을 영위하는 듯한 캐릭터이지만, 사실 <자학의 시 2>에서 공개된 유키에의 과거를 보면, 그녀의 웃음 자체가 삶을 향한 건강함이라기보단, '자학'의 일종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남편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아버지. 날마다 찾아오는 사채꾼에 겁이 나지만, 아버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딸이 벌어온 돈을 도박과 음주에 써버린다. 학교에서 그녀는 왕따다. 가난이 만든 왕따. 그는 부끄러움과 함께 외로움을 느낀다. 친구들은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렇기때문에 그녀의 이타심은 매번 다른 친구들의 이용 수준에서 그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친구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친구들의 사랑이 이렇게라도 더 다가왔으면 한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 했는데, 이제는 날 받아주겠지?"라는 식의 물음 섞인 행위를 시도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행위는 답없이 혹은 차가운 상태의 답으로 다가온다. '인정'해주길 바라는 의도에서 던진 질문이 '비-인정'으로 되돌아올 때 나타나는 '마조히즘'의 나르시시즘'. 맹정현이 말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은 여기서 돌출된다. "이제 난 똥이 아니겠지?"라고 물었을 때, 주체는 타자로부터 "그래 이제 너는 똥이 아니야"라는 답을 듣길 바라는 상태. 그러나 정작 타자는 "넌 아직 똥이야"라고 말하면, 주체는 스스로를 예외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 "나는 똥이야"라는 위치로. (물론 맹정현 선생이 본문에서 언급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은 한국의 민족성에 관한 언급에 밀착된 개념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과는 차이가 있다)

주체가 스스로를 예외의 상태로 위치지었을 때, 여기서 발생하는 나르시시즘은 우리에게 애잔함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울음의 의미'를 띤 웃음으로 더 극화된다. 학급에서 '왕따'가 된 순간, 유키에가 선망하는 타자 후지사와는 유키에에 비해 모든 것이 뛰어난 여학우로 묘사된다. 피아노도 잘 치고, 사교성도 좋고, 얼굴도 예쁜 후지사와를 보면서, 유키에는 스스로의 비극을 극화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학의 시'가 극명해지는 순간은, 친구들이 자신과 놀아주지 않을 때, 그리고 후지사와가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가자고 할 때이다. 유키에는 후지사와가 쉬는 시간에 자신의 손을 잡고 화장실을 가자고 할 때, '거짓-볼일'을 만든다. 오줌 /똥이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타자인 후지사와가 그녀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거짓으로 '볼 일'을 보는 척한다. '거짓-오줌/똥'의 존재. 그녀는 여기서 강렬한 자학의 시를 쓴다. 이사오가 밥상을 엎어버리면서 '똥보다 못한 놈'이라는 자조를 불쌍하게 내비치며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한다면, 유키에는 거짓 오줌/ 똥, 즉 오줌과 똥이 나오지 않지만, 나온 것처럼 시늉을 함으로써,   극한의 자학을 선보인다.  더 불쌍한 똥이 된 유키에.

 

 

# 윤리와 원한 ....(그리고 자학)

어느새 우리 삶에 익숙해진 무리짓기와 따돌리기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은 밥과 똥, 그리고 그 두 존재의 변화를 책임지는 인간의 윤리일 것이다. 윤리가 주는 사유의 선택지는 이제 어긋난 선과 악의 구분법으로만 작동하는 듯하다. 인터넷에서 매번 일어나는 병리로서의 언어들, 그것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작별하며, 윤리의 자장 안에서 합리화를 외치는 사람들. 결국 그들이 외면하는 건 '똥을 잊기 위해 사투하는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똥보다 못한 놈/년"이라고 자신있게 외칠 때를 놓칠 세라, '자학의 공연장'을 설치해주기 위해 애를 쓴다. '똥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그녀는 스스로가 '똥이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날마다 폭발물을 설치하려 한다. 누군가 알아서 '똥이 되어준다'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즐거워하는 소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소망이 증가할수록, 늘어나는 건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양산되는 자학- 나르시시즘이다. 해석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학은 나르시시즘을 볼 수 없고, 나르시시즘은 자학을 볼 수 없기에, "나는 똥이지 않아"라는 가녀린 나르시시즘(타인에게 강조하는 그 명령과 같은)이 또 다른 자학과 이어지는 고리의 끈끈함은 인간에게 남은 윤리의 굴레이다. 우리는 똥을 잊으려 할수록, 똥이 될 수도 있다는 그 두려움을 스스로 누적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에 대한 회피와 부정이 우리 시대의 안전지대에 들어가기 위한 쾌락이 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씁쓸하고 괴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문학동네 63호 - 2010.여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품절


나르시시즘이 '민족'이 아닌 '주체'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요소라면,우리는 또한 이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엮이는 매듭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필자의 가정은 그중에서도 각 세대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방식 속에서 특정한 나르시시즘이 발현되며,그리고 그것이 다른 세대의 나르시시즘과 독특한 매듭을 형성하는 것에 우리의 '민족성'의 이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467쪽

사실 이러한 인정에 대한 요구는 상상적인 차원에 속한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각이 그러한 나르시시즘을 지탱해주지 못하게 되면 그 요구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무관심으로 쉽게 변질되며,그런 한에서 그들은 때때로 타자들과 양립할 수 없는 민족의 고유성을 내세워 자신을 '세계 시민'으로부터 예외의 자리에 놓기 마련이다. 타자에게 인정을 갈구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 실망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망은 그 주체를 여전히 타자에 종속된 주체, 이타적 주체로 남겨놓기 때문이다.반면 여기서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은 묻는 순간, 상대의 호응이 없으면 곧바로 마음을 닫고 피해자적 태도로 변질되는 특이한 입장이다. "우리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무엇'이다."그리고 여기서 상실감으로 인한 자의식이 피해자적 위치에서 공고해진 민족주의와 중첩된다."우리는 너희들에게 상처를 입은 '무엇'이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눈과환상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타자를 생각하지 못했던 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대척점-470쪽

에 있는,서구인들을 보는 우리의 태도, 즉 타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470)관심이 있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던 우리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다.-470,471쪽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 현재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의 가장 밑바탕,다시 말해 '현재 속의 과거'를 이루는 것이라면,그보다 더 현재적인 세대,지금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소위 386과 그 언저리에 있는 '현 세대'에서 고유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경쟁적 나르시시즘'이다. 이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면,이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정체성의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며(다시 말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으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이다.오히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전 세대가 집착했던 것들이 현 시점에 한계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즉 전 세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요청되어 온 상상적 차원에서의 인정과 초자아적 아버지의 옹립, 경제의 재건 등을 통한 나(우리)의 확립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비의 세대가 기꺼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으로부터 정체성의 확립을 추구했다면,이제 그 자식 세대,어느 정도는 상실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세대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전 세대가 자청했던 권위주의,즉 결손된 상징화의 틈새를 뚫고 드러난 잔혹한 초자아적 아-471쪽

버지의 우상일 것이다.아비의 우상을 파괴하고,('세습'이란 개념과 분리될 수 없는)계급적인 부조리를 척결하며 민주주의의 완성에 몰두한 이들은,겉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 전 세대에 비해 급진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수직적인 차원의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이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수평적 차원의 부조리이다.즉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우상 파괴,초자아적 아버지를 타도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던 형제애들을 기다리는 것은 '평등'과 '형제애'가 아닌 상상적 '경쟁'이다.-471쪽

실제로 현 세대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 권위주의의 청산은 경쟁 사회로의 내몰림과 분리될 수 없다.이것을 단순히 희소성의 원칙,경제의 원칙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우리가 생존의 문제에 있어 과거보다 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더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이러한 관점은 어떻게 해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급진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이들의 열망이 궁극적으로는,특히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전 세대만큼이나 혹은 더 가혹한 방식으로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는지를,다시 말해 어째서 수직적인 불평등에는 민감하지만,수평적인 차원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472쪽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스펙형 인간들은 철저하게 스스로를 대상화하지만,'나는 타자를 위한 대상입니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던 구세대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과는 달리,자신이 봉사하는 타자의 일관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이것이 또한 학벌사회와 스펙사회이 다른 점이기도 하다).즉 스펙은 자신이 요구되는 대상이기를 바란다는 것을 함축하지만,그의 영혼은 자신의 구매자인 기업이나 조국을 향해 있지 않다. 팔리기 위해 기꺼이 준비된 상품이 된 인간은 더이상 기업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의 없는 어떤 냉소적 대상화가 있을 뿐이다.-480쪽

하지만 스스로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냉소적 대상화는 그나마 이 사회를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편입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지 않은 더 어린 세대,즉 사회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감을 잡(480)지 못한 세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남근에서 찌꺼기로 추락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무리짓기'와 '따돌리기'가 유래한다.자신이 똥으로 추락하는 체험을 잊기 위해 무리를 지으면서 타자를,자신의 희생양을 똥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480,48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ㅣ 카이로스총서 16
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10년 2월
장바구니담기


관용이 내세우는 중립성의 신화가,실제로는 부르주아 프로테스탄트 규범에 깊숙이 매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세속주의 이외에 미국 내외의 관용 담론을 연결시켜주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자유주의 관용 담론의 중핵에 위치한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라는 관념이다.도덕적 자율성의 관념은 미국의 안팎 모두에서 관용할 수 있는 주체와 관용 불가능한 주체를 나누는 기준이 되며,자유주의와 문명 담론을 은밀히 결합시킨다.-27쪽

근대 초기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오늘날 인종주의적 법률의 입법화를 저지하는 운동에 이르기까지,관용 담론이 때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하지만 역으로 관용에 대한 호소가 반드시 폭력과 종속을 제한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예컨대, 오늘날 동성애자에 대한 법적 평등의 완전한 실현 대신에 이들에 대한 관용에 호소하는 것은,동성애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항하여 이들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후자가 관용을 잔인함과 폭력,공적인 배제와 대립시키는 데 반해, 전자는 관용과 평등을 대립시키년서,관용을 통해 동성애자의 종속적인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33쪽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불쾌함을 유발하는 것들에 대한 행동이나 발언을 참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그것은 사회적,정치적,종교적,문화적 규범들을 부과하는 행위이며,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관용을 베푸는 이들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며 비정상적인 이들로 표지하는 일인 동시에,상대가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될 경우 부과할 수 있는 폭력 행위를 사전에 정당화하는 기제이다.더 나아가 정치적 담론으로서 관용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정체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생산 그 자체에 관여하며,문화를 종족 혹은 인종과 뒤섞고,믿음과 신념의 문제를 유전적 형질과 결합시키는 데 일조한다.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탈정치화함으로써,자연스럽게 정체성 그 자체를 관용의 대상으로 구성한다.-38쪽

탈정치화의 공통된 방식 중 하나는,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40)어, 그 현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그 현상을 조건 짓는 권력의 문제를 배제하는 것이다.-40,41쪽

두 번째 탈정치화 방식도 존재한다.이는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정치적 언어를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들로 대체해버리는 방식이다.정의와 평등의 문제가 관용으로 대체될 때,타자에 대한 정의의 문제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과 존중의 문제로 대체될 때,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고통들이 단순히 차이와 공격성의 문제로 환원되고 그 고통이 개인의 감정의 문제로 여겨질 때, 정치적 투쟁과 변혁의 문제는 특정한 행동과 태도,인정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물론 이러한 접근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긴 하겠지만,불평등과 배제 같은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관용을 제시하는 것은,정치적으로 생산된 차이를 물화하는 것일 뿐더러, 정의의 추구를 단순한 감수성 훈련 혹은 로티가 태도의 개선이라 이름붙인 해결책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정의의 추구는 이제 태도와 행실을 치료하고 개선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42쪽

정리하자면 오늘날 "정치의 문화화"는 비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삶 전체를 소위 문화의 문제로 환원시키며,이와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문화와 무관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논리 속에서,관용은 자유민주주의 원리의 일부로서 문화적 영역-즉, 섹슈얼리티에서 종족성에(53)이르기까지 모든 본질화된 정체성들을 포괄하는 영역이자 현대 자유주의 체제내에서 차이의 문제를 담당하는 영역-에 적용된다.즉, 관용은("차이"와 관련되기에 비자유주의적이며, "본질적이기에"비정치적이라고 여겨지는)문화적 정체성과 이러한 정체성 간의 충돌을 규제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도구로 기능한다.이 과정에서 관용은 이러한 정체성 주장 및 정체성 간의 충돌을 탈정치화하는 동시에,스스로를 단지 양심의 자유나 정체성의 자유를 보충하는 도구로,즉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유주의적 통치의 도구로 내세우는 것이다. -53,54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요소를 주인 안으로 편입시키는 동시에, 그 대상의 타자성otherness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타자성 관리 방식이다.바로 이 점이 관용을 한편으로는 동화,흡수와 다른 한편으(62)로는 배제,부정과 구분시켜준다.관용의 대상은 전체 내부로 편입된 후에도 여전히 표지된marked채 남아 있다.관용의 대상은 주인과 완전히 하나가 되거나 주인 속으로 용해되지 않기 때문에,이것이 가진 위협적이고 이질적인 특성은,주인의 신체 내부에서 계속 유지된다.-62,63쪽

관용이 차이에 대한 적대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관리할 뿐인 한, 관용은 각종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 된다.관용이 무엇에든 적용되는 이데올로기이자 통치의 요소가 된 오늘날,이 심리적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백한 사회적 효과를 가진다.오늘날 관용의 대상이라 여겨지는 이들은 주변적 대상으로 표지됨과 함께, 시민과 비시민 혹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에 자리 잡게 된다.이와는 반대로,관용을 실천하도록 종용받는 이들은,시민윤리와 평화,진보의 이름하에,적개심과 분노를 억눌러야만 한다.-64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그들의 "차이"를 드러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적이고 탈정치화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한에서만,즉 이를 정치적 주장으로 연결시키지 않는 한에서만,관용 가능한 대상이 된다. 관용 대상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정치화된 정체성이면 추구하기 마련인 인식론적,정치적 입장과 충돌할 뿐 아니라,"차이"를 구성하는 사회적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비표지된 문화,종족,인종,섹슈얼리티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계층화되고 불평등한 사회 질서 속에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와 원칙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88쪽

근대적 주체 형성은,한편으로는 표지된 주체의 차이를 존재론화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이 표지된 주체가 유사한 주체와 맺고 있는 관계를 명확히 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민족-국가의 추상적인 시민권 담론이,여타의 다양한 주체 생산 담론들-즉 기독교인,부르주아,백인,이성애적 규범으로부터 일탈한 존재들을 분류하고 규제하는 담론들-과 긴밀히 결합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배제되어 온 이들을 추상적 시민권 담론을 통해 내부로 편입시키는 과정-다시 말해, 배제된 자들의 일탈적 성격을 지우도록 강요하는 과정-은, 곧바로 이러한 지위를 재기입하기 위한 좀 더 강력해진 규제와 표지의 방식을 만들어 냈다. -124쪽

타자의 종속과 비체화abjection가 이러한 종속의 사사화나 경제 영역에서의 종속의 제도화를 통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즉 더욱 완전한 평등이 시급한 문제가 되는 곳에서,관용은 종속과 배제의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 소환된다.관용은 헤게모니적 규범이 일탈적 타자를 손쉽게 식민화하거나 내부화할 수 없을 때,혹은 직접적 종속이나 편입보다는 새로운 주변화와 조절의 테크닉을 통해서만 지배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자유민주주의 사회 내부로 호출된다.따라서 오늘날 대중 정치 담론 속에서,이성애 여성은 평등의 후보자가 되는 반면, 레즈비언 여성은 관용의 대상이 된다.전자의 종속적 차이는 이성애적 사회 질서와 가족 질서에 의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럴 수 없기 때문-130쪽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통치는 만약 조직되지 않는다면 그저 비생산적으로 남아 있었을,개인과 대중 그리고 초국적인 신체의 힘들을 이용하고 조직하는 과정을 포함한다.더 나아가 주체들의 욕구와 능력,욕망 역시 통치성에 의해 관리되고 지도된다.따라서 통치는 푸코가 "행위의 지도"라고 부른 것,즉 개인의 신체와 사회적 신체,정치적 신체의 행위를 지휘하고 지도하는 것과 관련된다.둘째,행위의 지도로서 통치성은,개인에서부터 인구,신체와 정신의 특정한 부분에서부터 윤리와 노동,시민적 실천에 이르기까지,다양한 지점을 통해 작동한다.셋째,통치성은 법이나 여타의 가시적인 권력에 한정되지 않으며,광범위하게 펼쳐진 비가시적 권력들을 통해 작동한다.푸코는 사목권력을 통치성의 이러한 특징을 보여부는 전형적인 예로 보았다.-140쪽

넷째,통치성은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이나 국가와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담론에 침투해,이러한 담론을 통해 작동한다.여기에는 범죄학,교육학,심리학,정신의학,인구학,의학에 이르는 다양한 과학 담론과 종교 담론,그리고 여타의 대중 담론이 포함된다.이와 같이 통치성은 집중화나 단일화,체계화에 기대는 것이 아(140)니라,근대 사회에 분산된 광범위한 권력과 지식을 통해 작동한다.-140,141쪽

정치적 갈등의 원인을 불관용에서 찾는 관용 담론은,불평등과 지배 같은 문제를 개인적인 편견과 증오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이는 정치적인 문제를 개인화하고,그 원인을 특정한 태도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탈정치적 접근이다.개인과 그 태도가 갈등의 이유로 제시되자마자,권력의 문제는 시야에서 사라진다.이러한 관점에 따르면,다양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의 원인은 편견을 가진 개인이고,관용적 개인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인 것이다.-233쪽

주체나 사회의 법칙이 문화와 종교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는 이제 유기체적 사회와 동일시되며,자율적 개인의 등장은 이러한 문화와 종교의 영향력을 소멸시킬 것으로 간주된다.여기서 사실상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란,바로 문화와 종교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극복 과정을 거친 자유주의 주체에게 문화란,먹을 거리,의복,음악,라이프스타일과 같은 것들일 뿐이다.과거 권력으로서의 문화는,이제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로 대체된다.자유주의 사회에서 사적 공간이 "비정한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안식처"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개인을 억압하던 문화는 이제 개인의 즐거움과 안식의 원천으로 변화한다.과거 지배와 비합리성의 원천이었던 종교 역시, 이제 개인의 위안과 자기 충족,도덕적 지침을 얻기 위한 주체의 선택지 중 하나로 변형되어야 한다.-24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자취생이라 가격에 민감하다. 그러다보니  간단하게 장을 본다 하더라도 대형 할인점을 가는 경우가 많다. 운동도 할 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우리 동네의 '불안지대'라고 불리는 그 위치에 조용히 자리 잡은 편의점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단골 편의점이 올해 초에 문을 닫고, 노부부가 욕심을 갖고 차린 편의점인데, 주인 아저씨의 표정은 고저가 크다. 너무 크게 사람들을 반가워해주거나, 때론 늦은 밤 술에 취해 벌건 목을 보여주면서 나오는 그 우울함의 큰 차이. 그것때문에 요즘은 돈을 더 주고서라도 '불안지대'에 자주 들린다. 이 곳이 불안지대라고 불리는 건 이유가 있다. 편의점이 위치한 그 곳이 우리 동네에서  가게가 문을 열고 닫는 주기를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전에 할인마트에 들렀다가 아차 싶어, 나도 모르게 할인마트 봉지를 들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하나 샀다. (소심한 사람들에겐 이 상황 참 곤욕이다. 어찌 보면 에티켓일 수도 있고, 어찌 보면 뭘 그런 것까지 신경쓰냐는 그 고민) 아저씨가 큰 웃음으로 반겨주길래, 이 아저씨 참 대인배구나 싶었더만, 텅텅 빈 가게에 라디오에 나오는 사연에 웃고 계셨다는 것을 눈치 채고선 미안해졌다.아저씨 냄새가 가게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걸 보니, 알바도 못 구하고, 혼자 밤을 샜나보다. 

 "라면 하나 더 살 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지 2010-07-26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의 소심함에 진한 동질감 느낍니다^^ 저희 동네에도 상황 동일합니다. 궁벽진 동네에 근래에 대형할인마트가 생겨서 온동네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고 인적 끊긴 작은 수퍼 주인들의 침울한 표정을 대하노라면 -- 대형할인점 개업 허가 문제 같은 것은 시장 논리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무기라곤 자기 몸밖에 없는 사람과 최첨단 무기 즐비하게 가진 사람을 마주세우고 싸우라는 것이 공정하다는 게 지금의 시장 논리이지 뭐겠습니까. -- ...

얼그레이효과 2010-07-26 23:28   좋아요 0 | URL
다각도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