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푸코와 글뤽스만의 관계에 대한 아티클을 읽고서, 글뤽스만이 누군지 처음 알게 되었다. 서울신문 2008년 5월 8일자 16면에 글뤽스만 부자가 대담을 나눈 게 있어 옮겨 놓는다.  

원본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508016001 

 

佛 저명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父子 인터뷰

[佛68혁명 40돌] (3) 현대적 의미를 논하다
 

파리 이종수특파원|68혁명 4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는 열기가 어느 해보다 뜨겁다. 최근 발간된 신간만 60여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부자(父子)가 대담 형식으로 정리한 ‘사르코지에게 설명한 68혁명’(드노엘 출간)이 눈길을 끈다. 대표적 좌파 지식인이었던 글뤽스만은 지난해 사르코지 여당 후보를 공개 지원해 논쟁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출간 직후인 지난달 초 파리 10구 포부르 푸아소니에르 62번지 글뤽스만의 자택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인터뷰는 1시간 30분여 진행됐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43년의 터울을 둔 부자는 68혁명을 놓고 생각이 겹치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했다. 
 

“사르코지가 68혁명을 왜곡…”


 
 
 

출간 배경이 궁금했다. 말문을 연 것은 아들 라파엘. 그는 “우리 집은 68혁명 뒤 권위주의가 없어진 가정이니까 내가 먼저 말하겠다.(웃음)”고 했다. 
 

아들 (라파엘, 이하 아들) 지난해 여당 유세 현장에 참석했는데 사르코지 후보가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고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몹시 거북했다. 순간 68세대인 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예상과 달리 웃고 있었다. 유세장을 나온 뒤 “왜 아까 웃고 있었어요?”라고 물었다. 아버지가 “사르코지 말은 당시 대학생운동의 리더였던 다니엘 콘-벤디트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그 뒤에도 질문이 이어져 아예 책으로 만들게 됐다. 
 

아버지(앙드레, 이하 아버지) 책 제목 그대로 사르코지에게 68혁명을 설명해 주고 싶었다. 그가 68혁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68혁명 이후 상대주의가 난무하고 도덕의식이 무너졌다는 그의 진단은 맞다. 하지만 핵심을 비켜갔다.68세대의 본질적 실수는 ‘교조주의적 마르크시즘’에 빠진 것이다. 사르코지 후보는 이를 알고도 정략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나중에 한 대담에서 본인도 ‘정략적 이용’이라고 시인했다.
‘정치적 책략’이었다는 말에 담긴 의미를 물었다. 
 

아버지 당시 사르코지가 지지율이 높았다. 그래서 좌파는 물론 중도·극좌파 후보들이 ‘반(反) 사르코지 전선’을 형성했다. 그러자 사르코지가 그들의 ‘정신적 공통분모’인 68혁명을 건드린 것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사회당 세골렌 루아얄 후보가 처음엔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30분 뒤 사르코지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말려들었다. 처음처럼 대응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러자 아들이 끼어 들며 반론을 제기했다. 
 

아들 전략적 연설이었다는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르코지의 도발은 좌·우파 양 진영에 남아 있는 보수주의를 겨냥한 비판이었다. 그는 ‘프랑스 병’의 핵심을 정체성 상실로 본 뒤 그런 혼돈의 책임을 묻기 위해 68혁명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운 것이다. 이민자 출신에 이혼 경력이 있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68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68혁명을 청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자해행위’인데 이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프랑스 68혁명만이 공산주의 비판” 
 

고정된 이념에 얽매이기보다는 탄력적 사유를 강조한 두 사람에게 68혁명의 본질은 어떻게 비칠까? 
 

아버지 두 가지 의미에서의 ‘단절’이다. 하나는 프랑스의 전통적 정서, 특히 농촌에 뿌리를 내렸던 평온함을 중시하는 전통과 단절한 게 68혁명이었다. 그래서 ‘68의 아이들’은 뿌리가 뽑히고, 불확실해하고 미래에 대해서 늘 걱정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하나는 200년 동안 이어온 노동자·공산주의 중심 사상과의 단절이다. 당시 좌파 가운데 최대 정당인 공산당은 노동자를 ‘대안 사회’ 혹은 혁명을 담보할 주역으로 껴안고 있었다. 소련을 추종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했다.68세대는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아들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68혁명은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면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점이 프랑스의 독창성이다.
아버지인 앙드레 글뤽스만은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혁명의 가운데에 있었다. 그만의 경험이 담긴 ‘육성’을 들려 달라고 했다. 
 

아버지 소르본 광장에 학생들이 운집, 연좌 시위를 하면서 치열한 논쟁을 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경찰이 겹겹이 에워쌌다. 그곳에 레지스탕스이자 공산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이 찾아 왔다. 그는 “나는 공산당과 노선을 달리한다. 여러분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콘-벤디트가 “당신이 왜 스탈린을 칭송했는지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 말에 동의하겠다.”고 말했다. 대답을 못하고 돌아가는 아라공을 향해 콘-벤디트가 “당신의 흰 머리 위에 피가 묻어 있다.”고 확성기로 말했다. 이 장면은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공개적으로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라파엘이 말한) 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이나 일본의 68혁명과 가장 다른 프랑스만의 특징이었다. 
 

68혁명 이후 달라진 것들 
 

68혁명이 이후 프랑스에 가져온 구체적 변화와 그에 대한 해석에서 두 사람은 조금 입장이 달랐다. 특히 라파엘은 68세대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아들 68혁명은 ‘수직의 세계’를 수평으로 바꾸었다. 문화·관습은 물론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낙태도 허용됐고 여성이 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중·고교도 남녀 공학이 됐지. 
 

아들 그러나 프랑스 정치는 여전히 수직의 잔재가 남아 있다. 정치에서는 68혁명의 정신이 스며들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68세대를 비난한다. 프랑스는 여전히 중앙집권적이고 대통령에 집중돼 있다.. 이런 면에서 68세대라고 주장하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 
 

아버지 그래도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된 뒤 이민자 출신을 장관으로 임명하고 좌파를 등용한 것이 얼마나 열린 변화인가? 
 

아들 아직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 정국은 엘리트를 중시하는 전통적 의미의 정치집단과 사르코지가 갈등하는 형국이다.
이윽고 화제가 ‘68혁명의 현대적 의미’로 넘어 왔다. 아버지 앙드레 글뤽스만은 좌·우를 떠나서 인권과 자기 성찰, 유럽공동체 정신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튼실히 하면서 68혁명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들은 ‘68혁명의 재해석’을 강조했다. 
 

아버지 68정신의 요체는 ‘감히 교수와 다르게 생각하기’다. 좌·우파를 아울러 한 진영에 종속되기보다는 항상 자신과 주위를 돌아 보면서 비판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내가 58년 부다페스트 사태 때 소련을 비판했다가 공산당에서 출당을 당한 것이나 70년대에 ‘배신자’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소련의 재야 인사들을 지지한 것도 그런 이유다. 
 

아들 그러면 지금은 “우리는 티베트인”이라고 말해야겠다. 
 

아버지 그렇다. 중국이 강국이라고 눈치를 봐선 안 된다. 
 

아들 그런 의미에서 68혁명 지도자 가운데 한 명도 제도권 정치의 핵심에 들어간 사람이 없는 것도 흥미롭다. 다니엘이 속한 녹색당도 68년 이후에 생긴 당이어서 제도권 정당으로 보기 어렵고 베르나르 쿠슈네르 외무장관도 사회당원이었지만 당 내에서는 늘 변방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68정신은 늘 프랑스의 전통적 중심부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두 부자는 68혁명 리더들이 각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 
 

아들 그건 다행아닌가. 혁명의 리더들이 한 길을 걷지 않은 것은 진영 구분짓기를 끝냈다는 의미다. 아버지 말대로 ‘스스로 운명 선택하기’를 실천했다는 거다. 꼭 좌파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지워진 고정관념이다. 또 68세대가 깨고 싶었던 ‘벽’이 아닐까?
다시 물었다.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진 앙드레 글뤽스만이 지난해 사르코지를 지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냐고? 
 

아버지 그렇다. 대선 후보 가운데 유일하게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인권을 부활하겠다고 말한 이가 사르코지였다. 좌파의 비판이 예상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vie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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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한국일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017042 

佛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에 대하여 

 앙드레 글뤽스만은 1937년생이다. 그의 사상적 궤적은 좌우를 넘나들었지만, 그런 편력 속에서도 그가 일관되게 탐구한 것은 악의 다양한 형태들이었다.

글뤽스만은 그 악에 맞서는 행동적 지식인으로서 ‘소극적 윤리학’라고 부름직한 반유토피아주의에 안착했다.

글뤽스만의 첫번째 저작은 ‘전쟁론’(1967)이다. 전쟁이라는 주제는 현대의 철학자들이 좀처럼 다루지 않는 것이지만, 글뤽스만에게는 그것이 악의 문제를 탐구하는 출발점이었다.

그 세대의 많은 좌파 프랑스 지식인들처럼 그도 마오처퉁주의자로서 자신의 사상적 편력을 시작했고, 당대의 프랑스 지성계를 감염시킨 극좌적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러나 68년 5월 혁명 이후, 특히 솔제니친의 작품들이 프랑스에 알려진 70년대 이후, 그는 ‘신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반(反)마르크스주의를 이끌며 과격한 사상 전향을 했다.

글뤽스만이라는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사상의 거장들’(1977)에서 그는 마르크시즘만이 아니라 계몽주의와 거대 철학들의 해방적 전통을 단호히 비판함으로써 반(反)전체주의적 입장을 명확히 했다.

그런 해방적 전통은 관념론으로 추락하며 역사 속에서 최악의 정치적 기획을 도왔다는 것이 비판의 근거였다.

글뤽스만에 따르면 윤리는 선에 대한 욕망에서 나올 수 없고, 오직 악에대한 저항에서만 나올 수 있다.

‘사상의 거장들’은 그의 이런 이념적 선회를 선명히 보여주면서, 그를“마르크스는 죽었다”는 명제로 요약되는 신철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1978년 가을에 사르트르, 아롱과 함께 남베트남 출신의 보트피플을돕기 위한 ‘베트남에 배를’ 운동을 주도하면서 사르트르와 아롱 사이의화해를 주선했고, 그 뒤에도 보스니아 내전이나 에이즈 같은 현실적 문제에 개입하며 참여적 지식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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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 2009-12-17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덕분에 좋은 기사 만났네요, 이것 말고 직전 포스트요.
사실 글뤽스만이라는 반동적인 사르코지 지지자는 알 필요도 없고,
오히려 신철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비판적 시각이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됩니다 :

- Jean-François Lyotard, Instructions païennes, Éditions Galilée, 1977.
- Gilles Deleuze, « Les « nouveaux philosophes » », supplément au n°24 du bimestriel Minuit, mai 1977 --> 텍스트 전문: http://1libertaire.free.fr/Deleuze03.html
- Pierre Bourdieu, « Le hit-parade des intellectuels français, ou Qui sera juge de la légitimité des juges ? », Homo academicus, Minuit, 1984, annexe 3.
- Daniel Bensaïd, Un nouveau théologien : Bernard-Henri Lévy, Lignes, 2008.

얼그레이효과 2009-12-1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료타르와 부르디외의 텍스트 외엔 아직 접하지 못한 것들이네요. 좋은 링크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 피에르 부르디외의 호모 아카데미쿠스와 실천 이성, 파스칼적 명상같은 책을 쓰고 싶은 머나먼 꿈이 있습니다.
 



 

원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88 

 

신철학자들 좌파 비판, 미디어 만나 시대 풍미
푸코, 무늬만 비슷해도 극찬…들뢰즈와는 결별 

 프랑스에서 반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1973~81)를 주창한 신철학은 분명 한 시대를 풍미한 신사조임이 분명하다. 과연 신철학은 상반된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 사이에 어떤 가교 역할을 했고, 특히 스탈린의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 증오심을 가진 좌파 지식인들과 어떤 정신적 유대관계를 가졌는가?

프랑스 미디어 지식인의 역사에서 1977년은 분명 ‘신철학자들’의 해로 기록될 만하다. 특히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앙드레 글뤽스만이 철학계의 혜성으로 떠오른 해다. 좌파 이념을 공격한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이들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앙리 레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La Barbarie à visage humain)이 발간 2주 만에 3만7천 부가 팔린 데 이어, 글뤽스만의 <대사상가들>(Les Maîtres penseurs)도 출간 한 달도 채 안 돼 3만 부가 팔렸다. 이 책들은 1년 사이 각각 8만 부가 나갔다. 이 책들의 성공은 프랑스 반전체주의 시대 도래의 신호탄이었다.

신철학자들이 좌파 정책과 좌파 이데올로기를 겨냥한 비판은 과장되긴 했어도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신철학’은 좌파연합 내부에 최대 위기가 닥치기 시작한, 정확히 1977년 5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다. 1977년 3월 12일과 20일에 치른 시의원 선거에서 프랑스사회당(PS)과 프랑스공산당(PCF)이 압승하고, 모든 이들이 197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파의 승리를 점치던 가운데, 선거의 승리는 오히려 좌파 진영에 경쟁과 분쟁을 심화시키고 내홍을 겪게 했다. 이에 PCF가 서둘러 양당 공동 프로그램을 운영하자고 요구해 5월부터 양당 대표의 협상이 시작됐지만, 협상은 그해 11월 23일 결렬됐다.

언론들의 뜨거운 관심

1977년 봄과 여름, 신철학자들은 좌파의 이런 위기를 상기시키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토론 방식을 제안하면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도처에서 열린 신철학 관련 토론이 정치적인 핵심 이슈가 됐다. 프랑스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아포스트로프>는 ‘신철학자들은 우파인가 아니면 좌파인가?’란 제목으로 신철학자들을 조명했다. 시사주간지 <누벨옵세르바퇴르>는 1978년 대선을 예측하기 위해 잡지에 ‘목표 78’이란 토론의 장을 신설했고, 신철학자들은 이 지면을 통해 의견을 개진했다.

또 일간 <르몽드>도 이들의 정치적 태도를 다뤘다.(1) 최고 지식인들로 손꼽히는 저명인사들은 신철학을 용인하며,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이들 또한 신철학이 정치적으로 시의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혁명적인 담론이나 계획에선 전체주의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인식했다. 1977년 프랑스의 좌파 연합 당시,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 강조되면서 이같은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신철학의 성공 요인을 단순히 지식인들의 삶 속에서 커지고 있는 미디어의 역할로 한정할 수만은 없다. 비록 도서출판 그라세(Grasset)의 발행인과 이 출판사의 시리즈물 책임자인 베르나르앙리 레비가 그라세 소속 저자들을 홍보하기 위해 신철학을 창안해냈지만, 신철학이 지적 영역 자체를 상대로 외적인 언론플레이를 통해 이념의 삶의 터전(지식인들의 삶의 터전)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철학이 인정받게 된 것은 정치 및 문화 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유명 지식인들에 의해 홍보되고 토론되며,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미치는 정치적 파장 때문이었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롤랑 바르트가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옹호하기 위해, 또 장프랑수아 르벨이 신철학을 전반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개입했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바르트는 레비가 내린 <역사적 초월의 위기>라는 진단에 동조하며, 레비의 글쓰는 방식(2)에 “반했다”고 토로했다. 르벨은 좌파연합 반대 투쟁을 벌이는 신철학자들을 지지하며, 신철학자들이 전체주의에 대한 분석을 담은 자신의 저서 <전체주의의 유혹>에 공감한다고 여겼다.

유명 지식인들, 신철학 옹호

그러나 이들보다는 또 다른 두 유명 인사의 역할이 신철학을 인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글뤽스만의 <대사상가들>을 찬양한 미셸 푸코의 역할뿐 아니라, 자신의 문학잡지 <텔켈>을 통해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신철학이 주도하는 투쟁에 동조한 필리프 솔러스의 역할이 그것이다.

푸코는 <누벨옵세르바퇴르>를 통해 <대사상가들>을 극찬했다. 한발 더 나아가 1977년, 푸코는 글뤽스만이 <요리사와 식인종>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자신의 저서 <광기와 비이성>을 활용해 ‘굴락’(Goulag·극동 러시아의 수용소 군도)과 지난 고전시대에 자행된 ‘대대적인 감금’을 비교한 것을 용납했다. 하지만 푸코의 글뤽스만 지지는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푸코는 클로드 모리아크와 질 들뢰즈가 자신을 비판하자, 자신의 견해(3)를 재고하기보다는 이들과 친교를 단절해버렸다.

글뤽스만의 견해, 특히 권력과 이성에 대한 그의 개념은 푸코 자신이 더욱 엄격한 분석을 통해 정의한 개념과는 달랐다는 점에서 푸코의 그런 태도는 한층 수수께끼 같다. 글뤽스만은 권력을 국가와 동일시하며 권력과 국가, 두 기관으로부터 소외된 대부분의 평민을 지지한 반면, 푸코는 혁신적인 자신의 가설을 통해 권력이 분산돼 있다고 봤다. 푸코의 미시구조(micro-structures)적인 접근 방식은 통치자들에게 집중된 통치권 개념에 명백히 반대 태도를 취하고 있다. 더욱이 글뤽스만은 (철학 및 헤겔적인) 이성과 학문을 통치와 완전히 동일시하며, 푸코의 계보학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다.

왜 푸코가 글뤽스만을 지지했는지 설명하고 싶다면, 푸코의 미디어 활용, 즉 그가 자신을 신성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1960년대, 교수로서 명성을 얻은 푸코는 지식 잡지와 문화 매체를 통해 자신의 명성을 문화계로 더 광범위하게 확장한다. 푸코는 그의 저서 <말과 사물>의 출간과 함께 순식간에 슈퍼스타 지식인 반열에 올랐다. 언론이 이 책을 놓고 장기간 토론을 벌이며, 이 책은 1966년 여름 베스트셀러가 됐다. 문화계에서 얻은 이 명성이 중요한 계기가 돼, 푸코는 1970년 프랑스 국립고등교육기관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골수 반공주의자 푸코

1970년대, 푸코는 여전히 지식인 사회에 명성을 알리는 데 목말라했다. 그는 급기야 동시대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 저서를 집필했다. 비록 글뤽스만이 푸코의 이념을 왜곡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명성을 좇는 푸코에겐 좋은 동반자였다. 특히 이들의 동반자 관계는 1976년 출간된 <성의 역사>의 제1권 <앎의 의지>에 대해 언론이 푸코의 기대와는 달리 시원찮은 반응이 보였을 때 두드러졌다. 글뤽스만은 서평 기고문을 통해 푸코의 저서를 극찬했다. 그는 푸코가 마르크스 이후 처음으로 <현대 세계의 가장 직접적인 본질>(4)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푸코가 글뤽스만을 지지한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골수 반공산주의자인 푸코는 좌파가 68혁명에서 우연찮게 승리를 쟁취하자 걱정이 된 듯, “공포를 주지 않는 권력 행사를 고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코는 1978년 국회의원 선거 전날 좌파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묻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좌파에 합류할 것이 아니라 지난 15년 동안 자신과 여타 사람들이 재설정해놓은 정치적 정의(定義)에 좌파가 적응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는 반공세력을 옹호하는 집회에 낀 지식인들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다.

푸코는 권력을 20세기의 본질적인 문제로 파악했다. 그는 권력 문제가 과거에 잘못 이해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현대적인 권력의 양식을 이해하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선 권력에 대한 개념의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감시와 처벌, 그리고 ‘굴락’

푸코는 아마도 글뤽스만처럼, 통치권력을 등한시할 정도로 규율권력의 중요성에 심취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따금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자행된 권력 행사의 가장 끔찍한 순간들이 서구에서 자행된 권력 행사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비쳤을 것이다. 푸코는 자신의 저서<감시와 처벌>에서 ‘굴락’과 서구의 형무소를 ‘수용소 군도’처럼 묘사하며 서로 견주었다. 또 소비에트연합에서 활용된 억압적인 정신의학이 “정신의학의 활용을 왜곡”한 것이 아닌, 그게 정신의학의 “근본적인 프로젝트”라고 주장했다.(5)

그가 러시아의 굴락과 서양의 <대대적인 감금> 사이를 견주며 가장 우려했던 것은, 이런 비교가 모든 박해의 이미지를 혼탁하게 하는 데 쓰이지나 않을까, 또 이를 구실로 PCF가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좌파는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기존 담론을 수정하지 않고 고수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푸코는 재출간된 <감시와 처벌>에서 ‘수용소 군도’란 용어를 삭제했다. 푸코는 <요리사와 식인종>은 이런 정치적 덫에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자신과 굴락 그리고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분석 작업을 해본적이 없던 푸코는, 글뤽스만의 저서 <대사상가들> 속에서 그 자신이 주도적으로 비판했던 적들(공산주의자,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및 국가)에 대한 규탄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분명 이 책을 극찬했던 것이다.(6)

글·마이클 크리스토퍼슨 Michael Christofferson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 곧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될 <좌파에 맞선 지식인들, 프랑스의 반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Les Intellecuels contre la gauche. L‘idéologie antitotalitaire en France, 2009)의 저자. 이 글은 그의 저서를 간추려 발췌한 것이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르몽드>, 1977년 5월 27일.

(2) 롤랑 바르트, <베르나르앙리 레비에게 보내는 편지>.

(3) 미셸 푸코, <말과 글 1976~1979>, 갈리마르, 파리, 1994, p277~281, 418~428. 클로드 모리아크, ‘희망은 죽이지 말아야 한다’, <르몽드> 1977년 7월 7일. 질 들뢰즈, ‘신철학자들’, <르몽드> 1977년 6월 19~20일.

(4) Niilo Kauppi, <French Intellectual Nobility: Institutional and Symbolic Transformations in the Post-Sartrian Era>, 뉴욕주립대 출판부, Albany, 1996, p.134~136. David Macey, <The Lives of Michel Foucault: A Biography>, Pantheon, 뉴욕, 1993 p.189 sq. 미디어에서 성공을 거둔 <말과 사물>, 앙드레 글뤽스만의 <대사상가들>, 그라세, 파리, 1977, p.237.

(5) 미셸 푸코, <섹스 킹에게 ‘NO’를 외쳐라> <1976년 1월 1일 강의> <말과 글 1976∼1979>, op. cit.,p266~267, 189 및 335, <감시와 처벌>, 갈리마르, 파리, 1975, p.305.

(6) 미셸 푸코, <1976년 1월 7일 강의> <소련을 비롯한 여타 국가에서의 범죄 및 징벌> <권력 및 전략> <말과 글 1976∼1979>, op. cit., p.166~167, 69, 418~421,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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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12-17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와 신철학과의 관계가 이런 게 있었군요.좋은 정보네요.아직도 앙리 레비는 활동하는 데 비해 글뤽스만은 요즘 좀 잠잠하죠?

얼그레이효과 2009-12-17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 반갑습니다. 사실 레비는 아는데, 이번 기사보고 글뤽스만이란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서울신문에 글뤽스만 부자가 대담을 나눈 것이 있어 포스트에 링크를 걸어놓으려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2-1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가 보던 77년~78년 시사잡지를 보면 앙리 레비와 글뤽스만을 동시에 소개하더라구요.둘이 신철학파의 총아였지요.요즘은 앙리 레비만 알려진 듯 해요.

얼그레이효과 2009-12-1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그랬군요. 고맙습니다.
 
스펙타클의 사회 - 문화교양 7
기 드보르 지음, 이경숙 옮김 / 현실문화 / 1996년 10월
구판절판


스펙타클을 시각 세계의 남용이나, 이미지들의 대량유포 기술의 산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되고 물질적으로 번역된 세계관이다. 그것은 대상화된 세계관이다.-11쪽

스펙타클은 엄청나게 긍정적인, 반박 불가능하고 접근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오로지 "겉으로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겉으로 보인다"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수동적 수용인데, 실은 스펙타클은 아무런 응답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신의 겉보이기 방식에 의해서, 즉 외양의 독점에 의해서, 이같은 수동적 수용을 이미 달성하고 있다. -14쪽

스펙타클은, 경제가 살아있는 인간들을 완전히 예속시키는 정도만큼, 살아있는 인간들을 자신에게 예속시킨다. 스펙타클은 자신을 위해 발전하는 경제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생산의 참된 반영이며, 생산자들의 허위적인 대상화이다.-15쪽

스펙타클은 활동을 관찰이라는 범주의 견지에서 파악하고자 한 서구 철학체계가 지닌 모든 취약점들을 상속받고 있다. 나아가 그것은 이 사유로부터 자라나온 정밀한 기술적 합리성의 끊임없는 확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스펙타클은 철학을 현실화하지 못한 채, 현실을 철학화한다. 각 개인의 구체적 삶은 사변적인 우주로 격하되었다.-17쪽

스펙타클이 번쩍거리며 다양하게 바뀌는 중에도, 진부함이 현대 사회를 지배한다. 이것은 전세계에 걸쳐서, 그리고 상품소비의 발전 덕분에 선택할 만한 역할들과 대상들이 증가한 듯이 보이는 모든 지점에서 그러하다. 종교 및 가족의 잔존물들(계급권력의 주요 세습유물들)과 그것들에 의해 보장되는 도덕적 억압은, 이 세계의 즐거움이 긍정될 때에는 언제든지 서로 한 몸이 된다.- 이 세계는 억압적인 사이비 즐거움에 불과한 것이 된다. 또한 현존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는 점잖은 순응도, 순전히 스펙타클적인 반란과 한 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경제적 풍요가 생산을 확대시켜 이같은 원재료들을 가공하는 과정에 이르게 되면 곧바로, 불만족 그 자체도 상품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반영한다.-42쪽

유명인사 소비하기는 각기 다른 유형의 개성들을 피상적으로 대변하고, 이런 각 유형들이 소비의 총체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갖고 있으며, 거기서 유사한 행복을 찾아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자신의 인격 속에 체제 자체를 구현하고 있다고 칭송받는 인물들은 그들의 실제 모습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사소한 개인적 삶의 현실을 은폐함으로써 위인이 된 것이고,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44~45쪽

풍요한 소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주로 청년과 기성세대 사이의 스펙타클적 대립이 허위적인 역할들 중에서도 맨앞에 등장한다. 이것이 허위적인 까닭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서의 기성세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것에 대한 변혁자로서의 젊음이란 것도 현재 청년기에 있는 사람들의 /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체제, 즉 자본주의의 역동성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이 지배하고, 사물들이 젊은 것이다. 다시 말해, 사물들이 서로 대결하고 서로를 대체한다.-45~46쪽

헤겔은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변혁을 해석해야만 했다. 그러나 헤겔은 그 변혁을 단지 해석하기만 함으로써, 철학을 철학적으로 완성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형성하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유는 아직 항상 너무 늦게 등장하는, 사실을 뒤쫓아가며 그 사실의 정당성을 선언하는 의식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오로지 사유 속에서만 분리를 초월하였다. 모든 현실의 의미는 그 역사적 완성에 의존하는 동시에 이 의미는 현실이 자신을 역사의 완성으로 만드는 동안 드러난다는 역설은, 17세기와 18세기의 부르주아 혁명을 사유한 이들이 헤겔철학에서 이들 혁명의 결과와 화해만을 찾아내려 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유래한다.-57쪽

이데올로기가, 절대권력의 소유를 통해 절대적 존재가 된 후, 부분적 지식에서 벗어나 전체주의적 허위성으로 바뀔 때, 역사에 대한 사유는 역사 자체가, 심지어 가장 경험적인 지식의 차원에서조차, 더이상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파괴된다. 전체주의 관료제 사회는 영속하는 현재 속에 사는데, 이 중단없는 현재 속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관료제를 위해 관료제의 경찰이 접근할 수 있는 장소로만 존재한다. 나폴레옹이 이미 천명한 적이 있는 "기억의 에너지를 지도하는 통치자"라는 웅대한 기획은 과거의 부단한 조작, 즉 그 의미와 사실 자체 양자 모두의 조작에서 총체적으로 구현된다.-88쪽

파시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계엄상태이며, 이를 수단으로 하여 자본주의 사회는 국가를 사회관리에 대규모로 개입시킴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고 또한 자신에게 미봉적인 합리화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같은 합리화 자체는 그 수단들이 엄청나게 비합리적이라는 부담을 지고 있다. 비록 파시즘이, 공황으로 인해 파산하거나 사회주의 혁명의 무력감에 기만당한 프티 부르주아지와 실업자들을 재규합함으로써, 이미 보수화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거점들(가족, 재산권, 도덕질서,국가)의 방어를 돕고 있긴 하지만, 파시즘 자체는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즉, 인종,혈통, 지도자 등의 케케묵은 사이비 가치들이 규정하는 특정 공동체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신화의 폭력적 재생이 그것이다. 파시즘은 기술적으로 장비를 갖춘 복고주의이다. -89쪽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이 겪은 개별적인 악에서는 물론 개별적인 악의 교정에서도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할 수 /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수많은 악들의 교정에서도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오직 삶의 변두리로 추방되었다는 절대적 악 속에서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97~98쪽

시간의 사회적 전유, 즉 인간노동에 의한 인간의 생산은 계급들로 분할된 사회 내에서 발전한다. 순환적 시간의 사회가 처해 있는 빈궁함 너머에 확립되어 있는 권력, 즉 사회적 노동을 조직하여 제한된 잉여가치를 수탈하는 계급은, 동시에 사회적 시간의 조직에서 나오는 시간 잉여가치도 수탈한다. 즉, 그 계급은 살아있는 것들의 불가역적 시간도 독점한다.-108쪽

사이비 순환적 시간은 현대의 경제적 생존의 소비시간이자, 증대된 생존의 소비시간으로, 이 시간 속에서 나날의 삶은 계속 결정권을 박탈당하고 더 이상 자연질서가 아니라, 소외된 노동 속에서 발전된 사이비 자연에 속박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시간은 자연스럽게 전산업사회의 생존을 조정했던 고대의 순환적 리듬을 재구축한다. 사이비 순환적 시간은 순환시간의 자연적 잔존물에 의지하며 아울러 그것을 활용하여 새로운 동질적인 조합들, 즉 밤과 낮, 노동과 주말 휴식, 휴가의 정기적 반복을 편재한다. -127쪽

집중된 자본주의는, 가장 발달한 부문의 경우, 방향을 "완전히 구색을 갖춘" 시간 블럭들을 판매하는 쪽으로 정한다. 그리고 블럭 각각은 많은 다양한 상품들을 통합하는 단일한 통일된 상품이다. "서비스"와 여가가 팽창하는 경제에서, 이것은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계산된 지불의 정식을 낳는다. 즉, 스펙타클적 환경, 휴가의 집단적인 사이비 대체, 예약을 통한 문화적 소비, 그리고 "열정적인 대화들"과 "명사와의 만남"이라는 형태의 사교성 자체의 판매등이다. 이런 종류의 스펙타클적 상품은, 오로지 그것에 상응하는 현실들의 심화된 빈곤때문에 유통될 수 있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마치 신용으로 지불될 수 있음으로써 현대화된 판매기법의 시험적 품목에 적합한 것이 분명한 한 것과 같다.-128쪽

소비성 사이비 순환적 시간은, 좁은 의미로는 이미지들의 소비 시간으로서, 그리고 넓은 의미로는 시간소비의 이미지로서, 스펙타클의 시간이다. 이미지 소비의 시간, 즉 모든 상품들의 매개체는 불가분 스펙타클의 각종 수단이 힘을 쏟는 장이며, 또 그것들의 목표이며, 모든 구체적 소비의 장소와 그것의 주요형태이기도 하다. 자동차의 속도든 건조된 수프의 활용이든 어느 것에서든, 현대 사회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시간절약은, 미국인구의 경우에는 TV의 단순시청이 하루 평균 3시간부터 6시간을 점하고 있다는 / 사실로 구체적으로 번역된다. 시간소비의 사회적 이미지는 모든 스펙타클적 상품처럼, 여가와 휴가의 계기들에 의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의상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되는 계기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지배된다. 여기서 이 상품은 명시적으로 현실적 삶의 계기로 제시되며, 중요한 점은 그것의 순환적 복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삶을 위해 마련된 계기들에서조차, 스펙타클은 여전히 더욱 더 강도높은 것이 되면서 관망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 진정한 삶으로 표상되었던 모든 것은 단순히 더 진정으로 스펙타클적인 삶으로 드러난다. -128~129쪽

스펙타클은,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으로서, 역사적 시간이라는 토대 위에 건설된, 역사를 포기하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으로서, 허위적인 시각의식이다. -131쪽

관광, 즉 소비라고 간주되는 인간의 유통, 상품유통의 부산물은, 근본을 보면, 이미 진부화된 것을 관람하러 가는 여가활동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다른 장소들로 가는 것을 담당하는 경제조직은 이 / 미 그 자체로 장소들의 등가성에 대한 보증이다. 여행으로부터 시간을 제거한 바로 그 동일한 현대화는 또한 그것으로부터 공간의 현실성을 제거했다. 169번 : 환경의 모든 것을 조형하는 사회는 바로 그 자신의 영토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기술, 이같은 과제들의 집적의 공고한 기반을 발전시켜 왔다. 도시주의는 자본주의가 자연환경과 인간환경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논리적으로는 절대적인 지배로 발전하면서 이제 자본주의는 공간의 총체성을 그 자신의 틀 속에서 재창조할 수 있고 재창조해야만 한다. -170번- : 도시주의에 의해 삶의 가시적인 동결의 형태로 충족되는 그 자본주의적 욕구는 헤겔적인 용어로서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의 쉼없는 생성"에 대한 "공간의 평화로운 공존"의 절대적 지배로 표현될 수 있다. -136~137쪽

"농촌은 정확한 모순, 즉 고립과 분리를 보여준다"(독일 이데올로기)도시주의는 도시를 파괴하고 다시 사이비 농촌을 재건하지만, 그 사이비 농촌은 그 역사적 도시에 의해 직접적으로 도전받았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는 물론이고 옛 농촌의 자연적 관계 또한 결여하고 있다. 새로운 인조농민들이 오늘날의 "조직화된 영토"안에서 주택과 스펙타클적 통제의 조건에 의해 다시 창조되고 있다. 늘상 농민들로 하여금 독립적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했고 창조적인 역사적 세력임을 자임하지도 못하게 했던 그 산재성과 협소성이 오늘날 또다시 생산자들의 특성이 되고 있다.(중략) 기술공학적 사이비 농민들로 구성되는 "신도시들"은 풍경에다 자신들이 입지하고 있는 역사적 시간과의 결렬을 뚜렷하게 새겨넣는다. 따라서 그들의 모토는 "여기서는 언제까지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역사적 부재의 세력들이 자신들만의 풍경을 꾸미기 시작하는 것은 도시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역사가 아직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142쪽

스펙타클이라는 비판적 개념은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모든 사항을 설명하고 추상적으로 부인하는 사회학적 및 정치적 수사학의 케케묵은 알맹이 없는 공식으로 속화될 수 있고, 그리하여 스펙터클적 체계를 방어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이제 명백한 점은 어떤 사유도 현존하는 스펙타클을 초월하여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펙타클을 둘러싸고 현재 존재하는 사유들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를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데 요망되는 것은 실천적 힘을 작동시키는 인간들이다.-161쪽

피터 마샬 작,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 중에서 : 상황주의자들은 다다, 초현실주의, 문자주의 Lettrism에 의해 영향받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및 지식인들의 소규모 모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시와 음악을 융합시키고 도시경관을 변형시키고자 했던 문자주의 인터내셔널은 1957년 잡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창간했던 집단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다. 처음에 그들은 주로 "예술의 폐지"에 관심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 이전의 다다이스트들과 초현실주의자들처럼 분리된 활동으로서의 예술과 문화라는 범주를 대체하여 그것들을 일상적인 삶의 부분으로 변형시키고 싶어했다. 문자주의자들처럼 그들은 노동에 반대하고 완전한 여흥을 옹호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창조성은 엉뚱한 곳에 소모되고 억압받으며 사회는 배우들과 구경꾼들, 생산자들과 소비자들로 분할된다. 그들은 일단의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력이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했고 모든 이들이 시와 예술을 창작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선언했다. 노동이나 권태따위는 지옥으로나 가라!-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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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레이몽 부동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한 책에서, 칼 맑스와 미셸 푸코를 '의혹의 철학자'들이라고 불렀다. 맑스는 다들 알다시피,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격언을 남겼고, 푸코 또한 자신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을 '파헤치는 데' 몰두한 지식인이었다. 의혹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의혹과 함께 자주 사용하는 표현은 '드러나다'이다. 의혹의 숙명은 바로 이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매일 보는 뉴스라든지, 혹은 경찰들의 체포 현장을 찍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의혹'은 그 드러남의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그 알몸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의혹이 더 매력적인 이유는 의혹의 알몸을 보기 이전에, 그 알몸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여백 때문이다. 이 여백이 오늘날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쾌락의 상품으로 작용하면서,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진실 이전의 상황에서 자신이 제시하는 '답 던지기'를 즐기는 듯하다.  이러한 '답 던지기'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발달하면서, 더욱 활발한 놀이로 규모가 커졌으며, 스포츠신문과 같은 올드미디어들은 이 대세에 따라 노골적으로 철자 게임을 기사화한다.  

이는 비단 연예면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의혹은 정치가 미디어와 결탁하여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술수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이 어떻든, 의혹은 '진실이 나올 것 같은 상황'만 연출해주면 그 소임은 다한 것이다. '나올 것 같은 상황'에서 시작되는 '답 던지기'게임에서, 무수한 답들이 공개되고, 그 답이 갖고 있는 각각의 화살표들은 사건의 진실을 뒤덮을만한 쾌락의 시간을 구성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하나의 사건에서, 그 사건이 감당하고 있는 진실의 드러남은 오히려 드러남 이전보다 그 쾌락의 농도가 얕다. 아주 예전부터 사회학자와 정치학자들이 작금의 정치현실을 수긍하는 형태로 제시한 '정치 소비'라는 개념 속에서, 의혹의 소비는 그나마 정치에 무관심한 개인이 정치에 발을 담그도록 하는 유망주인 것이다.  의혹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 가장 정치적인 언어다라는 탈을 쓴 가장 탈정치적인 언어인지 모른다. 혹은 정치를 도덕에만 등치시킨 채, 정치의 후퇴를 촉진하는 보수적 언어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의혹의 소비가 진행될수록, 대중들은 희망을 가질 만한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 시대의 '상식'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허나 우리가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옛 말을 언제까지 수긍하고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보수란 이름도 붙이기 아까운 그 집단은 대중들이 사실 그 말을  영원히 갖고 살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슬프게도 정치꾼들이 영원히 감추고 싶어하는 의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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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읽다가 가져왔다.  

   



군주는 인간과 야수의 본성을 지닌 잡종 짐승  

자크 데리다의 미발표 원고, 마키아벨리의 '망각된 늑대' 

'속임수' 군주의 모습은 영원 불변한가?
"미국은 거짓으로 얼룩진 시뮬라크르 국가인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자크 데리다는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야수와 군주'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주관했다. 강의는 왕권과 '정치인의 동물적 형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갈릴레 출판사가 이 방대한 내용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그 내용의 일부를 입수했으며, 여기에서 데리다는 16세에 근대정치학의 기초를 세우는데 기여한 니콜라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분석한다. <군주론>은 강자들의 지침서일까, 아니면 민중들의 교과서일까?

페리에스(Peries)가 번역한 니콜라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1)제18장에는 '군주들이 자신들의 약속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군주들이 지켜야할 발언에 관련된 대목, 곧 '군주들이 자신들 약속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혹은 '군주들이 자신들 약속에 어떻게 충실해야 하는가?' 등과 관련된 질문은 '인간 고유의 속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상 하나를 이루는 이러한 이중의 질문은 그 방식도 흥미롭다. 거기서 '늑대'뿐만 아니라 보다 잡다한 '동물'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 장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군주가 자신의 약속에 충실한 모습을 찬양할 만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에서 주목한다. 실제 그것은 찬양받을 만하다. 마키아벨리는 성실한 군주가 거의 없고, 대부분의 군주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속임수를 구사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군주들은 약속을 하면서 거의 대부분 속임수를 쓴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장 강한 군주들이 자신들 약속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는 군주들에 대해 승리를 거둔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로랑 드 메디치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투쟁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법과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과 싸우는 것이다." 2)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맹세한 신앙을 통해 권리, 정의, 성실성, 그리고 법, 약속, 규약, 제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약속의 배반, 거짓말, 서약 위반, 약속에 대한 무시, 힘의 무자비하고도 단순한 사용(최강자의 논리)을 통해 싸운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마키아벨리는 기묘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그것을 더 면밀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원칙적으로 약속은 법에 대해 성실하고, 법을 존중한다. 그는 약속에 대한 충성도와 함께 법과 더불어 싸우는 것은 인간 고유의 속성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주장은 원칙적으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 거짓말하거나 거짓 선서를 하지 않는 것은 인간 고유의 속성이자 존엄성"이라는 칸트의 주장과 대동소이하다.
 

  투쟁하는 두 번째 방식인 힘과 싸우는 것은 짐승들 방식이라고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짐승인 것이다. 법이 아니라 힘이 최강자라는 논리는 짐승에 해당한 것이다.
 이런 두 논리를 펼친 후 마키아벨리는 법과 더불어 싸우는 첫 번째 방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세 번째 주장을 설파한다. 법만으로는 무기력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지해야 한다. 군주는 법과 힘이라는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투쟁할 줄 알아야한다. 따라서 군주는 인간과 짐승으로 동시에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구절을 인용하자면, "군주는 적절하게, 짐승인 동시에 인간으로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3)
 

  약속에 대한 충실 등 법을 통한 행동이 무기력하거나 잘 굴러가지 않을 때, 약하거나 혹은 너무 약할 때에는 짐승으로 처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인 군주가 '마치 짐승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고대 작가들이 아킬레스와 고대의 여러 영웅들을 거론하며 우의적으로 가르쳐준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반인반마의 괴물 켄타우로스 일족인 케이론이 그들을 맡아 젖을 먹이고 키웠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인 교사를 그려내면서 작가들은 하나의 군주가 두 가지 본성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 하나의 본성이 다른 본성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4)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인간인 동시에 짐승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군주의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 한편, 동물적인 부분은 잡종이어야 하고, 혼성적이며, 두 동물의 혼합물 내지 접목, '사자이자 여우'이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단지 하나의 짐승이 아니라 하나 속에 두 개 짐승이 들어있는 것이다.
 

   "만약 사자에 불과한 동물이라면 덫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만약 여우에 불과한 동물이라면 늑대에 맞서 자신을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덫을 알아내기 위해 여우일 필요가 있고, 늑대에게 겁주기 위해 사자일 필요가 있다. 단지 사자이기를 고집하는 동물들은 서투르기 그지없다." 5)
 여기서 선언된 적은 늘 '늑대'이다. 사냥하고 격퇴하며, 제압하고 투쟁해야할 대상은 늑대이다. '늑대에 맞서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나의 생각에 더욱 흥미롭고 첨예한 문제는 늑대에게 '겁을 주는' 일이다.
 

  늑대에게 겁을 주는데 사자만으로 족하지 않을 경우 여우의 노하우를 이용할 수도 있다. 파스쿠아(Pasqua)가 주장한 대로 테러리스트들에게 테러를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자크 시락(Jacques Chirac) 정부 하에서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샤를 파스쿠아(Charles Pasqua)의 유명한 표현이다. 이 표현을 통해 파스쿠아는 테러리스트들에 맞서 동일한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정당화시켰다.6)
 

   야만적 폭력의 상징인 늑대만큼 잠재적으로 무시무시하고 끔찍하며, 잔인하고 무법자일 필요가 있다.
 이 말이 너무나 잘 들어맞는 이 시대 사건들을 과도하게 열거하는 대신 나는 노암 촘스키(Noam Chomsky)가 자신의 저서 속에서 '불량국가(rogue states)' 7)라고 표현한 것을 언급하는데 그치련다. 불량국가들의 '국제 테러리즘'이라는 것에 맞서 미 전략사령부는 핵전쟁 위협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짐승처럼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대적자의 이미지를 적에게 제공하면서, 적이 겁을 느끼고 두려워하도록 만들라고 권고한다.

나는 '불량'이라는 단어가 동물사회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아 따돌림을 당하는 짐승을 동시에 지칭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활이 걸린 이익이 문제가 될 때 그 짐승은 격분하거나 냉정함을 잃을 수 있고, 합리적인 인간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를 그칠 수 있는 것이다.
 

  적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정함에 있어 너무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말라고 지침서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눈먼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눈이 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과녁을 선정할 때 야수같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활이 걸린 이익이 관련될 경우 자신이 미칠 수도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미치고 무분별하거나 비이성적인 모습, 다시 말해 동물로 변할 수 있는 척해야 한다.
 

  미 전략사령부의 권고사항 중 하나는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이성적이거나 냉정함을 잃지 않는 것은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전략적으로는 일부 요소들이 '통제를 벗어난 듯이' 보이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 이러한 가짜 태도, 시뮬라크르(simulacre, 흉내)의 능력은 군주가 여우와 사자의 자질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변신 자체는 인간의 책략이자, 책략이 아닌 척해야 하는 여우 인간의 책략이다. 바로 거기에 거짓말, 우화, 혹은 시뮬라크르의 본질이  바로 거기에 있다. 다시 말해 진실을 자처하거나 혹은 자신이 충실하다고 맹세하는 것은 늘 불성실의조건이 된다. 단지 여우처럼 영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런 척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런 것을 그렇지 않은 척하기 위하여 군주는 항상 여우가 되어야 한다.
 

   오직 여우만이 그런 식으로 변신할 수 있고, 사자와 닮기를 시작할 수 있다. 사자는 그럴 수 없다. 여우는 사자 역할을 하기 위하여, 심지어 '여우로서의 본성을 감추기 위하여' 충분히 여우다울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명백한 사례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는 당대의 여우같은 한 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영리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해로울 경우 빈틈없는 군주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야 한다. 그때 군주로 하여금 약속하도록 만든 이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계율이다.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면 아마 그는 좋은 군주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악한데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군주가 왜 그들을 위해 자신의 약속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자신의 약속 불이행을 무마하기 위한 적법한 이유들이 부족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에 대해 우리는 동시대의 무수한 사례들을 들 수 있다. 군주들이 불성실하기 때문에 쓸모없이 되어버린 너무나 많은 평화조약, 온갖 종류의 조약이 그것이다. 여우처럼 능란하게 처신할 줄 알았던 자들이 가장 번성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입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여우로서의 본성을 잘 숨길 줄 알고, 흉내 내거나 감추는 기술을 완벽하게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들이 순간의 필요에 의해 너무 쉽게 눈이 멀고 훈련되기에, 속이는 사람은 속는 사람을 늘 찾아내는 것이다."
 

  동시대의 수많은 예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유익하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강조한 바와 같이, 오늘날에는 가장 강력한 주권국가들이 국제법을 자신의 이익에 예속시키면서 약소국들의 주권을 제한한다. 심지어 바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국제법을 침해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강대국들은 약소국들에 대해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으면서 약소국들을 불량국가, 다시 말해 무법자들이라 비난하는 것이다.

   영어로 '불량'(rogue)은 바로 동물사회의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는 동물이 아닌가? 강대국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항상 이유를 대고 변명한다. 그들이 옳지 않다 할지라도, 힘이 약한 나라들  앞에서는 정당성을 지닌다.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분노로 가득 찬 짐승처럼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면서.

 <번역 : 이상빈 malraux21@ilemonde.com>

 


 
1) 마키아벨리(Machiavel), <군주론(Le Prince)>, 장 뱅상 페리에스(Jean-Vincent Pㅤㅁㅐㄼriㅤㅁㅐㄼs) 번역(1825), 파트릭 뒤푸에(Patrick Dupouey)의 소개와 주석,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의 서문, Nathan, Paris, 1982, p. 94-96.
2) 마키아벨리, <군주론>, 18장, '군주들이 자신들 약속에 어떻게 충실해야 하는가?', 투생 기로데(Toussaint Guiraudet) 번역, Garnier Frㅤㅁㅏㅊres, Paris, 1837, p. 132.
3) 마키아벨리, <군주론>, 장 뱅상 펠리에스 번역, op. cit., p. 94.
4) Ibid.
5) Ibid.
6) 자크 시락 정부 하에서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샤를 파스쿠아(Charles Pasqua)의 유명한 표현. 이 표현을 통해 파스쿠아는 테러리스트들에 맞서 동일한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정당화시켰다.
7)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Rogue States. The Rule of Force in World Affairs>, South End Press, Cambridge(Massachusetts), 2000, p.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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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9-12-20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언뜻 저도 데리다가 말년에 짐승과 주권자에 관한 세미나가 출간되고 있다는 얘길 들은 거 같은데 여기서 그 일부를 만나니 반갑네요 ㅎ 그런데 실례가 안된다면 도그지어란 무슨 뜻인가요?ㅎ

얼그레이효과 2009-12-20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그지어. dog's ear라고 하구요..우리가 책 읽을 때, 인상적인 구절 있으면 표시하잖아요. 책귀퉁이 삼각형 형태로. 그걸 뜻하는 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