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이 '민족'이 아닌 '주체'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요소라면,우리는 또한 이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엮이는 매듭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필자의 가정은 그중에서도 각 세대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방식 속에서 특정한 나르시시즘이 발현되며,그리고 그것이 다른 세대의 나르시시즘과 독특한 매듭을 형성하는 것에 우리의 '민족성'의 이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467쪽
사실 이러한 인정에 대한 요구는 상상적인 차원에 속한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각이 그러한 나르시시즘을 지탱해주지 못하게 되면 그 요구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무관심으로 쉽게 변질되며,그런 한에서 그들은 때때로 타자들과 양립할 수 없는 민족의 고유성을 내세워 자신을 '세계 시민'으로부터 예외의 자리에 놓기 마련이다. 타자에게 인정을 갈구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 실망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망은 그 주체를 여전히 타자에 종속된 주체, 이타적 주체로 남겨놓기 때문이다.반면 여기서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은 묻는 순간, 상대의 호응이 없으면 곧바로 마음을 닫고 피해자적 태도로 변질되는 특이한 입장이다. "우리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무엇'이다."그리고 여기서 상실감으로 인한 자의식이 피해자적 위치에서 공고해진 민족주의와 중첩된다."우리는 너희들에게 상처를 입은 '무엇'이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눈과환상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타자를 생각하지 못했던 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대척점-470쪽
에 있는,서구인들을 보는 우리의 태도, 즉 타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470)관심이 있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던 우리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다.-470,471쪽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 현재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의 가장 밑바탕,다시 말해 '현재 속의 과거'를 이루는 것이라면,그보다 더 현재적인 세대,지금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소위 386과 그 언저리에 있는 '현 세대'에서 고유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경쟁적 나르시시즘'이다. 이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면,이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정체성의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며(다시 말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으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이다.오히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전 세대가 집착했던 것들이 현 시점에 한계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즉 전 세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요청되어 온 상상적 차원에서의 인정과 초자아적 아버지의 옹립, 경제의 재건 등을 통한 나(우리)의 확립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비의 세대가 기꺼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으로부터 정체성의 확립을 추구했다면,이제 그 자식 세대,어느 정도는 상실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세대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전 세대가 자청했던 권위주의,즉 결손된 상징화의 틈새를 뚫고 드러난 잔혹한 초자아적 아-471쪽
버지의 우상일 것이다.아비의 우상을 파괴하고,('세습'이란 개념과 분리될 수 없는)계급적인 부조리를 척결하며 민주주의의 완성에 몰두한 이들은,겉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 전 세대에 비해 급진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수직적인 차원의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이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수평적 차원의 부조리이다.즉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우상 파괴,초자아적 아버지를 타도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던 형제애들을 기다리는 것은 '평등'과 '형제애'가 아닌 상상적 '경쟁'이다.-471쪽
실제로 현 세대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 권위주의의 청산은 경쟁 사회로의 내몰림과 분리될 수 없다.이것을 단순히 희소성의 원칙,경제의 원칙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우리가 생존의 문제에 있어 과거보다 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더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이러한 관점은 어떻게 해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급진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이들의 열망이 궁극적으로는,특히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전 세대만큼이나 혹은 더 가혹한 방식으로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는지를,다시 말해 어째서 수직적인 불평등에는 민감하지만,수평적인 차원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472쪽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스펙형 인간들은 철저하게 스스로를 대상화하지만,'나는 타자를 위한 대상입니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던 구세대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과는 달리,자신이 봉사하는 타자의 일관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이것이 또한 학벌사회와 스펙사회이 다른 점이기도 하다).즉 스펙은 자신이 요구되는 대상이기를 바란다는 것을 함축하지만,그의 영혼은 자신의 구매자인 기업이나 조국을 향해 있지 않다. 팔리기 위해 기꺼이 준비된 상품이 된 인간은 더이상 기업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의 없는 어떤 냉소적 대상화가 있을 뿐이다.-480쪽
하지만 스스로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냉소적 대상화는 그나마 이 사회를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편입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지 않은 더 어린 세대,즉 사회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감을 잡(480)지 못한 세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남근에서 찌꺼기로 추락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무리짓기'와 '따돌리기'가 유래한다.자신이 똥으로 추락하는 체험을 잊기 위해 무리를 지으면서 타자를,자신의 희생양을 똥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480,4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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