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이런 말에 관심이 없을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일단 적어둘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기나긴 혁명』서론의 마지막 구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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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howardzinn.org/default/  

 우리 시대 진보 지식인 '하워드 진'이 2010년 1월 27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오만한 제국'을 읽으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며, 미국이란 나라가 이런 곳이었구나를 알게 되었던 

 그 시간이 생각납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불편한 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그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그의 말에서 솟아오르는 어떤 열정을 기억하고, 또 배우고 싶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요.. 

 지금은 마음이 착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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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월호를 읽다가 소개한다.

 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612

 Horizon] 화장실 없는 26억 인구 무관심 속 무방비 질병 노출 

위생학자 매기 블랙

전세계가 핵화학 오염물과 온실가스 배출 감소에만 골몰하는 지금, 병원균이 득실거리는 배설물 같은 기본적 오염원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런던 템스강 대악취 사건 이후 선진국은 도심환경 정화와 청결 유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개도국에서는 각종 질병의 발생 원인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지난 몇 세기 동안 전염병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해로운 공기’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점점 가속화되는 도시화는 늘 새로운 근심거리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오늘날 도시 인구의 대부분은 빈민촌에 거주한다. 판자촌 같은 빈민굴에서 10억 도시 인구가 위생시설 부족과 이로 인한 고통, 건강 악화와 인간의 존엄성 상실을 겪고 있다.

잠비아에서는 지난해 7천 건 이상의 콜레라가 발생했다. 이 중 162명이 사망했고, 수도 루사카에서만 30명이 숨졌다. 잠비아는 이에 125억 크와차(약 150만 유로)를 투자하고 복역수들을 동원해 하수도 정화사업을 벌이는 한편, 콘서트나 TV 드라마를 통해 대국민 의식 개선 등 위험 방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1)

그러나 도시화가 한창 진행 중인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 국가들에서는 도시 외곽(간혹 도심 내)의 열악한 생활환경이 도시 및 사회 전체에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국가들도 콜레라같이 비위생적 환경에서 비롯되는 대단위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병원 시설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


   
 
 
수돗물과 분뇨의 혼동
수세식 변기와 하수도 시설이 보급됨에 따라 사람들은 수도시설이 분뇨 처리 문제를 해결한다는 오해를 하게 되었다. 즉, 분뇨 오염이 질병의 중요한 발생 원인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보건정책조차 설사 및 기타 배변 관련 질병을 ‘수돗물 보급’ 카테고리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주택 소유자들은 상수도 사용료를 부담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수도망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교묘한 말장난 덕택에 대중 여론과 국정 논의 석상에서 이 더럽고 불결한 용어는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여전히 일부 개도국의 대도시를 흐르는 강은 19세기의 센강·라인강·템스강처럼 썩어가고, 투기된 오물들로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악취원들은 화려한 호텔과 관광시설들이 위치한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관심에서 멀어진 채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그 결과, 무려 26억 명의 사람들이(전세계 인구의 38%나 되는!) 분뇨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들에게는 화장실도 없고, 하수도 시설의 혜택도 없다. 분뇨를 모아두었다가 투기하는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재래식 변기도 정기적인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수도가 보급된 경우에도 오물의 10%가량만 종말 처리되고 있다. 즉, 나머지 90%는 미처리돼 하천에 버려짐으로써 어장과 식물군을 포함한 수질환경과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하천수가 세탁물, 세숫물, 목욕물 및 음용수로 그대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이 오물 처리와 흡수에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극소량의 배설물에도 미생물 박테리아가 수십억 마리 서식하는 것처럼 물에도 많은 병원체가 서식하고 있다.

인도 정부는 여러 해 동안 유독성 산업폐기물 투척과 미처리 폐수 방류로 오염된 갠지스강 정화사업을 위해 세계은행에서 5년간 1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받기로 했다.(2) 그러나 갠지스 강줄기에 즐비한 하수구를 따라 정화시설을 가동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정도의 투자로 인도 극빈층에게까지 하수도를 보급한다는 희망은 아직 요원하다. 실제로 위생시설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인구의 대부분은 주거환경이 열악한 농촌에 살거나(70%), 도시 내 사방으로 뻗어나간 빈민가에 거주하고 있다(30%).

개도국 내 대부분의 농촌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노상 배설이 일상적이다. 야간에 들판으로 나가 생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평판과 체면, 순결이 걸려 있어 특히 조심해야 하는 여성에게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밤 나들이 때 발생하는 신체 폭행이나 성폭력 피해는 다반사다. 무엇보다도 낮 시간 내내 배변을 참아야 해서 방광뿐 아니라 여러 가지 건강상 문제가 발생한다.


   
 
 
야음을 틈타 들판에서 뒷일
농촌과 달리 도시에서처럼 밖에서도 해결할 곳이 없거나 어린아이나 환자, 장애가 있는 노인과 같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은 양동이를 사용하거나 음식 포장재, 플라스틱 봉투 등을 사용한다. 배설물이 담긴 봉투는 가까운 쓰레기장에 버려지고, 그 근처를 떠도는 개나 돼지들이 뒤처리를 한다. 이 불결한 봉투들은 ‘이동식 화장실’이라고 불린다.

농촌 지역 사람들은 냄새 나고 비좁은 화장실보다 자신들의 전통적 방식을 선호한다. 이들은 집 안에 화장실 칸을 두는 것을 꺼리고, 되도록이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려 한다. 과거에는 태양과 바람에 의한 건조와 탈취, 유수에 의한 세척 작용만으로도 화장실 없이 생활이 가능했다. 그러나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노상 배설은 비위생적인 일이 되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하천과 강가, 해변, 들판, 길가에 퍼져 있는 분뇨 입자를 통해 병에 걸린다. 병원균이 손과 발, 음식이나 식기, 옷에 묻거나 호수나 연못에서 몸을 씻는 사람들과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인체 내로 흡입되는 것이다. 매년 150만 명의 영아가 설사와 관련된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또한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정기적인 고열과 복통으로 학교를 결석하거나 성장 장애를 겪는데, 이는 곧 육아를 담당하는 어머니의 부담을 가중하는 동시에 가정의 금전적 손실을 야기한다. 맨발로 배설물을 밟아 생기는 기생충 감염이 빈번한데 매년 1억3300만 건을 넘어선다. 장기 내에 기생하는 회충은 어린아이가 섭취하는 영양분의 3분의 1을 흡수하는데, 이로 인해 흔히 발생하는 질병이 천식이다. 어린아이가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자랄 경우 장기 내에 1천여 마리의 회충이 동시에 기생할 수도 있다.

정부가 위생·정화 시설 부족이 인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더라도 일반 대중에게 화장실은 국가 차원의 위생 지원 정책이 아니라, 개인 생활용품의 일부처럼 인식되고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화장실 없이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용변을 보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 개인만의 은밀한 공간이 부족해지면서 극빈층 사이에 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사회적 신분 상승에 성공한 경우 그 수요가 높다. 이는 화장실이 텔레비전처럼 세련미와 현대성의 상징물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빈민층뿐 아니라 서민층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뿐만 아니라 욕실과 샤워 시설, 생활용수 처리를 위한 하수도 설비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가정용 설비 부품’ 수요가 증가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100여 년 전 유럽에서 나타난 것과 유사하다.


 

 
 
 
 
화장실, 개인 차원의 문제 아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에는 이러한 추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원도 의지도 부족하다. 지도층 내에서도, 소비자층 내에서도 위생설비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현실에는 원조 지원국의 책임도 일부 있다. 물 관련 원조 프로그램 지원금이 연간 130억 달러에 달하지만, 이 중 10억 달러만이 위생시설 확충에 활용되고 있다.(3) ‘물과 위생’ 프로그램 가운데 오물·오수 처리 설비 확충이나 화장실 홍보, 위생 교육에 들어가는 예산은 거의 없다. 유엔이 2000년 수립한 새 천년 개발 목표 어디에도 위생은 찾아볼 수 없다. 1990년 기준으로 기본적 위생시설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인구를 2015년까지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목표가 추가된 것은 2002년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된 제2차 지구정상회의 때인데, 이조차 엄청난 로비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유니세프는 이같은 소극적 목표(위생시설 혜택이 부족함에도 목표 대상에서 제외된 인구는 18억 명에 이른다)조차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위생 측면에 대한 재정적·정치적·제도적·인식적 개선을 위해 유엔은 2008년을 ‘국제 위생의 해’로 지정했다. 유엔의 이런 노력은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마침내 위정자들이 식수 공급과 위생을 별개의 쟁점으로 인식한 것이다.

‘화장실의 비극’을 폭로하라
많은 지역에서 극빈층 거주 지역에 설치할 수 있는 화장실은 급수가 안 되고, 오물 처리를 위한 배수관 설치도 불가능하다. 거주민도 해당 지역 관청도 배수로나 분뇨 정화조에 투자할 형편이 못 될뿐더러, 분뇨 처리 시설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극동 아시아(중국 및 인도를 포함한)의 많은 국가들이 극심한 물 부족을 겪고 있기 때문에, 위생시설 보편화는 이미 실패가 예견되고 있다.

오랫동안 간과해온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마다 늘 그랬듯, ‘국제 위생의 해’는 그동안 잊혀져왔던 기술 향상과 교육 측면의 개선 현황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상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을 폭로하는 계기도 되었다. ‘불법’ 주거시설에 거주하는 인구를 수치에 포함시킨 결과 생활환경이 극도로 열악한 인구수는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관광 차원에서 국가 이미지에 끼칠 악영향을 두려워하는 많은 국가들이 상습적으로 콜레라 발병 건수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콜레라가 ‘불결한 질병’으로 인식돼 많은 환자들이 병을 숨기고 있는 만큼 숫자 속이기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4)

기존 위생설비는 선진국이나 부유층에서 편리한 하수설비일 따름이다. 따라서 위생 차원에서 조금이라도 수확을 거두려면 좀더 저렴하고 설치와 유지가 용이한 위생설비 기술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글•매기 블랙 Maggie Black
주요 저서로 <최후의 금기: 국제 위생 위기에 관하여>(런던·2008) 등이 있다

번역•김윤형

<각주>
(1) 샘파이리, ‘잠비아: 정부, 콜레라·말라리아와의 전쟁 선포’, <Times of Zambia>, 루사카, 2009년 10월 27일자.
(2) <BBC News>, ‘세계은행, 인도 갠지스강 정화사업에 10억 달러 투자협정 체결’, 2009년 12월 3일.
(3) 세계 물 파트너십, ‘물 안보를 향해: 행동 지침서’, 스톡홀름, 2000.
(4) 세계보건기구 정기간행물, 87호, 885~964, 제네바, 2009년 12월.





1858년 런던 템스강 대악취 사건이란?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런던을 강타한 한여름의 혹서로 템스강은 악취가 심한 시궁창으로 변해버렸다. 당시 막 발명된 수세식 변기가 유행하면서, 런던이 일종의 대형 하수구가 돼버린 셈이다. 심한 악취 때문에 강가에 위치한 법원들은 개정 기간을 축소해야 할 정도였다. 당시 유럽의 다른 도시들처럼 런던도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정기적으로 유행했는데, ‘해로운 공기’가 전염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던 시절이다. 

템스강의 악취가 독성이 강한 ‘해로운 공기’라는 믿음 때문에 의회는 즉각적인 행동에 돌입했다. 웨스트민스터궁의 테라스와 창문들이 모두 강변 북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의회는 즉시 300만 파운드의 특별예산을 마련해 하수구 시스템을 개축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광역 도시사업국(1)은 기술자인 조지프 바잘게트에게 런던 시내 전체의 하수구 설치 책임을 맡겼다. 공중보건법 채택 및 지방행정제 개혁과 함께, 런던 하수구 시스템 개축사업은 위생 역사상 큰 획을 그었으며, 영국 내 공중보건제도 개혁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유럽과 북미로까지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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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와 낭만주의 -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이호규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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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테크놀로지와 낭만주의의 밀월 관계 : 전기의 출현을 계기로)에서는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란 레오 마르크스의 '테크놀로지의 숭고함(sublime of technology)'의 은유로 집약되어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피력하였다. 계몽사상은 테크놀로지의 지위를 과거 어느 때보다 격상시켰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행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에서 비롯된 테크놀로지는, 근대성이 시작되면서, 지식, 과학, 그리고 합리성과 함께 사람들에게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산업혁명은 사람들에게 테크놀로지가 물질의 풍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행복한 미래를 약속한다는 신념을 갖게 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사회 공학'이라는 용어가 나타나면서 사회의 모든 분야를 테크놀로지에 근거한 인식의 틀로 바라보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렇게 테크놀로지는 근대성이 시작되면서 사회 발전, 나아가 사람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인식되었다.-6쪽

레오 마르크스의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을 차용하여 데이비드 나이는 디지털 매체의 출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디지털의 숭고함'으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숭고함'과 '디지털의 숭고함'은 모두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를 대변하는 은유로, 저자는 두 은유에서 사용되고 있는 '숭고함'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칸트에 의해 논의가 시작된 숭고함의 개념은 웅대한 자연에 대해 사람들이 존경심과 공포심을 동시에 갖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레오 마르크스는 테크놀로지가 인간과 자연의 중간 지대(middle scape)로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반영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는 근대성의 시작에서 비롯된 자연의 대상화와, 사람들이 갖게 된 자연을 이해하고 정복할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경이로움의 정신 상태가 테크놀로지에 반영되게 되었을까?-6쪽

은유는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공중에게 알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은유는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면서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만든다. 오늘날의 대중매체에서는 수많은 과학적인 발견과 테크놀로지들의 발전이 보도되고 있다. 과학적인 성과와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대개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킬 파격적인 혁신으로 묘사되곤 한다. 은유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커뮤니케이션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은유는 다양한 담론들을 연결시키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할 뿐더러 토의를 위한 공통의 장을 제공한다(Maasen&Weingart,1995.각주 12번)-11쪽

테크놀로지를 은유로 설명한다는 것은 과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이 은유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단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오히려 언론인들이나 광고인들이 과학에 의해 나타난 테크놀로지들을 설명하기 위해, 현재의 문화적인 이야기(narrative)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들과 어울릴 수 있는 은유들을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해당 테크놀로지들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테크놀로지와 대중매체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반인들의 희망과, 과학 혹은 테크놀로지를 표현하는 데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대중매체는 은유들을 통해 어떠한 주제를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하고, 고착화시키며 또한 극적으로 만든다.(Burke,1989,각주 14번)-12쪽

사람들이 대상의 정확한 실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은유는 대상을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즈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출현하면 바로 등장하는 것이 해당 매체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은유들이다. 우리에게 소개되는 은유들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해당 매체를 소개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수용케 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즉, 이때 은유는 생경한 매체를 일반인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집단들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또한 사회에서 회자되는 은유들은 일반인들이나 사회가 새로운 매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에 대한 상상을 투영하기도 한다. 새로운 매체 혹은 테크놀로지를 묘사하는 은유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은유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롭게 나타나는 매체가 자신들의 희망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물질과 이상이 결합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물질을 수용하기만 하면 자신들의 꿈이 현실화된다는 믿음, 나아가 신화 속에 살게 된다.-13~14쪽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은유들은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의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가져올 수 있는 혼란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종종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져왔지만, 그것들을 설명하는 은유들은 과학자나 전문가에게만 친숙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일반인들이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근대성에 방향을 제공한 것은 바로 유토피아 논의이다. 즉, 근대성이 칸트가 주장한 계몽이라고 하였을 경우에는, 비록 그가 실천 이성을 강조하였지만, 그 어떠한 실천적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진보 개념의 등장은 근대성의 방향을 설정하면서 이상향의 논의를 공간의 유토피아에서 시간의 유토피아로 전환시켰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 어디에 있는 이상향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성을 위해서 계속해서 나아가는 과정을 강조하게 되었다. 유토피아 이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문제점을 잊게 하고, 그것들이 미래에 해결될 것이라는 허위의식 역할을 하였다.-23쪽

근대의 이상향 논의는 과학적 합리성과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으로 인해 과거와는 달리 실천성을 갖게 되었다. 과학적 합리성은 약 16세기에 나타났는데, 이는 현실은 사람의 추상적인 이성으로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합리성에 근거하여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만 의존했던 이상향은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으로 한층 구체화되었다.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한 꿈의 실천성보다 더 이상 현실적인 논의는 없다. 테크놀로지는 현재화되어 있으며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는 자연과 사람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하며, 불완전한 사람들이 미래에는 완전한 사람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바로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진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테크놀로지와 유토피아의 논의의 결합은 기술 결정론을 낳게 되면서기술과 사회를 동일한 차원에서 고려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헐어 버린 전신의 출현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경외감과 사회에 대한 유기체 모델과 결합하면서 당시의 사회 질병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매체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4쪽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지배적인 사회인식론으로서 사회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주고 있다.-24쪽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세상에서 매우 복잡한 체계의 네트워크이다. 사람들은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을 단지 마음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감각기관과 마음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해한다. 또한 사람들의 생각은 매우 무의식적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는 단지 자신들이 창조한 상징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 단지 이름이 있는 것만이 전달될 수 있다. 따라서 상징은 해당 사회에서 인정하고 있는 생각들만을 반영하고 있다. 상징들은 해당 사회에서 지적으로 용인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는 바로 사회의 제반 권력관계에 의해서 상징이 결정됨을 의미한다.-27쪽

근대성 이후 새로운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현재 조건이란 예정되어 있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변화될 수 있는 무엇이라는 의식이다.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사람들을 과거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사람들은 현재의 환경 변화에 단순히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개조함으로써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는 일종의 계획이 되었으며, 이상향의 개념은 처방이 되었으며 또한 바람직한 목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즉, 과거의 이상향 철학은 단순히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공간의 유토피아를 기술하는 차원이었으나 근대성 이후의 이상향은 시간의 유토피아를 위한 처방의 차원으로 전환되었다.-38쪽

테크놀로지의 위험성에 대해 경종을 울린 학자로서 자크 에륄(Jacques Ellul)을 들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테크놀로지를 논의한 많은 학자들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학자로서 테크놀로지의 유토피아를 강조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테크놀로지는 지구에 천국을 건설하지 않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천국이 아니라 역으로 강제 수용소와 같은 전체성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들을 규정하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조성된 감옥은 바로 전체주의와 같다. 이는 사회가 테크놀로지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 아래 에륄은 결과적으로 사회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테크놀로지를 위하여, 그리고 테크놀로지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자크 에륄은 테크놀로지를 거론할 때, 전체성, 합리성, 효율성 등의 용어를 종종 사용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기술적인(technical) 과정은 독립적인 합리성, 즉 자체 내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합리성에 의해 진행된다. 이러한 합리성의 결말은 삶의 모든 영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43쪽

따라서 테크놀로지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방법-과학, 탐구, 생산 등-들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이성에 의해 이용되는 수단이다. 이러한 테크놀로지 논리에 의해 규정되는 방법들은 매우 광범위하고 집약적/이다. 테크놀로지는 삶의 모든 영역을 심층적으로 변화시킨다. 즉 사람들, 자연, 과학 행위, 인간성에 대한 견해, 그리고 전통적인 종교뿐만 아니라 예술과 정치 등이 테크놀로지의 횡포에 의해 재구성된다. 여기서 지적할 것은 바로 자크 에륄은 테크닉(technique)과 기술적인 사물(technical objects)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록 도구, 무기, 자동차, 컴퓨터 등이 기술적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산품이 에륄의 테크닉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테크닉은 독립적인 사회 과정이다. 테크닉은 삶이 합리적이고 단계적인 절차성의 특징을 갖게 한다. 이러한 테크닉은 공장, 관료제, 연구와 발전을 위한 집단, 도시 계획, 위원회 등에서 지배적으로 관찰된다. 여기서 테크닉은 일종의 생각의 유형(mode of thinking)이라 이해함이 적절하다. 에륄은 일반적으로 물질의 테크놀로지보다는 테크닉을 강조하면서 자연스-43~44쪽

럽게 영향을 주는 생각의 유형을 경고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러한 테크닉에 근거한 사고방식을 명료하고 확실하게 남들에게 과시한다. 전문가들은 어떠한 문제를 평가하고 해결할 때 그들의 자신감으로 인해 해당 분야를 정복하였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사고방식을 강요하면서 그들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다.-44쪽

테크닉은 근대 사회로 이행되면서 과거의 모든 신성함을 부정한 근원적인 독특한 개체이다. 이러한 테크닉의 영향력은 신성함이라는 인지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운영하는 관료제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끊임없이 진행되는 분업화, 행정의 규칙들, 형태 그리고 절차 등이 많은 사회 과정을 위한 현대의 권위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효율성, 접근과 탈출의 속도감, 전문가의 지식이 관료제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특징들이 학계에서도 관찰되고 있다.-45쪽

이러한 테크닉 가치는 특히 현재의 산업계에서도 활발하게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갈브레이스(Galbraith)는 현재의 시장은 전혀 자유롭지가 않다고 주장한다. 만약에 자유롭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정부 혹은 관료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 것이다. 경쟁이 만연한 시장에서 테크놀로지가 사용되면 될수록, 세분화, 자본, 그리고 시장의 조작 등이 더욱더 그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이를 갈브레이스는 테크노 구조(techno-structure)라고 명명하였다.(Galbraith,1967,각주 101번)
이러한 테크노 구조는 예를 들면, 규모의 경제라는 이름으로 모든 기업의 조직의 경영에 커다란 원칙으로 작동하고 있다.-46쪽

에륄은 이제는 테크놀로지가 개인화 차원까지 변화되었다고 한다. 요즈음 사람들을 일컬을 때 흔히들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는 바로 정보를 공정하는 체계 혹은 복잡한 기계의 의미를 갖고 있다. 더욱이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우주라는 실체를 관장하고 있는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원인과 효과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환경을 이렇게 기계적인 시각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기계의 효율성으로 대체하게 된다.(자크 에륄,각주 102번)-46쪽

에륄 이외에 테크놀로지에 대한 비관적인 사고는 신마르크스주의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하버마스는 Technology and Science as Ideology(1970)에서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다.(중략)/ 하버마스는 국가가 경제 발전을 제고시키기 위해서 사회에 개입하는 정도가 증가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결합시킴으로써 국가는 경제 발전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그 결과,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억압의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유토피아의 주장과 같이, 국가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한 부자유는 비합리적이지도 않고 전체주의적이지도 않다. 다만 여가, 부, 그리고 향상된 지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하버마스,각주 105번)-46,47쪽

테크놀로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담론들은 공히 기술결정론의 시각을 갖고 기술과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테크놀로지를 긍정적으로 보건 그것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건 간에 거기에 내재된 기술결정론은, 테크놀로지가 외생적인 요소이며 자발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사회관계와 조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고 있다.(Williams&Edge,1996,각주 109번) 또한 기술결정론적 관점에서 테크놀로지는 주어진 것이고 사회와 조직의 변화를 위한 효율적이고 신뢰할 만한 계기를 제공하며, 그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알려진 방향과 예정된 경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결정론은 정부와 산업의 공적 담론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난다.그들은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불가피하고 그것의 속성상 특정한 사회 변화를 촉진시킨다.(Edge,1994,각주 109번)-48쪽

테크놀로지와 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담론은 단지 테크놀로지를 독립변인으로 설정하여 그 이외의 모든 요소들을 종속변인으로 간주함으로써 과연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49쪽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나아가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 이상향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인식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담론들을 집약해서 테크놀로지의 숭고함(technology sublime)이라 일컫고 있다. 이하 각주 114번 내용 -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에 대한 담론은 테크놀로지를 심미적이고, 감정적이고 감동적인 실체로 바라보고 있으며 심지어 테크놀로지를 경외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논의들은 사람들이 자연과 테크놀로지를 놀랍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50쪽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담론은 사람들이 제작한 테크놀로지를 자연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연에서 느낀 경외심과 놀라움의 감각을 어떠한 비판적인 시각 없이 테크놀로지에 대한 경험과 동일 차원에서 취급한다. 존 러스킨의 연구에서 테크놀로지의 숭고함 논의를 이해할 수 있다. 러스킨에게 근대 문화의 맥락에서 도시와 테크놀로지는 바로 모든 사회 집단을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분리시켰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테크놀로지를 낭만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였으며, 테크놀로지와 도시의 표면에 나타나는 그림과 같은 특성을 감상하게 하였다.(Ruskin,1979, 각주 120번)-53쪽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담론들로부터 나타나는 특정한 감정과 경험은 잠정적이고 기만적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현재 사람들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도덕 그리고 물리적인 틀에 포함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카슨, 각주 121번)-53쪽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담론은 테크놀로지, 민주주의, 그리고 목가적인 이상주의 등을 물질의 득이 영혼의 완성이라는 등식으로 치환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레오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상을 '사람들이 테크놀로지가 노동 조건을 향상시킬 것이며 영혼의 삶 또한 향상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제일 중요하게 간주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로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숭고함의 신화는 세계 박람회와 같은 행사에 참가하/는 일반인의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숭고함의 신화는 테크놀로지, 자연 그리고 인류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며 그들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정치, 도덕, 그리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급격한 산업 성장, 그리고 정치 현실의 변화로 인해 테크놀로지에 대한 숭고함의 경험이 개념적인 차원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원래 테크놀로지에 대한 숭고함은 기존의 겸손함에서 비롯된 숭고함이, 테크놀로지와 전기의 발전이 모든 사회의 악을 없앨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간주되면서, 테크놀로지에 옮겨간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던 숭고함의 개념이 테크놀로지가 노동자들과 주부들의 잡일을 -53쪽

경감시킨다고 하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전환되면서 기존의 사회에 국한된 숭고함에서 일상생활의 숭고함으로 확장되게 되었다.(데이비드 나이,각주122번)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공존을 강조하는 것은 기술의 숭고함에 대한 중산층의 에토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숭고함은 "커뮤니케이션 ,교환, 움직임이 인류애, 계몽, 그리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고립과 떨어짐은 야만성의 증거이며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제임스 캐리,각주 123번)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53쪽

거시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연속이며 계몽주의와의 단절을 도모하지는 않았다. (중략) 낭만주의는 계몽사상이 이룩한 원칙들과 업적들을 환영하였다. 예를 들면 낭만주의는 계몽사상과 마찬가지로 미신으로부터의 사람들의 해방과 개인의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환영하였다. 비록 중세시대의 향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지만 낭만주의자들은 결코 중세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낭만주의자들이 가진 중세시대에 대한 향수는, 계몽사상이 개인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중세시대에 있던 공동체의 미덕을 잃을까 우려한 데서 빚어졌기 때문이다.-57쪽

숭고함이라는 용어는 1674년 보일로(Boileau)가 롱기누스를 번역하면서 문학계에 소개하였다. 낭만주의에서의 숭고함은 신의 세계를 대치하는 개념으로서 초월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하였다. 계몽주의에 의해서 과학이 신의 세계를 대체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초월성의 세계를 인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낭만주의자들은 숭고함의 은유를 이용하여 자연의 위대함을 관조함으로써 사람을 경외심과 존경의 마음으로 가득하게 하고, 이로부터 초월의 세계를 느끼고자 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이 가졌던 숭고함의 의미는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칸트는 사람의 마음과 감상의 대상의 숭고한 관계를 설명하면서, 숭고함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칸트의 숭고함에 대한 설명으로 인해 논의의 초점이 대상에 내재하고 있는 성격에서, 사람의 의식과 대상 사이의 관계로 이행되었다(crowther,1989,각주 149번). 숭고함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이 숭고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67쪽

낭만주의들의 숭고함은 사람들의 마음과 자연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없애고자 하였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자연을 생명이 없는 분석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자연은 사람의 마음과 멀어지게 되었다. 낭만주의는 자연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유럽에서 시작한 낭만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미국의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레오 마르크스의 테크놀로지 숭고함의 레토릭은 사라져/가는 농경사회의 전원적인 이미지를 대체하기 위해 나타났다. 숭고함의 담론은 산업화의 영향력과 산업화가 초래한 진보에 대한 놀라움과 공포심을 공히 포함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에 대한 담론은 바로 대중산업화로 인한 사회의 변혁에 대한 자본주의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등장하였다.(Porter,1986,각주 161번)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담론은 개인들을 소유적인 개인주의(posessive individualism)로 전환시키면서 산업화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기능을 하는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소유하였을 때 테크놀로지에 내재되어 있는 미-70쪽

적인 가치를 동시에 얻게 된다고 하는 심리적인 만족감을 사람들로 하여금 갖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테크놀로지를 미화시킴으로써 정부의 경제 발전 계획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 계획에 대한 당시 미국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고취시킬 수 있었다. 즉, 산업화로 인해 나타난 모순들을, 국민들로 하여금 테크놀로지를 소유/소비함으로써 자신들도 국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하였다.(Wilson,1992,각주 162번)-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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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는 없다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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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를 넘어 비아냥으로,꼬집다 못해 발기발기 찢고 흔적조차 드러남 없이 불태워 버리고팠던 지배계급의 못된 게으름과 패덕을 고발하기 위해 그림으로 도발한 당대의 까발림은 혁명 그 자체보다도 한껏 드라마틱한 일들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형국 아래 치부의 치부가 꺼풀을 벗고 모순의 모순이 뚜껑을 열고 제 발로 기어 나오는 극단의 현실 앞에서 도망갈 귀족도 도리질할 왕도 이제 더는 없었다. 안팎을 뒤집어 버리고, 기다리며 참고 있던 자들이 급기야 전부를 부정, 접수하려는 혁명적 변혁상황 속에서 오랜 감시와 관찰이 빚어준 정치적 직간은 이미 민중 본연의 자산이었고 결코 권력도 빼앗지 못할 주관적 가치로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포르노그라피의 정치성은 이처럼 의도적 고안물로 정착한,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계략의 하나로 이해해야만 했다.-9쪽

1장 : 소프트코어의 정치전략과 황색매체의 문화전술 중 / 첫째, 현 단계 한국 사회의 소프트코어 문화는 하드코어의 정치적 대용물로 기능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소프트코어의 문화적 대리만족 정도는 어디까지이며 그 표현의 한계치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둘째, 소프트코어의 경계확장 및 파괴욕구가 부딪치고 있는 현실적 장애와 정치적 통제는 문화적으로 서로 관계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셋째, 한국의 소프트코어 유통 미디어는 무엇으로 대표되고 있으며,그 현실은 어떤가? 넷째, 만일 한국 소프트코어 문화의 정책적 방임이 하드코어의 양산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면, 그때 나타날 문화적 컨텐츠의 실상은-25쪽

행여 이 땅에서 하드코어가 그 본연의 생생한 의미, 즉 거칠지만 솔직하고 난잡할망정 처절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미지를 담아내는 용기로 인정, 유통되길 기대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꾸로 보면 소프트코어만으로도 명분이 서지 않는데 하물며 하드코어의 표현의 한계를 지적한다든지 제작과 유통불가의 조건을 지탄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따라서 동영상과 영화형식의 경우, 연기단계로까지 격상된 하드코어의 계발이 저지되었던 것도 문제고, 더 나아가 성을 매개로 한 미디어들의 사회적 유통 자체를 외형적으로 홀대하거나 문화단위로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인식의 양면성도 더 큰 문제로 방치되어 왔다는데 우리는 당분간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29쪽

60년대의 박승훈과 염재만이 대표작가들이었고, 마광수와 장선우 감독의 경우는 90년대를 달군 좋은 예였다. 어쩌면 이미 시시해져버린, 그래서 왜 또 이즈음 다시 외설과 예술의 쟁론인가 하는 역비판 대상이 될 만큼 이들의 이름은 이제 솔직히 질릴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외설, 주조의 여전한 꼬리표?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하드코어 유통욕구의 예비방출? 소프트코어와 하드의 전략적 동거? 사회계약론적 합의 도출을 의식한 문화적 이반과 문자 및 영상매체의 항거?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재창출과 재생산구조를 의식한 임의적 스캔들라이제이션?-31쪽

발음조차 크게 차이나지 않는 외설과 예술의 병치는 결국 그 배치나 사용 의도의 고의성 여부를 떠나 자칫 둘 가운데 하나는 극히 불온하며 바람직스럽지 못한 메뉴임을 주입시키려는 또 하나의 폭력적 파시즘으로 이 땅에 뿌리깊이 자리한다. 그리하여 모랄리티의 인간적 엄존이 무시당하거나 사회집단 고유의 도덕적 자기통제 자체가 자율신경에 의해 적합히 담보되지 않을 경우, 국가는 늘 개입하거나 처벌공간을 향한 임의동행 주체로 나설 만반의 준비가 끝난 뒤임을 과시하고 있던 터였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도덕적 판단기준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를 판가름하는 척도의 하나로까지 발전하는 기이한 양상을 낳는다. -32쪽

성정치적 지배논리 확산은 고스란히 하드코어와 소프트코어 사이의 이상스런 균열논리를 양산해낸다. 사실상 갈라지거나 찢어져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단위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하드코어의 지하화와 소프트코어의 정치적 편승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서 말하려는 지하화와 정치적 편승개념은 사실상 권력의 억압과 이를 강력히 의식한 문화생산 주체들의 합리적 선택 결과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막상 이들 사이의 현실관계가 진정 생존을 위한 전략적 공모인지, 아니면 비동시적 요소들의 동시적 혼존이거나 필연을 가장한 우연적 변인들의 유약한 결합인지는 분명치 않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는 수 없이 잠시 끌어안고 있는 불안한 공존인지, 혹은 아무 상관없는 단위와 아웃풋의 강제 진열인지 의문 그 자체는 풀기가 매우 모호하다. -39쪽

자신의 존재양식에 관한 그 어떤 관심에도 아랑곳없이 에로 비디오는 하드코어와 소프트코어의 정치적 중재수단으로 이 땅에 자리한다. 동시에 이 땅의 대표적 영상 소프트코어임을 자처한다. 그것은 일단 하드코어의 급진성을 강력히 의식하되 소프트코어의 유연성을 내세움으로써 권력과의 타협점을 끝없이 모색한다. 물론 여기서 정치적 중재라 함은 인적, 물적 공세에 기반한 실질적,가시적 전략수행의 부산물로 구체화된 게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중문화의 간접 잠식과 장르별 공존을 의식한 시장점유 방식의 우회성을 여지없이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예술적 공헌이나 문화적 기여 따위의 공공담론을 의식할 겨를 없이 치고 빠지거나 챙기고 다시 만들 궁리를 하는 동안 자의든, 타의든 유통망에 인입된 인구들에게 모종의 잠정적 배설감을 제공하고 그로써 일정량의 대리만족과 사후 예감을 성적으로 담보한다는 점에서 그 공격 효과 역시 의외로 크다. -44쪽

'빨간 마후라'를 '빨간 보자기'로 바꾸거나 이미 업힌 뒤 다시 기대려는 의도는 예술성과 상업성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추구하려는 진/영의 정치진술과는 다른 의도를 반영한다. 그러니까 이들의 빠른 투자와 이탈전략 속에는 이미 작가주의의 심각함도 버거운 부담일 뿐 전혀 힘이 되지 않고 있고 대박용 상업주의가 추구하는 거대 인기의 자원으로 기술과 자본도 매력의 변수로 끼어들 틈이 없다.-54~55쪽

국가의 포르노그라피 인식이 늘 통제의 강박과 단속의 예고 속에서 스스로 경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그렇게 강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알고도 방임하고 일정한 도를 넘어설 때 '칼끝'만을 살짝 보이고 칼집에 도로 넣거나 살점 일부만을 도려 무작위로 상처낸 후 흐르는 피의 향기와 흔적에 놀라/알아서 치우도록 시장 주변의 공포효과만을 극대화시키려는 모종의 억지정책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면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 합리주의의 기본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81~82쪽

2장 한국의 문화통제와 하드코어 중/ 논쟁의 현장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분할되는 치열하을 드러내기도 했고, 관찰과 분석주체가 성의 대립으로 한층 격화, 진화하기 어려운 양상으로 커져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물론 서양의 경우로 국한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페미니즘과 그 외곽의 입지,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분화하는 포르노그라피의 지적 담론은 어느덧 제작과 유통 당사자들의 욕망이나 정치경제학적 자기 지탱논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별도의 논쟁구조를 튼실하게 확보해 나간다. -125쪽

급진적 반포르노그래피론이 페미니즘의 요새를 분열시키고 투쟁의 거점분산과 세력분할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궁극적으로 자유의지론자들까지 포함, 이들 모두를 또 다른 비판대상으로 몰아넣은 진영은 막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사실상 좌파의 포르노 비판은 비교적 명쾌한 계기에서 출발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의 사회철학과 부르/주아 비판론 위에서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물적 토대를 근본부터 분쇄, 개선 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는 한 반남성적 포르노론을 주창하려는 급진주의자들이나, 이들과 의식을 공유하되 성적 자기본능의 문제를 투쟁과정에서 변별해내려는 자유의지론자들 모두는 근본은 놔둔 채 지엽에만 집착하려는 허구의 존재들일 뿐이라는 게 사회주의적 포르노 비판론의 기본이었다.-130쪽

이제까지 진행된 포르노 논의구조는 도덕론적 결정론, 즉 극단의 배격과 폐기론으로부터 성적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남성과 여성 진영의 다양한 성정치적 주관주의, 그리고 적극적 수용과 교화를 목적으로 삼는 예외적 예찬과 순수를 바탕으로 삼는 폭력적 저항 담론에 이르는 등 일련의 진동과 왕복의 궤도를 반복하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정당한 성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변명하거나 타자의 논리에 제동과 반격을 가하는 진지한 사고를 잃지 않았고, 추종과 동의의 부피와 관계없이 논리적 자존의 세계를 고수해 왔다.-146쪽

에로물이라 지칭하는 개념은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본격적인 핑크화 경향에 편승, 노골적인 하드코어의 유포를 차단, 대행하고 민중부문의 문화적, 감각적 욕구를 원색적으로 해소하는 대리매체로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곧 성인물이란 용어와 이음동어의 용례로 유포되기 시작했고, 노골적으로 지하 유통된 하드코어 포르노그라피나 그 복제망을 은폐하면서 문화적 두둔의 매체로 움직인다. 뒤집어 보면 복제 포르노의 대속장치이자 감시와 처벌주체인 권력의 의도적 비의도성을 노골적으로 변명해주는 편리한 도구로 이들 매체는 본격 기능한다.-183쪽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 문화지평 안에서 음란과 외설의 반어는 건전이란 형용사였다. 한번 더 뒤집어 말하면 이 땅에서 음란은 건전치 못한 일체의 것들이었고, 건강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 인식과 언동, 혹은 자세마저 그것은 다 외설적이거나 방탕한 기류에 편승하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 공권력이 음란성이란 편리한 잣대 하나만으로 정치적 통제력을 확장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주지하는 것처럼 청소년에 대한 유해성 차단과 장치다.-185,186쪽

대체 음란성과 유해성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등치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음란물의 유통과 청소년 의식발달의 저해? 지하유통을 통한 시장의 황폐화와 여리고 순수한 10대들의 교육적 역기능 확장? 학업의 저해와 성의식 왜곡의 자동적 등치? 옐로우 미디어의 범람과 사회질서 유기의 일방성, 무책임성 강화? 국가의 직무유기와 지역사회의 혼돈 지속?-192쪽

온라인상의 하드코어가 무분별한 폐쇄성이나 배타적 공간을 요구한다면, 오프라인상의 소프트코어는 제한적 음란성과 유약한 본능 충족의 아쉬움을 유통과 수요 촉발의 원천으로 삼는다. 영상의 하드코어가 다 보여주고 모조리 까발려버림으로써 욕구의 처참한 재생산을 촉발하는 데 관심 기울이는 것과는 달리, 소프트코어를 주조로 삼는 성인물은 성애의 현장을 차마 다 드러내지 못하는 대신 미진한 욕구의 중복 충족을 통한 독자적 문화양식의 창출을 도모한다. 그것이 지하 B급 비디오 양식이든, 아니면 별도의 빨간 딱지든 이/미 격조와 고상함에서 자유로워진 성인물들은 대사와 색상, 풀롯과 감흥, 그리고 의상과 조명이란 영화적 기본 변수와도 굳이 엄격한 관계를 지키려 들지 않았다.-208~209쪽

몇 가지 사법적 준칙만으로 통제와 자율의 기틀을 다잡기 어려울만큼 이미 거대하게 커져버린 음란물 유통시장이나 자본주의 기층문화와 모호하게 겹쳐진 환경의 윤곽은 사실 권력이 헤집고 들어가 질서를 외치고 범법을 색출한다는 것 자체가 극히 무모한 일임을 잘 반증한다. 그것은 성인 전용의 핑크산업 통계를 위해 국가의 공권력이 단순한 경로로만 집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등급을 마련하여 유통과 관람을 제한하려는 규제안 작성의 행정적 기초로 활용되거나 시민사회를 향한 국가의 경고를 대집행하려는 치밀한 의도 또한 적절히 은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은근한 공포효과의 확산과 정치적 학습효과의 유포를 절충,배합하려는 국가의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었다.-220쪽

황색매체의 범람과 이들을 통한 음성적 정보 컨텐츠의 교류를 차단하려는 정부의 개입은 일단 건전성과 계몽성이라는 보수적 기준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 자기엄숙성을 전제로 깐다. 게다가 정부의 입장은 늘 단호하며 한치의 오류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자기완결성 혹은 무결점주의의 강박을 통해 한층 근엄하며 공포효과의 예비를 암시하려는 모종의 긴장구도 또한 배제하지 못한다. 이러한 자세는 바로 정치행정적 경직성과 적실성 약한 완벽주의 사고체계를 양산해낸다. -221쪽

음란의 형식이 영상 미디어를 거치든 아니면 인쇄매체로 전달되든 국가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본능 구가를 허용할 수 없다고 공언한 당국의 통제 도구는 물론 권력이다. 이를 더욱 공고히 포장하고 강제적 적합성을 부여하기 위해 권력이 법체계 보완과 구속력을 담보하려 드는 것도 논란의 여지는 없다. 강제력을 동원하여 서가에서 색깔 있는 책들을 솎아내고 압수,수색하거나 인터넷망을 역추적하여 하드코어의 임의(혹은 악의적)유포를 적발해내는 힘의 사용 기반은 크게는 사회윤리이고,좁게는 질서유지를 핑계삼는다.-265쪽

끝간 데 없이 벗기고 질펀하게 향락의 현장을 전달하려는 사람들과 숨든 도망다니든 그들의 작업결과를 기어이 보고 즐기겠다는 시각적 쾌락주체의 본능적 공모는 어떻게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만드는 이들과 보는 자들 사이의 계약론적 관계가 감각적 합의와 이윤 축적으로 기막하게 맞바뀌는 이익 교환으로 설명된다면, 이들 사이를 불특정하게 파고드는 국가의 정치적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268쪽

90년대 초에도 음란과 외설의 변별보다 무의식적 동일시 효과와 그 의도치 않은 문화적 해악이 암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선진자본주의 국가군 역시 명쾌한 분류기준이 없고, 그에 따라 해석과 계도의 문화 인프라가 있을 수 없다는 무의식적 안일의 사회심리를 말해 주기도 했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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