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 지식인과 그 사상 1980 - 90년대 당대총서 13
윤건차 지음, 장화경 옮김 / 당대 / 2000년 10월
절판


70년대 후반부터 비판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분단현실을 객관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주목해야 할 전환은 한국을 '제3세계'의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사고 / 방식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제3세계라는 인식은 세계를 하나의 체계제로 상정하고 세계체제는 중심과 주변(또는 반주변)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주변은 중심에 종속되는 관계에서 발전해 왔다는 데 주목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세계체제는 현실적으로 수세기에 걸쳐서 형성되어 온 자본주의 세계체제이며, 따라서 근현대의 한국사회 구조 또한 자본주의 세계체제, 특히 일본 및 미국과의 관게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34~35쪽

80년대 한국 사회과학 연구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것은 한국사회 또는 한국 자본주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한국자본주의 논쟁'이라고 불리는 이 논의는 단순히 학계나 언론계뿐 아니라 이른바 '운동권' 내부에서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이 논쟁의 주요 논점의 하나인 사회구조와 사회모순의 평가 내지는 성격 규정이 운동 주체세력 설정, 투쟁대상 규정 , 운동 노선 정립 등과 같은 전략, 전술을 결정해야 하는 당면한 사회변혁운동의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40쪽

80년대 초에 정성진, 조희연, 이대근 등은 당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던 종속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한국경제는 대외의존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며 더욱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주변부에 포섭되어 자본, 기술, 자원 등 모든 재화를 중심부에 의존시키는 종속성을 심화시켜 왔다고 논한다. 한국은 중심부와는 이질적인 사회구성체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자본주의, 즉 주변부자본주의에 편성되어 있으며 정부는 이러한 종속적인 발전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더욱더 권위주의적인 억압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주변부자본주의론(주자론)'의 주장이다. -40~41쪽

이에 대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의거하고 있던 박현채, 조민, 정윤형 등은 종속적일지라도 자본주의적인 한 그 내부에 자본주의 원리가 관철된다는 전제하에서 한국사회의 발전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론은 한국사회 내부의 계급관계와 모순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의 자본주의 발전단계의 성격을 인식하지 못한다, 해방 후의 한국사회는 주변주자본주의가 아니라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국가독점자본주의(국독자론)'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였다. 즉 박현채 등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광공업부문이 GN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등 경제규모가 급속하게 확대됨에 따라 일정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져서 독점자본이 성장한 것을 강조하며, 주자론과는 달리 계급구조에서도 산업노동자가 도시빈민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이로부터 운동론으로는 반제, 반독점, 반독재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 민중, 민주혁명의 단계적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41쪽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80년대 말부터 엄청난 어려움에 부딪혀 새로운 전개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의 재벌기업이 세계 곳곳에 진출해서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높이고 문화와 소비가 시대의 관심사가 되는 가운데,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라는 헤게모니 장악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명제는 어느새 잊혀가고 있었던 것이다.-92~93쪽

90년대 한국의 사상적 특징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중심으로 한 각종 포스트주의와 문화이론 등이 폭발적으로 유행한 것이다. 논단에서 논의의 중심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푸코, 데리다, 리요타르, 보드리야르 등의 프랑스사상으로 옮겨갔고 언급되는 어휘는 자본주의, 계급, 노동, 국가 같은 난해한 것에서 육체, 욕망, 문화, 지식, 권력 등과 같은 포스트모던한 것으로 바뀌어갔다. 자본주의, 계급, 노동, 국가 같은 어휘는 오히려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말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담론'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들어서부터다. -157쪽

민족주의는 결코 하나의 확고한 이론도, 개념도 아니다. 민족이 그러하듯이 민족주의도 '현실'의 추이와 함께 변해 가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만들어지고 이용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이데올로기이다. 당연히 민족주의가 사회진보에 건전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관념주의로 빠질 때, 그것은 곧 보수반동, 국수주의로 후퇴할 위험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격동하는 역사를 살아온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민중이 정서적으로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이데올로기로서, 역대 정부가 강요한 체제논리로서, 나아가 일종의 상업주의의 도구로서 끊임없이 이용되어 왔고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232쪽

사실 국민국가는 근대에 들어와서 생겨난 것이다. 이는 요즈음의 문화연구 등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허구성'을 띤 것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비록 국민국가가 '상상의 공동체'라 할지라도, 앤더슨은 국민국가론을 반드시 내셔널리즘 비판으로 전개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에 들어와서 국민(국가)을 구성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정치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인 정통의 가치라고 말하고 있다. 즉 국민국가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진공상태에서 떠다니는 공허한 존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민국가에 얽혀 있는 갖가지 담론을 예의 주시하고 국민국가가 지닌 폭력장치나 타자에 대한 차이/ 차별화 기능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이며 또 어떻게 하면 정치권력이나 지배층에 이용되지 않는 아이덴티티를 공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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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청춘 꽃띠는 어떻게 청소년이 되었나? - 청소년 만들기와 길들이기
고미숙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5월
품절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적 기질은 생물학적인 보편적 특징이라기보다 문화적 산물, 혹은 역사적 산물이다. 이런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마가렛 미드와 필립 아리에스에 의해 세상에 던져졌고, 이런 문제제기 자체가 너무 낡은 것인지는 몰라도 청소년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중략) 청소년기적인 기질의 탄생은 근대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 으며 근대 과학도 크게 공헌했다. 청소년들을 압박하는 사회적 요인은 더욱 강화되었고, 과학은 그들의 기질을 입증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질풍노도적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해냈다. 청소년기의 탄생은 바로 청소년기의 근대적 '기질' 발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발견된 기질은 단순한 과학적 사실에 머무르지 않고, 청소년을 다루는 장치와 방법을 고안해냈다.-16~17쪽

근대사회는 청소년들을 주변인으로 내몰았다. 미성숙한 것이 아니라 미성숙하도록 프로그램화된 것이다. -46쪽

일제강점 말기로 접/ 어들어 법률이나 문서상에서 공식적인 용어로 청소년이라는 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소년과 청년을 모두 훈육과 훈련, 규율의 대상으로 보면서부터다. 청소년을 아직 주체가 되기에는 미숙한 존재로 보고,충성스런 국민 만들기의 대상으로 삼으려한 것이다. (중략)학교제도를 포함한 갖가지 사회장치와 연령 발달에 대한 근대적인 아이디어는 미디어와의 공조를 통해서 생겨났다. 미디어와 일련의 제도는 청소년에게 질풍노도적 이미지를 덧씌웠고 서서히 주변인으로 살아가도록 길들이기 시작했다. / 이상 김현철-47~48쪽

이팔청춘과 청소년, 두 낱말은 같은 연령대를 지시하고 있지만, 둘을 에워싸고 있는 아우라와 표상의 차이는 실로 엄청난다. 전자가 자연적 생체 주기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후자는 근대 문명이 부과한 아주 특별한 호명체계다. 쉽게 말해 10대의 어떤 인간을 청소년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와 더불어 수많은 의미의 계열이 그물망처럼 산포된다. 예컨대, 일단 그는 결혼이나 동거 따위를 꿈꾸어서는 안 된다. 청소년이란 미성년의 주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절대 성욕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청소년과 성욕, 이 둘 사이는 멀면 멀수록 좋다. 아니, 숫제 청소년 따위의 성욕 따위는 없거나 없어야 마땅하다고 간주된다. (중략) 무릇 사회적 표상이란 이런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과 욕망을 철저히 망각하게 만들어버린다. 청년기에는 욕망의 부글거림으로 몸부림치다가도 막상 기성세대로 편입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청년은 순수할 거라는, 아니 순수해야 정상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 이게 바로 표상 혹은 호명체계의 위력이다. -59쪽

청소년의 존재 기반은 학교와 가족이다. 청소년은 모범적인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 효율적인 생산주체가 되기 위해 학교에서 교육의 과정을 착실히 밟아가는 세대이며 부모의 적극적(경제적)보호와 배려 속에서 대학입시를 향해 분투해야 하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청소년이라는 말 속에는 가족, 학교, 국가라는 개념들이 그물처럼 촘촘히 박혀있다. -60쪽

근대계몽기 민족담론은 모든 기호들의 차이를 봉인하는 블랙홀이자 초월적 좌표였다. 서구와 일제라는 대타자로 인해 국가와 민족이 발견되긴 했지만, 실상은 '텅 빈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발견과 동시에 부재를 감내해여 했기 때문이다. 오직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를 표현해야 하는 역설에 처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족담론은 모든 기호들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버렸다.-91쪽

순수함이란 달리 말하면 탈성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자면, 근대 이후 급부상한 가정교육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소년기의 성욕을 통제, 관리하는 것이었다. 위생담론이 적극 개입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이상 고미숙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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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가 어쨌다구? What's Up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한보희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품절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 연구는 진리(관여된 주체적 입장)와 지식을 혼동함으로써 - 그 둘 사이를 갈라놓는 간극을 부인하거나 지식을 진리 아래 직접 복속시킴으로써(예컨대 양자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지식 분야가 지닌 고유한 개념 구조에 대한 적절한 숙지도 없이 사회 비평적인 안목만 가지고 이런 특수 과학을 성급하게 폄하해버린다)-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진지한 태도를 결여하고 있는 데다가 오만하기까지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특수한 분과 학문적 숙련성의 결여라는, 흔히 지적되는 문화연구의 문제점이다. 가령 문학 이론가가 제대로 된 철학적 지식도 갖추지 않은 채,헤겔 철학을 남근-로고스-중심-341쪽

주의라고 험담하는 글을 쓴다거나 영화나 뭐 그런 다른 영역들에 대해서도 섣부르게 덤비는 것 등등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적절한 지식도 없이 모든 것에 판단을 내리려 드는, 일종의 그릇된 보편주의적 비평 능력이다. 전통적인 철학적 보편주의에 온갖 비난을 퍼부었던 문화 연구가 실은 자신을 일종의 대용품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는 꼴이다. 문화 연구의 막연한 관심들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보편 개념으로 변용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령 탈식민주의 연구에서 '식민화'라는 막연한 관념이 헤게모니를 쥔 개념으로 취급되기 시직하면 그것은 이내 보편적 패러다임으로 격상되며 급기야는 양성 간의 관계에서 남성이 여성을 식민화한다거나 상층 계급이 하층 계급을 식민화한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줄을 잇게 되는 것이다. -342쪽

문화 연구에 대하여 우리는 벤야민의 오래된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이 권력과 어떤 명시적 관계를 갖는가가 아니라 지배적인 권력관계 안에서 그들 자신은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 / 가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 연구가 지배적 권력 관계를 폭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권력관계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 양태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비판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척하기만 할 뿐인 그런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푸코가 '억압하고'/ 금지하는 사법 권력과 대비시켜 무언가를 생산하는 '생명-권력'이라고 불렀던 개념을 문화 연구에 적용해본다면 생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성을 규제하는 '억압적' 담론들이 실은 성의 번창과 완전히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 연구라는 분야도 오늘날의 전 지구적 지배 관계를 위협하기는커녕 그러한 지배 관계의 틀에 꼭 들어맞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가부장적인/자기동일성에 집착하는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비판이 그런 것들을 전복하기 위한 의지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모호한 매혹에 빠져있음을 무심코 드러내는 것이라면 어떨까?-344쪽

바로 이 지점에서 영국의 문화 연구에서 미국식 문화 연구로의 전환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그 둘은 비록 동일한 주제와 개념 등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수행하는 사회적-이데올로기적 기능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진짜 노동 계급 문화와 연계되어 있는 문화 연구에서 급진주의라는 겉멋이 든 강단 문화 연구로의 전환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적 언급에도 불구하고 문화 연구를 적대시하는 저항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은 문화 연구 / 가 현행 제도권 학계에 완전히 흡수될 수 없는 이질적 외부자로 남아 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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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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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비판을 위하여 : 폭력 비판이라는 과제는 그 폭력이 법과 정의와 맺는 관계들을 서/술하는 작업으로 돌려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원인이 어떻게 작용하든 간명한 의미에서의 폭력이 되는 것은 그 원인이 윤리적 상황에 개입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들의 영역은 법과 정의의 개념으로 지칭된다. 둘 가운데서 우선 법을 두고 보자면 모든 법질서의 가장 원초적인 기본 관계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라는 점은 분명하다.-79~80쪽

폭력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는 이러한 자연법론의 명제에 정면으로 맞서 등장한 것이 실정법적 명제로서 이들은 폭력을 역사적으로 생성된 결과로 본다. 자연법론이 모든 현존하는 법을 그것의 목적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할 수 있을 뿐이라면, 실정법[법실증주의]은 모든 생성하는 법을 오로지 그것의 수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한다. 정의가 목적들의 기준이라면 적법성이 수단들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학파는 공통된 기본 도그마에서 수렴하는데, 즉 정당한 목적들은 정당화된 수단들을 통해 달성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들은 정당한 목적들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자연법론은 목적의 정의 [정당성]를 통해 수단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며, 실정법은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하려고' 노력한다. -82쪽

법적 주체로서의 개별 인격체에 관한 한 유럽의 법 상황에서 특징적인 점은 이 각각의 개인의 자연적 목적들을, 그 목적들이 상황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폭력적으로 추구될 수도 있는 모든 경우에는, 허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법질서는 개인들의 목적이 합목적적으로 폭력적으로 추구될지도 모를 모든 영역들에 법적 목적들을 세워둠으로써 법적 강제력만이 이런 식으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게끔 만들려고 한다. -85쪽

각각의 법의 수중에 놓여 있지 않은 폭력은 그 법에 위험으로 작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 폭력이 추구하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 폭력이 법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추측은 '대'범죄자의 형상 자체가 그의 목적이 제아무리 극악무도하다 할지라도 얼마나 자주 민중에게서 은밀한 경탄을 불러일으켰는지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은 그 범죄자가 저지른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가 증명하는 폭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경우에 오늘날 법이 모든 행동 영역에서 개인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폭력이 실제로 위협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범죄자가 제압되는 가운데서도 법에 반감을 갖는 대중들의 공감을 자극한다. 폭력의 어떤 기능 때문에 그 폭력이 근거를 갖고 그처럼 법에 위협적으로 보이고 또 법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지는 바로 현재의 법질서에 의거해서도 그 폭력을 펼치는 것이 여전히 허용되는 곳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86쪽

사형의 의미는 법범 행위를 처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 법을 확립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법은 그 어떤 다른 법 집행보다 생사여탈의 폭력을 행사하는 데에서 스스로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94쪽

법적 계약은 그것이 제아무리 평화적으로 계약 당사자들에 의해 맺어질지라도 결국에는 가능적 폭력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법적 계약은 각 당사자에게 상대편에 대해, 만일 상대편이 계약을 위반하게 될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강제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계약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계약의 원천 역시 폭력을 요구한다. 그 폭력은 법정립적인 폭력으로서 물론 직접적으로 그 계약 속에 현전해 있을 필요는 없지만, 법적 계약을 보증하는 권력 자체가 - 그 권력이 그 계약 자체 속에 폭력을 적법하게 투입되지 않는다 해도 - 폭력적 기원을 갖고 있는 한, 그 계약 속에 들어 있다. -97쪽

법은 도덕적 차원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 사기가 사기를 당한 사람에게서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폭력적 사태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사기를 단죄하기 시작한다. -100쪽

외교사절들은 주로 사적 개인들 사이의 합의와 유사하게 그들 국가의 이름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서 그때그때 자신들의 갈등을 중재하였다. 이것은 중재재판을 통해서라면 더 단호하게 해결될 섬세한 과제이면서 근본적으로 중재재판적인 해결방식보다 더 상위에 있는 해결 방식인데, 그 이유는 해결이 모든 법질서를 넘어서, 그에 따라 폭력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05쪽

수단의 정당화와 목적의 정당성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은 결코 이성이 아니며 오히려 전자에 대해서는 운명적인 질서, 후자에 대해서는 신이라고 할 수 있다.-106쪽

법 정립은 물론 법으로서 투입되는 것을 그것의 목적으로 삼아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가지고 추구하긴 하지만, 목적한 것을 법으로서 투입하는 순간 폭력을 [ 소임을 다했으니],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도 직접적으로 법정립적인 폭력을 만든다. 이러한 일은 그 법 정립이 없는 폭력이 없는 독립된 어떤 목적이 아니라, 그 폭력에 필연적이면서 내밀하게 연계된 목적을 법으로서 권력의 이름으로 투입하면서 일어난다. 법 정립은 권력의 설정이며, 그 점에서 폭력을 직접 발현하는 행위이다. 정의는 모든 신적인 목적 설정의 원리이고, 권력은 모든 신화적 / 법 정립의 원리이다.-108~109쪽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인 폭력이 맞선다. 그것도 후자의 폭력은 모든 면에서 전자에 대한 반대상을 가리킨다.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111쪽

모든 신화적 폭력, 개입하여 통제하는 폭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정립적 폭력은 배척해야 마땅하다. 그 폭력에 봉사하는 관리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법보존적 폭력 역시 배척해야 마땅하다.-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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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구판절판


말하는 섹스라는 상징은 우리의 사회를 나타내는 상징의 하나이다. 현장에서 적발되고 심문을 당하며 속박되고 동시에 수다스러운 상태에서 지칠 줄 모르고 대답하는 섹스. 스스로 비가시적이게 될 정도로 충분히 환상적인 어떤 메커니즘이 어느 날 섹스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 메커니즘은 섹스로 하여금 쾌락과 무의지적인 것, 동의와 심문이 서로 섞이는 상호작용 속에서 자기와 타인들의 진실을 말하게 만든다. -97쪽

권력의 관점에서 분석을 실행하고자 한다면 국가의 주권이나 법의 형태 또는 지배의 전반적 단일성을 애초의 여건으로 상정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들은 오히려 권력의 말단 형태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권력은 우선 작용영역에 내재하고 조직을 구성하는 다수의 세력관계, 끊임없는 투쟁과 대결을 통해 다수의 세력관계를 변화시키고 강화하며 뒤집는 게임, 그러한 세력관계들이 연쇄나 체계를 형성하게끔 서로에게서 찾아내는 거점, 반대로 그러한 세력관계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괴리나 모순, 끝으로 세력관계들이 효력을 발생하고 국가 기구, 법의 표명, 사회적 주도권에서 일반적 구상이나 제도적 결정화가 구체화되는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112쪽

내재성의 규칙 :(전략) 성이 인식의 영역으로 성립된 것은 성을 가능한 대상으로 정립한 권력관계로부터이고, 역으로 권력이 성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앎의 기법, 담론의 절차가 성을 에워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앎의 기법과 권력의 전략이 제각기 특별한 역할을 맡고 상호간의 차이에 입각하여 서로 연결될지라도, 앎의 기법과 권력의 전략 사이에는 아무런 외재성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력 -앎의 "국지적 중심"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 예컨대 고해하는 사람과 고해하는 신부 또는 신자와 고해신부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할 것인데,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억제해야 할 "육욕"의 영향 아래 갖가지 형태의 담론, 이를테면 자기 성찰, 심문, 고백,해석, 대담은 일종의 끊임없는 왕복 운동 속에서 복종의 형태와 인식의 도식을 전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람이나 침대 또는 침실에서 아무리 사소한 섹스의 표시일지라도 그것에 관심을 쏟는 부모, 유모, 하인, 교육자, 의사에 의해 교대로 감시당하고 둘러싸이는 어린이의 육체는 특히 18세기부터 권력 -앎의 또 다른 "국지적 중심"이었다. -118쪽

"징수"는 더 이상 권력의 메커니즘의 주된 형태가 아니고, 권력에 복종하는 세력들에 대해 선동, 강화, 통제, 감시, 최대의 이용, 조직화의 기능을 하는 다른 부품들 사이에서 단지 하나의 부품일 경향이 있다. 즉, 세력들을 가로막거나 굴복시키거나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력들을 산출하고 증대시키며 정리하게 되어 있는 권력. 그때부터 죽음의 권리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의 요구 쪽으로 옮겨가거나 적어도 그러한 권력의 요구에 기대고 그러한 권력의 요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따르는 경향이 있게 된다. -153쪽

예전에는 이승의 지배자이건 저승의 지배자이건 군주만이 행사할 수 있는 죽음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이기에 범죄였던 자살이 19세기에는 사회학적 분석의 영역으로 들어간 최초의 행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에 놀랄 이유가 없는데, 생명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의 경계와 틈새에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죽을 권리가 출현한 것은 자살 덕분이다. 그토록 기이하면서도 그토록 규칙적이고, 발현의 측면에서 그토록 지속적이며 따라서 개인의 특별한 사정이나 사고로는 그다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그러한 죽으려는 고집은 생명의 관리가 정치권력의 책무로 대두된 사회에 대해 최초로 경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의 하나였다. -155쪽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화는 육체의 규율과 인구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양면을 지닌, 이를테면 해부학적이고 생물학적이며, 개별화하고 명시하며, 육체의 수행능력 쪽으로 향하고 생명의 과정 쪽으로 눈을 돌리는 그 광범위한 기술체계가 고전주의 시대에 정립되었다는 점에서 이제부터 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온통 에워싸는 것이 될 것이다. 최고 권력을 상징하던 죽음의 오랜 지배력은 이제 은밀하게 육체의 경영과 생명의 타산적 관리에 포함된다. 다양한 규율, 가령 초등학교, 중등학교, 병영, 일터가 고전주의 시대에 급속하게 발전한 현상, 또한 정치적 실천과 경제적 관측의 영역에서 출생률, 수명, 공중보건, 주거, 이주의 문제가 대두된 현상,따라서 육체의 제압과 인구의 통제를 획득하기 위한 다수의 다양한 기법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현상, 이러한 현상들을 통해 "생체-권력"의 시대가 열린다.-156쪽

살아가는 행위는 더 이상 죽음의 우연과 숙명성 속에서 때때로 떠오를 뿐인 그 접근 불가능한 기반이 아니라, 앎의 통제와 권력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어느 정도 넘어가는 것이 된다. 이제 권력은 법적 주체, 즉 권력의 최종적 권한이 죽음인 법적 주체뿐만 아니라 생명체를 다루게 되고, 권력이 생명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지배력은 생명 자체의 차원에 놓이게 될 것이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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