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 '사소주의자들'이란 칼럼을 썼습니다. 최근 국내에 부쩍 들어온, '센스를 측정화하는 심리적 경향'을 통해

'초-미시적 인간이 되라'는 담론엔 문제가 없는지 고찰해보았습니다.



















《한국일보》2030세상보기 / 사소주의자들 (전문 링크)

나는 일본인이 쓴 에세이를 즐겨 읽는 편이다. 일본의 심리학 에세이엔 내가 종종 ‘사소주의’라 부르는 사고가 스며들어 있다. 비유를 들자면, 사소주의란 다른 나라에선 한 장의 김을 네 등분할 것을 일본에선 여덟 조각을 내어 먹을 것 같다는 식의 자잘한 마음 상태다. 읽다 보면 무얼 이런 일까지 털어놓나 싶다. 일본인들이 그려내는 사회에 뭉툭함이란 없다. 이들은 이제 그저 미시적이어선 안 된다며,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선 ‘초-미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논한다. 그리곤 자신이 몸소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사소주의자들은 자신의 일상을 세분화하는 데 익숙하다. 시간대별로 삶을 세세히 조각 내어 이야기한다는 게 아니다. 사소주의자들은 자신을 성가시게 하거나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혹은 인상 깊은 호감을 준 사람에게 받은 감정을 알알이 들춰내는 기술을 지녔다. 이런 기술은 ‘센스’로 요약된다. 사소주의자들은 묻는다. 당신은 이 사회를 살아가기에 충분한 센스를 지녔습니까? 센스는 감각으로 받아들여도 되지만, 오래 전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는 ‘감득력(感得力)’이라 정의한 적이 있다. 즉, 누군가의 마음을 얻어 깨닫는 힘이 센스다.

이런 정의에 치우쳐 사회를 그려내는 사소주의자에게 문제가 없진 않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데 신경 쓰다 보니 그만큼 되돌아온 상처에 예민한 그들은, 사회를 호감과 불편으로 나누어 진단하는 데 익숙하다. 이 진단은 개인의 센스를 하나하나 따져서 ‘측정’하는 과정이다. 숫자가 나타나진 않지만, 사소주의자가 묘사하는 체험담은 수치라는 은유가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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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예술잡지 『F』18호 '전염'에 <사회문화사적 열병>이란 글을 썼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서브 컬처: 성난 젊음> 전을 다녀와서 남긴 쌉싸래한 리뷰. 데리다의 '아카이브 열병'을 떠올리며 썼다. 



"이 아카이브의 사운드는 과연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 걸까. 전시장을 살펴보면서 손짓하는 유령들을 미리 만나보았다. 다행히도 가장 식상한 유령이 먼저 다가왔다. 그 유령은 내게 공간 진입의 자격을 물었다. ‘이 기록이 서울시립미술관에 들어올 만해?’로 시작하는. 이내 그 질문에 성의가 없었다고 느꼈는지 예술관에 진입함으로써 얻는 상징자본 따위를 운운했다. 그리 마음이 움직이는 지적은 아니었다. 다음 유령은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는 사회문화사적 에너지가 과하게 분비되는 것 같지 않냐고 물었다. 관심이 갔다. 그것은 요즘 내가 시각장(visual field)에 느끼는 불안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전시회에 가면 예술가들은 사회문화사 연구자가 되어 있었다. 예술가들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하나의 문서/문서고 이미지로 축약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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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에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에 관한 서평을 썼다. 


<피로, 작가들의 건강법>(전문 링크)












글쓰는 사람이 쓰기에 대해 쓸 땐 두 경우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해보자’의 글쓰기다. 야심이 넘실댄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써보겠단 말엔 수줍음이 느껴지나 포부의 농도는 짙다. 다른 하나는 ‘해봤자’의 글쓰기다. 침울함이 뚝뚝 떨어진다. 뭐가 뭔지 모르겠기 때문에 이 생활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란 말엔 피로가 느껴지나 외려 건강의 수위는 높다. 각 작품마다 소재는 다르지만 대체로 ‘글을 쓴다는 것은?’이라는 물음이 겹쳐 있는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한겨레출판 2015)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후자다. 이 소설집에 참여한 열명의 작가들은 각자의 피로를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피로가 쌓이면 예민해진다. 간혹 선의는 비의가 되고 단어와 문장들엔 저의가 쌓인다. 피곤한 사람들은 이런 저의로 가득 찬 사회를 포착하는 눈이 밝다. 가령 이런 것이다. 오늘날 ‘○○을 준비하다’의 동의어는 ‘놀(쉬)고 있다’이다. ‘불우하다’의 동의어는 ‘(다들 힘겨우니 그 정도는) 평범하다’이다. ‘월세’의 동의어는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의) 자세’다. 내가 보기에 작가들은 ‘잘 피로한’ 자들의 체질을 지녔다. 없으면 단련시켜야 한다. 그래야 버틴다. 해보자의 글쓰기를 얼른 ‘흑역사’로 부인하고 부질없음의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찌질하진 않되 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작가들의 건강법이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까진 없다. 피로를 활력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문장에 졸릴 틈은 없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을 관통하는 것은 ‘잘 표현된 피로’이기 때문이다. 내게 이 소설집은 열가지 색깔의 숙성된 피로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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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안목 중독>(전문 링크)이란 이야길 해보았습니다. '진부함'에 대해 쉽게 나무라고, 사람을 서문에 비유하며, 서문 몇 쪽만 봐도 감이 온다며 뻔한 자로 규정하는 각박해진 세상을 논했습니다.

글로 먹고 사는 인생에도 안목은 중요한 능력이다. 나 같은 경우 글도 쓰지만, 잡지를 만들면서 다른 이의 글도 꾸준히 읽는다. 괜찮은 필자를 찾다 보면 글에 대한 평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런 생리를 잘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안쓰러운 신경전이 벌어진다. 대화 가운데 뻔하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여기서 뻔함은 나름의 방어다. 행여 자신이 진부해 보일까 걱정되어 누군가의 질문과 관점에 대뜸 뻔하다 받아 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익히 알다시피’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본다. 실컷 글 쓰거나 말한 뒤 이미 이뤄졌던 논의인가 싶어 습관적으로 서두에 ‘익히 알다시피…’로 표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들에게 ‘익히 알다시피…’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좀처럼 접하지 못했으리란 과욕을 낮추는 겸손이 아니다. 나중에 가서 타인에게 뻔한 사람으로 취급 받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을 신경 쓰는 태도에 가깝다.

안목의 사회적 용법에 의구심을 품지 않으면, 이러한 두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게 된다. 사람들의 표현을 금세 식상함과 그렇지 않음으로 지각하는 감정 구조가 굳어진다. 누군가의 언어를 제대로 들으며 헤아리려는 노력 대신, 세상을 오로지 비범함과 평범함으로만 솎아내는 것을 ‘뛰어난 감각’이라 여기는 착시가 생긴다. 그 구조 속에선 진부한 이로 규정될까 걱정되는 사람들을 통해 자기 감각을 과시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드셀 뿐이다.

이를 ‘안목 중독’이라 부를 수 있다면, 안목 중독의 사회는 각자 나름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이들의 메시지를 곧잘 ‘글러먹음’으로 평가하는 데 스스럼없다. 이러한 태도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니, 안목에 중독된 이들은 높을 대로 높아진 기준에 망설임이 없다. 타인이 왜 아직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지를 ‘용납’의 수준으로 사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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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은 최근 관심을 갖게 된 소설가다. 이력에 대한 흥미. 문화연구자 출신의 소설가란 이력이 끌렸다. 최근 나온 10명의 작가가 참여한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착하게>란 작품을 거기에 발표했고, 칼국수면을 이로 끊어먹는 아이의 도입부 묘사가 좋아서 페이질 끈질기게 잡았다.


그녀의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를 샀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 대체로 좋은 몸살 기운을 안고 돌아온다. 한데 그러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시달려야만 하는 기운이었다. 좋다 나쁘다기보단 내가 휘말려서 뭔가로 빚어내야 하는 기운이었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를 볼 때 그랬다. 보고 와서 몸져 누웠다. 비슷한 기운. 소설집의 표제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가 그랬다.

몸살의 연원이 잔인, 잔혹에서 오는 묘사의 수위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럴 것 같으면 전아리 작가가 더 셀지 모른다. 뭔가 마음을 툭 건드리는 표현이 맴돌고 그게 속에서 밍밍하게 돌다가 돌덩이가 되는 그런 경우.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엔 '부산물'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게 속을 밍밍하게 했다.

낙태의 경계에 있는 아이를 의미하는 그 표현은 '실토'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서 작품의 미묘한 잔혹함을 뒷받침하는 핵심어다.

형과 동생이 등장한다. 기이한 형이 있고 세상의 여자들은 그 형을 사랑했다. 화자인 동생은 병약한 병신이라 불리운다. 형만이 동생을 병신이 아니다라고 해준다. 온화는 불화를 조장한다. 작품은 이 불화를 형과 동생의 직접적인 갈등으로 넣지 않는다. 그사이에 형을 좋아한 그녀가 있다.

병신인 동생은 병신이 아니야라고 해주는 형을 위해 뭔갈 해야 했다. 형은 동생에게 형의 그녀가 있는 곳으로 잠입하라고 시킨다. 그녀가 부산물이라고 하는, 존재의 상태. 아이를 지우기 위해서다. 동생은 형의 그녀와 살면서 그녀를 병신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순간을 노리는 생활이 시작되었고, 작품은 그 죄책감을 페이지의 분위기로 끌어낸다.

사람은 악취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그것을 사랑한다는 귄터 그라스의 말이 이 작품에 인용되는데, 작품엔 정말 악취가 난다. 비린내에 가깝다.

소설집 속 해설이 추려주는 관점이기도 하지만, 박민정 작가는 '가족 불능'을 시인해버리는 '고의적 미성장'이란 지점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도 해당된다.

인물들은 성장과 성숙에 관심이 없다. 아니, 아예 그것을 '놓아버리는' 인물들이다. 놓아버린다는 건 지쳤다는 것이다. 혹은 부러 놓아서 누군가 자신을 지치게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 고단함이 자신의 악취미가 된다.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는 고단함이 악취미가 된 이 세상의 세태를 묻는다. 악취미는 튼튼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비릿한 게임 언어가 되어 누가 더 잘 지치는지 시험한다. 누가 더 잘 이 세상을 '놓아버릴 것인가' 대책도 대안도 없다. 통제불능의 상태.

저는 짐승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 글러먹었으니 제가 당신을 안 잡아먹기보단 차라리 당신이 제게 안 잡히도록 도망가세요란 '미안함'은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에서 느낀 몸살 기운이었다.
오늘날 미안하다는 말은 악취미적 인사가 되었다. 


시달릴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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