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비판을 위하여 : 폭력 비판이라는 과제는 그 폭력이 법과 정의와 맺는 관계들을 서/술하는 작업으로 돌려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원인이 어떻게 작용하든 간명한 의미에서의 폭력이 되는 것은 그 원인이 윤리적 상황에 개입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들의 영역은 법과 정의의 개념으로 지칭된다. 둘 가운데서 우선 법을 두고 보자면 모든 법질서의 가장 원초적인 기본 관계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라는 점은 분명하다.-79~80쪽
폭력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는 이러한 자연법론의 명제에 정면으로 맞서 등장한 것이 실정법적 명제로서 이들은 폭력을 역사적으로 생성된 결과로 본다. 자연법론이 모든 현존하는 법을 그것의 목적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할 수 있을 뿐이라면, 실정법[법실증주의]은 모든 생성하는 법을 오로지 그것의 수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한다. 정의가 목적들의 기준이라면 적법성이 수단들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학파는 공통된 기본 도그마에서 수렴하는데, 즉 정당한 목적들은 정당화된 수단들을 통해 달성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들은 정당한 목적들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자연법론은 목적의 정의 [정당성]를 통해 수단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며, 실정법은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하려고' 노력한다. -82쪽
법적 주체로서의 개별 인격체에 관한 한 유럽의 법 상황에서 특징적인 점은 이 각각의 개인의 자연적 목적들을, 그 목적들이 상황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폭력적으로 추구될 수도 있는 모든 경우에는, 허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법질서는 개인들의 목적이 합목적적으로 폭력적으로 추구될지도 모를 모든 영역들에 법적 목적들을 세워둠으로써 법적 강제력만이 이런 식으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게끔 만들려고 한다. -85쪽
각각의 법의 수중에 놓여 있지 않은 폭력은 그 법에 위험으로 작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 폭력이 추구하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 폭력이 법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추측은 '대'범죄자의 형상 자체가 그의 목적이 제아무리 극악무도하다 할지라도 얼마나 자주 민중에게서 은밀한 경탄을 불러일으켰는지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은 그 범죄자가 저지른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가 증명하는 폭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경우에 오늘날 법이 모든 행동 영역에서 개인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폭력이 실제로 위협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범죄자가 제압되는 가운데서도 법에 반감을 갖는 대중들의 공감을 자극한다. 폭력의 어떤 기능 때문에 그 폭력이 근거를 갖고 그처럼 법에 위협적으로 보이고 또 법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지는 바로 현재의 법질서에 의거해서도 그 폭력을 펼치는 것이 여전히 허용되는 곳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86쪽
사형의 의미는 법범 행위를 처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 법을 확립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법은 그 어떤 다른 법 집행보다 생사여탈의 폭력을 행사하는 데에서 스스로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94쪽
법적 계약은 그것이 제아무리 평화적으로 계약 당사자들에 의해 맺어질지라도 결국에는 가능적 폭력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법적 계약은 각 당사자에게 상대편에 대해, 만일 상대편이 계약을 위반하게 될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강제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계약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계약의 원천 역시 폭력을 요구한다. 그 폭력은 법정립적인 폭력으로서 물론 직접적으로 그 계약 속에 현전해 있을 필요는 없지만, 법적 계약을 보증하는 권력 자체가 - 그 권력이 그 계약 자체 속에 폭력을 적법하게 투입되지 않는다 해도 - 폭력적 기원을 갖고 있는 한, 그 계약 속에 들어 있다. -97쪽
법은 도덕적 차원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 사기가 사기를 당한 사람에게서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폭력적 사태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사기를 단죄하기 시작한다. -100쪽
외교사절들은 주로 사적 개인들 사이의 합의와 유사하게 그들 국가의 이름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서 그때그때 자신들의 갈등을 중재하였다. 이것은 중재재판을 통해서라면 더 단호하게 해결될 섬세한 과제이면서 근본적으로 중재재판적인 해결방식보다 더 상위에 있는 해결 방식인데, 그 이유는 해결이 모든 법질서를 넘어서, 그에 따라 폭력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05쪽
수단의 정당화와 목적의 정당성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은 결코 이성이 아니며 오히려 전자에 대해서는 운명적인 질서, 후자에 대해서는 신이라고 할 수 있다.-106쪽
법 정립은 물론 법으로서 투입되는 것을 그것의 목적으로 삼아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가지고 추구하긴 하지만, 목적한 것을 법으로서 투입하는 순간 폭력을 [ 소임을 다했으니],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도 직접적으로 법정립적인 폭력을 만든다. 이러한 일은 그 법 정립이 없는 폭력이 없는 독립된 어떤 목적이 아니라, 그 폭력에 필연적이면서 내밀하게 연계된 목적을 법으로서 권력의 이름으로 투입하면서 일어난다. 법 정립은 권력의 설정이며, 그 점에서 폭력을 직접 발현하는 행위이다. 정의는 모든 신적인 목적 설정의 원리이고, 권력은 모든 신화적 / 법 정립의 원리이다.-108~109쪽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인 폭력이 맞선다. 그것도 후자의 폭력은 모든 면에서 전자에 대한 반대상을 가리킨다.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111쪽
모든 신화적 폭력, 개입하여 통제하는 폭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정립적 폭력은 배척해야 마땅하다. 그 폭력에 봉사하는 관리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법보존적 폭력 역시 배척해야 마땅하다.-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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