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큰 일'을 볼 때, 변을 확인하고 물을 내리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그런 습관이 들어서, 어른이 되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그러다보니 하루에 몇 번은 똥의 모습을 본다. 문득 똥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밥의 미래는 다양하겠지만, 주로 '나'라는 놈을 통해 '똥'이 될 운명에 처한다. 내 입에 들어가기 전, 밥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원하는 존재지만, 정작 내 몸에 들어가면, '밥'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기피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것이 '똥'이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똥보다는 밥을 더 가치있게 생각한다. 삶을 말풍선으로 그려본다면, 우리는 그 '삶'을 위해 말풍선 안에 밥을 채워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 '똥'을 그리워하진 않는다. 똥은 피하고 싶은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똥보다 못한 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농담 수준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그것은 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모욕이다. 많은 이들이 이 모욕을 듣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다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 밥상을 엎어버리다  - 더 불쌍한 똥이 되기 위해 

 

하지만 스스로를 똥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고다 요시이에의 만화 <자학의 시>를 보면서 밥과 똥의 생각을 더 깊이 해봤다. <자학의 시>에는 날마다 밥상을 엎어버리는 재주(?)가 있는 남편 이사오가 등장한다. 그는 소위 "밥먹을 가치도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쓰레기도 제대로 못버리고, 아내 유키에가 어렵게 벌어온 돈을 경마와 빠진꼬,술에 다 써버리는 특기(?)만 있는 남자에게 남은 건, 남에게 받는 스트레스 집에선 받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자존심'뿐이다. '밥이라도 먹을 가치가 있는 놈"과 "똥보다 못한 놈"의 사이에서, '자학'이 남편 이사오와 아내 유키에에게 스며든다. 이사오의 '신경질 놀이'인 밥상 뒤엎기는 단순히 아내 이사오에게 부리는 신경질이라곤 볼 수 없다. 만화를 침착하게 보다 보면, 이사오는 결국 스스로에게 "내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있는가"를 매번 밥상을 뒤엎어버림으로써 묻는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밥상을 뒤엎으면서 그는 '밥이라도 먹을 가치가 있는 놈"이라는 걸 스스로 부인하고 만다. '자학'인 것이다. 자신이 하고 다니는 짓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내 유키에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밥상에 대한 분노는 더 차갑다. 만약 아내 유키에가 이사오의 이런 짓에 분노로 맞대응했다면, 이 만화는 재미없는 홈드라마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 유키에는 밥상이 매번 뒤엎어져도 그것에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이사오가 자신을 더욱 사랑해주길 원한다. 이웃들이 남편과 헤어지라고 해도, 또 그 어떤 험담을 해도, 유키에는 그것에 대해 "맞아요, 맞아,못살아"하지 않는다. 그녀의 자비로움은 이사오의 자학 강도를 더 세게 보이도록 한다. 

밥상을 뒤엎으면서, 이사오는 밥을 먹을 권리를 포기한다. (물론 그 이후의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그는 밥상을 엎어버리면서 똥을 쌀 권리를 유보한다. "똥보다 못한 놈"이라는 소리를 집에서라도 듣기 싫어서. 그렇게 그는 스스로의 생존을 '짠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주위를 휘감는 건 "더 불쌍한 똥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다. 





 

 

 

 

 

 

# 자학과 나르시시즘  - 맹정현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 경쟁적 나르시시즘, 냉소적 나르시시즘' 

<자학의 시>를 통해 밥과 똥, 그리고 나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어떤 텍스트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에서 맹정현 선생이 기고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 경쟁적 나르시시즘, 냉소적 나르시시즘>이 그 주인공이다.   

 
맹정현 선생은 오늘날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기획 속에서 '나르시시즘'의 유형과 한국 사회의 '오늘'을 연결지어 이야기한다. '나르시시즘'은 자학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아니다. 오히려 '자학'은 생존과 자살 가운데, 사는 자가 취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나르시시즘적인 태도일지 모른다. 자살은 할 수 없는(왠지 모르게 삶에 대한 그런 식의 종말은 스스로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듯한, 더 나아가 그런 식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주체) 그러나, 생존에 대해 그렇게 큰 확신도 없는 주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자학은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부정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학에 중독되었을 때, 그것의 결말은 죽음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학은 더 괴로운 결말을 보여준다. 이 삶에 살아가긴 하지만, 그 삶에 대하여 힘이 생기지 않는 현실, 그 체감. 자학의 종말은 무기력으로 치닫는다. <자학의 시>에서 남편 이사오는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캐릭터다.  

 

하지만 스스로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냉소적 대상화는 그나마 이 사회를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편입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지 않은 더 어린 세대,즉 사회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감을 잡(480)지 못한 세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남근에서 찌꺼기로 추락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무리짓기'와 '따돌리기'가 유래한다.자신이 똥으로 추락하는 체험을 잊기 위해 무리를 지으면서 타자를,자신의 희생양을 똥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 – 480,481쪽



- 아내 유키에가 보여주는 '복합적 나르시시즘'

 

아내 유키에는 매번 웃는 모습,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남편과는 다른 '건강함'을 영위하는 듯한 캐릭터이지만, 사실 <자학의 시 2>에서 공개된 유키에의 과거를 보면, 그녀의 웃음 자체가 삶을 향한 건강함이라기보단, '자학'의 일종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남편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아버지. 날마다 찾아오는 사채꾼에 겁이 나지만, 아버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딸이 벌어온 돈을 도박과 음주에 써버린다. 학교에서 그녀는 왕따다. 가난이 만든 왕따. 그는 부끄러움과 함께 외로움을 느낀다. 친구들은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렇기때문에 그녀의 이타심은 매번 다른 친구들의 이용 수준에서 그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친구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친구들의 사랑이 이렇게라도 더 다가왔으면 한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 했는데, 이제는 날 받아주겠지?"라는 식의 물음 섞인 행위를 시도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행위는 답없이 혹은 차가운 상태의 답으로 다가온다. '인정'해주길 바라는 의도에서 던진 질문이 '비-인정'으로 되돌아올 때 나타나는 '마조히즘'의 나르시시즘'. 맹정현이 말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은 여기서 돌출된다. "이제 난 똥이 아니겠지?"라고 물었을 때, 주체는 타자로부터 "그래 이제 너는 똥이 아니야"라는 답을 듣길 바라는 상태. 그러나 정작 타자는 "넌 아직 똥이야"라고 말하면, 주체는 스스로를 예외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 "나는 똥이야"라는 위치로. (물론 맹정현 선생이 본문에서 언급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은 한국의 민족성에 관한 언급에 밀착된 개념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과는 차이가 있다)

주체가 스스로를 예외의 상태로 위치지었을 때, 여기서 발생하는 나르시시즘은 우리에게 애잔함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울음의 의미'를 띤 웃음으로 더 극화된다. 학급에서 '왕따'가 된 순간, 유키에가 선망하는 타자 후지사와는 유키에에 비해 모든 것이 뛰어난 여학우로 묘사된다. 피아노도 잘 치고, 사교성도 좋고, 얼굴도 예쁜 후지사와를 보면서, 유키에는 스스로의 비극을 극화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학의 시'가 극명해지는 순간은, 친구들이 자신과 놀아주지 않을 때, 그리고 후지사와가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가자고 할 때이다. 유키에는 후지사와가 쉬는 시간에 자신의 손을 잡고 화장실을 가자고 할 때, '거짓-볼일'을 만든다. 오줌 /똥이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타자인 후지사와가 그녀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거짓으로 '볼 일'을 보는 척한다. '거짓-오줌/똥'의 존재. 그녀는 여기서 강렬한 자학의 시를 쓴다. 이사오가 밥상을 엎어버리면서 '똥보다 못한 놈'이라는 자조를 불쌍하게 내비치며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한다면, 유키에는 거짓 오줌/ 똥, 즉 오줌과 똥이 나오지 않지만, 나온 것처럼 시늉을 함으로써,   극한의 자학을 선보인다.  더 불쌍한 똥이 된 유키에.

 

 

# 윤리와 원한 ....(그리고 자학)

어느새 우리 삶에 익숙해진 무리짓기와 따돌리기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은 밥과 똥, 그리고 그 두 존재의 변화를 책임지는 인간의 윤리일 것이다. 윤리가 주는 사유의 선택지는 이제 어긋난 선과 악의 구분법으로만 작동하는 듯하다. 인터넷에서 매번 일어나는 병리로서의 언어들, 그것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작별하며, 윤리의 자장 안에서 합리화를 외치는 사람들. 결국 그들이 외면하는 건 '똥을 잊기 위해 사투하는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똥보다 못한 놈/년"이라고 자신있게 외칠 때를 놓칠 세라, '자학의 공연장'을 설치해주기 위해 애를 쓴다. '똥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그녀는 스스로가 '똥이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날마다 폭발물을 설치하려 한다. 누군가 알아서 '똥이 되어준다'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즐거워하는 소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소망이 증가할수록, 늘어나는 건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양산되는 자학- 나르시시즘이다. 해석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학은 나르시시즘을 볼 수 없고, 나르시시즘은 자학을 볼 수 없기에, "나는 똥이지 않아"라는 가녀린 나르시시즘(타인에게 강조하는 그 명령과 같은)이 또 다른 자학과 이어지는 고리의 끈끈함은 인간에게 남은 윤리의 굴레이다. 우리는 똥을 잊으려 할수록, 똥이 될 수도 있다는 그 두려움을 스스로 누적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에 대한 회피와 부정이 우리 시대의 안전지대에 들어가기 위한 쾌락이 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씁쓸하고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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