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밝히고 싶은 건 나는 '천안함'이 소속된 해군 2함대 정훈공보병 출신의 예비역이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내무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천안함 관련 뉴스를 계속 녹화하고, 새벽에 일어나 언론의 2함대 관련 뉴스를 클리핑할 후배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런 고생을 위로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군대 언론의 역할을 하는 '정훈공보실'의 구성원들이 아직까지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앞으로 살아갈 날을 걱정할 이들을 위해,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길 바란다. 군대 내 속성상,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라도, 쉬쉬할 공산이 크다는 건 비단 해군 출신이 아니더라도 군을 갖다 온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상식일 것이다. (상식이라는 표현이 비극적이긴 하지만) 

요즘 군대가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군대라는 울타리에 들어온 이상, "너희는 이제 나라를 위해 쓰일 병기란 말야"라는 훈련소 어느 장교의 말을 곱씹어보면, 군대가 환경이 좋아지는 것과, 그 장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군대 내 많다는 건 다르게 봐야 할 문제라는 건 명백하다. 누구는 기독교를 싸그리 비판할 때와 같이, '일부'를 가지고 그렇게 군대를 폄하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그 '일부'가 군대라는 명령 체계로 움직이는 시스템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천안함 사건'을 통해 시신으로 돌아온 장병들은 엄연히 '개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 '개죽음'은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그리고 이 사회가 만들어 낸 죽음이기에, 더 그렇다. 더 나아가서는 군대의 일순간 오류가 아닌, 그동안 누적되어온 군대라는 조직의 메커니즘이 방관해왔던 부분들의 폭발로 인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제기하는 '음모론', 언론이 제기하는 '음모론'이 주는 안타까운 이 현실 판단은 씁쓸함을 가중시킨다. 

군대의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정훈공보실, 더 적확하게 말해서 해군 정훈공보실이 다른 병과에서 주는 정보들을  쉬쉬하려는 데 애를 쓰고 있다면, 오늘도 정권의 엉덩이를 핥기에 바쁜 신문,방송 언론들은 팍팍 드러내기에 바쁜 것 같다. 군대는 보이는 것을 보이려 하지 않게, 군대 용어로 '싸재(사회)에 속한 언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려 만드느라 바쁘다. 그 빈틈에 무엇이 있을까. 바로 우리들이 있다. 그리고 그 우리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유가족들의 모습도 있다.  

정말 잔인한 지적일 수 있겠으나, 이번 사건을 통해 해군 지원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고, 해군 2함대의 이미지가 떨어지는 것이 더 걱정될까봐 이 사건이 얼른 지나가길 바라는 군대 간부들이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와 같은 사병 출신들이 소속 부대에 대한 얼마나 큰 애착이 있겠나. 사병을 나온 우리와 같은 이들에게 어느 부대를 나왔다는 건, 전역을 해서 관계를 만들어가고, 술자리 때 맛난 반찬격인 '향수'용으로 쓰일 따름이다. 단, 이런 충성심의 층위와 달리, 군을 업으로 하는 자들에게 책임을 모조리 전가하는 것과 달리, 군대 안에서 '조국'이라는 이름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령관 이하 간부들이 분명 책임있는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부탁이 아닐까. 

그런데, 지금 그들이 너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2함대 작전실 벙커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사실상 각 해군 병과 중 가장 낮은 영관 계급을 가진 정훈공보실장의 사무실에서 작전과,감찰실,법무관 등등의 영관장교들은 점심 커피 브레이크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나는 함부로 예단하지 않겠다.  

나는 큰 것은 바라지 않는다. 다만 윗 분들이 지금 실신하고 오열중인 저 가족들의 마음을 '인간'의 모습으로 봐주길 바란다.  희생당한 장병들을 병기가 아닌, 전역을 한 달 앞두고, 가족의 뒷바라지를 위해, 소소하게 살았던 한 인간으로 대우해주길 바란다. 그랬을 때, 그들의 죽음은 2함대의 손실이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이 이랬음을 공유할 수 있는 충분한 사유의 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 안에서 보상금이니, 성금모금이니하는 '처리'의 언어들이 넘쳐나는 것은 "이제 이 정도면 되지 않겠냐"는 현실주의를 가장한 또 다른 회피일지 모른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침몰당시 신속하지 못한 구조로 인해 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생명같다는 군대의 보고 체계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외부의 공격으로 침몰된 것이라면은 국방부와 국군에게는 

중대하고 치명적인 오점이 될 것입니다. 

무능하거나 정직하지 않은 군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부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우리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물에 잠긴 배 안에서 끝까지 사투를 벌였을 천안함 승조원들과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가족들의 심경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모든 진실이 명백하고 완전하게 공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길만이 바로 한없이 떨어져버린 군당국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며 피끓는 청춘을 조국에 받치고 있는 60만 국군장병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길이고 역사의 퇴행을 막는 길일 것입니다. 

정부가  천안함 순직 병사들에게 전사자에 준하는 최고의 

예우를 갖추기로 한 점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티끌만큼의 의혹도 없이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것 만이 

마지막까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살고자 했던 

젊은 넋들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 <그것이 알고 싶다> 김상중의 마지막 멘트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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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논문이 거의 막바지 작업에 이르렀다. 오랜만에 짬을 내어 학회 세미나에 다녀왔다. 한국언론정보학회와 한국언론학회는 비슷한 이름을 가졌지만 조금 성향(?)이 다르다고 늘 들어왔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조금 무겁기도 하고, 거칠게 표현하는 것 같지만, 한국언론정보학회의 분위기는 대학원생들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예전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  

어제 작은 토론회에서, 내가 늘 학술적으로 존경해왔던 한 연구자의 소논문 발표를 듣고 왔다. 그는 석사 시절부터 늘 문화연구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으며, 인정받아왔다. 그리고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래서 플로어 토론 시간 때 이런 내 마음을 전했고, 그 후, 그 분의 논문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나에게 그 분의 집념은 대단해 보였지만, 그 집념이 가진 유연성은 늘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그 분과 같은 학교에서 오신 한 분의 성토도 이해가 갔다. 화해의 지점? 소통의 지점? 뭐 그런 것을 마련하는 건 사실 이상적인 게 아닐까.  

난 조금 더 급진적인 무엇을 꿈꾼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연구자들끼리의 성찰게임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 바로 선언과 이론을 같이 가져 가려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론화를 통해 선언을 말하려는 자들은, 그 글을 통해 자신의 태도를 올곧게 만드는 지침서를 만들 수 있어도, 그들이 정작 아쉬워하는 어떤 부분을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차라리 그들이 그렇게 바라는 '옳은' 문화연구를 지향한다면, 선언이 주는 파장에 기댄 이론보다는, 그것과 무관한 이론을 통해, 그 이론이 주는 파장을 기반으로 한 학술적 대화가 더 건설적일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자신이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을 직접 실천해보고, 그 방식의 옳고 그름을 지적으로 적용하여, 이론화하는 작업을 하던지. 하지만, 그런 작업도 한국의 문화연구자 몇몇이 실행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론과 선언의 관계에서 주는 그 '태도'라는 측면이, '비판'이라는 좋은 용어를 갖고 있지만, 결국 자신을 이론적 순혈주의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자신은 게토화된 이론의 공간 안에 빠질지 모른다. 

이것을 깨닫는 데, 2년이 걸렸다. 정치적 지향점을 드러내기 위해, 그 지향점을 향한 이론화의 밑받침은 엄청나게 어렵다. 차라리, 그 지향점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이 꿈꾸는 변화를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면, 그러한 글은 굳이 논문이란 형식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그리고 난 이 생각을 당분간 철회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그 분의 그 화려한 문체, 그리고 열정적인 태도에 늘 존경을 표하면서도, 그 집념이 성장했다는 부분은 인정할 수 없었다.성찰과 비판이라는 좋은 개념이 다른 이에게 '죄의식 마케팅'으로 인식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일단, 나는 계급을 사유한다고 해서, 다시 맑스로! 하는 구호는 반대다. 그리고 계급을 문제화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퇴색된 비판의식을 회복하는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나는 하드한 정치경제학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일부 문화연구자들의 목소리에 공감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진보인들의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을 탓하는 지식인들도 결국 그 자신이 학술을 통해 꾀하는 현실 감각이 둔함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내게 그럼 답이 뭐요 물어본다면, 나는 맑스보다 피터 싱어를 공부하는 것이 그대들이 바라는 진보적 문화연구가 아니겠냐라는 답을 꺼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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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4-2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섣부른 생각이겠지만, 얼그레이님 글을 보면 '진보적인 이론과 절차가 진보적인 정치적 함의까지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란 문제의식과 회의에서 머물러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그리고 당연히 얼그레이님은 정치적 실천이 확보되지 않는다면(최소한 연계되지 않는다면)이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은 회의를 느끼시는 것 같고요. 그런데, 제 느낌엔 이론 자체가 원래 그런 한계를 가진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론이 정치적 함의를 끌어내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게되면(혹은 전개한다고 선언하면) 기본적으론 그 논의가 대상으로 삼는 기존 일반지식이론과 정치 자체가 '외부'에서는 그대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혜량하옵소서.) 요컨데 이론 자체는 늘 실패할 수 밖에 없죠. 그렇다고 해서 거친 경험주의가 쉬운 답이 될 수 있을 성싶지도 않고요. 쓸데없이 잡소리를 늘어놓았네요. 얼그레이님의 글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려운 문제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시니 해답이 나오겠죠. 힘네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4-20 21:20   좋아요 0 | URL
오 좋은 생각 고맙습니다. 음, 이 글을 통해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다음과 같습니다. 요즘 들어 저는 '진보적인'이론이 있을까란 생각을 한답니다..중요한 것은 그걸 '진보적으로' 잘 활용하는 것이겠지요. 빵가게님이 잘 지적해주신 부분. 이론이 정치적 함의를 끌어내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게 되는 것. 이 부분은 사실 제가 대학생이 되고..그리고 대학원 들어와서..작년 까지..이론은 반드시 비판적,정치적 함의를 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밝히고 싶어요. 근데..공부를 하다보니..그 생각이 제 '아집'이라는 걸..요즘 느끼게 되고,,이론과 실천에 대한 차분한 관계를 모색하는 중이랍니다. 만약 제가 계속 과거의 생각을 밀어붙인다면..빵가게님 말처럼, 일반지식이론과 정치가 오히려 더 고립되는 형국이 발생하는데..이 '실천이론'이라는 것..그것 만큼 신중하게 써야 할 개념은 없는 것 같다란 자기비판을 하게 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2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론을 너무 각박하게 인식하지 않았나..^^ 공부를 계속 할 사람으로서,,요즘 제게 어떤 인식 전환의 계절이 오긴 온 것 같습니다. 좋은 덧글 덕분에..또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4-20 21:57   좋아요 0 | URL
아이고, 별 말씀을요. 누구 눈에는 누구만 보이고 누구 눈에는 누구만 보인다고, 훨씬 깊은 생각을 하시네요.^^ 제 한계가 그 정도라서 그정도 내용으로만 보였는 모양입니다.^^;;; 졸업논문 잘 완성하시고요. 일교차가 심한데 감기조심하시고요.(이미 걸려있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총총합니다...
 

어쩌면 김예슬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김홍중 선생의 <마음의 사회학>에 내재된 시선과 동일한 것인지 모른다. 진심과 진심의 포장. 사람들은 이 친구의 진심을 계속 의심하고 있다. 진심과 의심의 관계. 이것은 너무나도 멀지만, 한편으론 너무나도 가깝다고 하는 설정. 그래서 어떤 이들은 김예슬 선언이라는 이름의 책이 나오고 난 후, 그 진심과 의심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럴 줄 알았어, 뭔가 있다니까. 아니, 대자보 쓰고 나서 벌써 이렇게 책이 나와? 

또 하나의 의심을 둘러싼 환경. 책을 냈다는 부분.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책이라는 매체와 대자보라는 또 다른 매체. 매체이론을 공부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매체의 지위부여기능이란 것이 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에 나온 나는 나오지 않는 나에 비해 사람들의 주목도가 다르다. "아, 어제 방송 나오셨던데요. 멋지세요"라는 말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 쉽게 쓰지만,  이 말 속에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매체와 명성의 관계. 앤디 워홀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예술적 강령을 언급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맥락. 예술과 명성, 매체와 명성. 그 관계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식. 명성이라는 단어가 예술과 대중매체라는 양식 위에 있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부러움과 시기심. 

사람들은 이 '진정성 게임'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한 친구의 선언에 담긴 내용을 본다. 그러나 그 돌아봄의 성격이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 기반을 둔 것과 다른 하나의 현상. 소위 운동권 스펙이라는 표현이 떠돌 정도의 기이함. 박수쳐 주기보다는, 그녀의 문장에 감탄하고, "글 잘 썼네요"라고 운운하며, 자신의 스펙과 비교해보려는 심리. 그랬을 때, 오히려 그녀의 노력과 용기가 '일순간'으로 전락하고, 자신의 노력은 무엇이냐며, 왜 자신이 쌓아올린 가치의 시간들을 뒤쳐지게 만들려냐는 저의를 묻는 기이한 용맹심. 

이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인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할 때, 우리는 그 아이를 구하는 사람에게도 의심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너무 과장된 것일까. 그 사람의 면상을 비롯해 모든 것을 다 해부해보면서, 그 사람의 됨됨이 테스트를 시험하고, 그 후에 오케이, 됐어. 통과. 너 정도면 구해도 되겠다라고 하는 심리의 팽배. 그리고 이어지는 착오. 물에 빠진 아이는 죽고 없는데,구하러 간 이도 허우적 거리고 있는데, 자신들은 그 테스트를 하느라 힘을 다 뺐다고 그것을 구경하거나 혹은 그 자리를 일찍 뜨거나.  

지나친 적대와 과장된 연대만이 남은 우리 시대의 윤리. 이것이 곧 정치적 현실이다. 이 현실을 지배하는 명성을 위시한 자본주의의 표상은 우리를 암울하게 한다. 옳은 삶을 명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이 지긋지긋한 현실들. 옳은 삶의 추구가 명예가 되지 못하는 이 시궁창같은 현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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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7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17 21:21   좋아요 0 | URL
저도 그 결단을 지지합니다. 결단에 힘을 실어주고 싶네요. 오랜만입니다.

Carrot 2010-04-17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표현이 너무 적확해서 트위터에 인용해버렸습니다. 하아...

얼그레이효과 2010-04-17 21:22   좋아요 0 | URL
갑자기 공부하다가 이 글을 쓰고 싶어져서 썼는데, 이런 표현이 나오고 말았네요. 힝. 반갑습니다.
 

어제 밤 딴지일보에서 마련한 경기도지사 후보자들의 토론회에서 심상정 진보신당 후보가 생각보다 많은 '까임'을 당한 것 같다. 몇몇 대형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보니,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MB와 한나라당을 심판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 같았다. 3퍼센트. 그렇다. 현실적으로 , 그렇다고 숫자라는 것이 그 현실을 다 아우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 3이란 숫자는 진보신당이 가진 현실이며. 또 상징이기도 하다.  

정치에 해박한 몇몇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진보신당이 올해가 고비이지 않겠나랴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가늠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그런 묵시록적 발언들을 지지자들로부터 들으니, 가슴이 싸했다. 좀 엉뚱한 발상인지 모르겠지만, '선거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이 못난 MB를 몰아내자라는 심리가 정말 그렇게 커 있다는 현실이 때론 이 MB가 바라는 건 아닐까라는 걸 한 번 더듬거려 봤다. 이 발상은  MB를 그냥 이대로 두자라는 말이 아니라, MB 스스로가 과하게 부상됨으로써, 이 모든 구조적 모순들 자체가 사람 하나의 모습에 담겨 싸그리 퇴색되는 순간이 어쩌면 이번 지방선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솔직히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가장 피해를 볼 사람은 대중들일지 모른다. 대중들이 원하는대로 단일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로 한나라당이 깨갱거리는 순간이 왔을 때, 그 순간으로 인해, 대중들의 지지를 힘입은 그 자들이 '정신차렸다'는 그 진정성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하늘에 계신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오십보백보다,라고 말을 푹 던져놓고 그 차이가 주는 진지전을 시도해려 보는 이 진보의 전략이 마냥 옳은 건지는 사실 확신이 안 선다. 

진보신당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보이지 않은 게 문제며, 이 '보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당장 보이는' 무엇에 환호하는 이 사회에서, 진보가 늘 내세우는 '아름다운 차선' 혹은 '미래를 위한 열심과 최선'에 사람들이 '지치고 있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인 듯하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생활정치'라는 개념을 데리고 와서, 강조하며, 로컬에, 풀뿌리에 정치인들이 투신하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즉, 뜬구름 잡는 진보가 되지 말고, 생활 =현실이니, 현실적 안목을 키우라는 건데, 그런 지적이 나오는 건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오래된 진보의 성찰 상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딜레마는 어디 생활이 현실로만 이루어지겠냐는 것. 그래서 진보신당이 내세우는 공약을 받치는 언어들이 그렇게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는 대중들에게, 정말 현실이 무엇이며, 이상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겠소라는 그 쉬움을 늘 강요하는 대중들이 이상을 가장 멀리 하는 태도로 위안을 삼는 것, 거기서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너무 변덕스럽게 조정해버리는 대중들의 태도도 정치꾼들을 욕하는 만큼이나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너희들 때문에 일 그르쳤잖아라는 말이 어쩌면 이번 지방선거의 유행어가 되지나 않을지, 그래서 진보가 또 한 번 상처를 받고, 아예 주저앉는 것은 아닐지, 착잡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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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소비 - 경기변동과 미디어 사용 ㅣ 한국언론진흥재단 연구서
김영주 지음 / 한국언론재단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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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시간에만 미디어를 이용한다는 종래의 관념은 이동시간에도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23쪽

미디어 기기 보유 여부는 미디어에의 접근성을 결정짓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미디어 이용을 위해서는 가구 또는 개인이 미디어 기기를 보유하고 있거나 적정한 가격대의 손쉬운 대여가 가능해야 한다.-25쪽

초기 미디어 효과 연구에서는 '미디어'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나,미디어가 사람들에게게 무엇을 하나?라는 시각에서 수용자를 파악하였다. 즉 전지전능한 미디어와 표적 대상으로서의 수용자를 상정하였기 때문에 수용자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익명적이고 고립된, 무기력한 존재로서의 수동적 수용자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등장한 이용과 충족 이론에서는 '미디어 수용자가 미디어로 무엇을 하나?'라는 관점으로 전환하여 미디어를 선택적으로 이용하고 취급하는 참여자이자 능동적인 존재로서의 수용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능동적 수용자는 자신의 사회적,심리적 욕구에 의해 미디어를 이용하고 그로부터 충족에 대한 기대를 설정하며,실제로 욕구를 충족시키는 능동적인 존재,개인주의적,영향을 받지 않는,이성적,주관적 사고,행동,선택하는 존재로 파악된다.-45쪽

미디어 연구에서 전통적으로 수용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대중 수용자의 대중이라는 말에는 균질화,획일화,수동적,몰개성적 집단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대중사회론에서는 수용자를 비이성적이고,미디어가 내보내는 메시지를 기계적으로 수용하며,미디어에 의해 쉽게 조작되고 조종되는 존재로 바라본다. 규모면에서 크고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으며 서로 간에 알지 못하는 익명적인 존재이며 자기정체성이 부족하다.-46쪽

미디어 효과론의 이용과 충족 이론이 수용자의 능동성을 개인적 미디어 이용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 문화주의적인 대안적 수용자 관점에서는 수용자들이 동일한 메시지를 해석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개입을 하게 된다.따라서 그로부터 창출되는 메시지의 이미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의미창출 과정의 적극성을 강조한다.-47쪽

문화연구에서는 미디어의 내용물에 대한 지칭도 메시지보다는 텍스트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메시지란 표현은 미디어에 의해 획일화된 객관적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반면 텍스트는 의미란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수용자와 미디어 콘텐츠의 만남을 통해 의미가 새로이 생산된다는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47쪽

경기 침체와 미디어 소비 감소 -115쪽

1998년 외환위기 시,2008년 경기 침체 시 교양,오락비, 미디어 소비 지출 비용의 감소세 뚜렷 : 소득의 변화에 따라 소비지출도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대표적으로 1998년 외환위기는 근로자 가구의 소득 감소를 야기하였으며,이에 따라 소비지출 또한 감소하였다.1991년부터 1995년까지 교양,오락비는 소득,소비증가율보다 높은 비율로 증가하였다.이 시기는 소득,소비 측면에서 모두 호황을 누리던 시기로 소비심리 역시 활성화되었고,교양,오락에 투(145)자되는 비용도 아울러 증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1998년의 경우,교양,오락비는 소득의 감소,소비지출비의 감소보다 더 많은 폭으로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외환위기가 발생한 1998년대의 전년대비 소득은 6.7%,소비지출은 10.7%감소하였다.그런데 교양,오락비는 전년대비 22.6%감소하여 소득감소율의 3배,소비감소율의 2배나 더 큰 폭으로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교양,오락비의 경우 생활필수재가 아니기 때문에 소득 감소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여 감소 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교양,오락 지출비용은 소득에 대한 탄력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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