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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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품은 손으로 이루어진 복제에 대해서는 이것을 위조픔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완전하게 유지할 수 있지만 기술적 복제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기술적 복제는 원작에 대해서 수공적 복제보다 더 큰 독자성을 가진다. 예컨대 기술적 복제는 사진에(45),서는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렌즈로는 포착되지만 인간의 육안에는 미치지 못하는 원작의 모습들을 강조해서 보여줄 수도 있고, 또 확대나 고속촬영술과 같은 기계적 조작의 도움을 받아 자연적 시각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이미지들을 포착할 수 있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둘째,기술적 복제는 원작이 도달할 수 없는 상황에 원작의 모사를 가져다놓을 수 있다. 기술적 복제는 원작으로 하여금 사진이나 음반의 형태로 수용자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해준다.사원은 제자리를 떠나 예술 애호가의 작업실에서 수용되고,음악당이나 노천에서 연주된 합창곡은 방 안에서 들을 수 있게 된다. -45,46쪽

복제기술은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에서 떼낸다. 복제기술은 복제를 대량화함으로써 복제 대상이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대신 대량으로 나타나게 한다.또한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을 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47쪽

사물을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대중이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상속에, 아니 모사 속에,복제를 통하여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제어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중략)상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있는 데 반해, 복제물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50쪽

복제된 예술작품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복제를 겨냥해서 제작되는 예술작품의 복제품이 되어가고 있다. -52쪽

영화의 경우 기계적 복사는 문학이나 회화의 경우와는 달리 대중 보급을 위해서 외부에서 부과된 조건이 아니다. 영화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바로 영화작품의 기술 속에 내재되어 있다.영화의 이러한 기술은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영화작품의 대량 보급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대량보급을 그야말로 강요하는 것이다.영화의 기술이 대량 보급을 강요하는 이유는,영화의 제작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한 폭의 그림을 살 수 있었던 개인이 이제는 더 이상 영화를 살 수 없기 때(52)문이다.-52,53쪽

제의가치 자체는 예술작품을 은밀한 곳에 숨겨두기를 요구한다.예를 들면 어떤 신상들은 밀실에서 승려들에게만 접근이 허용되고 있고,어떤 성모상은 거의 일 년 내내 베일 속에 가려져 있으며 또 중세 사원의 어떤 조각들은 지면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여러 예술 활동이 제각기 의식의 모태에서 해방됨에 따라 예술 활동의 산물들이 전시될 기회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전시가치의 문제.-54쪽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피카소와 같은 회화에 대해서 가졌던 가장 낙후된 태도가 채플린과 같은 영화에 대해 갖는 가장 진보적 태도로 바뀐 것이다.여기서 진보적 태도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고(80)체험하는 데 대한 즐거움이 전문적인 비평가의 태도와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80,81쪽

영화가 펼쳐지는 영사막과 그림이 놓여 있는 캔버스를 한번 비교해보자. 영사막 위의 영상은 변하지만, 캔버스 위의 그림은 변하지 않는다.캔버스 위의 그림은 보는 사람을 관조의 세계로 초대한다.그는 그 앞에서 자신을 연상의 흐름에 내맡길 수 있다. 그러나 영사막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영화의 장면은 눈에 들어오자마자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버린다. 그것은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영화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의 연상의 흐름은 그 장면의 변화로 인해 이내 중단되고 만다. 영화의 충격효과는 바로 이러한 데에 그 근거를 두며,또 이러한 충격효과는 다른 충격효과가 모두 그러한 것처럼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상태(Geistesgegenwart)에서만 받아낼 수 있다.-89쪽

사람들이 영화에서 개탄하는 것은,예술 애호가가 예술작품에 정신집중의 태도로 접근하는 데 반해 대중은 예술작품에서 정신분산(오락)을 찾는다는 점이다.대중에게는 예술작품이 오락의 한 계기이고,예술 애호가에게는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이 문제는 보다 자세히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정신분산(Zerstreuung,distraction)과 정신집중(Sammlung,concentration)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다.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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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자와 순응론자. 이 거친 표현은 사실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일찍이 움베르토 에코가 <매스컴과 미학>이란 책에서 선보인, 그 당시로는 '논란'이 된 표현이다. 그는 대중문화에 관해,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퇴행하는 부르주아지'의 시선을 갖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퇴행하는 부르주아지는 도덕에 관해 엄격하며, '포르노크라시'에 관해서 청소년들을 '쯧쯧거리는 태도'로 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이었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들이 그런 태도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이 분석은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에코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시대를 논하면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고매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세상 밖의 일로 치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논한다는 것은, 바로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중문화의 '존폐'를 이야기하는 것이 비생산적임을 지적하며, 차라리 더 유익한 것은, 이러한 '매스컬쳐'가 주는 양상을 현실적으로 분석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찾아보는 게 더 유익하리라는 진단을 내렸다.  

 

대중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지금, 에코의 이 말은 조금은 진부한 훈수일 수 있으나, 에코가 이러한 언급을 한 시기를 점쳐보면, 에코의 이 말은 일종의 '예언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이 나온 시기가 1964년도 였고, 한국의 경우 196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이론들을 조금씩 공부한 사람들이 '대중사회 논쟁'이라는 테마를 갖고, 한국은 과연 대중사회인가? 한국에 대중문화라는 것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학 내 토론이 있기도 한 상황이었다.(조금 더 자세한 상황을 알고 싶다면, 한국 언론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학자 중 하나인 ,  초창기 대중문화 이론에 대한 학문적 성격을 심어보려 노력한, '강현두 선생'의 저작들을 챙겨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 읽어보면 딱딱한 내용이 많지만, 그가 집필하고 번역한 책의 서문에 언급된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 당시  한국 사회 내 대중문화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참고할 수 있는 힌트가 된다.) 다만, 이 토론에서 대부분 넘쳐나는 것은, 결국 도덕과 결부된 / 종속된 문화론이었다. 국가라는 요인 또한 동떨어질 수 없었다. 또, 주로 외국에서 벌어지는 문화 논쟁에 관한 요약을 '이식'한 데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소위 한국의 대중문화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이라고 하는 시기 구분이 있는데, 대부분 지금처럼 편하게 대중문화를 인식하고, 문화라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때를 1990년대로 잡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 구분의 인식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나는 참고로 이런 시기 구분을 깨보려는 연구를 하는 중이다.) 

다들 알겠지만, 90년대 이전, 한국의 1980년대만 해도, 특히 신문에서는 에코나 부르디외가 싫어하는 도덕적 엄격주의자들의 문화 비평이 많았다.(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문화를 '도덕'과 일치시키며, 문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인상 비평 류의 머무른 훈계조로 문화를 향유하려는 자들의 '태도'를 지적하는 데 골몰했다. 

어찌보면, 이런 실천적 비평은 문화연구자 그래엄 터너가 명명한 '문화와 문명'류의 스크루티니학파, 리비스와 그의 아류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에코가 유사 맑스주의가 불렀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공명하는 것이 있었다. 에코는 이들의 공명 지점을 알고 있었던 듯 했다. '계몽의 변증법'과 '교양과 무질서'는 내가 보기엔 '실천 비평'이라는 테마 안에서 만나는데, 그 안에서 대중들은 늘 문화를 즐긴다는 것에 죄의식을 가져야 했다.(이들,즉 문화에 대한 엄격주의자들은 문화적 실천에 대한 훈수를 두고, 새로운 실천을 추구하거나, 혹은 그 실천을 폐기처분할 것을 제안하는데, 양 시선이 만나는 어떤 공유점이 있다는 것이 내가 공부하면서 정리한 생각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또한 '비판이론'이란 좋은 의의가 담긴 사유를 시도했지만, 그들이 리비스학파의 보수적 문화관과 함께 공유한 것은 문화를 즐기는 시민들에 대한 일종의 '선도부장'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김어준 식으로 말하자면 '죄의식 마케팅'?이라고 할까?)    

여기에 내가 더 심화시켜 보고 싶은 부분은 '선도부장론'이라고 부르고 싶은 지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 '선도부장론'은 문화와 도덕, 그리고 경제에 대한 측면을 아우른다. 그리고 이 아우름 속에 정치라는 중요한 비평의 목적이 있다. 에코가 말하는 '종말론적 지식인'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가장 대표적으로 접할 수 있는 비평의 언어를 한국 사회에 투영해보면,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계속 에코가 <매스컴과 미학>에서 한 언급을 되짚어보면, 종말론적 지식인들의 수사에는 늘 '대중'이란 말이 깊은 분석의 지시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도덕적 감정을 앞세워 싸잡아 비난하기 위해 가장 쉬운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분석의 시각은 '문화산업'을 통해 대중의 수동성을 걱정한 아도르노 아저씨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종말론적 수사에 자리잡은 걱정의 언어들은, 좌파 특유의 레파토리로 오늘날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한국 사회의 진보는 성찰과 비난의 대상, 그 모호함 속에 갖혀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진보는 망할 것이다라는 류의 지적들. 그래서 이러한 '태도를 지적하는 데만 골몰하는 지식인'들의 칼럼이 지난 촛불 이후에 엄청나게 많이 늘어났고, 또 이것이 관성화되면서, 내겐 이런 물음이 남았다. (한윤형 군의 표현처럼), 어떻게 진보하란 말인가? 

누구는 대중이 우매하다라는 생각을 버리라며, 대중의 우월함을 찬양한다, 그리고 진보진영에게 그 우월함을 각성의 언어로 깨달아, 탁웡한 언어를 챙기라고 요구한다. 또 누구는 진보의 성찰성을 촉구한다, 그러면서 진보의 성찰적 언어와 그 대안적 결과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지 않은 채, 그동안 진보진영이 해 온 무능한 부분이 이러하다,저러하다라는 류의 것으로만 머문다. 나는 이러한 '비평의 흐름'들이 빈번해졌던 약 촛불 이후 지난 1년 반 간의 흐름을 보면서, 진보진영에게 대안이 없다라고 비난하는 대중의 모습과 지식인들의 모습이 무엇이 다른가라고 느껴 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진보의 종말을 암시하는 듯한, 묵시록적 발언으로 정작 현실 정치에 성찰성이라는 개념을 포장하여, 겁을 주고 나무라기에 바빴던 것은 아닐까. 

나는 강준만이 자신의 책 속에서 언급하듯이, 시민들에게 무조건 정치 현실을 비난하기에 바쁜 그 태도를 자제하라고 한 것을 하나의 비유로 삼고 싶다. 즉, 지식인들도, 진보 진영을 향해 성찰적 언어를 포장한 대안 없는 비판을 넘어서야 함을 말하고 싶은 거다. (그런 면에서 나는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본 서영표 선생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 

진보진영을 걱정하는 지식인들의 '정신차리라'는  언어 속에서, 그들은 지금의 정치 현실을 '뜨거운 냉소'로 일관하는 순응론자들에게 '그래, 바로 이거야'라는 일말의 카타르시스를 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비평의 유효기간은 스크롤바를 다 내리면 끝이다.  (그런 점에서 시사인의 고종석 씨 최근 칼럼은 좀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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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5-1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권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보수 정당·진보 정당>, 인가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0 23:37   좋아요 0 | URL
네 빵가게님. 칼럼 내, 현상에 대한 지적은 저도 고종석씨 견해에 동의하는데, 제가 나름 '스포츠중계형'비평이라고 부르는, 그 태도가 제겐 좀 안일해보였거든요. 최근 진보진영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글을 보면, 진보진영의 형편을 중계하기 바쁘거나, 노력을 아예 안 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식으로 싸잡아 보는 부분이 있어, 아쉬운 측면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누적되어 좀 이런 잡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5-11 01:00   좋아요 0 | URL
네.^^
 
매스컴과 미학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3
움베르토 에코 지음, 윤종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품절


서론 중 - 한편, 종말론적 지식인들은 문화 상품 자체와 이것들이 실(50)질적으로 어떻게 소비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연구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종말론적 지식인들은 문화 상품의 소비자들을 대중이라는 획일적인 물신화된 개념으로 격하시킬 뿐만 아니라,대중들이 모든 귀중한 예술작품들을 단순한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비난하지만,동시에 자기 스스로도 대중적인 문화 상품들을 물신화된 개념으로 격하시킨다.이들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대중적 상품들을 분석하기보다,이에 대한 구조적인 특징만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대중문화 상품 전체를 통째로 부정한다.따라서 이에 대해 분석하게 되는 경우에 이들은 자신의 기이한 감정적인 성향들을 은연중에 드러내어 애증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기를 나타낸다.따라서 대중적 상품의 최초이자 최고의 희생자는 비평가 자신이 아닌가라는 일종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50쪽

1장 고급,중급,저급 중 - <대중문화가 존재하는 것이 좋은가?나쁜가?>하는 식의 문제 제기는 잘못된 것이다.(게다가 이러한 질문은 민중들의 지위 향상에 대한 적대감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으며,기술적인 진보와 보통 선거권,하층민에까지 확산된 교육권 등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한다)그렇다면 오히려 다음과 같은 질문이 올바른 문제 제기가 될 것이다.<산업화된 사회의 현실이 매스 미디어의 총체로 알려진 이러한 유형의 의사소통 관계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이상,매스 미디어가 문화적 가치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떤 문화적 행동이 필요한가?>-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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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 -하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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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문화적 선의- 중간 계급 중 : 문화적 실천과 의견에 대한 앙케트 조사들이 일종의 학교시험의 형태를 띤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조사대상자들은 언제나 규범에 비추어 판정된다고 스스로 느끼며, 자신들의 학력 면에서의 공인정도에 따라 위계화된 응답을 얻게 되고 내용과 양태 면에서 그들의 학력자격에 언제나 밀접히 대응하는 선호를 나타낸다.-600쪽

어떤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 어떤 종류의 '브랜드'나 상점이 의미하는 '질의 보증'을 신용함으로써 그 제품의 질에 대해 안심하는 것처럼 정통적 투자감각은 출판사,영화감독, 극장이나 음악당의 이름같이 많은 경우 외부적 지표로 무장되는데 이 투자감각은 '선발된'문화소비를 발견하게 해준다.-601쪽

문화의 대량축적의 원리인 축적하려는 격심한 욕구는 극단으로 즉 부조리로 치닫는 재즈나 영화 애호자의 도착perverson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러한 도착은 교양화된 응시의 정통적 정의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도착은 작품의 소비를(영화의 제작진과 타이틀,오케스트라의 편성,녹음날짜 등과 같은)작품에 대한 부대 지식의 소비로 대체한다.혹은 이러한 축적에의 욕구는 사회적으로 미미한 주제들에 대해 고갈되지 않은 지식을 수집하는 모든 이들의 획득하려는 집념에서도 볼 수 있다.-604쪽

(고전작품과 문학상 수상작처럼)확실히 보증된 생산물 -606쪽

상승이동의 요청에 따라 전적으로 정의되는 이 순수하고 공허한 문화적 선의는 도덕의 차원에서도 그 등가물을 가지고 있다. 상승하는 분파의 금욕적 엄격주의rigorisme ascetique가 그것이다. 하강하는 분파의 억압적 엄격주의rigorisme repressif는 그 집단이 사회적으로 퇴행하는 것으로부터 생긴 한의 감정을 행동원리로 하는데,그것은 오직 과거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미래를 가진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비난하는데서 오는 만족감을 주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갖고 있는 것같지 않다.-640쪽

신흥 쁘띠 브르주아지는 거의 모든 점에서 쇠퇴하는 쁘띠브르주아지의 억압적 도덕성에 대립하는데,쇠퇴하는 쁘띠 부르주아지의 종교적 또는 정치적 보수주의는 종종 도덕적 무질서 특히 성도덕의 문란에 대한 도덕적 분노에 모아진다. 예)포르노크라시(Pornocratie: 구별짓기에서는 성도덕의 문란을 상징하며 퇴폐적인 사회상황을 비난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됨)-665쪽

제7장 필요한 것의 선택:민중계급 중 - 생활양식의 차원 혹은 '생활의 양식화'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의 원리는 세계에 대한,즉 물질적 구속과 시간적 절박성에 대한 주관적,객관적인 거리상의 변이에 있다.세계나 타인에 대해 거리를 두거나,초연하거나 되는 대로 식의 성향,객관적으로 내면화되기 때문에 주관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성향은,그것의 일면인 미학적 성향처럼,절박성에서 상대적으로 해방된 생활조건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필요성에 대한 종속은 형식상의 탐구와 모든 형태의 예술을 위한 예술이 지닌 무상함과 무의미를 거부하면서 민중계급 사람들로 하여금 실용적이고 기능주의적인 '미학'에 경도되게 하는데, 필요성에의 종속은 일상생활의 모든 선택의 원리이며,본래적 의미에서의 미적인 의도를 '미친 짓거리folies'라고 배제하게 하는 생활기술의 원리이기도 하다. -685쪽

여기서 '필요한 것'이란 기술적으로 필요한 것, 즉 실용적이거나 이른바 기능적인 의미의 필요성인데 이것은 '더 이상도 아니고 딱 알맞는 것'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인 동시에,'단순하고','검소한'사람들에게 '단순하고','검소한'취향을 강요하는 사회적,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부과되는 것으로서의 의미이다.(중략)따라서,집단의 모든 물건을 미학적 선택의 기회로 만들거나,엄밀하게 그 기능에 의해 정의되는 공간인 욕실이나 부엌에까지 조화나 미의 의도를 확대하고,특히 냄비나 찬장의 선택에 미학적 기준을 적용하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적 발상만큼 민중계급의 여성들에게 낯선 것도 없다.-6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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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ser, F(2001). Veni,Vidi,Video 

- The Hollywood Empire And The VCR 

3쪽 

VCR이 1975년도에 나타났고, 1990년대 중반까지 견고한 영역을 다졌다. 이 시기에 미국 영화와 텔레비전 산업에 눈에 띌 만한 변화가 보였다. 

(와써가 말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영화제작의 새로운 스타일(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새 세대 영화감독들) 

2. 어마어마한 광고비와 마케팅 캠페인 

3.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영화 수익  

4. 탑  헐리웃 스튜디오에 의한 영화 산업의 글로벌한 지배 

5. 경쟁력있는 독립 배급사들의 죽음 

6. 초국가적 미디어 기업의 탄생, 합작영화, 수직적 통합이 실시되어, 한 회사 계열체 내 방송,케이블, 출판, 음반, 뉴 미디어 등이 관리 및 상품화 

7. 미국 내 독과점 네트워크의 붕괴 및 해외 방송 시스템의 규제 

8. 새로운 시장 열려   

106쪽 

이들의 파트너쉽과 네거티브 픽업은 비디오 배급의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했다. 

배급사가 영화 배급권을 갖는 대가로 일정액의 대금을 제작사에 지급한다는 계약. 이러한 계약은 제작자에게 제작 비용을 부담할 대출자로부터 융자를 받을 수 있다는 신뢰성을 준다. 즉 네거티브 픽업은 일종의 담보인 셈이며 보장된 수령액을 토대로 융자가 이루어진다. 제작자들은 제작소가 영화를 구매해 시장에 내놓겠다고 합의한 딜 메모(deal memo)를 은행측에 제시하고 융자를 받게 된다.  

1980년대 파라마운트 사의 빅 셀러인 영화 탑 건이 있다. 이 작품은 타이-인 전략을 통해, 펩시 콜라 프로모와 함께 1986년 개봉되었다. 펩시 광고는 탑건의 비디오 출시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비록 비디오 광고가 널리 퍼지지 않았지만, 헐리우드와 소비자 마케팅 간의 tie-in 홍보 전략은, 비디오 시장 때문에 더 가까워졌다. 둘의 사이가.  

breadth vs depth 

넓이 대 깊이 논쟁 149쪽~150쪽 

소매상, 도매상, 배급사 간에 논쟁/ 갈등을 불러 일으키다. 

156쪽 

신 헐리우드 체제는 영화 제작의 새로운 방식 뿐반 아니라 새로운 배급 방식을 실천하였다. 그것은 더 큰 규모의 영화를 만드는 데 돈을 투입하고, 비싼  극장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디오산업의 몰락의 근거가 되었다. 극장주들은 그들의 극장을 개조함으로써 홈비디오 산업에 도전했다.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그런 작업을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7쪽  

그들이 벌어들인 새 비디오 수익을 가지고. 상영관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160쪽 

극장 개봉은 도매상과 소매상에게 선반 위에 작품을 비치하도록 설득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헐리웃 영화산업의 '승자 독식 구조' 성향. 

161쪽 

스티븐 스필버그. 1980년대 대중적인 용어가 된 '하이 컨셉 high concept'영화. 큰 예산이 투여된 영화. 

186쪽 

비디오는 영화 회사에게 가르쳤다. 영화사들이 그들이 보유한 작품의 콘텐츠를 새로운 방식으로 배급해야 할 것임을. 

비디오는 또한 강화시켰다. 영화 배급의 가치를. 그러므로 타임-라이프, 소니, 뉴스 코포레이션 등등의 회사는 메이저 영화 ㅐ급사와 연대하길 원했다. 

195쪽 

아이들을 위한 비디오그램은 비개봉작 범주에서 유일하게 큰 히트를 치는 분야였다. 홈비디오는  디즈니와 다른 스튜디오에서 완전판의 애니메이션을 부활시켰고, 아이들의 시청 습관과 그런 비디오그램을 통해 완벽하게 고정되었다.

201쪽 

와써가 말한 leisure time efficiency 여가 시간의 효율성 

202쪽 

밖에 나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로맨틱한 시간이다. 혹은 친목을 위한 시간이다. 다른 한 편, 홈비디오를 본다는 것은 텔레비전 시간에 대한 대안적 방식이다. 비디오테이프를 산다는 것은 선물을 하는 시간이다. 집에서 수차례 아이들에게 비디오그램을 보여준다는 것은 기계적 방식의 아기 돌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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