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논문이 거의 막바지 작업에 이르렀다. 오랜만에 짬을 내어 학회 세미나에 다녀왔다. 한국언론정보학회와 한국언론학회는 비슷한 이름을 가졌지만 조금 성향(?)이 다르다고 늘 들어왔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조금 무겁기도 하고, 거칠게 표현하는 것 같지만, 한국언론정보학회의 분위기는 대학원생들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예전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  

어제 작은 토론회에서, 내가 늘 학술적으로 존경해왔던 한 연구자의 소논문 발표를 듣고 왔다. 그는 석사 시절부터 늘 문화연구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으며, 인정받아왔다. 그리고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래서 플로어 토론 시간 때 이런 내 마음을 전했고, 그 후, 그 분의 논문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나에게 그 분의 집념은 대단해 보였지만, 그 집념이 가진 유연성은 늘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그 분과 같은 학교에서 오신 한 분의 성토도 이해가 갔다. 화해의 지점? 소통의 지점? 뭐 그런 것을 마련하는 건 사실 이상적인 게 아닐까.  

난 조금 더 급진적인 무엇을 꿈꾼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연구자들끼리의 성찰게임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 바로 선언과 이론을 같이 가져 가려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론화를 통해 선언을 말하려는 자들은, 그 글을 통해 자신의 태도를 올곧게 만드는 지침서를 만들 수 있어도, 그들이 정작 아쉬워하는 어떤 부분을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차라리 그들이 그렇게 바라는 '옳은' 문화연구를 지향한다면, 선언이 주는 파장에 기댄 이론보다는, 그것과 무관한 이론을 통해, 그 이론이 주는 파장을 기반으로 한 학술적 대화가 더 건설적일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자신이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을 직접 실천해보고, 그 방식의 옳고 그름을 지적으로 적용하여, 이론화하는 작업을 하던지. 하지만, 그런 작업도 한국의 문화연구자 몇몇이 실행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론과 선언의 관계에서 주는 그 '태도'라는 측면이, '비판'이라는 좋은 용어를 갖고 있지만, 결국 자신을 이론적 순혈주의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자신은 게토화된 이론의 공간 안에 빠질지 모른다. 

이것을 깨닫는 데, 2년이 걸렸다. 정치적 지향점을 드러내기 위해, 그 지향점을 향한 이론화의 밑받침은 엄청나게 어렵다. 차라리, 그 지향점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이 꿈꾸는 변화를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면, 그러한 글은 굳이 논문이란 형식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그리고 난 이 생각을 당분간 철회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그 분의 그 화려한 문체, 그리고 열정적인 태도에 늘 존경을 표하면서도, 그 집념이 성장했다는 부분은 인정할 수 없었다.성찰과 비판이라는 좋은 개념이 다른 이에게 '죄의식 마케팅'으로 인식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일단, 나는 계급을 사유한다고 해서, 다시 맑스로! 하는 구호는 반대다. 그리고 계급을 문제화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퇴색된 비판의식을 회복하는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나는 하드한 정치경제학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일부 문화연구자들의 목소리에 공감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진보인들의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을 탓하는 지식인들도 결국 그 자신이 학술을 통해 꾀하는 현실 감각이 둔함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내게 그럼 답이 뭐요 물어본다면, 나는 맑스보다 피터 싱어를 공부하는 것이 그대들이 바라는 진보적 문화연구가 아니겠냐라는 답을 꺼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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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4-2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섣부른 생각이겠지만, 얼그레이님 글을 보면 '진보적인 이론과 절차가 진보적인 정치적 함의까지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란 문제의식과 회의에서 머물러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그리고 당연히 얼그레이님은 정치적 실천이 확보되지 않는다면(최소한 연계되지 않는다면)이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은 회의를 느끼시는 것 같고요. 그런데, 제 느낌엔 이론 자체가 원래 그런 한계를 가진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론이 정치적 함의를 끌어내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게되면(혹은 전개한다고 선언하면) 기본적으론 그 논의가 대상으로 삼는 기존 일반지식이론과 정치 자체가 '외부'에서는 그대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혜량하옵소서.) 요컨데 이론 자체는 늘 실패할 수 밖에 없죠. 그렇다고 해서 거친 경험주의가 쉬운 답이 될 수 있을 성싶지도 않고요. 쓸데없이 잡소리를 늘어놓았네요. 얼그레이님의 글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려운 문제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시니 해답이 나오겠죠. 힘네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4-20 21:20   좋아요 0 | URL
오 좋은 생각 고맙습니다. 음, 이 글을 통해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다음과 같습니다. 요즘 들어 저는 '진보적인'이론이 있을까란 생각을 한답니다..중요한 것은 그걸 '진보적으로' 잘 활용하는 것이겠지요. 빵가게님이 잘 지적해주신 부분. 이론이 정치적 함의를 끌어내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게 되는 것. 이 부분은 사실 제가 대학생이 되고..그리고 대학원 들어와서..작년 까지..이론은 반드시 비판적,정치적 함의를 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밝히고 싶어요. 근데..공부를 하다보니..그 생각이 제 '아집'이라는 걸..요즘 느끼게 되고,,이론과 실천에 대한 차분한 관계를 모색하는 중이랍니다. 만약 제가 계속 과거의 생각을 밀어붙인다면..빵가게님 말처럼, 일반지식이론과 정치가 오히려 더 고립되는 형국이 발생하는데..이 '실천이론'이라는 것..그것 만큼 신중하게 써야 할 개념은 없는 것 같다란 자기비판을 하게 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2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론을 너무 각박하게 인식하지 않았나..^^ 공부를 계속 할 사람으로서,,요즘 제게 어떤 인식 전환의 계절이 오긴 온 것 같습니다. 좋은 덧글 덕분에..또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4-20 21:57   좋아요 0 | URL
아이고, 별 말씀을요. 누구 눈에는 누구만 보이고 누구 눈에는 누구만 보인다고, 훨씬 깊은 생각을 하시네요.^^ 제 한계가 그 정도라서 그정도 내용으로만 보였는 모양입니다.^^;;; 졸업논문 잘 완성하시고요. 일교차가 심한데 감기조심하시고요.(이미 걸려있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총총합니다...
 

어쩌면 김예슬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김홍중 선생의 <마음의 사회학>에 내재된 시선과 동일한 것인지 모른다. 진심과 진심의 포장. 사람들은 이 친구의 진심을 계속 의심하고 있다. 진심과 의심의 관계. 이것은 너무나도 멀지만, 한편으론 너무나도 가깝다고 하는 설정. 그래서 어떤 이들은 김예슬 선언이라는 이름의 책이 나오고 난 후, 그 진심과 의심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럴 줄 알았어, 뭔가 있다니까. 아니, 대자보 쓰고 나서 벌써 이렇게 책이 나와? 

또 하나의 의심을 둘러싼 환경. 책을 냈다는 부분.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책이라는 매체와 대자보라는 또 다른 매체. 매체이론을 공부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매체의 지위부여기능이란 것이 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에 나온 나는 나오지 않는 나에 비해 사람들의 주목도가 다르다. "아, 어제 방송 나오셨던데요. 멋지세요"라는 말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 쉽게 쓰지만,  이 말 속에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매체와 명성의 관계. 앤디 워홀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예술적 강령을 언급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맥락. 예술과 명성, 매체와 명성. 그 관계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식. 명성이라는 단어가 예술과 대중매체라는 양식 위에 있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부러움과 시기심. 

사람들은 이 '진정성 게임'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한 친구의 선언에 담긴 내용을 본다. 그러나 그 돌아봄의 성격이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 기반을 둔 것과 다른 하나의 현상. 소위 운동권 스펙이라는 표현이 떠돌 정도의 기이함. 박수쳐 주기보다는, 그녀의 문장에 감탄하고, "글 잘 썼네요"라고 운운하며, 자신의 스펙과 비교해보려는 심리. 그랬을 때, 오히려 그녀의 노력과 용기가 '일순간'으로 전락하고, 자신의 노력은 무엇이냐며, 왜 자신이 쌓아올린 가치의 시간들을 뒤쳐지게 만들려냐는 저의를 묻는 기이한 용맹심. 

이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인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할 때, 우리는 그 아이를 구하는 사람에게도 의심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너무 과장된 것일까. 그 사람의 면상을 비롯해 모든 것을 다 해부해보면서, 그 사람의 됨됨이 테스트를 시험하고, 그 후에 오케이, 됐어. 통과. 너 정도면 구해도 되겠다라고 하는 심리의 팽배. 그리고 이어지는 착오. 물에 빠진 아이는 죽고 없는데,구하러 간 이도 허우적 거리고 있는데, 자신들은 그 테스트를 하느라 힘을 다 뺐다고 그것을 구경하거나 혹은 그 자리를 일찍 뜨거나.  

지나친 적대와 과장된 연대만이 남은 우리 시대의 윤리. 이것이 곧 정치적 현실이다. 이 현실을 지배하는 명성을 위시한 자본주의의 표상은 우리를 암울하게 한다. 옳은 삶을 명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이 지긋지긋한 현실들. 옳은 삶의 추구가 명예가 되지 못하는 이 시궁창같은 현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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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7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17 21:21   좋아요 0 | URL
저도 그 결단을 지지합니다. 결단에 힘을 실어주고 싶네요. 오랜만입니다.

Carrot 2010-04-17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표현이 너무 적확해서 트위터에 인용해버렸습니다. 하아...

얼그레이효과 2010-04-17 21:22   좋아요 0 | URL
갑자기 공부하다가 이 글을 쓰고 싶어져서 썼는데, 이런 표현이 나오고 말았네요. 힝. 반갑습니다.
 

어제 밤 딴지일보에서 마련한 경기도지사 후보자들의 토론회에서 심상정 진보신당 후보가 생각보다 많은 '까임'을 당한 것 같다. 몇몇 대형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보니,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MB와 한나라당을 심판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 같았다. 3퍼센트. 그렇다. 현실적으로 , 그렇다고 숫자라는 것이 그 현실을 다 아우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 3이란 숫자는 진보신당이 가진 현실이며. 또 상징이기도 하다.  

정치에 해박한 몇몇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진보신당이 올해가 고비이지 않겠나랴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가늠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그런 묵시록적 발언들을 지지자들로부터 들으니, 가슴이 싸했다. 좀 엉뚱한 발상인지 모르겠지만, '선거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이 못난 MB를 몰아내자라는 심리가 정말 그렇게 커 있다는 현실이 때론 이 MB가 바라는 건 아닐까라는 걸 한 번 더듬거려 봤다. 이 발상은  MB를 그냥 이대로 두자라는 말이 아니라, MB 스스로가 과하게 부상됨으로써, 이 모든 구조적 모순들 자체가 사람 하나의 모습에 담겨 싸그리 퇴색되는 순간이 어쩌면 이번 지방선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솔직히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가장 피해를 볼 사람은 대중들일지 모른다. 대중들이 원하는대로 단일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로 한나라당이 깨갱거리는 순간이 왔을 때, 그 순간으로 인해, 대중들의 지지를 힘입은 그 자들이 '정신차렸다'는 그 진정성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하늘에 계신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오십보백보다,라고 말을 푹 던져놓고 그 차이가 주는 진지전을 시도해려 보는 이 진보의 전략이 마냥 옳은 건지는 사실 확신이 안 선다. 

진보신당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보이지 않은 게 문제며, 이 '보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당장 보이는' 무엇에 환호하는 이 사회에서, 진보가 늘 내세우는 '아름다운 차선' 혹은 '미래를 위한 열심과 최선'에 사람들이 '지치고 있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인 듯하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생활정치'라는 개념을 데리고 와서, 강조하며, 로컬에, 풀뿌리에 정치인들이 투신하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즉, 뜬구름 잡는 진보가 되지 말고, 생활 =현실이니, 현실적 안목을 키우라는 건데, 그런 지적이 나오는 건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오래된 진보의 성찰 상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딜레마는 어디 생활이 현실로만 이루어지겠냐는 것. 그래서 진보신당이 내세우는 공약을 받치는 언어들이 그렇게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는 대중들에게, 정말 현실이 무엇이며, 이상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겠소라는 그 쉬움을 늘 강요하는 대중들이 이상을 가장 멀리 하는 태도로 위안을 삼는 것, 거기서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너무 변덕스럽게 조정해버리는 대중들의 태도도 정치꾼들을 욕하는 만큼이나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너희들 때문에 일 그르쳤잖아라는 말이 어쩌면 이번 지방선거의 유행어가 되지나 않을지, 그래서 진보가 또 한 번 상처를 받고, 아예 주저앉는 것은 아닐지, 착잡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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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소비 - 경기변동과 미디어 사용 한국언론진흥재단 연구서
김영주 지음 / 한국언론재단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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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시간에만 미디어를 이용한다는 종래의 관념은 이동시간에도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23쪽

미디어 기기 보유 여부는 미디어에의 접근성을 결정짓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미디어 이용을 위해서는 가구 또는 개인이 미디어 기기를 보유하고 있거나 적정한 가격대의 손쉬운 대여가 가능해야 한다.-25쪽

초기 미디어 효과 연구에서는 '미디어'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나,미디어가 사람들에게게 무엇을 하나?라는 시각에서 수용자를 파악하였다. 즉 전지전능한 미디어와 표적 대상으로서의 수용자를 상정하였기 때문에 수용자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익명적이고 고립된, 무기력한 존재로서의 수동적 수용자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등장한 이용과 충족 이론에서는 '미디어 수용자가 미디어로 무엇을 하나?'라는 관점으로 전환하여 미디어를 선택적으로 이용하고 취급하는 참여자이자 능동적인 존재로서의 수용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능동적 수용자는 자신의 사회적,심리적 욕구에 의해 미디어를 이용하고 그로부터 충족에 대한 기대를 설정하며,실제로 욕구를 충족시키는 능동적인 존재,개인주의적,영향을 받지 않는,이성적,주관적 사고,행동,선택하는 존재로 파악된다.-45쪽

미디어 연구에서 전통적으로 수용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대중 수용자의 대중이라는 말에는 균질화,획일화,수동적,몰개성적 집단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대중사회론에서는 수용자를 비이성적이고,미디어가 내보내는 메시지를 기계적으로 수용하며,미디어에 의해 쉽게 조작되고 조종되는 존재로 바라본다. 규모면에서 크고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으며 서로 간에 알지 못하는 익명적인 존재이며 자기정체성이 부족하다.-46쪽

미디어 효과론의 이용과 충족 이론이 수용자의 능동성을 개인적 미디어 이용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 문화주의적인 대안적 수용자 관점에서는 수용자들이 동일한 메시지를 해석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개입을 하게 된다.따라서 그로부터 창출되는 메시지의 이미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의미창출 과정의 적극성을 강조한다.-47쪽

문화연구에서는 미디어의 내용물에 대한 지칭도 메시지보다는 텍스트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메시지란 표현은 미디어에 의해 획일화된 객관적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반면 텍스트는 의미란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수용자와 미디어 콘텐츠의 만남을 통해 의미가 새로이 생산된다는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47쪽

경기 침체와 미디어 소비 감소 -115쪽

1998년 외환위기 시,2008년 경기 침체 시 교양,오락비, 미디어 소비 지출 비용의 감소세 뚜렷 : 소득의 변화에 따라 소비지출도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대표적으로 1998년 외환위기는 근로자 가구의 소득 감소를 야기하였으며,이에 따라 소비지출 또한 감소하였다.1991년부터 1995년까지 교양,오락비는 소득,소비증가율보다 높은 비율로 증가하였다.이 시기는 소득,소비 측면에서 모두 호황을 누리던 시기로 소비심리 역시 활성화되었고,교양,오락에 투(145)자되는 비용도 아울러 증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1998년의 경우,교양,오락비는 소득의 감소,소비지출비의 감소보다 더 많은 폭으로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외환위기가 발생한 1998년대의 전년대비 소득은 6.7%,소비지출은 10.7%감소하였다.그런데 교양,오락비는 전년대비 22.6%감소하여 소득감소율의 3배,소비감소율의 2배나 더 큰 폭으로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교양,오락비의 경우 생활필수재가 아니기 때문에 소득 감소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여 감소 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교양,오락 지출비용은 소득에 대한 탄력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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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행위이론 2 -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 나남신서 533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장춘익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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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슨스는 해석학을,즉 사회과학의 객관영역에 대한 의미이해적 접근방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320쪽

목적론적 행위모델은 주어진 상황에서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적절한 것으로 보이는 수단을 선택하며 적용하는 한 행위자를 설정한다.통상적으로 그렇듯이 파슨스는 '목적'을 행위자가 산출하고자 하는 미래의 상태로 정의한다.한편 '상황'은 행위자의 관점에서 통제되거나 혹은 통제를 벗어나는 구성요소들로,즉 '수단들'혹은 '조건들'로 구성된다.선택 가능한 수단들 사이에서의 결정은 준칙에 따르며,목적설정에서는 가치와 규범이 기준이 된다. 이 두 가지를 묶어서 파슨스는 일단 '규범적 기준'이라고 칭한다.이제 어떤 행위상황에서 행위자에게 귀속되는 행위태도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행위에 대한 기초적 수준에서의 분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322쪽

이런 행위이론적 틀은 파슨스에게 중요한 일련의 개념적 함축을 갖는다.우선 이 모델은 행위자가 인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목적설정과 수단선택의 차원에서 규범에 따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전제한다.(322) 일단 그는 규범적인 것의 차원을 한 행위 주체가 의무를 부과하는 명령을 준수하거나 혹은 위반할 수 있는(324)태도로 특정짓는 것에 만족하고 만다.(325)-322,324쪽

중기 초반부의 행위이론 중 일부 / 파슨스는 행위체계를 구성할 때 문화의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사회라는 행위체계는 문화적 유형이 제도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그리고 인성이라는 행위체계는 문화적 유형이 동기에 닻을 내린 것으로 설명한다. 기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더 이상 단위행위가 아니라,문화적 유형 혹은 상징적 의미들이다.이것들이 결합되어 어떤 구도를,다시 말해 전승가능한 문화적 가치체계와 해석체계를 이룬다.문화적 전승 가운데 행위체계의 구성에 직접적으로 의미를 갖는 부분은 가치유형이다.가치유형은 의무를 부과하는 행동기대나 혹은 상호주관적으로 타당한 규범으로 제도화하는 식으로,또 개인의 동기나 혹은 성격을 형성하는 행위성향으로 내면화되는 식으로 가공되는 원자재를 이룬다.-339쪽

한 문화의 틀 안에서 행위한다는 것은 상호작용 참여자들이 문화적으로 확보되고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된 비축지식으로부터 해석을 취하여 그들의 상황에 대해 서로 이해를 도모하고 이것을 토대로 각자의 목표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이해지향적 행위를 중심개념으로 놓고 볼 때,문화에 의한 행위의 규정은 행위자가 전승된 문화내용을 해석하면서 전유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가치에 따르는 태도를 대상들에 따르는 태도로 파악하기 때문에,파슨스는 이런 분석의 길을 막아버리고 만다.-344쪽

의사소통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세계가 묶어주지 않는다면,문화,사회,인성은 서로 떨어져나가버린다.그리고 바로 이것이 파슨스로 하여금 세 질서를 매개되지 않은 채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에게 부분적으로 침투하는 체계들로 자립화시키도록 만든다.파슨스는 문화적 가치가 사회와 개인에 제도화와 내면화라는 통로를 통해서 병합된다는 생각을 행위이론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를 단념한다. 그 대신 분석적으로 분리된 체계들 사이의 상호침투라는 모델이 전면에 자리하게 된다.-354쪽

특히 복잡한 사회는 일관성 요구와 기능적 명령 사이에 나타나는 지속적 갈등을 흡수하고,무해하게 만들며,논란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파슨스는 여러 가지 흡수메커니즘을 든다.가령 제도화 내지 내면화의 정도가 행위영역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서로 갈등하는 가치유형이 지배하는 행위영역들을 분리하는 것이다.-360쪽

파슨스는 정신분석학에서 발달한 모델인 충돌갈등의 무의식적,징후형성적 처리라는 모델을 사용한다.그러나 그러한 사회병리현상 내지 인성의 병리현상에서 행위체계의 이원적 구성의 취약성이 드러난다.한편으로 파슨스가 갈등처리의 병리적 형태들에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론구성 방식 덕택인데,다른 한편 그가 이런 현상들을 어떻게 자신의 이론구성 안에서 위치시킬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361쪽

파슨스에 따르면 타당성 주장의 사실성은 제도화되거나 내면화된 가치와 결부된 외적,내적 제재 덕택이다.그러나 그럴 경우 역기능적이 되고 갈등을 산출하는 가치복합체가,환경에 의해 위협에 처한 체계로부터 나오는 존립유지 명령의 압력 아래에서,왜 좀더 기능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제재와 결부된 가치복합체에 의해 흡수,대체돼서는 안 되는지를 알 수 없다.달라진 체계 환경의 관계에 의해 유발되는 가치변화에 대해 파슨스는 어떤 내부적 차단장치를 거론할 수 있을까?만일 유형변수들이라는 것이,문화의 차이를 단지 동일한 결정유형들의 상이한 조합방식으로 파악하는 요소주의적 의미를 갖는다면,그리고 그것들이 또한 이런 결정유형들의 변화에 내적 제한을 가하는 어떤 구조를 보이지 않는다면,파슨스는 기능적 명령에 맞서 고유논리를 갖는 문화적 유형들이 보이는 저항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를 보유하지 못하는 셈이다.-363쪽

파슨스는 이제 기능을 비교적 추상적인 차원에서 적응,목표달성,통합,그리고 구조유형의 유지로 정의한다.-380쪽

파슨스는 문화적 가치의 타당성을 자기조절적 체계에서 기준치에 부여되는 인공두뇌학적 의미에서의 통제기능으로 해석한다.문화적 가치들 사이의 의미론적 관계는 암묵적으로 통제변수들 사이의 경험적 관계로 재해석된다.-388쪽

파슨스는 서구에서 일어난 근대화의 현상들을 우선 구조적 분화의 관점에서 정리한다. 이때 그는 통합기능을 하는 하부체계를 준거점으로 삼는데,이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런 구성의 결정이 도덕 및 법의 발달을 진화의 핵심변수로 만들고,반면에 생활세계의 물질적 재생산의 역학 그리고 그와 함께 계급구조와 지배질서로부터 생겨나는 갈등은 배경으로 밀려난다.-443쪽

이미 1960년대 말에 파슨스가 사용하는 용어에는 생물학적 진화이론으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문화적 발달을그는 유전적 코드의 변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긴다.세계상 속에 들어 있는 인지적 잠재력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문화적 변종들의 영역으로부터의 선택에 해당하고,반면에 국가에 따라 상이한 근대사회의 발달경로는 구조형성적 혁신들이 가장 잘 안정화될수 있었던 환경들에 대한 지표를 제공한다.(중략)파슨스는 진화론에 입각해서 선택메커니즘과 안정화메커니즘 그리고-문화적 코드의 차원으로 자리가 옮겨진-변이메커니즘 사이의 협동작용부터 설명한다.동시에 파슨스는 사회진화이론을 체계이론과 겹치게 해서,베버가 사회합리화과정으로 생각한 근대화 과정을 체계복잡성의 증가로,그것도 사회가 경제와 국가행정이라는 하부체계들을 특수한 조절매체들을 통해서 분화시킬 때 등장하는 복잡성 증가로 소급한다.-4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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