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 연구는 진리(관여된 주체적 입장)와 지식을 혼동함으로써 - 그 둘 사이를 갈라놓는 간극을 부인하거나 지식을 진리 아래 직접 복속시킴으로써(예컨대 양자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지식 분야가 지닌 고유한 개념 구조에 대한 적절한 숙지도 없이 사회 비평적인 안목만 가지고 이런 특수 과학을 성급하게 폄하해버린다)-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진지한 태도를 결여하고 있는 데다가 오만하기까지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특수한 분과 학문적 숙련성의 결여라는, 흔히 지적되는 문화연구의 문제점이다. 가령 문학 이론가가 제대로 된 철학적 지식도 갖추지 않은 채,헤겔 철학을 남근-로고스-중심-341쪽
주의라고 험담하는 글을 쓴다거나 영화나 뭐 그런 다른 영역들에 대해서도 섣부르게 덤비는 것 등등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적절한 지식도 없이 모든 것에 판단을 내리려 드는, 일종의 그릇된 보편주의적 비평 능력이다. 전통적인 철학적 보편주의에 온갖 비난을 퍼부었던 문화 연구가 실은 자신을 일종의 대용품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는 꼴이다. 문화 연구의 막연한 관심들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보편 개념으로 변용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령 탈식민주의 연구에서 '식민화'라는 막연한 관념이 헤게모니를 쥔 개념으로 취급되기 시직하면 그것은 이내 보편적 패러다임으로 격상되며 급기야는 양성 간의 관계에서 남성이 여성을 식민화한다거나 상층 계급이 하층 계급을 식민화한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줄을 잇게 되는 것이다. -342쪽
문화 연구에 대하여 우리는 벤야민의 오래된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이 권력과 어떤 명시적 관계를 갖는가가 아니라 지배적인 권력관계 안에서 그들 자신은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 / 가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 연구가 지배적 권력 관계를 폭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권력관계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 양태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비판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척하기만 할 뿐인 그런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푸코가 '억압하고'/ 금지하는 사법 권력과 대비시켜 무언가를 생산하는 '생명-권력'이라고 불렀던 개념을 문화 연구에 적용해본다면 생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성을 규제하는 '억압적' 담론들이 실은 성의 번창과 완전히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 연구라는 분야도 오늘날의 전 지구적 지배 관계를 위협하기는커녕 그러한 지배 관계의 틀에 꼭 들어맞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가부장적인/자기동일성에 집착하는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비판이 그런 것들을 전복하기 위한 의지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모호한 매혹에 빠져있음을 무심코 드러내는 것이라면 어떨까?-344쪽
바로 이 지점에서 영국의 문화 연구에서 미국식 문화 연구로의 전환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그 둘은 비록 동일한 주제와 개념 등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수행하는 사회적-이데올로기적 기능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진짜 노동 계급 문화와 연계되어 있는 문화 연구에서 급진주의라는 겉멋이 든 강단 문화 연구로의 전환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적 언급에도 불구하고 문화 연구를 적대시하는 저항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은 문화 연구 / 가 현행 제도권 학계에 완전히 흡수될 수 없는 이질적 외부자로 남아 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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