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사회'에서 생존하는 전략 중 하나는 '교수 이름 외우기'다. 나는 이런 암기를 잘 하는 이들을 '명함 인간'이라 부른다. 명함에는 보통 무엇이 들어가나. 자기 이름, 자기가 다니는 직장, 자기 직책, 블로그 주소, 휴대폰 주소, 등등이 들어간다. 명함 인간들에게는 교수의 이름, 교수가 나온 대학교, 대학원, 유학 간 나라, 그 나라의 대학원, 그 교수가 쓴 논문이나 단행본 등을 외우는 것이 필수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되면, 자신이 외운 '명함'들을 꺼내는 것이다. '명함 인간'들은 보통 술자리에서 그 능력을 잘 발휘한다. 소주 한 잔을 부딪히면서, 껄껄거리는 웃음으로 삼겹살을 잘게 썰며, 자신이 알게 된 교수의 이름과 논문을 줄줄 읊는다. "아! 전남대의 무슨무슨 교수? 아 연대의 그 무슨과 그 교수?"  

사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유형은 대학원 공부를 하고 싶은 대학교 고학년생들의 어떤 열정이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교수 이름을 외우고, 그 교수가 무슨 대학을 나왔고, 어디에 유학을 다녀왔는지는 아는 건, 어떤 열정의 소산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 그런 '관계망 만들기'를 좋아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아는 몇몇 후배들은 내가 책을 빌려주니 책 앞 표지에 있는 저자의 소개만 뻔하게 쳐다보더라. 무슨 내용을 쳐다보는지 사실 함부로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던 친구들이 방금전까지 서울의 모 교수와 경남에 있는 모 교수가 영국의 무슨무슨 대학 동문이고, 어쩌고 그런 정보를 귀신같이 잘 알아서 말하던 이와 일치한다는 것을 볼 때, 나는 기분이 이상한 걸 부인할 수 없었다.  

'명함 인간'들을 탄생시키는 구조에 대해 우리는 본격적인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런 의문에 손사래를 칠 사람들이 놀랍게도 교수보다는 젊은 제자들이 더 많을 거란 점이다. 나는 늙으면 늙을수록 부패와 근접해 있다는 견해에 좀처럼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 부패와 불안에 눈감으려 하는 것과 가까이 위치해 있는 이들은 나를 포함한 젊은 연구자일 수 있다. 내가 열을 올리며, "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교수가 조교한테 미용실 예약을 시키냐!"라고 말할 때, '그게 뭐 어때서'라고 쳐다보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현실은 비단 나의 억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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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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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이 더러운 나라. 이민이나 가야겠다"라는 소리를 낸 이, "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나라를 욕해. 더러우면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이가 일치하는 나라. '다문화주의'라는 이름 아래, 인권의 가치를 소중히 하자면서도, 인터넷에서 국가 우열 순위를 매기며 한국과 동남아시아가 비슷한 레벨이라는 의견에, "어떻게 우리나라를 동남아시아 따위"에 비교할 수 있냐며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 우리는 이 나라를 괄호나 물음표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노자의 책을 읽으면 늘 그렇듯이, 괄호나 물음표 안에 '한국'이라는 이름을 집어넣게 된다.  

"어떻게 네가 '한국인'이냐, '귀화인'이라고 말해야지"라는 책 속 에피소드가 말해주듯이, 어쩌면 우리는 박노자의 한국 비평을, '경계인'이라는 차원에서 소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박노자는 실제로 법적인 절차를 거쳐 한국인이 되었고, 우리는 이 '되었고'의 차원을 의식하면서, 그를 '타자'로 위치시킨 채, 그의 비평에 뜨끔하는지 모른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그를 상징하는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박노자는 '한국인'이지만, '비-한국인'이라는 상징성을 옆에 둔 채, 존재하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이 묘한 구분의 심리는 따가움을 느끼고 싶은 비평의 참 맛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박노자 개인을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위치 안에서 바라보려는 심리 또한 강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국가가 무엇이며, 민족이 무엇인지 새삼 돌아보게 되고, 그 경계 짓기에 아슬아슬하게 손을 뻗치거나, 아니면 내면 속에서 '과감하게' 그 '경계 짓기' 에 동참함으로써 비평 속 따가운 맛을 받아들이되, 여전히 너는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까주거라"고 하는 이상한 '주인의 심리' 또한 이 연약한 자아는 드러내고 만다.  

'주인의 심리'라는 이 위험한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주인됨'은 마치 (한국이란 나라를) '중국- 일본- 러시아' 가 둘러싼 한반도라는 영토 안에서 나는 태어난 사람이며, '한국적인 것'이라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역사라는 학습 효과를 통해 '한국인 됨'을 가졌다고 인식하는 나를 둘러싼  존재 증명이리라 그러나 이 존재 증명은 다들 알다시피 매우 불안한 것이며, 확언할 수 없다고 본다. 고로 이 '주인됨'에서 오는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딱 듣고 싶은 만큼의 비판, 듣고 싶은 만큼의 성찰에 머무를 것을 무의식적으로 주문해 버린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노자를 존경하는 것은, 그는 바로 이런 나의 '주인됨'의 판타지를 무참히 깨는 회의적인 시선을 던진다는 점,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따가운' 비평어들을 과감히 끄집어 내어 그 '날 것'의 효용을 체험하라고 제안하기 때문이다. [박노자의 만감 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국민의 이중구조화'를 경험하게 된다. '원자화'된 개인들이 국가에 대한 자발적 동의를 당연히 받아들이면서, 그 책임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면서도, '국가'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사태와 사건들에 때로는 그 개인의 책임의식을 '희생양'을 삼을만한 대리적 존재에 맡긴 채, '근거없는' 사회에 대한 힐난을 일삼기. 때론 그 힐난을 무마하기 위해, '국가적 쾌락'을 내면화한 '스펙타클한' 국가적 카니발리즘에 자신의 육체를 던지고, 그것을 긍정의 힘에 맡기기. 

우린 이런 지적을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그 지적을 이성과 논리로 받아들이려는 경우는 적었다. 그 지적을 '외국인/ 한국인'으로 구분하면서, 비판의 자격을 따지는 게 더 일상화된 것은 아닌가."아무리 그래도 외국인이 우리나라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비판하는 거 좀 그렇지 않나요?"라고 심정적 동의를 구하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곳의 부정성을 '합리화'하려는 것에 우리는 더 친숙하지 않은가.  

재범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자본주의의 무서운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민족주의를 넘어선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주문을 쉼없이 외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야! 네가 뭔데 우리나라(에서 돈 잘 벌면 되었지. 우리 그릇이나 빼앗는 주제에) 함부로 말해!" 사실 여기서 '우리나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정작 우리의 입술에서 '우리 그릇이나 빼앗는 주제'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독촉한다. 자본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생기는 사태들에 대하여, 우리는 이 '정념의 상품'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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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전두환 - 전2권
백무현 글, 그림 / 시대의창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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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원도 안되는 삶, 딴 나라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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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논쟁'이란 말을 들으면, 뉴스에서 사람들을 '낚으려고' 너무나 쉽게 쓰는 '파문'이란 말을 대할때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곤 했다. "이것들, 사람 또 낚으려고 하는구나"하는 그런 좀 못된 심보말이다. 이건 사실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한겨레나 경향을 보던 지인들이 어떤 논쟁들을 보면, 그 논쟁에 대해 '개입적인' 말을 하기보다는, 언론이 또 '괜히' 의제를 만들어보려고 안달이 났구나라는 반응이 의외로 많았다. 그래서 그 논쟁에 참여한 이는 '흥행 없는 배우'들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또 그렇게 '관중'의 위치에만 머무른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조정환-이택광의 '중간계급- 촛불' 블로그 논쟁이 아니었나 싶다. 최 원의 개입을 통해 달궈질 가능성이 농후했던 논쟁이었고, 흥미로운, 나름 유의미한 논쟁이었다고 보는데, 주변 반응은 그냥 두 지식인의 '팬덤' 대결이 아니었냐는 의견이었던 것 같다.  

예상보다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 논쟁이 있으니, 그것은 요즘 <레디앙>에서 벌어지는 '체제 논쟁'이다. 나는 아직 20대고, 그렇기때문에 과거 '사회구성체논쟁', '한국 자본주의 성격 논쟁', '시민사회 논쟁' 등등 뜨거웠던 논쟁사를 역사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체험한 세대이다. 하지만 요즘 워낙 이런 '생산적' 논쟁이 희소한지라, 옛날 그 뜨거웠던 논쟁의 나날들이 그리워진다. (사실, '그리워진다'라는 표현은 당시의 경험을 '글'로만 체험한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리라. 하지만 왠지 이 표현을 쓰고 싶어졌다. 일정한 양해를) 

사실 조희연 - 서영표 vs 손호철 구도에 머무른 채, <레디앙>에서 억지로 살려보려고 기를 쓴 느낌도 들지만, 그런 '불투명한' 의심은 하기는 싫고, 중간에 최 원 선생이 '지배어'의 생산이라는 고민의 의제를 잘 던져놓은 덕분에, 논쟁의 불씨는 계속 남은 형국이다. 이 논쟁 덕분에 얼마전 윤건차 선생의 <한국 현대사상의 흐름>을 다시 집어들어 정독했다. '레디앙'에서 본 조희연 선생과 손호철 선생의 사진을 보다가, 윤건차 선생의 문자 속에 새겨진 조희연과 손호철이라는 이름을 보니, (과장됨 없이)뭔가 가슴이 뜨끔하는 느낌이 들었다(미어진 기운보다는 약간 덜한). 그 뜨거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그렇기때문에 그 뜨거움을 유지하고 싶은 이 지식인들의 열망, 욕망. 이 열망과 욕망이 가로새겨진 이름들을 하나하나 짚을때마다, 그 어떤 사상과 이념의 적대를 떠나, 그 적대를 아우르는 지성에 대한 존경은 감히 숨길 수 없는 그 어떤 보존의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당연하리라. 

하지만, 이런 '추억의 경제'가 지금 이 논쟁을 '효율과 실리'에 머무르게 만든다면, 그것은 '탈정치'보다 더 못난 얼굴을 가진 게 분명하다. 고로 나는 이런 '생산적 논쟁'이 더 뜨거워지길 바란다. 사실  비평과 해석의 의미에 흠뻑 빠진 우리 젊은 세대에게, 진중권이 시사인에서 언급한 '제작학'으로서의 학문적 의식이 참 없다는 게 안타깝다. 늘 다가오는 현상의 해석에 힘을 쏟은 채, 그 현상의 모순을 극복해보려는 대안의 시간은, '당연한 말만이 돌아올 대답'을 해대는 '당연한 질문'의 시간으로 전락한다. (사실 고단수 선생들은 이런 젊은 제자들의 뻔한 질문질이, 제자들 그들의 '인정 투쟁'임을 안다. 그 인정 투쟁에 결국 '나'는 있고, 사람은 간과된다. 오 인간이 죽어있는 학문이여! 대학생들 반성하자!) 

그런 맥락에서 '체제 논쟁'은 현상 분석의 시간을 넘어, 현상 극복의 시간을 창발적으로 이야기해보려는 '장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태의연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다만 이승원 선생이 말한 것처럼(좀 더 정확히 말해 해석해보면), 이런 전략들이 지나친 '현실 정치와의 접점 형성'으로 간다면, 이론이 가진 '지속가능함'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리라 본다. 이 맥락에서 나 또한 조희연 선생이 던진 '어떤 민주주의인가' 그리고 최 원 선생이 언급한'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의제임을 고백해본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라는 개념에 이어,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개념 속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는 희망의 지속가능성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부디 '수사'가 되지 않길 바라며) 

조희연, ‘반신자유주의 연합’ 비판…"국민정치적 공간+반신자유주의"(9월 10일, 레디앙)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481

 

[조희연-서영표 비판] "97년체제론에 대한 왜곡에 답한다"(9월 16일, 손호철)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530

 

[논쟁-손호철 선생님께] 추상적 논의-경험주의 편향 넘기 위해(9월 23일, 서영표)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16

 

[서영표 교수에게] ‘공허하고 추상적인’ 체제논쟁의 이유(9월 24일, 손호철)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32

 

[손호철 선생께①] ‘반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정치’ 고민하자(9월 28일, 조희연)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62

 

[손호철 선생께②] “08년 체제는 87년 체제에 대한 역전”(9월 28일, 조희연)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70 

 

[투고-체제논쟁] 조희연-서영표와 라클라우-무페…김대중-노무현에 대한 착각(10월 5일, 최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733 

 

 [정치사회비평-체제논쟁] 민주후보-독자후보 논쟁 넘어 삶의 변화로(10월 9일, 이승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785

 

[체제논쟁] 최원씨에게…헤게모니 전략과 ‘민주주의적 변혁주의’(10월 19일, 조희연)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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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벤느가 쓴 푸코에 관한 에세이, <푸코, 사유와 인간>이 산책자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이 책 작업 후반부에 참여했는데, 용어 선정과 역주 작성을 도왔습니다. 폴 벤느는 한국에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라는 책으로 잘 알려져 있죠. (이 책 번역자가 이번 푸코 책 번역자인 이상길 선생입니다)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에 수록된 '역사학을 혁신한 푸코'라는 벤느의 글과 함께 보시면, 더 좋을 듯합니다. 벤느가 비유적인 표현을 많이 쓰고, 위트있고 명랑한 문체, 그리고 블랙유머같은 글 분위기를 내는 터라, 푸코를 잘 아는 분이라면, 깔깔거리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자인 이상길 선생은 한국언론학을 대표하는 신진학자로, 특히 국내에서는 피에르 부르디외 이론의 정통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 문화연구 진영에서 몇 안되는 역사연구자이기도 하죠.문화연구를 공부하고 싶은 젊은 대학생들, 대학원생들이 많이 존경하는 연구자입니다. 출판계 내에서도 성실하고 꼼꼼한 역자로 정평이 나 있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 책도 덕분에 두툼하게 나온 것 같습니다.   

<담론>을 쓴 사라밀즈의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요한나 옥살라의 <하우 투 리드 푸코>보다는 좀 전문적이고,  아마 책 홍보문구대로 들뢰즈의 <푸코>와 비교해 가면서 읽으면 쏠쏠한 재미가 있을 듯합니다. 후반기에 푸코 관련 기대작들이 출간 예정으로 알고 있는데, 연대 도서관에서 매일 대출중인  서동진 선생의 박사학위논문 <자유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예정보다 출간이 늦어지는군요. 심세광 선생님의 번역서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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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drix 2009-10-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상길 선생님 수업 듣는 대학원생입니다. 푸코 이야기는 좀 재미있겠네요. 저도 문화연구 연구하는 학새잉긴 한데. 꼼꼼하시기는 이루 말할 것도 없겠죠. 요즘 부르디외 공부하는 데 마치 "니들처럼 부르디외 그렇게 읽으면 딱 맞아죽기 십상이다"(물론 훨씬 젠틀하게 표현하시지만)라 하시는 것 같아. 엄밀한 글읽기와 책읽기에 대해 알려주시는 것 같아요. 어쨌거나. 반갑습니다. ㅎ

얼그레이효과 2009-10-28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