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 레이몽 부동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한 책에서, 칼 맑스와 미셸 푸코를 '의혹의 철학자'들이라고 불렀다. 맑스는 다들 알다시피,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격언을 남겼고, 푸코 또한 자신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을 '파헤치는 데' 몰두한 지식인이었다. 의혹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의혹과 함께 자주 사용하는 표현은 '드러나다'이다. 의혹의 숙명은 바로 이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매일 보는 뉴스라든지, 혹은 경찰들의 체포 현장을 찍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의혹'은 그 드러남의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그 알몸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의혹이 더 매력적인 이유는 의혹의 알몸을 보기 이전에, 그 알몸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여백 때문이다. 이 여백이 오늘날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쾌락의 상품으로 작용하면서,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진실 이전의 상황에서 자신이 제시하는 '답 던지기'를 즐기는 듯하다.  이러한 '답 던지기'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발달하면서, 더욱 활발한 놀이로 규모가 커졌으며, 스포츠신문과 같은 올드미디어들은 이 대세에 따라 노골적으로 철자 게임을 기사화한다.  

이는 비단 연예면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의혹은 정치가 미디어와 결탁하여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술수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이 어떻든, 의혹은 '진실이 나올 것 같은 상황'만 연출해주면 그 소임은 다한 것이다. '나올 것 같은 상황'에서 시작되는 '답 던지기'게임에서, 무수한 답들이 공개되고, 그 답이 갖고 있는 각각의 화살표들은 사건의 진실을 뒤덮을만한 쾌락의 시간을 구성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하나의 사건에서, 그 사건이 감당하고 있는 진실의 드러남은 오히려 드러남 이전보다 그 쾌락의 농도가 얕다. 아주 예전부터 사회학자와 정치학자들이 작금의 정치현실을 수긍하는 형태로 제시한 '정치 소비'라는 개념 속에서, 의혹의 소비는 그나마 정치에 무관심한 개인이 정치에 발을 담그도록 하는 유망주인 것이다.  의혹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 가장 정치적인 언어다라는 탈을 쓴 가장 탈정치적인 언어인지 모른다. 혹은 정치를 도덕에만 등치시킨 채, 정치의 후퇴를 촉진하는 보수적 언어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의혹의 소비가 진행될수록, 대중들은 희망을 가질 만한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 시대의 '상식'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허나 우리가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옛 말을 언제까지 수긍하고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보수란 이름도 붙이기 아까운 그 집단은 대중들이 사실 그 말을  영원히 갖고 살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슬프게도 정치꾼들이 영원히 감추고 싶어하는 의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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