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김예슬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김홍중 선생의 <마음의 사회학>에 내재된 시선과 동일한 것인지 모른다. 진심과 진심의 포장. 사람들은 이 친구의 진심을 계속 의심하고 있다. 진심과 의심의 관계. 이것은 너무나도 멀지만, 한편으론 너무나도 가깝다고 하는 설정. 그래서 어떤 이들은 김예슬 선언이라는 이름의 책이 나오고 난 후, 그 진심과 의심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럴 줄 알았어, 뭔가 있다니까. 아니, 대자보 쓰고 나서 벌써 이렇게 책이 나와? 

또 하나의 의심을 둘러싼 환경. 책을 냈다는 부분.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책이라는 매체와 대자보라는 또 다른 매체. 매체이론을 공부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매체의 지위부여기능이란 것이 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에 나온 나는 나오지 않는 나에 비해 사람들의 주목도가 다르다. "아, 어제 방송 나오셨던데요. 멋지세요"라는 말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 쉽게 쓰지만,  이 말 속에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매체와 명성의 관계. 앤디 워홀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예술적 강령을 언급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맥락. 예술과 명성, 매체와 명성. 그 관계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식. 명성이라는 단어가 예술과 대중매체라는 양식 위에 있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부러움과 시기심. 

사람들은 이 '진정성 게임'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한 친구의 선언에 담긴 내용을 본다. 그러나 그 돌아봄의 성격이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 기반을 둔 것과 다른 하나의 현상. 소위 운동권 스펙이라는 표현이 떠돌 정도의 기이함. 박수쳐 주기보다는, 그녀의 문장에 감탄하고, "글 잘 썼네요"라고 운운하며, 자신의 스펙과 비교해보려는 심리. 그랬을 때, 오히려 그녀의 노력과 용기가 '일순간'으로 전락하고, 자신의 노력은 무엇이냐며, 왜 자신이 쌓아올린 가치의 시간들을 뒤쳐지게 만들려냐는 저의를 묻는 기이한 용맹심. 

이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인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할 때, 우리는 그 아이를 구하는 사람에게도 의심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너무 과장된 것일까. 그 사람의 면상을 비롯해 모든 것을 다 해부해보면서, 그 사람의 됨됨이 테스트를 시험하고, 그 후에 오케이, 됐어. 통과. 너 정도면 구해도 되겠다라고 하는 심리의 팽배. 그리고 이어지는 착오. 물에 빠진 아이는 죽고 없는데,구하러 간 이도 허우적 거리고 있는데, 자신들은 그 테스트를 하느라 힘을 다 뺐다고 그것을 구경하거나 혹은 그 자리를 일찍 뜨거나.  

지나친 적대와 과장된 연대만이 남은 우리 시대의 윤리. 이것이 곧 정치적 현실이다. 이 현실을 지배하는 명성을 위시한 자본주의의 표상은 우리를 암울하게 한다. 옳은 삶을 명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이 지긋지긋한 현실들. 옳은 삶의 추구가 명예가 되지 못하는 이 시궁창같은 현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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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7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17 21:21   좋아요 0 | URL
저도 그 결단을 지지합니다. 결단에 힘을 실어주고 싶네요. 오랜만입니다.

Carrot 2010-04-17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표현이 너무 적확해서 트위터에 인용해버렸습니다. 하아...

얼그레이효과 2010-04-17 21:22   좋아요 0 | URL
갑자기 공부하다가 이 글을 쓰고 싶어져서 썼는데, 이런 표현이 나오고 말았네요. 힝.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