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나이제이션
김덕호.원용진 엮음 / 푸른역사 / 2008년 5월
품절


(김덕호, 한국에서의 일상생활과 소비의 미국화 문제 몇 구절 공부용으로 옮김)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는 갑자기 '소비 혁명 consumer revolution'이 일기 시작했다. 소비 혁명이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비주의 consumptionism'라는 이념으로 무장한 소비자들에 의해 일상생활의 중심에 소비가 위치하는 새로운 사회로 대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주의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생산 대신 소비를 노동 대신 여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절약이 아닌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며, 금욕이 아닌 쾌락을 위해 생활하고, 결핍의 문화가 아닌 풍요의 문화를 실천하며, 소비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147쪽

우선 외부적인 환경부터 살펴보자. 엄청나게 늘어나는 외채에 의해 국가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망국론은 1985년을 고비로 급속히 수그러들었다. 국제 수지 흑자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1985년 중반 이후 달러, 국제 금리, 유가가 거의 동시적으로 하락한 이른바 '3저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85년 6.6 퍼센트이던 GNP 성장은 1986년에 이르러 12.9퍼센트로 배가 되었다. 또한 1985년의 해외 순 부채액은 467억 달러였는데, 1986년에는 46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로 외채 위기 분위기가 사라졌다. 1인당 GNP또한 1980년 / 에 1,592달러이던 것이 불과 7년 만인 1987년에는 3,110달러로 거의 두배로 증가했다. 그리하여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147~148쪽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더욱 분명하게 소비는 기본적인 필요 need 단계를 넘어 욕망 desire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서게 되었다.또한 주요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50쪽

소비시장이 확대되면서 외제품에 대한 경계 담론도 증가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해외의 소비재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자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하는 물건을 통해 한국의 소비자들이 타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경고의 글이나 행동이 등장했다. 여기에는 한국 경제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 있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과소비 추방에 대한 캠페인이 주기적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소비자 민족주의 consumer nationalism'는 이러한 움직임을 떠받치는 이념을 제공했다. 그렇지만 1988년도 올림픽 개최는 '소비자 민족주의'를 시대에 뒤진 이념으로 만들었으며, 개방화를 대세로 만들었다. -152쪽

원용진, 한국 대중문화, 미국과 함께 혹은 따로 몇 구절 옮김 / 퇴폐 등을 이유로 대중매체를 일거에 정리한 군사정권은 문화의 메뉴를 스스로 선택하거나 지정해 대중에게 제공하기를 매체에 강요한다. 관제 축제로 일컬어지는 <국풍 81>, 프로 스포츠(프로야구, 민속씨름), 마당극 등이 그것이다. 대중매체는 70년대 말부터 가꾸어왔던 상품화 전략을 기반으로 이를 펼쳤다.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한 대중문화 메뉴 정하기, 그에 3저 호황이라는 경제적 우연을 탄 대중매체의 적극적 편승으로 인한 상품화로 이어지게 된다. -200쪽

그것으로 부족한 부분은 수입된 미국의 대중문화가 채웠다. 민중문화운동을 채 낚은 듯 보이는 관제 축제, 마당극, 씨름 등의 부활은 1970년대를 불온과 퇴폐의 문화 시대로 규정짓는 군사정권의 의도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이미 불붙기 시작한 청년 들의 문화 소비 그리고 새롭게 자신들의 문화적 메뉴를 원하는 청소년층을 다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민중문화의 대중화라는 정치적 제스처의 이면에는 이미 진행되어온 욕망, 새로운 욕망을 추구하는 대중문화 소비자들은 여전히 '오리지날'을 원하고 있었다. (중략) 대중문화 내 미국화는 정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민족문화 부활을 통한 문화적 선전과는 관계없이 미국식 문화에 대한 욕망은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생활화되어 있었다. 문화적 억압으로 인해 대중문화에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내용이 결핍됨에 따라 그 욕망은 오히려 더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중매체가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대중문화의 미국화 가속화는 이전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라진다. -201쪽

대중문화 시장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보장받은 대중매체는 이미 타 시장(미국 등지의 시장)에서 보장받은 내용을 수입하거나 모방하는 손쉬운 전략을 폈다. 빠른 속도로 보급된 VTR 기기를 메웠던 내용은 대부분 미국 것이었다. VTR 기기 보급에 맞춘 콘텐츠의 수입으로 청소년들은 미국 프로 레슬링을, 성인들은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나 멜로물, 에로물을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방송국 편성에 의한 선택적 미국식 대중문화 접촉에 의존하던 데서 벗어나 직접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202쪽

미국에 대한 의구심, 반발이 곧 모든 미국적인 것에 대한 저항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대중문화의 주 소비층에 제공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대안적 내용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적인 대중문화를 거부하는 데까지 이어지기는 불가능했다. 민중문화운동이 있긴 했지만 대중의 일상에까지 미치진 못했다. 민중문화운동이 반미를 담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머물러 대중의 일상을 파고드는 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이 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1970년대에 끊어졌더 여러 형태의 실험들이 미미하게 이뤄졌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국적인 적을 재전유할 수 있는 능력이 이 시기를 지나면서 조금씩 다시 형성되기 시작했다. 흔히 대중매체가 미국화를 주도하고, 미국에 대한 태도와 미국적인 것에 대한 태도가 분리되기 시작한 이 시기를 두고 정치적 저항의 시기라 / 고 부른다. 하지만 대중문화 영역은 오히려 이전에 비해 미국화가 강화된 시기였다. 대중매체가 직접 실어 나를 뿐만 아니라 미국적인 것으로 포장된 내용을 무차별적으로 펴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대중매체가 미국화를 직접적으로 펼친 시기라 할 수 있다. -205~206쪽

지속적 경제 성장과 3저 호황으로 인한 경제적 풍요를 경험하면서 대중들은 자신감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 자신감은 비민주적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그 불신과 더불어 정치적 동맹인 미국에 대한 부정적 태도도 형성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문화, 미국적인 형식의 대중문화는 경제적 풍요와 자신감을 채워줄 자산이었을 뿐 배격의 대상은 아니었다. 대중매체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운동 등에 정당성에서 밀리고 있었지만 대중문화적 내용으로는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았던 셈이다. 이전의 대중문화적 실험들의 절멸, 민중문화운동의 도구화, 대중매체의 과점 시장 보호, 경제적 호황으로 인한 문화상품 구매력의 성장으로 대중문화의 미국화는 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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