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당비의 생각>에 두번째 글을 올렸다. 

 http://dangbi.tistory.com/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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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풀린 현대성
아르준 아파두라이 지음, 차원현.채호석.배개화 옮김 / 현실문화 / 2004년 3월
절판


상상력은 특수한 개인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된 능력(유럽에서 낭만주의가 꽃을 피운 이래로 암묵적으로 동의해온 의미에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집단의 자산으로서도 가능하며, 이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른 곳에서 내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이른바 "정서의 공동체 community of sentiment"란 개념(아파두라이,1990)은 함께 상상하고 사물을 감각할 수 있는 집단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글 읽기와 비평 및 항유의 집단성이라는 조건하에서 대중 매체가 만들어낼 수 있던 것 중 하나다. 베네딕트 앤더슨(1983)이 잘 설명했듯이 인쇄자본주의는 한 번도 대면해본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동일한 정체성을 불러 일으키는 매우 중요한 매체로 기능할 수 있었다. 출판물들을 통해 그들은 자신이 인도네시아인이거나, 인도인 혹은 말레이지아인이라고 생각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쪽

그러나 전자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형식들 역시, 이와 유사하면서 좀더 강력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매체들은 국가의 경계 내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와 비디오 같은 종류의 대중 매체를 집단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강렬한 숭배심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닌 광범위한 공동체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19쪽

세계화가 반드시, 심지어는 대개의 경우에서조차 동질화나 미국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이한 각각의 사회들이 현대성의 물질적인 토대를 자신들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듯이, 다수의 지역들과 역사들, 언어들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를 심화시킬 수 있는 공간은 많이 남아 있다. -37쪽

'에스노스케이프'라는 개념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변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풍경을 뜻한다. 여행자와 이주민, 피난민, 탈출자, 임시 노동자, 그리고 여타의 이동 중인 집단들과 개인들은 세계의 본질적인 모습을 구성하며, 국가 정치(혹은 국가 간 정치)에 유례 없던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출생과 거주, 다양한 부모-자식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형태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친족 관계나 친구 관계, 노동, 레저 등과 같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공동체들과 관계망들이 존재하고 있다.좀더 많은 사람들과 집단들이 이동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대면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기를 소망하는 환상을 갖고 있는 한, 오히려 이러한 안정성들이라는 낱줄들이 어디에서나 인간의 움직임이라는 씨줄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현실과 환상은 이제 좀더 큰 규모로 작동한다. -62쪽

'테크노스케이프'라는 개념을 나는 심지어 유동적이기도 한 기술의 전 지구적 배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또한 고도의 기술이건 저급한 기술이건, 기계적인 기술이건 정보적인 기술이건, 기술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본래 견고했던 다양한 종류의 경계들을 가로 질러 움직이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많은 나라들이 현재 다국적 기업들의 토대로서 존재하고 있다. 리비아에 있는 거대한 제철소는 인도와 중국, 러시아, 일본의 이익과 결부되어 있으며, 새로운 기술적 배치물을 구성하는 상이한 부분들을 제공할 수 있다. 기술들의 이 기묘한 배분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에스노스케이프에 고유의 특징들은 규모나 정치적 조정, 시장 합리성의 경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점점 더 돈의 흐름, 정치적 가능성, 그리고 미숙련 노동과 고도 숙련 노동의 접근 가능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63쪽

'미디어스케이프'는 정보들을 생산하고 퍼뜨릴 수 있는 전자적 장치들의 배분(신문, 잡지, 텔레비전 방송국, 그리고 영화 제작 스튜디오)과 이런 미디어에 의해 생산된 세계의 이미지들 모두에 관계되어 있다. 전자적 장치들은 오늘날 사적/공적 이익 단위들에 의해 전 세계적 차원에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에는 복합적인 변형들이 존재하는데,그것은 양식(다큐멘터리인가 아니면 오락물인가)과 하드웨어(전자적인가 아니면 전자 이전인가)와 청중(지역적, 민족적인가 아니면 초국가적인가)에, 그리고 매체를 조종하는 자들의 이해에 의존한다. 미디어스케이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특히 텔레비전, 영화, 그리고 카세트 형식으로) 특유의 이미지와 이야기들, 에스노케이프의 목록들을 담고 있는 거대한 레퍼토리를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이다.이는 전 세계의 많은 청중들이 매체 그 자체를 인쇄와 영화, 전자 화면, 그리고 빌보드의 복합적이고 상호 연관된 레퍼토리로 경험한다는 것을 뜻한다.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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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4일 WWE RAW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충분히 기록될 가치가 있는 이벤트를 만들었다. 무려 12년 만에 브렛 '더 힛맨' 하트가 친정 WWE로 돌아온 것이다. 하트 가문이 나은 최고의 스타라고 할 수 있는 그는 WWE와의 앙금을 정리하고 팬들 앞에 섰다. 근 15년 간 WWE 골수 팬을 자처하는 내게 이 날은 가장 설레이는 날이 될 것같다.  

다들 알다시피 브렛 하트는 1997년 서바이버 시리즈에서 성사된 숀 마이클스와의 WWF 챔피언쉽에서 '몬트리올 스크류잡'이라고 일컫는 프로레슬링계 역사에서 길이 남을 논란 경기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당시 WWE와의 계약 상태, 그리고 회장인 빈스 맥마흔과의 관계 속에서 많은 미스테리를 남긴 이 경기를 통해 브렛 하트가 회장 빈스 맥마흔에게 경기가 끝난 후 뱉은 침은 각본이 아닌, '리얼'임이 밝혀졌고, 브렛 하트는 이후 WWE를 떠나 WCW에 새 둥지를 틀게 된다. 상대자였던 숀 마이클스도 물론 이 논란에서 벗어나진 못한 터. 브렛 하트를 좋아하는 많은 팬들은 캐나다에서 숀 마이클스가 경기를 할 때면 반겨 주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난 최근 RAW에서도 역시 숀 마이클스는 캐나다에서는 미국에서의 큰 환호를 기대할 수 없다.  

암튼 브렛 하트가 WWE 명예의 전당에 오른 후, 컴백 이야기가 루머로 솔솔 오르고 있었던 터, 결국 이 루머는 현실로 이루어졌다. 게스트 호스트로서, 레슬매니아 기간까지 계약이 된 브렛 하트는 내가 보기에는 빈스 맥마흔과 VS 구도를 형성할 것 같다. (빈스는 이 날 RAW에서 결국 또 악역을 자처하며 브렛의 거기를 차고 아유를 받으며 퇴장했다) 

브렛 하트, 돌아와줘서 고마워. 이제 더 락만 오면 되나! 



브렛 하트의 친정 복귀를 반기는 열렬히 반기는 여성 팬, 옆에 아주머니가 입은 옷이 숀 마이클스의 DX라 더 재미있는 광경 





브렛 하트가 링에서 보여주었던 전형적인 퍼포먼스. "나보고 어쩌라고~" 



브렛 하트가 고대하던 순간을 만들었다. 12년 만에 적수이자 동료였던 숀 마이클스를 링 안으로 부른 것이다. 



결과는 조금은 어색한 화해 



숀 마이클스는 이 날 스위친 뮤직을 먹이려는 포즈로 훼이크를 쓴 뒤, 브렛과 화해의 포옹을 했다. 

이로써 역사는 다시 써졌다. 이 둘이 화해할 날이 오다니. 그보다 이 둘을 한 링 안에서 다시 볼 날이 오다니. 

세상 일은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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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2-25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숀마이클스를 정말 무척 좋아하는데, 브렛힛맨하트와 예전에 록커스였을때 경기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네요. 알라딘에서 WWE 에 대한 글을 보는것도 반갑고 ㅠㅠ

며칠전에 로얄럼블을 보는데 숀마이클스가 나와서 중간에 탈락하는 거 보고 참 속상했었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3-0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숀마이클스가 언더테이커랑 커리어매치를 하던데,,언더테이커의 레슬매니아 연승기록을 밀어줄지, 아니면 숀마이클스의 커리어를 계속 연장시켜줄지 궁금하군요..결론은 이 두 옹들이 아직 수고를 해야 하는...wwe의 구조가 안타깝네요.wwe 글은 종종 올리겠습니다.^^
 

1월 6일. 그 분을 떠올리며  



 

얼마전에 후배가 책을 한권 보여줘요. 그림 책이더군요.
글도 써있고 그런 책인데, 그림 하나가 아주 눈길을 끌어요.
와인잔 안에 살던 붕어가 그 와인잔이 좁다고 느꼈던지
와인잔을 깨고 허공에 이렇게 떠 있는 빨간 붕어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어진 틀 안에 살지요.
스스로 만든 것이든 뭐 타의로 이루어진 것이든
생각과 여러가지 행동, 인간관계...

근데 그 붕어 그림을 보고 나는 붕어처럼 내 틀을 벗어날
용기가 있던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는 없더군요.
좁으면 어때? 좁은 대로 살지.
뭐 그정도 더라구요. 사람들은 누구나 선택하고 포기하고
그러고 지냅니다. 포기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남지요.
그 아쉬움이 길게 오래 남을 수도 있고 금세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선택한 부분에 대해선 나름대로 책임을 져가면서 지내지요.

저는 짜장면 집에 가면은 짬뽕이랑 짜장이랑 같이 시켜서 둘다먹고
나오는데요 왜냐하면 짬뽕 시킨날은 반쯤 먹다보면
'아~ 오늘 짜장이었구나' 뭐 그렇게 아쉬워하고 또 짜장면 시킨날은
짜장면도 반쯤 먹다보면 '아~ 오늘 짬뽕이었구나'그래 자꾸 아쉬워해요~

그래보신 경험들 있으세요? 짬뽕먹다가 짜장 생각하신 거.
자꾸 아쉬워해요. 아주 묘한 짜장과 짬뽕의 갈등입니다.
아쉬워 하는게 싫어서 둘다 시켜서 둘도 맛을 보고 나오는데요.

현실에서는 둘다 선택할 수가 없지요. 뭔가 하나를 선택하면은 분명히
하나는 놓아야 하거든요. 붕어는 나가는걸 원했고 저는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을 선택을 했구요.

누구나 태어나면서 어떤 용기를 가지고, 그런 성향을 지니고 태어나시는
분들도 있고 또 그저 저처럼 이렇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지요.
어떤것이 좋다 나쁘다 따지기 전에 그저 나름대로 선택한 부분에서
잘 살길 바라면서 그냥 봐야죠.

헌데 뭔가 새로운거, 새로운 느낌, 새로운 경험, 새로운 상황은 지금 익숙한
그 틀을 벗어나면서부터 시작이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늘 가집니다.
붕어가 부러워요. 계속 부러워하다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붕어가 부러워요.

- 김광석, [노래이야기, 인생이야기] 중에서 콘서트 토크 시간 - 

 김광석- 나른한 오후

아~~참 하늘이 곱다 싶어 나선 길
사람들은 그저 무감히 스쳐가도
또 다가오고....
혼자 걷는 이길이 반갑게 느껴질무렵
혼자라는 이유로 불안해하는 난
어디 알만한 사람 없을까 하고
만난지 십분도 안되 벌써 싫증을 느끼고
아~~참 바람이 좋다 싶어 나선 길에
아~~참 햇볕이 좋다 싶어 나선 길에
사람으로 외롭고 사람으로 피곤해하는 난
졸리운 오후 나른한 오후
물끄러미 서서 바라본 하늘

아~~참 바람이 좋다 싶어 나선 길에
아~~참 햇볕이 좋다 싶어 나선 길에
사람으로 외롭고 사람으로 피곤해하는 난
졸리운 오후 나른한 오후
물끄러미 서서 바라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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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이제이션
김덕호.원용진 엮음 / 푸른역사 / 2008년 5월
품절


(김덕호, 한국에서의 일상생활과 소비의 미국화 문제 몇 구절 공부용으로 옮김)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는 갑자기 '소비 혁명 consumer revolution'이 일기 시작했다. 소비 혁명이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비주의 consumptionism'라는 이념으로 무장한 소비자들에 의해 일상생활의 중심에 소비가 위치하는 새로운 사회로 대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주의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생산 대신 소비를 노동 대신 여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절약이 아닌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며, 금욕이 아닌 쾌락을 위해 생활하고, 결핍의 문화가 아닌 풍요의 문화를 실천하며, 소비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147쪽

우선 외부적인 환경부터 살펴보자. 엄청나게 늘어나는 외채에 의해 국가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망국론은 1985년을 고비로 급속히 수그러들었다. 국제 수지 흑자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1985년 중반 이후 달러, 국제 금리, 유가가 거의 동시적으로 하락한 이른바 '3저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85년 6.6 퍼센트이던 GNP 성장은 1986년에 이르러 12.9퍼센트로 배가 되었다. 또한 1985년의 해외 순 부채액은 467억 달러였는데, 1986년에는 46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로 외채 위기 분위기가 사라졌다. 1인당 GNP또한 1980년 / 에 1,592달러이던 것이 불과 7년 만인 1987년에는 3,110달러로 거의 두배로 증가했다. 그리하여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147~148쪽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더욱 분명하게 소비는 기본적인 필요 need 단계를 넘어 욕망 desire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서게 되었다.또한 주요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50쪽

소비시장이 확대되면서 외제품에 대한 경계 담론도 증가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해외의 소비재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자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하는 물건을 통해 한국의 소비자들이 타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경고의 글이나 행동이 등장했다. 여기에는 한국 경제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 있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과소비 추방에 대한 캠페인이 주기적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소비자 민족주의 consumer nationalism'는 이러한 움직임을 떠받치는 이념을 제공했다. 그렇지만 1988년도 올림픽 개최는 '소비자 민족주의'를 시대에 뒤진 이념으로 만들었으며, 개방화를 대세로 만들었다. -152쪽

원용진, 한국 대중문화, 미국과 함께 혹은 따로 몇 구절 옮김 / 퇴폐 등을 이유로 대중매체를 일거에 정리한 군사정권은 문화의 메뉴를 스스로 선택하거나 지정해 대중에게 제공하기를 매체에 강요한다. 관제 축제로 일컬어지는 <국풍 81>, 프로 스포츠(프로야구, 민속씨름), 마당극 등이 그것이다. 대중매체는 70년대 말부터 가꾸어왔던 상품화 전략을 기반으로 이를 펼쳤다.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한 대중문화 메뉴 정하기, 그에 3저 호황이라는 경제적 우연을 탄 대중매체의 적극적 편승으로 인한 상품화로 이어지게 된다. -200쪽

그것으로 부족한 부분은 수입된 미국의 대중문화가 채웠다. 민중문화운동을 채 낚은 듯 보이는 관제 축제, 마당극, 씨름 등의 부활은 1970년대를 불온과 퇴폐의 문화 시대로 규정짓는 군사정권의 의도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이미 불붙기 시작한 청년 들의 문화 소비 그리고 새롭게 자신들의 문화적 메뉴를 원하는 청소년층을 다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민중문화의 대중화라는 정치적 제스처의 이면에는 이미 진행되어온 욕망, 새로운 욕망을 추구하는 대중문화 소비자들은 여전히 '오리지날'을 원하고 있었다. (중략) 대중문화 내 미국화는 정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민족문화 부활을 통한 문화적 선전과는 관계없이 미국식 문화에 대한 욕망은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생활화되어 있었다. 문화적 억압으로 인해 대중문화에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내용이 결핍됨에 따라 그 욕망은 오히려 더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중매체가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대중문화의 미국화 가속화는 이전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라진다. -201쪽

대중문화 시장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보장받은 대중매체는 이미 타 시장(미국 등지의 시장)에서 보장받은 내용을 수입하거나 모방하는 손쉬운 전략을 폈다. 빠른 속도로 보급된 VTR 기기를 메웠던 내용은 대부분 미국 것이었다. VTR 기기 보급에 맞춘 콘텐츠의 수입으로 청소년들은 미국 프로 레슬링을, 성인들은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나 멜로물, 에로물을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방송국 편성에 의한 선택적 미국식 대중문화 접촉에 의존하던 데서 벗어나 직접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202쪽

미국에 대한 의구심, 반발이 곧 모든 미국적인 것에 대한 저항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대중문화의 주 소비층에 제공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대안적 내용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적인 대중문화를 거부하는 데까지 이어지기는 불가능했다. 민중문화운동이 있긴 했지만 대중의 일상에까지 미치진 못했다. 민중문화운동이 반미를 담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머물러 대중의 일상을 파고드는 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이 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1970년대에 끊어졌더 여러 형태의 실험들이 미미하게 이뤄졌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국적인 적을 재전유할 수 있는 능력이 이 시기를 지나면서 조금씩 다시 형성되기 시작했다. 흔히 대중매체가 미국화를 주도하고, 미국에 대한 태도와 미국적인 것에 대한 태도가 분리되기 시작한 이 시기를 두고 정치적 저항의 시기라 / 고 부른다. 하지만 대중문화 영역은 오히려 이전에 비해 미국화가 강화된 시기였다. 대중매체가 직접 실어 나를 뿐만 아니라 미국적인 것으로 포장된 내용을 무차별적으로 펴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대중매체가 미국화를 직접적으로 펼친 시기라 할 수 있다. -205~206쪽

지속적 경제 성장과 3저 호황으로 인한 경제적 풍요를 경험하면서 대중들은 자신감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 자신감은 비민주적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그 불신과 더불어 정치적 동맹인 미국에 대한 부정적 태도도 형성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문화, 미국적인 형식의 대중문화는 경제적 풍요와 자신감을 채워줄 자산이었을 뿐 배격의 대상은 아니었다. 대중매체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운동 등에 정당성에서 밀리고 있었지만 대중문화적 내용으로는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았던 셈이다. 이전의 대중문화적 실험들의 절멸, 민중문화운동의 도구화, 대중매체의 과점 시장 보호, 경제적 호황으로 인한 문화상품 구매력의 성장으로 대중문화의 미국화는 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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